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504자)

막는 날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갔습니다⁠, 어머니⁠.⁠”

엘드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소율은 이것이 더 무서웠다⁠. 엘드린이 어머니 앞에 섰다⁠. 숲지기 스물과 벨렌과 말뚝 사이의 리엘과 시월⁠, 그리고 접이식 의자를 옆구리에 낀 반석호가 다 보는 앞이었다⁠. 엘드린은 엘프어로 말했다⁠. 통역관이 옮겼고⁠, 리엘이 말뚝 사이에서 빠진 말을 채웠다⁠.

“⁠인간은 숲의 뼈를 원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주는 척했습니다⁠. 인간이 첫 여왕의 나무까지 손을 대면⁠, 원로원은 더는 어머니의 수교를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은 닫히고⁠, 숲은 다시 숲만의 것이 됩니다⁠. 나무 하나로 숲 전부를 지키는 길이었습니다⁠.⁠”

“⁠그 나무 하나가 네 어머니의 어머니가 아니냐⁠, 하고 물으십니다⁠.⁠”

엘드린은 이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왕은 한참 서 있었다⁠. 투명한 머리카락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러고는 벨렌을 봤다⁠. 묻는 말이었지만 정하는 말이었다⁠.

“⁠오늘부터 숲지기는 벨렌이 거느리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벨렌이 무릎을 꿇었다⁠. 엘드린을 보지 않았다⁠. 엘드린도 벨렌을 보지 않았다⁠. 엘드린은 어깨의 은실 잎 문양을 손으로 한 번 쓸었다⁠. 떼어 내지는 않았다⁠.

“⁠어머니께서 저를 벌하실 수는 없습니다⁠. 뿌리 아래의 일은 원로원이 정합니다⁠.⁠” 엘드린이 소율을 보면서 한국어로 바꿔 말했다⁠. “⁠원로원에서 뵙지요⁠. 그분들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몇 해가 걸리든⁠.⁠”

엘드린은 빈터를 걸어 나갔다⁠. 숲지기 누구도 따라가지 않았다⁠. 은껍질나무 사이로 엘드린의 검은 머리가 사라졌다⁠.

여왕이 말뚝 쪽으로 걸어왔다⁠. 리엘의 손목 끈을 손끝으로 풀었다⁠. 다음 시월 앞에 섰다⁠. 시월이 여왕을 올려다봤다⁠. 여왕이 시월의 손을 들어 손등의 노르스름한 얼룩을 봤다⁠. 물었다⁠. 이번에는 리엘이 옮겼다⁠. 목소리가 다시 공문 같았다⁠. 이번에는 이게 맞았다⁠.

“⁠나무를 죽인 손으로 나무를 살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시월이 소율을 봤다⁠. 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월이 여왕에게 묶인 손을 내밀었다⁠.

“⁠해 볼게요⁠. 대신 끈 좀 풀어 주세요⁠. 손이 저려서 화약도 못 만지겠어요⁠.⁠”

*

“⁠굴이 칠백 걸음이면 바람 구멍이 있어야 돼요⁠.⁠” 시월이 흙바닥에 굴을 그리며 말했다⁠. 손목에 끈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사람이 숨을 쉬어야 하니까⁠. 막장 가까이에⁠, 위로 뚫어서 관을 꽂아요⁠. 근데 숲 바닥에 관이 삐죽 나와 있으면 엘프들이 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나무 밑동 속에 숨겨요⁠.⁠” 소율이 말했다⁠. “⁠나무를 베고⁠.⁠”

벨렌이 숲지기들에게 엘프어로 명했다⁠. 숲지기 스물이 여왕의 나무 쪽으로 흩어졌다⁠. 엘프 걸음으로 금방이었다⁠. 한 시간 뒤 휘파람이 돌아왔다⁠. 여왕의 나무에서 서쪽으로 백 걸음⁠, 은껍질나무 숲 사이에 둥치 하나가 무릎 높이에서 잘려 있었다⁠. 잘린 면 위에 이끼를 덮어 놓았다⁠. 이끼를 걷자 밑동 한가운데가 파여 있었고⁠, 이 속으로 검은 관 하나가 땅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관에서 미지근한 바람이 올라왔다⁠. 질산 냄새와 온석의 온기가 섞인 바람이었다⁠.

숲지기들이 이 밑동을 둘러싸고 섰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숲지기 하나가 밑동 옆에 무릎을 꿇고 잘린 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톱 자국이 결을 따라 고르게 나 있었다⁠. 쇠날이었다⁠.

“⁠나무 한 그루는 엘프 한 사람이에요⁠.⁠” 소율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리엘이 이 말을 옮기지 않았다⁠. 숲지기들은 다 알고 있었다⁠.

계획은 시월이 정했고⁠, 짧았다⁠. 이 관 바로 아래가 삼백 걸음째 갈림길에서 여왕의 나무 쪽으로 백 걸음 들어간 자리였다⁠. 이 구간 갱목 여섯 틀을 빼면 천장이 내려앉는다⁠. 화약은 쓰지 않는다⁠. 갱목에 밧줄을 묶어 위에서 당긴다⁠. 묶는 건 아래에서⁠, 당기는 건 위에서⁠.

엘프는 뿌리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니 아래는 인간이 내려가고⁠, 엘프는 위에서 당겼다⁠. 덩굴 밧줄 여섯 가닥이 검은 관을 따라 땅속으로 내려갔다⁠.

소율이 구멍 쪽으로 떠나기 전에 벨렌이 밑동 앞에서 리엘을 불렀다⁠. 엘프어였다⁠. 리엘이 형 곁으로 갔다⁠. 벨렌은 밧줄 여섯 가닥 가운데 첫 번째를 자기 손에 감았다⁠. 그리고 두 번째를 동생에게 내밀었다⁠. 리엘이 이것을 받아 손에 세 번 감은 다음 끝을 안으로 접어 넣었다⁠. 벨렌이 이 손을 내려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 밧줄 끝도 풀어서 세 번 감고 안으로 접어 다시 맸다⁠.

*

동굴 곁굴 철문 앞에 반석호가 접이식 의자를 펴고 앉았다⁠.

반석호의 뒤에 숲지기 열이 섰다⁠. 오늘 아침 벨렌의 숲지기가 된 궁수들이었다⁠. 의자 앞에는 점검단장과 보안팀장과 보안팀원 열이 섰다⁠. 철문 너머 굴에서는 기술자들이 굴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단장이 의자를 내려다봤다⁠.

“⁠반 소장⁠. 업무 배제된 분이 여기서 뭐 해요⁠?⁠”

“⁠앉아 있어요⁠. 업무 배제라서 할 일이 없어서⁠.⁠”

“⁠비켜요⁠. 우리 기술자들 들어가야 돼요⁠.⁠”

반석호가 휴대폰을 들었다⁠. 찰칵⁠. 단장의 얼굴이 화면에 담겼다⁠. 찰칵⁠, 보안팀장의 얼굴이 담겼고⁠, 찰칵⁠, 찰칵⁠, 보안팀원 하나하나가 차례로 담겼다⁠.

“⁠뭐 하는 겁니까⁠?⁠”

“⁠기록용입니다⁠. 엘프분들은 얼굴을 세거든요⁠. 들어간 사람⁠, 나온 사람⁠. 손가락으로⁠. 근데 손가락은 얼굴을 못 남기잖아요⁠.⁠”

보안팀장이 반석호의 어깨를 밀었다⁠. 접이식 의자가 뒤로 기울었다⁠. 반석호가 의자와 같이 엉덩이부터 동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바닥에 누운 채로 휴대폰을 들어 보안팀장을 찍었다⁠. 찰칵⁠.

숲지기 열이 일제히 활을 당겼다⁠.

보안팀장이 손을 들고 한 걸음 물러났다⁠. 반석호가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 의자를 다시 펴고 앉았다⁠. 등산 조끼 하나 남은 단추가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반석호는 단추를 줍지 않았다⁠. 숲지기 줄 맨 끝에서 앳된 숲지기가 걸어 나와 이 단추를 주웠다⁠. 목에 반석호의 카메라를 건 채였다⁠. 이 사람은 단추를 반석호의 손바닥에 올려 주고 엄지를 들어 보였다⁠. 반석호도 엄지를 들었다⁠.

“⁠단장님⁠, 저 정년 칠 년 남았어요⁠. 길게 남았죠⁠. 그러니까 천천히 하세요⁠. 저 여기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어요⁠. 엘프 시간으로⁠.⁠”

*

갱목 여섯 틀에 밧줄 여섯 가닥이 묶였다⁠. 소율이 셋⁠, 시월이 셋⁠. 시월의 매듭은 빠르고 단단했다⁠. 소율의 매듭은 시월이 한 번씩 다시 묶었다⁠.

“⁠공무원⁠, 이거 신발 끈 매듯 매면 안 돼요⁠.⁠”

“⁠알아요⁠.⁠”

“⁠알면서 그렇게 매요⁠?⁠”

머리 위 검은 관에서 리엘의 목소리가 내려왔다⁠. 관을 타고 오느라 소리가 둥글게 울렸다⁠.

“⁠위쪽은 준비를 마쳤음을 알려 드립니다⁠. 신호를 주시면 숲지기 스물이 당깁니다⁠.⁠”

소율이 갈림길 쪽을 돌아봤다⁠. 갈림길 너머로 전등 불빛 셋이 다가오고 있었다⁠. 레일 위를 걷는 구둣발 소리가 났고⁠, 흰 안전모가 맨 앞에 있었다⁠.

표재곤이었다⁠. 기술자 둘이 뒤에서 상자를 안고 따라왔다⁠. 상자 옆면에 「⁠한성마이닝⁠」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표재곤은 소율과 시월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갱목에 묶인 덩굴 밧줄을 봤다⁠. 위로 이어진 밧줄을 따라 고개를 들어 검은 관을 봤다⁠. 오래 봤다⁠.

그러고는 걸어왔다⁠. 갱목 여섯 틀 한가운데⁠, 밧줄이 묶인 갱목 바로 아래에 섰다⁠.

“⁠당기라고 하세요⁠.⁠” 표재곤이 말했다⁠. 여전히 느긋한 목소리였다⁠. “⁠엘프들한테⁠. 사람 하나 깔려 죽게 할 거면⁠.⁠”

기술자 둘이 상자를 내려놓고 뒷걸음질했다⁠. 표재곤은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비키지 않았다⁠. 흰 안전모를 고쳐 썼다⁠.

“⁠마소율 씨는 못 시키죠⁠. 9급이었지만 공무원이니까⁠. 엘프들은 더 못 하고⁠. 인간 하나 죽이면 그건 전쟁이잖아요⁠. 엘프 쪽에서 시작한⁠.⁠”

소율은 표재곤 앞에 섰다⁠. 갱목 아래였다⁠. 둘 다 같은 천장 아래 서 있었다⁠.

“⁠전무님⁠, 나오세요⁠.⁠”

“⁠싫습니다⁠.⁠”

“⁠이 굴 막혀도 회사는 안 망해요⁠. 전무님은 안 망하고요⁠. 나오세요⁠.⁠”

“⁠막히면 망합니다⁠. 나는⁠.⁠” 표재곤이 처음으로 눈까지 웃었다⁠. 지친 웃음이었다⁠. “⁠이 년을 팠어요⁠. 회사에도 반만 말하고⁠. 반은 내 거였어요⁠. 이게 막히면 남는 건 엘프 왕자하고 손잡은 전무 하나예요⁠.⁠”

시월이 소율 뒤에서 앞으로 나서서 흰 안전모 아래 표재곤의 얼굴을 봤다⁠. 시월은 이 얼굴을 갱도에서 정면으로 본 적이 없었다⁠. 늘 머리 전등 불빛 뒤에 있었다⁠. 소율이 머리 전등을 아래로 내렸다⁠. 불빛이 표재곤의 가슴께로 떨어졌다⁠. 시월이 처음으로 이 얼굴을 봤다⁠.

“⁠기사님⁠, 오늘은 두 번만 하시죠⁠.⁠”

시월이 표재곤의 느릿느릿한 존댓말을 그대로 흉내 냈다⁠.

“⁠그 목소리 맞네⁠. 밤마다 그 말 하던⁠.⁠”

표재곤의 웃음이 멈췄다⁠.

소율은 이 틈에 표재곤의 멱살을 잡았다⁠. 셔츠 깃이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출근 첫날 다림질로 세워져 있던 이 깃이었다⁠. 시월이 반대쪽 팔을 잡았다⁠. 둘이 표재곤을 갈림길 쪽으로 끌었다⁠. 표재곤이 버텼다⁠. 구두가 레일 위에서 미끄러졌다⁠. 흰 안전모가 벗겨져 레일 위를 굴렀다⁠.

“⁠당겨요⁠!⁠” 소율이 검은 관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지금⁠!⁠”

검은 관 위에서 리엘의 목소리가 엘프어로 무언가를 외쳤다⁠. 밧줄 여섯 가닥이 한꺼번에 팽팽해졌다⁠.

첫 번째 갱목이 빠졌다⁠. 천장에서 흙이 쏟아졌다⁠. 두 번째⁠, 세 번째⁠. 우르릉 소리가 굴을 타고 밀려왔다⁠. 소율과 시월은 표재곤을 끌고 갈림길을 넘었다⁠. 등 뒤에서 네 번째⁠, 다섯 번째⁠. 흙과 돌과 온석이 한꺼번에 내려앉았다⁠. 주황빛 돌들이 먼지 속에서 잠깐 빛났다가 묻혔다⁠. 여섯 번째 갱목이 빠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 소리를 무너지는 소리가 덮었다⁠.

먼지가 굴을 꽉 채웠다⁠. 소율은 소매로 입을 막고 기침했다⁠. 머리 전등 빛이 먼지 속에서 하얀 막대처럼 섰다⁠. 한참 뒤 먼지가 가라앉았다⁠. 갈림길 너머⁠, 여왕의 나무로 가는 굴이 천장까지 흙으로 막혀 있었다⁠. 레일 끝이 흙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흰 안전모가 이 흙더미 아래 반쯤 묻혀 있었다⁠.

시월이 흙더미를 오래 봤다⁠. 이 손이 흙더미에 닿았다⁠. 노르스름한 얼룩 위에 회색 흙이 덮였다⁠.

“⁠내가 판 데를 내가 막았네⁠.⁠” 시월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 년 동안 판 거 삼 분 만에⁠.⁠”

*

표재곤은 흙바닥에 앉아 있었다⁠. 회색 정장이 흙투성이였다⁠. 머리카락에도 눈썹에도 먼지가 앉아 하얬다⁠. 흰 안전모는 없었다⁠. 이 사람은 기침을 한참 했다⁠. 기침이 멎자 정장 안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소율이 보고 있는 걸 알고도 꺼냈다⁠. 버튼을 눌렀다⁠.

“⁠단장님⁠. 표재곤입니다⁠.⁠”

무전기 너머에서 잡음 섞인 목소리가 대답했다⁠. 철문 앞의 점검단장이었다⁠.

“⁠막혔습니다⁠. 그 나무 쪽으로 가는 굴⁠, 다⁠.⁠” 표재곤이 숨을 골랐다⁠. 먼지 낀 눈으로 소율을 올려다봤다⁠. 서두르지 않는 목소리가 돌아와 있었다⁠. “⁠위에 보고하시죠⁠. 엘프들이 회사 갱도를 무너뜨렸다고⁠. 우리 직원이 깔릴 뻔했다고⁠. 그리고⁠.⁠”

표재곤이 버튼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날짜 잡으시죠⁠.⁠”

이때 구멍 쪽 갱도를 타고 소리가 흘러들었다⁠. 낮고 긴 소리였다⁠. 땅 위에서 울린 소리가 구멍으로 떨어져 굴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소율은 이 소리를 알았다⁠. 아흐레 전 숲 바닥에 벨렌의 피가 흐를 때 들은 소리였다⁠. 두 번째 소리가 이것을 받았다⁠. 세 번째가 받았다⁠.

시월이 소율을 봤다⁠. 표재곤도 무전기를 귀에서 떼고 소율을 봤다⁠. 둘 다 이 소리가 무엇인지 몰랐다⁠. 소율은 흙더미 아래 반쯤 묻힌 흰 안전모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원로원 뿔피리예요⁠. 엘드린이 뿌리 회당에 들어갔어요⁠.⁠”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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