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00자)

협조 공문은 못 받습니다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2갱 입구에서 맨 먼저 맡은 것은 석탄 냄새였다⁠. 이십 년 전에 문을 닫은 탄광인데도 갱목에 밴 검은 가루 냄새가 습기를 타고 올라왔고⁠, 마소율은 이 냄새를 맡자마자 할아버지가 퇴근하던 저녁의 부엌을 떠올렸다가 얼른 지웠다⁠. 2029년 9월 3일 월요일⁠, 아침 아홉 시였다⁠. 강원도 태백⁠, 한성마이닝 폐광 2갱 앞 검문소에서 경비원이 소율의 출입증을 세 번 뒤집어 봤다⁠.

“⁠외교부요⁠? 9급⁠?⁠”

“⁠네⁠.⁠”

“⁠거기 가는 사람 올해 처음 보네⁠.⁠”

경비원이 안전모를 내밀었다⁠. 소율은 이걸 쓰고 갱차에 올라탔다⁠. 레일 위를 덜컹거리며 사백 미터를 내려가는 동안 귀가 두 번 먹먹해졌고⁠, 갱 벽에 박힌 전등이 하나씩 뒤로 흘러갔다⁠. 레일이 끝나는 자리에 이것이 있었다⁠. 갱도 막다른 벽을 덮은 푸른 빛의 막이었다⁠. 물 위에 기름이 번진 것처럼 빛이 천천히 일렁였고⁠, 이 앞에 노란 선과 「⁠실바렌 방향 · 상시 개방⁠」 팻말이 서 있었다⁠.

수교 두 해째⁠, 이 문을 지나 출근하는 한국 공무원은 오늘부터 둘이 되었다⁠.

소율은 숨을 들이쉬고 걸어 들어갔다⁠. 차가운 물에 얼굴을 담글 때처럼 살갗이 한 번 오그라들었다⁠. 다음 걸음에서 석탄 냄새가 끊겼다⁠. 이 자리를 다른 냄새가 채웠다⁠. 송진 같지만 더 달았고⁠, 꿀을 바른 나무껍질을 코앞에 댄 것 같은 냄새였다⁠. 동굴 바닥은 마른 모래였고⁠, 이 끝에 햇빛이 네모나게 걸려 있었다⁠.

동굴을 나서자 풀밭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풀이 바람에 한쪽으로 누웠고⁠, 풀밭 저편에 흰 돌이 한 줄로 박혀 있었다⁠. 이 돌 너머로 나무들이 섰다⁠. 껍질이 은빛이었다⁠. 둥치 하나가 컨테이너만 했고⁠, 가지는 하늘을 덮었다⁠.

찰칵⁠.

“⁠아 이거 좋다⁠. 신규 직원 첫 발⁠. 근데 주무관님⁠, 한 번만 다시 나와 주실래요⁠? 표정이 너무 놀랐어⁠.⁠”

카메라를 든 남자가 풀밭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흔 후반⁠, 등산 조끼⁠, 배 위에서 단추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실바렌 출장소장 반석호였다⁠. 소율은 동굴로 다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찰칵⁠. 반석호가 화면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너무 안 놀랐네⁠. 한 번만 더⁠.⁠”

세 번째에 반석호는 만족했다⁠.

*

출장소는 컨테이너 두 동이었다⁠. 한 동은 사무실⁠, 한 동은 숙소였고⁠, 지붕에 태극기와 「⁠주실바렌 대한민국 대사관 겸 출장소⁠」 아크릴 간판이 바람에 덜컹거렸다⁠. 전기는 문을 지나 들어온 굵은 전선 하나로 받았다⁠. 사무실 벽 한 면이 사진이었다⁠. 나무⁠, 나무⁠, 엘프 뒤통수⁠, 나무⁠, 반석호와 엘프의 어색한 투샷⁠, 또 나무⁠.

“⁠저 엘프어는 하나도 몰라요⁠.⁠” 반석호가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리며 말했다⁠. “⁠시험 세 번 떨어졌어⁠. 그래서 찍어⁠. 사진은 통역이 필요 없잖아⁠. 날마다 본부에 보내요⁠. 안 열어 보는 것 같긴 한데⁠.⁠”

문이 열렸다⁠. 엘프가 들어왔다⁠.

키가 소율보다 머리 하나는 컸고⁠, 귀 끝이 머리카락 사이로 비죽 나와 있었다⁠. 은회색 머리를 뒤로 묶었고⁠, 녹색 웃옷 품에 두꺼운 종이 뭉치를 안고 있었다⁠. 젊은 얼굴이었다⁠. 엘프는 소율 앞에서 허리를 반듯이 숙였다⁠.

“⁠신임 주무관님의 부임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본인은 여왕 폐하의 통역관 밑에서 수습 중인 리엘임을 알려 드립니다⁠. 향후 원활한 업무 협조를 부탁드리오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소율은 반석호를 봤다⁠. 반석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협정문으로 한국어를 배웠대⁠. 그리고 우리가 보낸 공문으로⁠. 우리 탓이야⁠.⁠”

리엘이 품의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2027년 수교 협정문 사본이었다⁠. 여백마다 연필로 엘프 글자가 빽빽했다⁠. 소율은 이 종이 냄새에서 은껍질나무 수액 냄새를 맡았다⁠. 이 엘프는 이걸 나무 밑에 앉아서 읽었다⁠.

“⁠주무관님께서 엘프어 시험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응시자가 저 혼자였어요⁠.⁠”

리엘이 이 말을 한참 생각하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다면 일등이 맞습니다⁠.⁠”

*

오후 두 시에 표재곤이 왔다⁠.

검은 SUV가 문을 지나올 수는 없어서⁠, 표재곤은 직원 둘을 거느리고 동굴에서 풀밭을 걸어왔다⁠. 쉰 초반⁠, 회색 정장⁠, 넥타이 없이 셔츠 깃을 다림질로 세운 사람이었다⁠. 반석호가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았다⁠. 「⁠한성마이닝 전무이사 표재곤⁠」

“⁠반석호 소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이쪽이 새로 오신 마소율 주무관님이시고⁠.⁠”

표재곤은 소율의 직급을 이름 뒤에 정확히 붙였다⁠. 그러고는 서류철을 책상 위에 펼쳤다⁠. 「⁠게이트 안정화 공사 장비 반입 및 숲 측량 협조 요청⁠」

“⁠문 주변 암반이 약해졌어요⁠. 갱도 쪽은 저희 땅이니까 저희가 보강해야 하고요⁠. 십이 톤짜리 착암 장비를 동굴 쪽으로 들일 거고⁠, 숲 쪽 지반도 측량을 좀 해야 합니다⁠. 엘프분들한테 측량 동행을 붙여 달라는 거죠⁠. 출장소에서 협조 확인만 해 주시면 됩니다⁠.⁠”

반석호의 손이 서랍으로 갔다⁠. 소율은 이 서랍에 출장소 직인이 들어 있다는 걸 아침에 봤다⁠.

“⁠소장님⁠.⁠”

반석호의 손이 멈췄다⁠.

“⁠동굴은 두 나라가 같이 쓰는 데예요⁠. 숲은 엘프 땅이고요⁠. 출장소가 확인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엘프 쪽에 전해 드릴 수는 있어요⁠.⁠”

표재곤이 소율을 봤다⁠. 웃는 얼굴이었고 눈은 웃지 않았다⁠.

“⁠주무관님⁠, 첫날이시죠⁠?⁠”

“⁠네⁠.⁠”

“⁠9급이시고⁠.⁠”

“⁠네⁠.⁠”

“⁠이건 본부 실바렌협력과하고도 얘기가 된 겁니다⁠. 형식상 현지 확인이 필요해서 온 거고요⁠. 주무관님이 판단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판단 안 합니다⁠. 엘프한테 물어볼게요⁠. 오늘요⁠.⁠”

반석호가 두 사람 사이에서 커피 믹스를 뜯다가 가루를 책상에 쏟았다⁠. 표재곤의 직원이 휴지를 내밀었고⁠, 반석호는 이 휴지로 책상을 닦다가 공문 귀퉁이까지 닦았다⁠. 커피 가루가 「⁠협조 요청⁠」 네 글자 위에 갈색으로 번졌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복사본 있으시죠⁠?⁠”

표재곤이 일어섰다⁠. 몸을 돌릴 때 소율은 이 냄새를 맡았다⁠. 구두 밑창 가장자리에 회색 흙이 말라붙어 있었고⁠, 이 흙에서 시큼하고 매캐한 냄새가 났다⁠. 머리카락 타는 냄새에 식초를 섞은 듯한⁠, 할아버지 작업복 소매에서 나던 냄새였다⁠. 질산이 타고 남은 냄새⁠, 발파하고 난 갱도의 냄새였다⁠.

“⁠전무님⁠, 오늘 서울에서 바로 오셨어요⁠?⁠”

“⁠본사에서 아침 일찍요⁠. 왜요⁠?⁠”

“⁠구두에 흙이 묻어서요⁠.⁠”

표재곤이 구두를 내려다봤다가 다시 소율을 봤다⁠.

“⁠태백 흙이 좀 끈적하죠⁠. 주무관님⁠, 저녁까지 연락 주세요⁠. 장비는 내일 새벽에 들어옵니다⁠.⁠”

*

오후 네 시⁠, 소율은 보온병 두 개와 컵라면 여섯 개를 종이 가방에 담았다⁠. 전임자가 남기고 간 인수인계 쪽지에 한 줄이 있었다⁠. 「⁠숲지기들 국물 좋아함⁠. 숲에 불 금지라 보온병 필수⁠.⁠」 이 아래에 누가 볼펜으로 덧붙여 놓았다⁠. 「⁠라면 주면 말이 좀 짧아짐⁠. 좋은 뜻임⁠.⁠」

리엘이 앞장섰다⁠. 풀밭을 가로질러 흰 경계석 앞에 이르자 리엘이 걸음을 멈추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열쇠와 칼을 이곳에 두시기 바랍니다⁠.⁠”

소율은 주머니에서 숙소 열쇠와 서류 봉투 뜯을 때 쓰던 커터칼을 꺼내 돌 위에 놓았다⁠. 리엘이 보온병을 들어 흔들어 봤다⁠.

“⁠이것은 불입니까⁠?⁠”

“⁠뜨거운 물이에요⁠. 불은 없어요⁠. 아침에 끓여서 담아 왔어요⁠.⁠”

리엘이 마개를 열고 김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석 안쪽 숲은 해가 있을 때⁠, 엘프와 함께여야 들어갈 수 있었다⁠. 숲 안에는 불꽃도 쇠날도 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 있는 나무 한 그루는 엘프 한 사람이었다⁠. 협정문 첫 장에 그렇게 적혀 있었고⁠, 리엘의 연필 글씨가 이 줄에만 세 겹으로 밑줄을 그어 놓았다⁠.

“⁠오늘은 안까지 안 들어가요⁠. 숲지기분들 여기로 좀 불러 주실 수 있어요⁠?⁠”

리엘이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물고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나무 위에서 같은 휘파람이 돌아왔다⁠. 소율은 컵라면 뚜껑을 반쯤 뜯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김이 올랐다⁠. 리엘이 이 김을 내려다봤다⁠.

“⁠삼 분 기다리셔야 돼요⁠.⁠”

“⁠삼 분이란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문의드립니다⁠.⁠”

“⁠엘프 시간으로 하면⁠, 음⁠. 아주 짧아요⁠.⁠”

“⁠그렇다면 지금입니까⁠?⁠”

“⁠지금보다 조금 뒤요⁠.⁠”

리엘은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삼 분 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소율이 됐다고 하자 국물을 한 모금 마셨고⁠, 눈을 감았고⁠, 오래 숨을 내쉬었다⁠. 귀 끝이 붉어졌다⁠.

“⁠불 없이 따뜻한 것을 처음 먹어 봅니다⁠.⁠” 리엘이 말했다⁠. 이번에는 공문 말투가 아니었다⁠.

이때 소율의 코에 이것이 걸렸다⁠.

수액의 단내 아래에 시큼하고 매캐한 것이 섞여 있었다⁠. 오후에 표재곤의 구두에서 맡은 냄새였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냄새는 낮게 깔려 있었고⁠, 소율은 쪼그려 앉아 땅에 코를 댔다⁠. 경계석 바로 안쪽⁠, 은껍질나무 뿌리 두 가닥 사이로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한 틈이 나 있었다⁠. 냄새는 거기서 올라왔다⁠.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리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소율은 고개를 들었다⁠.

나뭇가지 위에 엘프 하나가 서 있었다⁠. 활시위를 귀까지 당긴 채였다⁠. 화살촉이 소율의 이마를 가리켰다⁠. 검은 머리를 길게 땋았고⁠, 다른 엘프들처럼 녹색 옷이었지만 어깨에 은실로 수놓은 잎 문양이 있었다⁠. 뒤쪽 가지마다 활을 든 숲지기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엘드린 전하이십니다⁠.⁠” 리엘이 속삭였다⁠. “⁠여왕 폐하의 아드님이시며 숲지기를 거느리고 계심을 알려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매우 화가 나 계십니다⁠.⁠”

엘드린이 엘프어로 말했다⁠. 짧고 차가운 소리였다⁠. 소율은 단어 절반을 알아들었다⁠. 지난밤⁠, 땅⁠, 세 번이라는 말이 들렸다⁠. 리엘이 옮겼다⁠.

“⁠지난밤 숲 아래 땅이 세 번 기침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새들이 둥지를 떠났음을 알려 드립니다⁠. 또한 그 냄새가 너희 인간에게서 난다고 하십니다⁠.⁠”

소율은 틈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맡았다⁠. 아는 냄새였다⁠. 표재곤의 구두가 오늘 아침 어디를 밟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말을 지금 꺼내면 이 화살이 날아갈 곳이 소율의 이마가 아닐 수도 있었다⁠. 동굴일 수도⁠, 문 너머일 수도 있었다⁠.

“⁠지진일 수도 있습니다⁠. 이 땅이 원래 약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리엘이 옮겼다⁠. 엘드린의 활이 조금도 내려가지 않았다⁠.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리엘이 옮기기 전에 소율이 먼저 알아들었다⁠. 해와 내일과 지다라는 말이 한 문장에 있었다⁠.

“⁠그러면 그 지진이 어디서 났는지 네 발로 가서 보여라⁠. 내일 해가 질 때까지⁠. 그러지 못하면 이 일을 원로원에 인간의 공격으로 올리겠다⁠.⁠”

리엘이 옮기다 말고 엘드린을 올려다봤다⁠. 공문 말투가 무너졌다⁠.

“⁠내일이라니요⁠. 전하께서 하루를 기한으로 거시는 것은 처음 봅니다⁠.⁠”

엘드린이 대답 대신 시위를 조금 더 당겼다⁠. 소율은 컵라면 국물이 식어 가는 냄새를 맡으며 일어섰다⁠.

“⁠보여 드릴게요⁠. 내일 해 지기 전에⁠.⁠”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바닥이 먼저 들었다⁠.

쿵⁠.

땅이 한 번 울렸다⁠. 둔하고 깊은 소리였다⁠. 나무 위에서 새 떼가 한꺼번에 날아올랐고⁠, 은껍질나무 잎이 비처럼 떨어졌다⁠. 뿌리 사이 틈에서 회색 먼지가 훅 뿜어져 나왔다⁠. 질산 냄새가 방금 막 터진 것처럼 생생하게 코를 찔렀다⁠. 대낮이었다⁠.

화살이 날아왔다⁠. 소율의 두 운동화 사이⁠, 흙에 깃까지 박혔다⁠.

엘드린이 가지 위에서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리엘은 옮기지 않았다⁠. 옮길 필요가 없었다⁠. 엘드린이 소율을 내려다보며 또박또박 한국어로 말했다⁠.

“⁠이것도⁠, 지진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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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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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가자리2026.10.26· 1화

    9급 공무원이 엘프 왕국에 파견되면 월급은 어느 나라에서 줘요?

    • 엄선재작가2026.10.27

      대한민국에서 줘요. 출장비는 아직 결재가 안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