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13자)

숲지기의 증언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화살이 날아온 것은 소율과 리엘이 돌아선 다음이었다⁠.

엘드린은 쏘지 않을 것 같았다⁠. 리엘이 소율 옆에 선 뒤로 화살촉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다 멈췄고⁠, 엘드린이 한국어로 가라⁠, 라고 했다⁠. 올라가서 말해 봐라⁠. 누가 너희를 믿는지⁠. 그래서 둘은 돌아섰다⁠. 다섯 걸음쯤 갔을 때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리엘이 휘청였다⁠. 화살이 리엘의 왼팔 소매를 꿰뚫고 갱목에 박혀 있었다⁠. 소매가 갱목에 꿰여 리엘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소매 사이로 붉은 것이 번졌다⁠.

“⁠경고다⁠.⁠” 엘드린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왔다⁠. “⁠다음은 경고가 아니다⁠.⁠”

소율은 화살을 잡아 뽑았다⁠. 갱목 깊이 박혀 두 손으로 비틀어야 빠졌다⁠. 리엘의 소매가 풀렸다⁠. 소율은 화살을 버리지 않았다⁠. 손에 쥔 채 리엘의 성한 팔을 잡고 뛰었다⁠. 등 뒤에서 두 번째 화살은 오지 않았다⁠. 표재곤의 목소리만 따라왔다⁠. 서두르지 않는 목소리였다⁠.

“⁠조심히 가세요⁠, 마소율 씨⁠. 무너진 데는 또 무너지는 법입니다⁠.⁠”

구멍 아래 밧줄까지 칠백 걸음이었다⁠. 리엘의 팔에서 떨어진 피가 레일 위에 점점이 이어졌다⁠. 둘이 밧줄을 타고 구멍 밖으로 올라왔을 때 동쪽 하늘이 회색으로 밝아 오고 있었다⁠. 말뚝 사이에서 시월이 일어나 앉아 둘을 봤다⁠. 리엘의 팔을 봤다⁠. 소율의 손에 든 화살을 봤다⁠.

“⁠사진 찍지 말고 나오랬잖아요⁠.⁠”

“⁠안 찍었어요⁠.⁠” 소율이 화살을 들어 보였다⁠. “⁠이거 가져왔어요⁠.⁠”

화살은 숲지기들의 화살과 같은 길이였다⁠. 깃만 달랐다⁠. 검은 깃 세 장을 은실로 감아 매어 놓았다⁠. 이 은실이 수액에 젖어 금빛으로 번들거렸다⁠.

*

엘드린은 소율과 리엘보다 먼저 여왕의 나무에 가 있었다⁠.

해가 나무 꼭대기에 닿을 무렵⁠, 소율과 리엘이 계단 예순 개를 올라 둥근 방에 들어섰을 때 엘드린은 여왕 오른쪽에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씻은 머리였다⁠. 이 사람이 리엘을 가리켰다⁠. 엘프어였다⁠. 방 안의 엘프들이 일제히 리엘을 봤다⁠.

리엘이 옮기지 않았다⁠. 옮길 수 없었다⁠. 자기에 대한 말이었다⁠. 여왕의 통역관이 대신 옮겼다⁠. 늙은 통역관의 한국어는 리엘보다 더 공문 같았다⁠.

“⁠엘드린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통역 견습 리엘이 어젯밤 뿌리 아래로 내려갔다 하십니다⁠. 그 머리카락에 엉긴 것이 여왕의 나무 수액이라 하십니다⁠. 금기를 어긴 자의 말은 들을 수 없다 하십니다⁠.⁠”

소율은 리엘을 봤다⁠. 리엘의 머리카락 끝이 금빛으로 뭉쳐 있었다⁠. 잘린 뿌리에 이마를 댔을 때 묻은 수액이었다⁠. 씻을 틈이 없었다⁠. 소율은 엘드린의 젖은 머리를 봤다⁠.

“⁠전하도 거기 계셨어요⁠. 같이요⁠.⁠”

통역관이 옮겼다⁠. 엘드린이 입꼬리만 올려 웃고 엘프어로 대답했다⁠. 통역관이 옮겼다⁠.

“⁠인간 공무원은 어제 제 나라에서 쫓겨난 몸이라 하십니다⁠. 그 말을 누가 들어야 하느냐 하십니다⁠.⁠”

소율은 화살을 꺼내 여왕 앞 바닥에 내려놓았다⁠. 검은 깃과 은실 위에 금빛 수액이 말라 있었다⁠.

“⁠갱목에 박혀 있었어요⁠. 리엘 씨 팔을 스친 화살이에요⁠.⁠”

엘드린이 화살을 내려다봤다⁠.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숲지기는 모두 내 화살을 쓴다⁠. 내가 거느리니까⁠. 숲 어디에든 내 화살이 박혀 있다⁠. 그렇게 옮겨라⁠.⁠”

여왕은 화살을 오래 봤다⁠. 그러고는 리엘을 봤다⁠. 리엘이 무릎을 꿇었다⁠. 엘프어로 낮게 말했다⁠. 이번에는 통역관이 옮기기 전에 소율이 알아들었다⁠. 리엘은 자기가 뿌리 아래에 갔고⁠, 전하도 거기 계셨다고 말했다⁠.

여왕이 물었다⁠. 통역관이 옮겼다⁠.

“⁠너는 인간 곁에 얼마나 있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리엘이 대답하지 못했다⁠. 여왕이 아들을 봤다⁠. 엘드린이 어머니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엘프어로 말했다⁠. 짧고 부드러웠다⁠. 소율은 이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단어 셋이 이어진 말이었다⁠. 나는 가지 않았다⁠.

여왕이 손을 들었다⁠. 정하는 말이었다⁠. 통역관이 옮겼다⁠.

“⁠금기를 어긴 자는 나무를 죽인 자 곁에 앉아 첫서리를 기다리면 어떻겠느냐⁠, 하십니다⁠.⁠”

*

이 시각 동굴 곁굴 철문 안쪽에서 표재곤은 점검단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접이식 탁자 위에 종이컵 커피 둘이 식어 가고 있었다⁠. 철문 너머로 엘프 궁수들의 그림자가 문틈 빛을 가렸다 비켰다 했다⁠.

“⁠그 아가씨가 봤다고⁠?⁠” 단장이 안경을 벗어 닦았다⁠. “⁠엘프 왕자하고 같이 있는 걸⁠?⁠”

“⁠봤습니다⁠. 엘프 통역 하나하고⁠.⁠”

단장이 안경을 다시 썼다⁠. 한참 커피 컵을 돌렸다⁠.

“⁠표 전무⁠. 나는 엘프 왕자 얘기 들은 적 없는 걸로 하겠소⁠. 점검단은 메우는 공사 점검하러 온 거고⁠, 메우는 공사는 잘되고 있고⁠.⁠” 단장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찡그렸다⁠. 식은 커피였다⁠. “⁠근데 그 아가씨 말이 엘프들 사이에서 먹히면⁠, 그다음엔 내가 모른다고 해도 소용이 없어요⁠. 위에서 나한테 물을 거야⁠. 온석 얼마나 확보했냐고⁠.⁠”

“⁠내일 밤에 끝냅니다⁠. 구멍 스물넷⁠, 한 번에요⁠. 그 나무 넘어가면 엘프들은 우리 얘기 할 틈이 없습니다⁠. 자기들끼리 바빠지죠⁠.⁠”

“⁠사람은 안 다치고⁠?⁠”

표재곤이 흰 안전모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하청은 다 내보냈습니다⁠. 이번엔 우리 기술자들이 합니다⁠. 발파 기사 하나 새로 구했고요⁠.⁠” 표재곤이 웃었다⁠. “⁠염 기사보다 손은 느린데 입은 무겁습니다⁠.⁠”

*

리엘은 시월 옆 말뚝 사이에 앉았다⁠. 손목에 덩굴 끈이 감겼다⁠. 이 끝이 쓰러진 나무 뿌리에 이어졌다⁠. 시월이 자기 은박 담요를 반으로 찢어 반을 리엘의 어깨에 덮었다⁠.

“⁠엘프 통역님도 들어왔네⁠. 여기 이제 사람 꽉 찼다⁠.⁠”

리엘은 이날 해가 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가 지고 나서 숲지기 경비가 바뀌었다⁠. 새로 온 경비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이 붕대 끝도 두 번 감겨 밖으로 늘어진 숲지기 매듭이었다⁠.

벨렌은 말뚝 사이를 보지 않았다⁠. 쓰러진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섰다⁠. 활은 등에 멘 채였다⁠. 시월이 은박 담요 아래에서 리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리엘은 이 밤 처음으로 형 앞에서 공문 말투를 쓰지 않았다⁠.

“⁠형⁠, 그 굴 끝에 첫 여왕의 뿌리가 있어요⁠. 톱으로 잘려 있어요⁠. 그 둘레에 구멍이 스물넷 뚫려 있어요⁠. 화약 넣을 구멍이요⁠. 시월 씨가 그러는데 그렇게 둥글게 뚫는 건 위에 있는 걸 넘어뜨리는 거래요⁠. 이틀이면 된대요⁠. 전하가 그렇게 말했어요⁠. 이게 쓰러지면 원로원은 내 말을 듣는다고⁠. 어머니는 다시 나무 밖으로 못 나온다고⁠.⁠”

벨렌의 등이 둥치에서 떨어졌다⁠.

“⁠전하가 첫 여왕의 나무를 말했느냐⁠?⁠”

“⁠네⁠.⁠”

“⁠뿌리 아래에서 직접⁠.⁠”

“⁠제 눈앞에서요⁠. 형이 매듭 묶은 사백 걸음은 시작이었어요⁠. 형이 봄에 본 굴이 그 나무 밑까지 갔어요⁠.⁠”

벨렌은 오래 서 있었다⁠. 숲 바닥에 떨어진 은빛 잎 하나를 발끝으로 뒤집었다⁠. 그러고는 말뚝 쪽으로 걸어와 리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리엘의 왼팔 소매를 들췄다⁠. 화살이 스친 자리에 소율이 감은 붕대가 있었다⁠. 벨렌이 이 붕대 매듭을 봤다⁠. 두 번 감고 끝을 밖으로 늘어뜨린⁠, 자기 머리의 붕대와 같은 매듭이었다⁠.

“⁠그 화살⁠.⁠” 벨렌이 말했다⁠. “⁠검은 깃에 은실이었느냐⁠?⁠”

“⁠네⁠.⁠”

벨렌이 일어섰다⁠. 자기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뽑아 리엘에게 보였다⁠. 갈색 깃 세 장에 풀실을 감은 화살이었다⁠.

“⁠숲지기 화살은 다 이렇다⁠. 은실은 내가 감는다⁠. 전하의 화살에만⁠. 백 년 동안 그랬다⁠.⁠”

*

이튿날 아침⁠, 엘드린이 숲지기 스물을 데리고 쓰러진 나무로 왔다⁠.

소율은 이미 거기 있었다⁠. 밤새 말뚝 바깥 이끼 위에 앉아 있었다⁠. 반석호가 이 옆에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출장소에서 보안팀이 밤새 소율을 찾아 컨테이너를 다 뒤졌고⁠, 반석호는 해가 뜨자마자 의자를 들고 경계석을 넘었다⁠. 경계석 앞에서 기다리던 숲지기 하나가 동행을 서 줬다⁠. 반석호의 카메라를 빌려 간 앳된 숲지기였다⁠.

엘드린은 소율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말뚝 사이 리엘을 봤다⁠. 그러고는 숲지기들에게 엘프어로 명했다⁠. 숲지기 넷이 말뚝 쪽으로 걸어왔다⁠. 손에 덩굴 끈 뭉치를 들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엘드린이 한국어로 대답했다⁠.

“⁠말뚝 사이가 좁다⁠. 하나를 더 박는다⁠. 첫서리에 앉을 자리가 하나 늘었다⁠.⁠”

엘드린이 반석호를 봤다⁠. 반석호가 졸다 깨서 눈을 비볐다⁠.

“⁠대사 대리⁠. 네 자리다⁠. 첫서리에⁠.⁠”

반석호가 엘드린을 보고⁠, 말뚝을 보고⁠, 소율을 봤다⁠. 그러고는 접이식 의자를 접어 옆구리에 끼고 일어섰다⁠.

“⁠그럼 지금 앉아 볼게요⁠. 자리 좀 봐 두게⁠.⁠”

반석호가 말뚝 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소율이 이 팔을 잡았다⁠. 엘드린 앞을 가로막았다⁠.

“⁠전하⁠. 첫서리는 아직이에요⁠. 원로원이 그렇게 정했어요⁠. 첫서리에 본다고⁠.⁠”

“⁠인간이 원로원을 가르치느냐⁠?⁠”

“⁠전하가 가르치셨잖아요⁠. 해 지기 전에만 서두르는 거라고⁠. 피가 흐른 일에만⁠.⁠” 소율은 엘드린의 눈을 봤다⁠. 세 걸음이 아니라 한 걸음 앞이었다⁠. “⁠어젯밤 뿌리 아래에서 피가 흘렀어요⁠. 리엘 씨 피요⁠. 전하 화살에⁠.⁠”

숲지기 스물이 일제히 엘드린을 봤다⁠. 엘드린의 손이 등의 화살통으로 갔다⁠.

이때 쓰러진 나무 둥치 뒤에서 벨렌이 걸어 나왔다⁠.

밤새 경비를 섰던 그대로였다⁠. 붕대 밑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벨렌이 숲지기 스물 앞에 섰다⁠. 자기가 거느리는 숲지기들이었다⁠. 벨렌은 엘드린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 숲지기들을 향해 섰다⁠. 엘프어로 말했다⁠. 소율이 아는 단어들이 이어졌고⁠, 모르는 단어는 리엘이 말뚝 사이에서 작게 옮겼다⁠. 형의 말을 옮기는 두 번째였다⁠.

“⁠나는 봄에 노란 나무를 보았다⁠. 매듭을 묶었다⁠. 전하께 아뢰었다⁠. 전하께서는 여왕 폐하께 아뢰지 말라 하셨다⁠. 인간이 더 깊이 파게 두라 하셨다⁠. 나는 폐하 앞에서 매듭을 보름 전에 묶었다고 했다⁠. 거짓이었다⁠. 그 이끼는 봄 이끼다⁠.⁠”

숲지기들 사이에서 소리가 일었다⁠. 벨렌이 손을 들어 이 소리를 눌렀다⁠.

“⁠해넘이 회의가 끝난 밤부터 전하께서는 밤마다 동굴 곁굴로 내려가셨다⁠. 인간들과 함께⁠. 나는 철문 앞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문 안으로 들어가신 전하가 해 뜨기 전에 나오셨다⁠. 매번 머리가 젖어 있었다⁠.⁠”

벨렌이 소율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율이 화살을 건넸다⁠. 벨렌이 이것을 숲지기들 앞에 들어 보였다⁠. 검은 깃과 은실과 금빛 수액이 숲지기 스물의 눈앞에 들렸다⁠.

“⁠이 은실은 내가 감았다⁠. 백 년 동안 전하의 화살에만⁠. 이 수액은 첫 여왕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숲지기 스물이 엘드린을 봤다⁠. 엘드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화살통에 얹은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손가락 끝만 화살 깃 하나를 천천히 쓸었다⁠.

숲 저편에서 엘프들이 무릎 꿇는 소리가 이어져 왔다⁠. 마른 잎이 한꺼번에 눌리는 소리였다⁠. 소율은 고개를 돌렸다⁠. 은껍질나무 사이로 투명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여왕이었다⁠. 행렬도 없이⁠, 통역관 하나만 데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엘프 기준으로 전력 질주였다⁠.

여왕이 쓰러진 나무 앞 빈터에 들어섰다⁠. 말뚝 사이의 리엘을 봤다⁠. 벨렌의 손에 들린 화살을 봤다⁠. 그러고는 아들을 봤다⁠. 묻는 말이었다⁠. 통역관이 옮기지 않아도 소율은 알아들었다⁠. 단어가 넷뿐이었다⁠.

“⁠엘드린⁠, 뿌리 아래에 갔느냐⁠?⁠”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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