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558자)

두 개의 날짜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막힌 굴 위로 첫 여왕의 나무가 서 있었다⁠. 잘린 뿌리에서 흐르던 수액은 사흘 만에 멎었다⁠. 엘프들은 이 사흘 동안 여왕의 나무 둘레에 모여 앉아 노래를 불렀다⁠. 이 가락이 사흘 내내 쉬지 않고 이어졌다⁠. 노란 줄 한가운데 할머니 나무 밑에서 소율이 처음 들은 이 가락이었다⁠. 나흘째 아침⁠, 여왕의 나무 꼭대기 잎 하나가 노랗게 물들었다가 거기서 멈췄다⁠. 더 번지지 않았다⁠.

소율은 이 잎을 바깥뜰에서 올려다봤다⁠. 출장소 계단에 앉아 있었다⁠. 손에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반석호가 보낸 뉴스 화면이었다⁠.

「⁠정부⁠, 실바렌 게이트 ‘⁠안전 확보 작전⁠’ 10월 15일 시행 검토⁠」

기사 첫 줄은 이랬다⁠. 엘프 측이 한국 기업 갱도를 일방적으로 붕괴시켜 한국 민간인의 생명이 위협받은 사건과 관련해⁠, 정부는 게이트 주변 한국인과 한국 자산 보호를 위해 경찰 특공대와 군 공병을 투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사 아래쪽에 한성마이닝의 입장이 한 줄 붙어 있었다⁠. 「⁠당사 직원이 매몰 직전 구조됐다⁠.⁠」 구조한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반석호가 숙소 컨테이너에서 나와 소율 옆에 앉았다⁠. 등산 조끼에 단추가 하나도 없었다⁠. 떨어진 단추는 조끼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표 전무 승진했대⁠. 게이트 자원 개발 무슨 위원회 자문⁠. 정부 쪽⁠.⁠”

“⁠그럴 줄 알았어요⁠.⁠”

“⁠주무관님도 알았어⁠? 나는 몰랐는데⁠.⁠”

“⁠흰 안전모가 흙에 묻혔잖아요⁠. 그럼 새 모자를 받아야죠⁠.⁠”

*

엘프 쪽 날짜는 여왕의 나무에서 정해졌다⁠.

정확히는 이 밑동⁠, 뿌리 회당에서였다⁠. 원로 아홉이 돌 자리에 앉았고⁠, 엘드린이 가운데 빈자리에 섰다⁠. 숲지기를 잃은 왕자였지만 어깨의 은실 잎 문양은 그대로였다⁠. 여왕이 맞은편에 앉았다⁠. 소율은 회당 입구 뿌리 그늘에 리엘과 함께 섰다⁠. 이번에는 인사를 건너뛰지 않았다⁠. 원로들은 각자의 할머니 나무 안부부터 물었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반석호의 벽시계는 걸려 있지 않았다⁠.

엘드린이 엘프어로 말을 시작했다⁠. 리엘이 소율의 귓가에 낮게 옮겼다⁠.

“⁠해넘이 회의는 둘을 정했습니다⁠. 첫서리 전에 인간이 제 손으로 굴을 메울 것⁠. 흰 머리쓰개를 쓴 인간을 이 회당에 데려올 것⁠. 굴은 막혔습니다⁠. 그러나 굴을 막은 손은 숲지기 스물의 손이었습니다⁠. 인간은 밧줄을 묶었을 뿐 당기지 않았습니다⁠. 흰 머리쓰개를 쓴 인간은 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나라는 그 인간에게 새 자리를 주었습니다⁠. 둘 다 이루지 못했습니다⁠.⁠”

소율은 이 말을 들으며 갱목 아래에서 시월이 매듭을 다시 묶던 손을 떠올렸다⁠. 밧줄을 묶은 것은 인간이었다⁠. 당긴 것은 엘프였다⁠. 엘드린은 이 둘을 갈랐다⁠. 소율이 해넘이 회의에서 회사와 나라를 갈랐던 것처럼⁠.

원로들은 오래 말이 없었다⁠. 가운데 원로가 일어서서 노래하듯 말했다⁠. 리엘이 한 구절씩 옮겼다⁠.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졌다⁠.

“⁠해넘이 회의에서 정한 것은 다시 회의하지 않는다⁠. 다만 날은 원로원이 정한다⁠. 첫서리 뒤 첫 보름⁠. 그날 실바렌은 문 앞의 인간을 내몰고 동굴을 돌로 메운다⁠. 전쟁의 활은 엘드린이 든다⁠. 뿌리 아래에 간 일은 그 뒤에 따로 묻는다⁠.⁠”

엘드린이 원로들에게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회당 입구 쪽을 돌아보며 소율을 봤다⁠. 웃지 않았다⁠.

여왕이 일어섰다⁠. 원로들이 여왕을 봤다⁠. 여왕이 물었다⁠. 짧은 물음이었는데 회당이 조용해졌다⁠. 리엘이 옮기다 멈추고 소율을 봤다가 다시 옮겼다⁠.

“⁠첫서리 전에⁠, 인간의 우두머리를 동굴에서 내가 직접 만나 보면 어떻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원로들이 웅성거렸다⁠. 엘드린의 턱이 굳었다⁠. 여왕이 한 마디를 더 했다⁠. 이번에는 통역관이 아니라 여왕이 직접 소율 쪽을 봤다⁠. 리엘이 숨을 들이켰다⁠.

“⁠그 자리에서 내 말을 인간의 말로 옮기는 자는⁠, 마소율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여왕이 소율의 이름을 불렀다⁠. 엘프의 입에서 나온 이 이름은 받침이 다 무르게 녹아⁠, 마와 소와 율이 한 글자씩 떨어져 나왔다⁠.

*

한국 쪽은 이틀 만에 문서로 답을 보냈다⁠. 점검단장이 직접 들고 바깥뜰을 건너왔다⁠. 소율에게 내밀지 않고 반석호에게 내밀었다⁠. 반석호가 받아서 읽고⁠, 소율에게 건넸다⁠.

9월 28일 오전 열한 시⁠, 동굴 공동 관리 구역⁠. 대한민국 대통령과 실바렌 여왕⁠. 이 아래 한 줄이 따로 있었다⁠. 「⁠통역 : 마소율(⁠9월 28일 하루에 한하여 직위 해제 효력 정지⁠)⁠」

“⁠하루짜리 복직이네요⁠.⁠” 소율이 말했다⁠.

“⁠하루짜리예요⁠.⁠” 단장이 말했다⁠. “⁠엘프 여왕이 마소율 씨 아니면 안 나온다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위에서 다들 기가 막혀 했어⁠. 9급 통역이 정상 회담을⁠.⁠” 단장이 안경을 고쳐 썼다⁠. “⁠그날 하루만 공무원이에요⁠. 그날 하는 말은 다 기록에 남아요⁠. 단어 하나 틀리면 그게 외교 사고고⁠. 아시죠⁠?⁠”

반석호가 단장 앞으로 나섰다⁠.

“⁠저는요⁠? 저도 하루짜리 복직이에요⁠?⁠”

“⁠반 소장은 사진 담당이요⁠. 대통령실 전속 사진사가 문을 못 지나온대요⁠. 폐소 공포증이 있어서⁠.⁠” 단장이 혀를 찼다⁠. “⁠엘프 앞에서 각도 아는 사람이 반 소장밖에 없다고⁠.⁠”

반석호가 소율을 봤다⁠.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나 대통령 찍어⁠.⁠”

단장은 돌아서기 전에 출장소 숙소 컨테이너 쪽을 봤다⁠. 시월이 이 계단에 앉아 있었다⁠. 여왕이 끈을 풀어 준 뒤로 시월은 숲에도 문 너머에도 가지 않고 거기 앉아 있었다⁠.

“⁠염시월 씨도 같이 나가셔야 합니다⁠. 허가 없는 발파⁠, 산림 훼손⁠. 한국 쪽 수사가 기다리고 있어요⁠.⁠”

소율이 이 앞을 막아서려 했다⁠. 시월이 먼저 일어섰다⁠.

“⁠갈게요⁠.⁠” 시월이 노란 안전모를 옆구리에 끼었다⁠. “⁠어차피 엄마 병원도 가 봐야 되고⁠. 근데 단장님⁠, 수사하면 저 말 많이 해요⁠. 밤마다 누가 내려왔는지⁠, 무슨 목소리로 몇 번 하자고 했는지⁠. 그거 다 받아 적으세요⁠. 엘프 여왕님 앞에서 한 말 그대로 할 거니까⁠.⁠”

단장이 시월을 봤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동굴 쪽으로 걸어갔다⁠. 시월이 뒤를 따랐다⁠. 문 앞에서 한 번 돌아서서 소율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반석호에게 배운 것이었다⁠.

*

9월 28일 아침⁠, 바깥뜰에 서리가 내리지 않았다⁠. 풀잎 끝마다 차가운 이슬이 무겁게 매달려 있었다⁠. 리엘이 이 이슬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고 말했다⁠.

“⁠곧입니다⁠.⁠”

이번에는 엘프의 곧이 아니었다⁠.

열 시에 한국 대표단이 문을 지나왔다⁠. 태백 쪽에서 갱차를 타고 내려와⁠, 문 앞에서부터는 걸어서 왔다⁠. 경호원 여섯이 먼저 나왔다⁠.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였다⁠. 동굴 입구의 숲지기들이 이 선글라스를 보고 수군거렸다⁠. 리엘이 옮겼다⁠. 인간의 우두머리는 눈먼 자들을 앞세우느냐고⁠. 경호원 하나가 선글라스를 벗었다가 숲지기들의 화살촉을 보고 도로 썼다⁠.

뒤이어 대통령이 나왔다⁠. 육십 줄의 남자였다⁠. 동굴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은껍질나무 숲을 올려다봤다⁠. 한참 그러고 있었다⁠. 반석호가 이 모습을 찍었다⁠. 찰칵⁠. 대통령이 반석호를 돌아봤다⁠. 반석호가 고개를 숙였다⁠.

“⁠기록용입니다⁠, 대통령님⁠.⁠”

대표단이 동굴 입구 앞 바깥뜰에 늘어섰다⁠. 외교부 차관과 점검단장과 대통령실 비서관 둘이 섰고⁠, 맨 끝에 회색 정장의 남자가 섰다⁠. 셔츠 깃이 다림질로 빳빳하게 서 있었다⁠. 목에 건 출입증에 「⁠게이트 자원 개발 자문⁠」이라고 찍혀 있었다⁠.

표재곤이 소율 앞으로 걸어왔다⁠. 소율은 출장소 계단 앞에 서 있었다⁠. 오늘 하루짜리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오늘 통역 잘 부탁드립니다⁠, 주무관님⁠.⁠” 표재곤이 직급을 정확히 붙였다⁠. “⁠하루짜리⁠.⁠”

“⁠흰 안전모 안 쓰셨네요⁠.⁠”

“⁠이제 현장 안 갑니다⁠. 현장은 다른 사람이 가죠⁠.⁠” 표재곤이 숲 쪽을 봤다⁠. 여왕의 나무 꼭대기의 노란 잎 하나를 봤다⁠. “⁠온석 두 해 치는 이미 문 이쪽에 있습니다⁠. 국가 비축으로요⁠. 엘프들이 문을 돌로 메우든 말든⁠, 그건 남아요⁠. 그리고 10월 15일에 공병이 들어오면 막힌 굴은 다시 뚫립니다⁠. 이번엔 회사가 아니라 나라가 뚫죠⁠. 그건 엘프 왕자가 바라던 거고⁠.⁠”

“⁠전무님이 바라던 거기도 하죠⁠.⁠”

“⁠저는 이제 자문입니다⁠.⁠” 표재곤이 웃었다⁠. 눈은 웃지 않았다⁠. “⁠주무관님⁠, 오늘 회담에서 나오는 말 정확히 옮기세요⁠. 9급이 단어 하나 바꾸면 그게 전쟁입니다⁠. 기록에 다 남아요⁠.⁠”

소율은 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표재곤의 구두를 내려다봤다⁠. 깨끗했다⁠. 태백 흙이 묻어 있지 않았다⁠. 질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처음 출장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이 구두에서 맡은 냄새가 이제는 아무 데서도 나지 않았다⁠. 냄새가 사라진 자리에서 소율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맡았다⁠. 새 가죽 냄새와 차 안의 방향제 냄새와⁠, 서울 회의실의 마른 공기 냄새였다⁠.

*

회담장은 동굴 안이었다⁠. 푸른 빛의 문 앞 모래 바닥에 긴 탁자 하나가 놓였다⁠. 한쪽 끝은 문을⁠, 한쪽 끝은 바깥뜰을 향했다⁠. 탁자는 한국 쪽이 가져왔고⁠, 엘프들은 의자 대신 이끼 덮인 돌을 가져왔다⁠. 동굴 안 공기에서 석탄 냄새와 수액 냄새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섞였다⁠.

통역 자리는 탁자 한가운데⁠, 두 우두머리 사이였다⁠.

소율이 이 자리로 가려면 동굴 입구를 지나야 했다⁠. 동굴 입구에 엘드린이 혼자 활을 메고 서 있었다⁠. 원로원이 맡긴 전쟁의 활이었다⁠. 엘드린이 소율 앞을 막았다⁠. 한국어였다⁠.

“⁠오늘 네가 옮기는 말 하나하나가 활이 될지 말이 될지 정한다⁠.⁠”

“⁠전하 말씀도 제가 옮겨요⁠.⁠”

“⁠나는 오늘 말하지 않는다⁠. 첫 보름에 말한다⁠.⁠” 엘드린이 한 걸음 비켜섰다⁠. 그러다 다시 소율을 봤다⁠. “⁠너는 첫날 지진이라고 했지⁠. 시간을 벌려고⁠. 오늘도 그럴 거냐⁠?⁠”

소율은 대답하지 않고 엘드린을 지나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여왕은 투명한 머리카락을 무릎까지 늘어뜨린 채 이끼 덮인 돌 위에 이미 앉아 있었다⁠. 뒤에 원로 셋이 서 있었고⁠, 리엘이 여왕 왼쪽 반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엘프 쪽 통역관 자리였다⁠. 리엘이 소율을 봤다⁠.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출장소 계단에서 리엘은 엘프어로 무언가를 말했다⁠. 소율은 이 말을 옮겨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탁자 반대편 끝에 앉았다⁠. 뒤에 차관과 비서관과 단장과 표재곤이 섰다⁠. 반석호가 동굴 벽에 붙어 휴대폰을 들었다⁠. 숲지기 열이 동굴 입구에⁠, 경호원 여섯이 문 앞에 섰다⁠.

소율은 두 우두머리 사이에 앉았다⁠. 탁자 위에 종이와 볼펜이 놓여 있었다⁠. 소율은 이것을 옆으로 밀었다⁠.

여왕이 먼저 말하지 않았다⁠. 묻는 사람은 늘 기다렸다⁠. 대통령이 헛기침을 했다⁠. 비서관이 건넨 종이를 한 번 내려다보고⁠, 다시 여왕을 봤다⁠. 그러고는 말했다⁠. 또박또박⁠, 기록에 남을 목소리로⁠.

“⁠대한민국 정부는 실바렌의 숲 아래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동굴 안이 조용해졌다⁠.

소율은 이 문장을 들으며 엿새 동안 울면서 문 너머로 넘어간 갱차들을 떠올렸다⁠. 점검단장의 비닐봉지에 봉해진 주황빛 돌 하나와⁠, 문 이쪽에 국가 비축으로 남았다는 두 해 치도 떠올렸다⁠.

여왕은 한국어를 몰랐다⁠. 리엘은 알았다⁠. 엘드린도 알았다⁠. 동굴 입구에서 엘드린의 시위 당기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리엘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여왕 쪽 통역이 먼저 옮기는 것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인간의 말을 엘프의 말로 옮기는 자는 하나였다⁠.

표재곤이 대통령 뒤에서 소율을 봤다⁠. 차관이 봤다⁠. 반석호는 휴대폰을 든 손을 내렸다⁠. 대통령이 소율을 봤다⁠. 여왕이 소율을 봤다⁠.

소율은 숨을 들이쉬었다⁠. 석탄 냄새와 수액 냄새가 한 숨에 같이 들어왔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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