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92자)

사백 걸음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아닙니다⁠.⁠”

소율이 그렇게 대답하자 엘드린은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서 내렸다⁠. 이것이 어제 오후 경계석 앞에서 있었던 일의 끝이었다⁠. 지진이 아니라고 인정한 인간에게 엘드린은 더 묻지 않았다⁠. 내일 해가 질 때까지⁠, 라는 말만 한 번 더 하고 나무 위로 사라졌다⁠.

그리고 밤사이 반석호가 직인을 찍었다⁠.

“⁠아니 그게⁠, 접수증인 줄 알았지⁠.⁠” 반석호가 아침 일곱 시 사무실에서 커피 믹스 두 봉지를 한꺼번에 뜯으며 말했다⁠. “⁠밤 열한 시에 그 회사 직원이 복사본을 들고 왔더라고⁠. 받았다는 확인만 해 달래⁠. 어제 커피 쏟은 것도 미안하고 해서⁠.⁠”

책상 위에 공문 복사본이 있었다⁠. 「⁠협조 확인⁠」 칸 옆에 출장소 직인이 붉게 찍혀 있었다⁠. 직인 옆에 반석호가 찍은 사진도 한 장 놓여 있었다⁠. 직인을 찍는 반석호 자신의 손이었다⁠.

“⁠기록용으로⁠.⁠”

“⁠소장님⁠.⁠”

“⁠알아⁠, 알아⁠. 근데 주무관님⁠, 그거 들려⁠?⁠”

들렸다⁠. 동굴 쪽에서 쇠가 쇠를 긁는 소리가 풀밭을 건너왔다⁠.

*

동굴 안은 어제와 딴판이었다⁠. 문 앞에 분해한 착암 장비를 실은 갱차가 여섯 대 늘어서 있었고⁠, 한성마이닝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 부품을 동굴 오른쪽 곁굴로 날랐다⁠. 어제까지 이 곁굴 입구는 나무판자로 막혀 있었다⁠. 오늘은 회색 철문이 서 있었다⁠. 문 위에 「⁠안전 구역 · 관계자 외 출입 금지⁠」가 붙어 있었고⁠, 경첩의 용접 자국이 아직 푸르스름했다⁠.

소율은 철문 가장자리에 얼굴을 댔다⁠. 문틈으로 찬 바람이 새어 나왔다⁠. 이 바람에 젖은 흙냄새와 함께 질산 냄새가 묻어 있었다⁠. 어제 오후 경계석 틈에서 맡은 것과 같았다⁠.

“⁠주무관님⁠, 거기는 위험합니다⁠.⁠”

표재곤이 안전모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흰 안전모였다⁠. 다른 작업자들은 다 노란 것을 썼다⁠.

“⁠이 안에 뭐가 있어요⁠?⁠”

“⁠보강 구간입니다⁠. 암반이 약해서 앵커를 박고 있어요⁠.⁠”

“⁠어제 오후 네 시에 땅이 울렸어요⁠. 경계석 안쪽 뿌리 틈에서 먼지가 올라왔고요⁠.⁠”

“⁠앵커 박는 소리가 좀 크죠⁠.⁠”

“⁠앵커 박는 데는 화약 안 써요⁠.⁠”

소율은 철문 옆을 지나던 작업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스무 살 남짓한 얼굴에 장갑 낀 손으로 착암기 부품을 안고 있었다⁠.

“⁠어제 앵커 몇 개 박으셨어요⁠?⁠”

작업자가 입을 열다 말고 표재곤을 봤다⁠. 표재곤이 턱으로 곁굴 안쪽을 가리켰다⁠. 작업자는 부품을 고쳐 안고 대답 없이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안쪽에서 또 이 냄새가 밀려 나왔다⁠.

표재곤의 눈썹 하나가 올라갔다⁠. 표재곤은 소율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위아래로 훑었다⁠.

“⁠주무관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할아버지가 이 동네 광부였어요⁠. 철암에서요⁠.⁠”

표재곤이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고 스피커를 켰다⁠. 신호음 두 번 만에 남자 목소리가 받았다⁠. 본부 실바렌협력과 과장이었다⁠.

“⁠과장님⁠, 표재곤입니다⁠. 지금 현장에 주무관님이 와 계신데요⁠, 안전 구역에 들어가시겠다고 해서⁠.⁠”

“⁠마 주무관⁠?⁠” 과장의 목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두 번 울렸다⁠. “⁠거기 회사 공사 현장이에요⁠. 출장소가 협조 확인까지 해 준 건데 왜 거기 가 있어요⁠? 오늘 중으로 경위서 올려요⁠. 기업 공사 현장 무단 접근 건으로⁠.⁠”

“⁠과장님⁠, 여기서 화약 냄새가⁠—⁠”

“⁠냄새요⁠? 마 주무관⁠, 냄새로 보고서 써요⁠?⁠”

통화가 끊겼다⁠. 표재곤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흰 안전모를 썼다⁠.

“⁠경위서는 짧게 쓰세요⁠. 첫 번째 거니까⁠.⁠”

*

오전 열 시⁠, 소율은 경계석 위에 숙소 열쇠를 올려놓았다⁠. 커터칼은 어제부터 출장소 서랍에 넣어 두었다⁠. 리엘이 숲 쪽으로 한 걸음 먼저 들어가 뒤를 돌아봤다⁠. 동행이 있고 해가 있었다⁠. 소율은 경계석을 넘었다⁠.

숲 안은 공기가 달랐다⁠. 수액의 단내가 바깥보다 진했고⁠, 발밑 낙엽이 축축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젖은 낙엽 밑의 흙이 따뜻했다⁠. 소율이 쪼그려 앉아 손바닥을 땅에 대자 사람 등을 만진 것 같은 온기가 올라왔다⁠.

“⁠뿌리뼈입니다⁠.⁠” 리엘이 말했다⁠. “⁠땅 아래에 따뜻한 돌이 흐르고 있으며⁠, 나무들이 그것을 안고 겨울을 납니다⁠. 인간분들께서는 온석이라고 부르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돌⁠, 파 본 적 있어요⁠?⁠”

리엘의 얼굴이 굳었다⁠.

“⁠뿌리 아래는 돌아가신 분들의 자리입니다⁠. 엘프는 뿌리 아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소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리엘이 어제 엘드린이 서 있던 나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율이 물었다⁠.

“⁠여기서 어제 그 틈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려요⁠?⁠”

“⁠곧입니다⁠.⁠”

“⁠곧이 얼마예요⁠?⁠”

리엘이 손가락을 꼽았다⁠.

“⁠이번 겨울이 오기 전입니다⁠.⁠”

“⁠리엘 씨⁠, 나 오늘 해 지기 전까지 가야 돼요⁠.⁠”

“⁠아⁠.⁠” 리엘이 진심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시다면 그것은 곧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지금은 매우 빠르게 걸어야 합니다⁠.⁠”

이들은 매우 빠르게 걸었다⁠.

어제의 틈에서 숲 안쪽으로 서른 걸음쯤 들어가자 소율이 먼저 멈췄다⁠. 은껍질나무 한 그루의 잎이 노랬다⁠. 다른 나무들은 한여름처럼 푸른데 이 한 그루만 늦가을이었다⁠. 손을 뻗어 잎 하나를 쥐자 바스락 부서졌다⁠. 잎자루가 말라 있었다⁠. 위에서 마른 게 아니라 아래에서 물이 끊긴 마름이었다⁠.

다음 나무도⁠, 다음 나무도 노랬다⁠.

소율은 걸음을 셌다⁠. 노란 나무와 노란 나무 사이를 지날 때마다 숫자가 올라갔다⁠. 나무들은 숲 사이에 흩어져 있지 않았다⁠. 한 줄로 서 있었다⁠. 줄을 뒤돌아보면 이 끝이 경계석을 지나 바깥뜰을 가로질러 동굴이 있는 바위 언덕에 닿았다⁠. 앞을 보면 숲 안쪽으로 곧게 뻗었다⁠.

걸음 수가 삼백을 넘고 삼백오십을 넘는 동안 노란 나무는 한 번도 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노란 나무 하나 밑에 엘프 여자가 앉아 있었다⁠. 등을 둥치에 붙이고 낮게 노래를 불렀다⁠. 같은 가락이 끝없이 돌았다⁠. 리엘이 걸음을 늦추고 목소리를 낮췄다⁠.

“⁠저분의 할머니 나무입니다⁠. 저 아래에 할머니께서 묻혀 계십니다⁠. 나무가 아프면 그 아래 계신 분께 노래를 불러 드립니다⁠. 덜 추우시라고⁠.⁠”

엘프 여자는 소율을 보지 않았다⁠. 노래를 멈추지도 않았다⁠. 노란 잎 하나가 이 무릎에 떨어졌다⁠. 엘프 여자는 이 잎을 주워 품에 넣었다⁠.

사백 걸음에서 노란 나무가 끝났다⁠. 사백한 걸음째 나무는 푸르렀다⁠.

소율은 마지막 노란 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들었다⁠. 낮은 가지에 마른 풀을 꼬아 만든 매듭이 묶여 있었다⁠. 돌아보니 지나온 노란 나무마다 같은 매듭이 있었다⁠. 풀을 세 번 감아 끝을 안으로 접어 넣은 매듭이었다⁠.

“⁠이거 누가 묶었어요⁠?⁠”

“⁠숲지기의 풀매듭입니다⁠. 아픈 나무를 보았다는 표시입니다⁠.⁠”

“⁠언제 묶었는지 알 수 있어요⁠?⁠”

“⁠숲지기들만 압니다⁠.⁠”

소율은 매듭 하나를 가까이 들여다봤다⁠. 마른 풀 위에 초록 이끼가 얇게 앉아 있었다⁠. 손톱으로 건드리자 이끼 밑의 풀이 이미 갈색으로 삭아 있었다⁠. 바로 옆 나무의 매듭에도 이끼가 있었다⁠. 소율은 휴대폰을 꺼냈다가 반석호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사진을 찍었다⁠.

머리 위 가지가 흔들렸다⁠. 엘프 하나가 소리 없이 떨어져 소율과 매듭 사이에 섰다⁠. 리엘보다 어깨가 넓었고⁠, 왼쪽 눈썹을 가로지른 흉터가 있었다⁠. 등에 멘 활은 리엘의 키만 했다⁠. 얼굴은 리엘을 몇 해 더 바람에 말린 것 같았다⁠.

엘프가 리엘에게 엘프어로 말했다⁠. 소율은 ‘⁠누가⁠’와 ‘⁠보여 주었느냐⁠’를 알아들었다⁠. 리엘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협정문 몇 장을 줄줄 외던 통역 견습이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제 발끝만 봤다⁠.

엘프가 소율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휴대폰을 내놓으라는 손이었다⁠.

“⁠안 됩니다⁠.⁠” 소율이 휴대폰을 등 뒤로 감췄다⁠. “⁠이건 쇠날이 아니에요⁠. 불도 아니고요⁠.⁠”

엘프가 한 걸음 다가섰다⁠. 손이 소율의 손목으로 왔다⁠. 이때 리엘이 겨우 소리를 냈다⁠. 엘프어가 아니라 한국어였다⁠.

“⁠형⁠.⁠”

엘프의 손이 소율의 손목 한 뼘 앞에서 멈췄다⁠. 소율은 리엘을 한참 봤다⁠. 그러고는 매듭 하나를 손끝으로 쓸었다⁠. 풀려는 손짓이 아니었다⁠. 이끼를 쓸어 덮는 손짓이었다⁠.

“⁠매듭은 나무가 낫거나 죽을 때까지 풀지 않는다⁠.⁠” 엘프가 엘프어로 말하고⁠, 소율이 알아듣지 못한 얼굴을 하자 리엘을 봤다⁠. 리엘이 작게 옮겼다⁠. 다음 말은 리엘이 옮기기를 망설였다⁠.

“⁠해 지기 전에 나가라⁠. 전하께서 경계석에서 기다리신다⁠.⁠”

엘프가 다시 가지 위로 뛰어올랐다⁠. 은회색 잎이 몇 장 떨어졌다⁠. 소율은 리엘을 봤다⁠.

“⁠형이에요⁠?⁠”

“⁠숲지기 대장 벨렌입니다⁠.⁠” 리엘이 대답하고 나서 한참 뒤에 덧붙였다⁠. “⁠엘드린 전하의 숲지기 대장입니다⁠. 저는 형 앞에서 말을 잘 못 합니다⁠. 이 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돌아 나오는 길에 출장소 쪽에서 반석호의 문자가 왔다⁠. 「⁠현장 사진 내가 찍어 줄까⁠? 노란 나무 보고 싶어⁠.⁠」 소율은 걸으면서 답을 보냈다⁠. 「⁠소장님은 사무실에 계세요⁠. 경계석 넘으시면 안 돼요⁠.⁠」 답이 바로 왔다⁠. 엄지를 든 이모티콘이었다⁠.

*

해가 경계석 너머로 기울었다⁠. 엘드린은 어제 이 나뭇가지 위에 있었다⁠. 오늘은 활을 겨누지 않았다⁠. 활은 등에 메고⁠, 팔짱을 끼고 내려다봤다⁠. 숲지기 여섯이 이 둘레 가지에 섰다⁠.

리엘이 옮길 준비를 하고 숨을 골랐다⁠. 소율은 자기 엘프어로 먼저 말했다⁠. 서툴렀지만 단어를 하나씩 놓았다⁠.

“⁠사람이 땅을 팝니다⁠. 한국 회사입니다⁠.⁠”

리엘이 놀라 소율을 봤다가⁠, 다음을 한국어로 받아 엘프어로 옮겼다⁠.

“⁠동굴 옆 굴에서 시작해서 숲 아래로 사백 걸음까지 갔습니다⁠. 나무가 노랗게 진 줄을 따라가면 그 길이 보입니다⁠. 한국 정부가 시킨 일은 아닙니다⁠.⁠”

엘드린이 팔짱을 풀었다⁠. 엘프어로 짧게 물었다⁠. 리엘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러면 너희 정부는 그 회사를 막을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소율은 오늘 아침 동굴 벽에 두 번 울린 과장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냄새로 보고서 써요⁠?

대답이 늦었다⁠. 엘드린은 이 늦음을 대답으로 받았다⁠. 처음으로 웃었다⁠. 그리고 숲지기 하나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경계석 왼쪽 수풀이 흔들렸다⁠. 숲지기 둘이 사람 하나를 양쪽에서 끌고 나왔다⁠. 등산 조끼⁠, 단추 하나가 버티는 배⁠, 목에 건 카메라⁠.

“⁠주무관님⁠! 아니 나는 그냥⁠, 노란 나무가 예뻐서⁠, 딱 한 장만⁠—⁠”

반석호였다⁠. 반석호의 운동화가 흰 경계석 안쪽 흙을 밟고 있었다⁠. 동행은 없었다⁠. 엘드린의 입에서 엘프어가 나왔다⁠. 이번에는 리엘이 옮기기도 전에 소율이 알아들었다⁠. 이 말에는 어제 협정문 첫 장에서 리엘이 세 겹으로 밑줄 그은 단어⁠, 나무가 들어 있었다⁠.

“⁠동행 없이 경계를 넘은 인간은 숲지기가 붙잡는다⁠. 나무값으로 이 자를 데려간다⁠.⁠”

숲지기들이 반석호를 숲 안쪽으로 끌었다⁠. 반석호가 끌려가면서도 카메라를 들어 엘드린을 찍었다⁠. 찰칵⁠. 플래시가 터졌다⁠. 숲지기 하나가 놀라 활을 당겼다가 엘드린의 손짓에 내렸다⁠.

“⁠소장님⁠!⁠”

리엘이 소율의 팔을 잡았다⁠.

“⁠넘으시면 안 됩니다⁠. 저는 지금 동행이 아니라 통역으로 왔습니다⁠. 해가 지고 있습니다⁠.⁠”

해는 반쯤 남아 있었다⁠. 반석호의 플래시가 숲 안쪽에서 한 번 더 번쩍였다⁠. 소율은 리엘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 흰 경계석을 넘었다⁠.

나무 위에서 시위 당기는 소리가 났다⁠. 엘드린이 활을 내려 화살을 걸고 소율의 가슴을 겨눴다⁠. 이번에는 한국어였다⁠.

“⁠너도⁠, 넘었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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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갈피곰2026.10.26· 2화

    엘프 왕자가 첫날 화살을 겨눴는데 공무원은 겁 안 났어요?

    • 엄선재작가2026.10.27

      났죠. 그래도 공문은 끝까지 읽었어요. 그게 9급의 힘입니다.

사백 걸음 ·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