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05자)

인질은 사진을 찍는다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엘드린의 화살촉은 소율의 가슴뼈 한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다⁠. 소율은 이 화살촉을 보면서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두 번째 걸음에서 숲지기 둘이 양쪽 팔을 잡았다⁠. 엘드린은 쏘지 않았다⁠. 시위를 천천히 풀고⁠, 엘프어로 한 마디를 했다⁠. 리엘이 경계석 너머에서 이 말을 옮겼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둘 다 데려가라⁠. 하나는 나무값으로⁠, 하나는 길잡이로⁠.⁠”

*

반석호는 마흔여덟 해를 사는 동안 넥타이 말고는 무엇에도 묶여 본 적이 없었다⁠.

숲지기들은 반석호를 나무에 묶지 않았다⁠. 나무는 사람이었고⁠, 사람에게 인간을 묶을 수는 없다고 했다⁠. 대신 막사 한가운데 박아 둔 죽은 나무 기둥에 덩굴 끈으로 손목을 묶었다⁠. 막사라고 해도 지붕은 없었다⁠. 은껍질나무 세 그루 사이에 엮은 나무판 위로 엘프들이 오르내렸고⁠, 바닥에는 마른 이끼가 깔려 있었다⁠. 이끼에서 버섯 냄새가 났다⁠. 해가 지자 숲은 금방 캄캄해졌고⁠, 엘프들은 불을 피우지 않았다⁠. 반석호는 이가 맞부딪치는 소리를 처음으로 자기 입에서 들었다⁠.

목에 건 카메라는 아무도 빼앗지 않았다⁠. 엘프들은 이게 뭔지 몰랐다⁠.

반석호는 묶인 손을 비틀어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가 터졌다⁠. 막사 둘레에 서 있던 숲지기 넷이 한꺼번에 활을 들었다⁠. 이 가운데 제일 앳된 얼굴의 숲지기가 반석호 앞으로 다가와 카메라를 들여다봤다⁠. 반석호는 손목이 끈에 쓸리는 걸 참으며 화면을 돌려 보여 줬다⁠. 화면에 이 숲지기의 얼굴이 있었다⁠. 깜짝 놀라 활을 반쯤 당긴 얼굴이었다⁠.

숲지기가 자기 얼굴을 한참 봤다⁠. 그러더니 동료를 불렀다⁠. 둘이 같이 화면을 봤고⁠, 금세 셋이 되고 넷이 됐다⁠.

“⁠아 이거 좋다⁠.⁠” 반석호가 말했다⁠. “⁠여기⁠, 여기 서 봐요⁠. 좀 웃어 봐⁠. 아 엘프는 안 웃나⁠? 그럼 그대로⁠.⁠”

찰칵⁠.

한 시간 뒤 반석호 앞에는 숲지기 아홉이 줄을 서 있었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막사가 대낮처럼 밝아졌다가 꺼졌다⁠. 숲지기들은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숨을 참았다⁠. 빛을 들이마시면 안 된다고 믿는 눈치였다⁠. 앳된 숲지기가 반석호의 등 뒤에 마른 이끼를 한 아름 깔아 줬다⁠. 다른 하나가 자기 망토를 벗어 반석호의 무릎에 덮었다⁠. 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멎었다⁠.

반석호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엘프어로 아는 말이 딱 하나 있었다⁠. 출장소 첫 주에 리엘이 가르쳐 준 말이었는데⁠, 감사하다는 뜻인지 실례한다는 뜻인지 끝내 헷갈렸다⁠. 반석호는 망토를 덮어 준 숲지기를 보며 이 말을 정성껏 했다⁠. 숲지기 아홉이 동시에 반석호를 봤다⁠. 그러더니 앳된 숲지기가 반석호의 손목 끈을 조금 느슨하게 풀고 막사 구석의 구덩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볼일 보는 자리였다⁠. 반석호는 이날 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게 됐다⁠.

반석호는 엘프어를 하나도 몰라서 찍었다⁠. 사진은 통역이 필요 없었다⁠. 날마다 본부로 보내는 사진 보고는 아무도 열지 않았지만⁠, 같은 사진을 받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이었다⁠. 딸은 사흘에 한 번 답을 보냈다⁠. 「⁠아빠 이 엘프 잘생겼다⁠」 「⁠아빠 또 나무야⁠?⁠」 반석호는 묶인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방금 찍은 숲지기 아홉의 사진을 딸에게 보냈다⁠. 신호가 없어 전송 대기 표시만 돌았다⁠. 그래도 보냈다⁠.

*

엘드린의 자리는 막사보다 높은 가지 위에 있었다⁠. 소율은 숲지기가 내려 준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리엘이 뒤따랐다⁠. 동행 없이 경계석을 넘은 소율과 달리 리엘은 엘프였고⁠, 엘드린은 통역이 필요했다⁠. 아니⁠, 필요하지 않았다⁠. 소율은 어제와 오늘 두 번 들었다⁠. 엘드린은 한국어를 알았다⁠.

“⁠한국어 하시잖아요⁠.⁠”

엘드린은 엘프어로만 대답했다⁠. 리엘이 옮겼다⁠.

“⁠너희 말은 입에 넣으면 쇠 맛이 난다고 하십니다⁠.⁠”

엘드린이 가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이 둘레에 은빛 잎 사이로 별이 보였다⁠. 소율은 맞은편 가지에 앉았다⁠. 발밑이 까마득했다⁠.

“⁠소장님을 놓아주세요⁠.⁠”

“⁠경계를 넘은 인간을 놓아주는 것은 숲지기 대장이나 여왕 폐하가 정한다⁠.⁠” 리엘이 옮겼다⁠. “⁠전하께서는 숲지기를 거느리시니 정하실 수 있다고 하십니다⁠. 다만 그냥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뭘 원하세요⁠?⁠”

엘드린이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숲 바닥이 아니라 그보다 더 아래⁠, 땅을 가리키는 손짓이었다⁠. 그리고 이 손가락을 천천히 동굴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동굴 옆 굴에 쇠문을 달았다고 들었다⁠. 그 안을 내 눈으로 보고 싶다⁠. 동굴은 두 나라가 같이 쓴다고 너희 협정문에 적혀 있지⁠. 그런데 그 문은 인간만 연다⁠.⁠”

소율은 엘드린을 봤다⁠. 이 안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았다⁠. 엘드린은 본 것을 그대로 원로원에 가져갈 것이다⁠. 인간이 숲 아래를 파고 들어왔다고⁠. 한국 정부의 공무원이 직접 길을 안내했다고⁠.

“⁠보시면 원로원에 가져가실 거잖아요⁠.⁠”

“⁠그래⁠.⁠”

“⁠전쟁 얘기를 하실 거고요⁠.⁠”

엘드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엘드린은 기다렸다⁠. 엘프가 기다리는 법을 아는 얼굴이었다⁠. 한 계절이라도 그렇게 앉아 있을 것 같았다⁠.

소율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막사 쪽에서 플래시가 또 한 번 터졌다⁠. 숲지기들이 낮게 탄성을 질렀다⁠.

거절하면 반석호는 나무값으로 숲에 남는다⁠. 그동안 표재곤은 철문 안에서 하던 일을 계속한다⁠. 엘드린은 언젠가 다른 길로 이 안을 볼 것이다⁠. 당시에는 소율이 곁에 없다⁠. 엘드린 혼자 본 것과⁠, 소율이 곁에서 같이 본 것은 원로원 앞에서 다른 말이 된다⁠.

“⁠오늘 밤에 가요⁠. 대신 소장님은 해 뜨면 놓아주세요⁠.⁠”

“⁠너는⁠?⁠”

“⁠저는 지금 놓아주셔야죠⁠. 길잡이니까⁠.⁠” 소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만 여쭐게요⁠. 노란 나무마다 숲지기 매듭이 묶여 있었어요⁠. 이끼가 앉은 것도 있었고요⁠. 전하는 땅 밑 일을 언제부터 아셨어요⁠?⁠”

리엘이 이 말을 옮기다 목소리를 낮췄다⁠. 엘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래 그늘에서 누군가 발을 옮기는 소리가 났다⁠. 마른 이끼가 한 번 바스락거리고 조용해졌다⁠.

엘드린이 처음으로 소율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엘프어로 천천히 말했다⁠. 리엘이 한 박자 늦게 옮겼다⁠.

“⁠너는 네 나라 사람들을 나에게 팔고 있다⁠. 알고 있느냐⁠?⁠”

“⁠네⁠.⁠”

소율은 이 말을 하고 줄사다리를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사다리 아래 그늘에 벨렌이 서 있었다⁠. 가지 위의 말을 다 듣고 있었던 얼굴이었다⁠. 리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엘도 형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

바깥뜰로 돌아오니 동굴 앞이 밝았다⁠. 이동식 조명등 네 대가 풀밭을 대낮처럼 비췄다⁠. 이 불빛 아래 검은 점퍼를 입은 남자 열둘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점퍼 등판에 「⁠한성마이닝 보안⁠」이 흰 글씨로 박혀 있었다⁠. 앞에 선 남자는 마흔 줄의 짧은 머리였다⁠. 허리에 무전기와 검은 손잡이 달린 무언가를 찼다⁠. 전기충격기였다⁠.

표재곤이 출장소 컨테이너 계단에 앉아 있었다⁠. 손에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주무관님⁠, 무사하셨네요⁠. 소장님은요⁠?⁠”

“⁠해 뜨면 돌아오세요⁠.⁠”

“⁠다행입니다⁠. 우리 보안팀입니다⁠. 인질 사건이 났다고 해서 급히 들어왔어요⁠. 동굴에 우리 직원이 삼십 명인데⁠, 엘프들이 사람을 잡아가기 시작하면 회사로서는 지켜야죠⁠.⁠”

소율의 휴대폰이 울렸다⁠. 본부 과장이었다⁠. 숲에 있는 동안 부재중 전화가 열한 통 쌓여 있었다⁠.

“⁠마 주무관⁠, 소장이 납치됐다는데 왜 나는 회사한테 그 얘길 들어요⁠?⁠”

“⁠과장님⁠, 납치가 아니라 소장님이 경계석을⁠—⁠”

“⁠지금 기자들 냄새 맡기 전에 정리해야 돼요⁠. 회사 보안팀이 협조하겠다니까 받아요⁠. 그리고 마 주무관은 동굴 근처에 가지 말아요⁠. 경위서 두 건이에요⁠.⁠”

통화가 끊겼다⁠. 표재곤이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두 건이면 징계 위원회 가요⁠. 첫 달에⁠. 그거 기록 오래 남습니다⁠.⁠”

“⁠전무님⁠, 오늘 밤 열두 시에 엘프 쪽이 동굴 곁굴을 보러 옵니다⁠. 공동 관리 구역이에요⁠. 협정문 칠 조요⁠.⁠”

표재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사라졌다⁠.

“⁠누가 그걸 약속했어요⁠?⁠”

“⁠제가요⁠.⁠”

*

밤 열한 시 반⁠, 표재곤은 곁굴 철문 안쪽에서 보안팀장과 마주 섰다⁠. 굴 안 공기는 바깥보다 차가웠고⁠, 레일 위에 세워 둔 갱차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표재곤은 흰 안전모를 벗어 손바닥으로 먼지를 털었다⁠.

“⁠팀장님⁠, 엘프들 활 쏘는 거 보셨어요⁠?⁠”

“⁠영상으로만 봤습니다⁠.⁠”

“⁠빠릅니다⁠. 근데 오늘은 걔들이 먼저 들게 해야 돼요⁠. 활을요⁠. 우리가 먼저 뭘 하면 안 되고⁠.⁠”

보안팀장의 눈이 표재곤에게 갔다⁠.

“⁠먼저 들면요⁠?⁠”

“⁠들기만 하면 돼요⁠. 쏘면 더 좋고⁠.⁠” 표재곤이 안전모를 다시 썼다⁠. “⁠엘프가 한국 민간인한테 활을 겨눴다⁠. 그 한 줄이면 본부도 국회도 우리 편입니다⁠. 이 굴 지키는 데 경찰이 들어와요⁠. 그다음엔 군이 들어오고⁠. 그러면 엘프 허락 같은 거 아무도 안 물어봐요⁠.⁠”

“⁠그 주무관은요⁠?⁠”

“⁠9급이에요⁠.⁠” 표재곤이 철문 빗장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경위서가 두 건이고⁠.⁠”

*

밤 열두 시⁠, 엘드린은 숲지기 셋과 벨렌을 데리고 바깥뜰을 건넜다⁠. 리엘이 뒤를 따랐다⁠. 엘프들은 조명등 불빛을 피해 풀밭 가장자리 그늘로만 걸었다⁠. 발소리가 없었다⁠. 보안팀원들은 엘프들이 동굴 입구 앞에 설 때까지 이들이 오는 걸 몰랐다⁠.

동굴 안은 조명등 열기로 후텁지근했다⁠. 소율은 앞장서서 곁굴 철문 앞까지 걸었다⁠. 철문 앞에 보안팀장이 서 있었다⁠. 뒤로 점퍼 열둘이 두 줄로 섰다⁠.

“⁠여기는 안전 구역입니다⁠. 못 들어갑니다⁠.⁠”

“⁠동굴은 공동 관리예요⁠.⁠”

“⁠곁굴은 회사 공사 구간입니다⁠. 위에서 받은 지시는 그것뿐입니다⁠.⁠”

엘드린이 보안팀장을 봤다⁠. 위아래로 천천히 한 번⁠. 그러고는 소율에게 엘프어로 물었다⁠. 리엘이 옮겼다⁠.

“⁠이 인간은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숲지기냐고⁠.⁠”

“⁠회사 숲지기예요⁠.⁠”

엘드린이 코로 짧게 웃었다⁠. 손을 들었다⁠. 숲지기 셋과 벨렌이 동시에 활을 내려 화살을 걸었다⁠. 시위 당기는 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겹쳐 울렸다⁠. 보안팀원 하나가 허리의 전기충격기를 뽑았다⁠. 파직⁠, 하고 파란 불꽃이 튀었다⁠.

숲지기들의 얼굴이 굳었다⁠. 동굴은 숲이 아니었지만⁠, 불꽃은 엘프들 눈앞에서 튀었다⁠. 벨렌의 화살촉이 이 보안팀원의 목으로 옮겨 갔다⁠.

“⁠넣으세요⁠!⁠” 소율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섰다⁠. 등 뒤에 화살촉 넷⁠, 앞에 전기충격기 하나였다⁠. “⁠지금 넣으세요⁠. 저분들한테 그 불꽃은 칼 뽑은 거랑 같아요⁠.⁠”

보안팀원이 팀장을 봤다⁠. 팀장이 고개를 젓지 않았다⁠. 끄덕이지도 않았다⁠. 전기충격기 끝에서 파란 불꽃이 한 번 더 튀었다⁠. 질산 냄새가 철문 틈에서 새어 나와 오존 냄새와 섞였다⁠.

철문 안쪽에서 빗장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안으로 열렸다⁠. 흰 안전모를 쓴 표재곤이 문지방에 서 있었다⁠. 뒤로 비탈진 굴이 아래로 이어졌고⁠, 굴 천장에 매단 전등이 먼 데까지 점점이 내려갔다⁠. 표재곤은 엘드린의 화살촉을 보고⁠, 보안팀원의 전기충격기를 보고⁠, 이 사이에 선 소율을 봤다⁠. 그러고는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팀장님⁠, 넣어요⁠. 손님한테 실례입니다⁠.⁠”

전기충격기가 허리로 돌아갔다⁠. 표재곤이 손바닥으로 굴 안쪽을 가리켰다⁠.

“⁠보여 드리죠⁠, 전하⁠. 끝까지⁠.⁠”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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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금빵2026.10.26· 3화

    3화 제목처럼 인질이 사진을 찍으면 그건 증거 사진이에요, 기념사진이에요?

    • 엄선재작가2026.10.27

      주인공은 증거라고 하고 엘프들은 기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질은 사진을 찍는다 ·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