4화(5,474자)

젖은 시멘트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곁굴 안은 젖은 돌 냄새로 가득했다⁠. 표재곤이 앞장섰고⁠, 뒤를 소율과 리엘이⁠, 뒤를 엘드린과 숲지기들이 따랐다⁠. 보안팀장이 맨 뒤에 붙었다⁠. 굴은 어른 둘이 나란히 걸을 만한 너비로 비스듬히 내려갔다⁠. 바닥에 레일 두 줄이 깔려 있었고⁠, 천장을 받친 갱목에서 새 나무 냄새가 났다⁠. 전등이 다섯 걸음마다 하나씩 매달려 흔들렸다⁠.

굴 어귀에서 엘드린이 걸음을 멈췄다⁠. 손바닥을 천장에 댔다⁠. 차가운 바위였다⁠. 이 사람은 숲지기들에게 짧게 말했고⁠, 숲지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엘이 소율의 귀에 대고 옮겼다⁠.

“⁠아직 바위 아래라고 하십니다⁠. 뿌리 아래가 아니니 걸어도 된다고⁠.⁠”

소율은 걸으며 걸음을 셌다⁠. 걸음이 열을 넘고 스물을 넘는 사이 질산 냄새가 짙어졌다가 옅어졌다⁠. 이 위에 다른 냄새가 덮였다⁠. 차갑고 텁텁한⁠, 비 맞은 보도블록에 석회 가루를 뿌린 듯한 냄새였다⁠.

서른 걸음째에서 굴이 끝났다⁠.

회색 벽이었다⁠. 굴을 꽉 막은 콘크리트 벽 표면이 전등 불빛에 축축하게 번들거렸다⁠. 표재곤이 벽 앞에서 몸을 돌렸다⁠. 두 팔을 벌렸다⁠.

“⁠여기까지입니다⁠. 문 쪽 암반이 갈라져서 이 구간을 보강하고 막았습니다⁠. 그게 공사 전부예요⁠.⁠”

리엘이 옮겼다⁠. 엘드린이 벽을 봤다⁠. 벽 앞 바닥을 봤다⁠. 코를 한 번 킁 하고 울렸다⁠. 엘프어로 한 마디를 했다⁠.

“⁠냄새가 난다고 하십니다⁠. 숲 틈에서 올라오던 그 냄새가⁠.⁠”

“⁠보강할 때 쓰는 접착제 냄새입니다⁠.⁠” 표재곤이 대답했다⁠. “⁠독하죠⁠. 저도 머리가 아파요⁠.⁠”

소율은 벽 앞으로 나섰다⁠. 손바닥을 벽에 댔다⁠. 차가웠다⁠. 손바닥을 떼자 손금마다 회색 물기가 배어 있었다⁠. 콘크리트는 붓고 나서 한 달이 지나야 다 마른다⁠. 이 벽은 겉이 손바닥에 묻어날 만큼 젖어 있었다⁠. 길게 잡아도 하루였다⁠.

“⁠오늘 부으셨네요⁠.⁠”

“⁠주무관님⁠, 손 씻으세요⁠. 피부에 안 좋습니다⁠.⁠”

소율은 쪼그려 앉았다⁠. 레일 두 줄이 벽 앞에서 끝나지 않았다⁠. 레일은 벽 밑동으로 그대로 들어가 있었고⁠, 콘크리트가 이 위를 덮고 굳어 가고 있었다⁠. 레일 위에는 갱차 바퀴 자국이 반질반질하게 나 있었다⁠. 끝나는 레일 위에는 바퀴가 지나간 자국이 생기지 않는다⁠.

소율은 일어서서 주먹으로 벽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소리가 둔하게 울렸다⁠. 그리고 벽 너머에서 이 소리가 아주 작게 한 번 더 돌아왔다⁠. 속이 꽉 찬 바위는 소리를 돌려주지 않는다⁠.

“⁠전무님⁠, 이 뒤에 굴이 있어요⁠.⁠”

“⁠배수로입니다⁠.⁠”

“⁠배수로에 레일이 들어가요⁠?⁠”

표재곤이 대답하기 전에 보안팀장이 소율의 팔을 잡았다⁠. 손아귀가 셌다⁠.

“⁠주무관님⁠, 안전 구역에서 구조물 두드리시면 안 됩니다⁠. 나가시죠⁠.⁠”

“⁠놓으세요⁠.⁠”

“⁠나가시죠⁠.⁠”

보안팀장이 소율을 벽에서 떼어 냈다⁠. 소율의 운동화가 레일 위에서 미끄러졌다⁠. 리엘이 소율의 다른 팔을 잡았다⁠. 엘프 손이 인간 손보다 차가웠다⁠. 보안팀장과 리엘 사이에서 소율의 몸이 잠깐 양쪽으로 당겨졌다⁠.

엘드린은 이걸 보고 있었다⁠. 벽보다 그쪽을 더 오래 봤다⁠. 그러고는 엘프어로 천천히 말했다⁠. 리엘이 소율을 붙든 채 옮겼다⁠.

“⁠인간은 인간에게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라고 하십니다⁠.⁠”

엘드린이 몸을 돌렸다⁠. 숲지기들이 엘드린을 따랐다⁠. 표재곤이 이 등 뒤로 말했다⁠.

“⁠전하⁠, 벽 뒤가 궁금하시면 깨 드릴 수 있습니다⁠. 사흘 걸리고⁠, 회사 승인도 받아야 합니다만⁠.⁠”

리엘이 옮기기도 전에 엘드린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엘프어였다⁠. 리엘의 목소리가 굴 벽에 부딪혀 울렸다⁠.

“⁠볼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나는 노란 나무를 셌다⁠. 사백 걸음이다⁠. 벽은 상관없다⁠.⁠”

*

해 뜰 무렵 숲지기 둘이 반석호를 경계석까지 데려다줬다⁠. 반석호의 머리카락에 마른 이끼가 붙어 있었고⁠, 어깨에는 엘프 망토가 걸쳐져 있었다⁠. 목에 카메라는 없었다⁠.

“⁠소장님⁠, 카메라는요⁠?⁠”

“⁠빌려줬어⁠.⁠” 반석호가 하품을 했다⁠. “⁠쟤 있잖아⁠, 제일 어린 애⁠. 그 애가 너무 갖고 싶어 하길래⁠. 전하가 가져도 된대⁠. 빌려준 거야⁠. 대여⁠. 엘프는 대여가 몇 년이야⁠?⁠”

“⁠곧이요⁠.⁠”

“⁠그럼 됐네⁠.⁠”

반석호는 출장소 계단에 앉아 휴대폰을 켰다⁠. 밤새 쌓인 전송 대기가 한꺼번에 날아갔다⁠. 십 분 뒤 딸에게서 답이 왔다⁠. 「⁠아빠 이거 다 엘프야⁠? 아빠 잡혀갔어⁠? 왜 다들 숨 참고 있어⁠?⁠」 반석호는 답장을 쓰다가 졸았다⁠.

*

아침 아홉 시⁠, 본부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과장 혼자가 아니었다⁠. 스피커 너머로 다른 목소리가 둘 더 있었다⁠.

“⁠마 주무관⁠. 한성마이닝에서 공식 항의가 들어왔어요⁠.⁠” 과장의 목소리가 어제보다 낮았다⁠. 낮은 쪽이 더 나빴다⁠. “⁠우리 공무원이 한밤중에 무장한 외국 병력을 데리고 기업 안전 구역에 들어갔다⁠. 보안 요원하고 대치했다⁠. 본사 법무팀 명의로 왔고⁠, 사본이 차관실로도 갔어요⁠.⁠”

“⁠무장한 외국 병력이 아니라 엘프 왕자하고⁠—⁠”

“⁠활 들고 있었잖아요⁠.⁠”

소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들고 있었다⁠.

“⁠지금부터 마 주무관은 경계석 안쪽하고 동굴 출입 금지예요⁠. 엘프 쪽 연락은 반 소장만 해요⁠. 그리고 금요일 오전 열 시⁠, 서울로 와요⁠. 징계 위원회 열립니다⁠.⁠”

반석호가 전화기 쪽으로 몸을 숙였다⁠.

“⁠과장님⁠, 반석호입니다⁠. 저 우리 주무관이 그게⁠, 저를 구하려고⁠—⁠”

“⁠반 소장은 왜 경계석을 넘었어요⁠? 그것도 경위서 써요⁠.⁠”

전화가 끊겼다⁠. 반석호가 소율을 봤다⁠. 소율은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씻었는데도 손금 사이에 회색이 남아 있었다⁠.

열 시에 표재곤이 출장소 문을 두드렸다⁠. 밤새 굴 안에 있었을 텐데 셔츠 깃이 여전히 빳빳했다⁠. 소율에게 고개만 까딱하고 반석호 앞에 앉았다⁠.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소장님⁠, 고생하셨습니다⁠. 밤새 얼마나 놀라셨어요⁠. 이건 그냥 사실 확인서예요⁠. 엘프들이 소장님을 강제로 끌고 가서 결박하고 밤새 억류했다⁠. 사실 그대로잖아요⁠. 서명만 해 주시면 회사 법무팀이 본부하고 정리합니다⁠. 소장님 경위서도 그걸로 갈음되게 해 드릴게요⁠.⁠”

반석호가 볼펜을 집었다⁠. 소율은 이 손을 봤다⁠. 그저께 밤 공문에 직인을 찍던 손이었다⁠. 볼펜 끝이 종이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다 멈췄다⁠.

반석호가 볼펜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집었다⁠. 사진첩을 열었다⁠. 숲지기 아홉이 숨을 참고 서 있는 사진이 나왔다⁠. 다음은 반석호의 무릎을 덮은 엘프 망토 사진이었다⁠. 다음은 반석호의 등 뒤에 깔린 마른 이끼였다⁠. 반석호가 이 사진들을 표재곤 쪽으로 돌렸다⁠.

“⁠전무님⁠, 결박은 맞아요⁠. 근데 이게 밤새 억류예요⁠?⁠”

표재곤이 화면을 봤다⁠. 반석호가 소매를 걷어 손목을 내밀었다⁠. 덩굴 끈에 쓸린 붉은 자국이 손목에 한 줄 있었다⁠.

“⁠저 이거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 망토 덮어 준 애가⁠, 저한테 볼일 보는 데도 알려 줬어요⁠. 이건 못 쓰겠네요⁠.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서⁠.⁠”

표재곤이 서류를 거둬 들었다⁠. 일어서면서 반석호의 손목 자국을 한 번 더 봤다⁠.

“⁠소장님⁠, 정년 몇 년 남으셨죠⁠?⁠”

“⁠칠 년이요⁠.⁠”

“⁠길게 남으셨네요⁠.⁠”

표재곤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반석호는 한참 동안 자기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소율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나 방금 잘한 거지⁠?⁠”

“⁠네⁠.⁠”

“⁠그럼 됐어⁠. 근데 무서워⁠.⁠”

*

정오에 동굴 입구가 막혔다⁠.

엘프 궁수 열이 동굴 입구 바위 위와 둘레 풀밭에 섰다⁠. 벨렌이 이 한가운데 서서 동굴 안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동굴 안에서 바깥뜰로 나오려던 한성마이닝 작업자 둘이 화살 두 대가 발 앞에 꽂히자 뒷걸음질로 굴 안으로 돌아갔다⁠.

리엘이 엘드린의 말을 전하러 왔다⁠. 이 말을 출장소 컨테이너 문 앞에서 소율에게 옮겼다⁠. 반석호가 옆에서 휴대폰으로 이 장면을 찍었다⁠.

“⁠벽 뒤를 보여 줄 때까지 동굴에서 아무도 숲 쪽으로 나오지 못한다⁠. 인간들은 자기들 문으로 돌아가면 된다⁠.⁠”

한성마이닝 작업자들은 문을 지나 태백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곤란한 쪽은 출장소였다⁠. 출장소의 물과 쌀과 휴지는 날마다 문을 지나 갱차로 들어와 동굴 입구에서 손수레로 옮겨졌다⁠. 이 손수레가 궁수들 앞에서 멈췄다⁠. 오후 세 시⁠, 소율은 숙소 컨테이너 찬장을 열어 남은 것을 셌다⁠. 생수 여섯 병⁠, 쌀 반 봉지⁠, 컵라면 아홉 개⁠.

“⁠이 사람들 오늘 아침부터 서 있었지⁠?⁠” 반석호가 창밖을 봤다⁠. “⁠밥은 먹나⁠?⁠”

엘프 궁수들은 정오부터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엘프는 한 계절도 그렇게 서 있을 수 있다고 리엘이 말했다⁠. 다만 배는 고프다고 했다⁠.

소율은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여 보온병 두 개에 담았다⁠. 컵라면 아홉 개를 종이 가방에 넣었다⁠. 동굴 출입 금지였다⁠. 동굴 입구 앞 풀밭은 바깥뜰이었다⁠. 소율은 궁수들 열 걸음 앞에서 멈췄다⁠. 뚜껑을 반쯤 뜯고 물을 부었다⁠. 김이 올랐다⁠.

궁수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만 움직였다⁠.

“⁠삼 분이에요⁠.⁠” 소율이 말했다⁠. 리엘이 옮겼다⁠. “⁠엘프 시간으로 아주 짧아요⁠.⁠”

삼 분이 지났다⁠. 소율은 컵 하나를 풀밭에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다음 것을 이 옆에 놓았다⁠. 아홉 개가 줄을 섰다⁠. 벨렌은 활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궁수 하나가 먼저 활을 내렸다⁠. 막사에서 반석호의 카메라를 받아 간 이 앳된 숲지기였다⁠. 목에 카메라를 걸고 있었다⁠. 이 사람은 컵 하나를 들고 국물을 마시더니 눈을 크게 떴다⁠. 옆의 궁수에게 엘프어로 뭐라고 했다⁠. 리엘이 웃음을 참으며 옮겼다⁠.

“⁠불 없이 끓은 물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해를 담아 다닌다고⁠.⁠”

궁수들이 하나씩 활을 내렸다⁠. 여덟 개의 컵이 비었다⁠.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벨렌 몫이었다⁠. 벨렌은 이 컵을 내려다보지도 않았다⁠. 동굴 안쪽만 봤다⁠.

소율은 남은 컵을 집어 벨렌 발치까지 걸어갔다⁠. 화살 겨눈 사람 앞까지 가는 일은 이틀 사이 세 번째였다⁠. 컵을 이 발치 바위 위에 놓았다⁠.

“⁠식으면 맛없어요⁠.⁠”

벨렌이 처음으로 소율을 봤다⁠. 엘프어로 낮게 말했다⁠. 리엘이 옮기지 않았다⁠. 소율이 리엘을 돌아보자 리엘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형이 말하기를⁠, 당신이 벽을 두드린 소리를 숲지기 모두가 들었다고 합니다⁠.⁠”

벨렌은 컵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발로 밀어내지도 않았다⁠. 소율은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출장소 찬장에는 이제 컵라면이 없었다⁠.

*

해가 경계석 너머 나무 꼭대기에 걸렸을 때⁠, 숲 쪽에서 소리가 났다⁠.

천둥 같았다⁠. 그러나 하늘은 맑았다⁠. 소리는 위에서 오지 않고 발밑에서⁠, 숲 깊은 데서 굴러왔다⁠. 우지끈⁠, 하고 무언가 크고 오래된 것이 꺾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숲 위로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다음에 땅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소율이 들고 있던 빈 보온병이 손에서 떨어져 풀밭에 굴렀다⁠.

동굴 앞 궁수들이 일제히 숲 쪽을 돌아봤다⁠. 벨렌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경계석 너머 숲에서 리엘이 뛰어나왔다⁠. 엘프가 그렇게 뛰는 걸 소율은 처음 봤다⁠. 리엘은 경계석 앞에서 숨을 몰아쉬며 소율에게 소리쳤다⁠. 공문 말투가 다 부서져 있었다⁠.

“⁠사백 걸음 너머예요⁠. 거기서도 한참 더 안쪽이요⁠. 제일 늙은 나무가 쓰러졌어요⁠. 뿌리째요⁠. 땅이 꺼졌어요⁠. 숲지기 하나가 그 구멍에 떨어졌어요⁠. 아래에서 소리가 나요⁠. 살아 있어요⁠.⁠”

리엘이 숨을 삼켰다⁠.

“⁠구멍 아래에 불빛이 보여요⁠. 우리 불빛이 아니에요⁠.⁠”

동굴 앞 궁수 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숲 쪽에서⁠, 소율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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