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78자)

뿌리 아래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반석호의 전기 불판에서 삼겹살 기름이 튀었다⁠. 바깥뜰 출장소 컨테이너 계단 앞이었다⁠. 숲에는 불을 들이지 않는다⁠. 바깥뜰은 숲이 아니었고⁠, 전기 불판에는 불꽃이 없었다⁠. 반석호는 이 둘을 다 따져 보고 불판을 꺼냈다⁠. 고기 굽는 냄새가 밤 풀밭을 건너 동굴 입구까지 갔다⁠.

“⁠업무 배제 기념 회식이에요⁠! 다 오세요⁠!⁠”

숙소 컨테이너 앞에 서 있던 보안팀원 둘이 서로를 봤다⁠. 점검단장이 마소율 씨가 내일 아침 첫 갱차를 탈 때까지 숙소 앞을 지키라고 했다⁠. 둘은 저녁을 못 먹었다⁠. 삼겹살 기름이 또 튀었다⁠.

“⁠한 점만 드시고 가요⁠. 단장님한텐 비밀로 할게⁠. 나 지금 업무 배제라 보고할 데도 없어⁠.⁠”

보안팀원 하나가 먼저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하나가 숙소 컨테이너 문을 한 번 돌아보고 따라갔다⁠. 숙소 컨테이너 안에서는 불이 켜져 있었고⁠, 창에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소율이 의자 위에 세워 둔 엘프 망토 그림자였다⁠. 소율은 이때 이미 컨테이너 뒤 창으로 빠져나와 풀밭에 엎드려 있었다⁠.

*

경계석 앞에서 리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진 지 두 시간이 넘었다⁠. 경계석 안쪽은 해가 있을 때 엘프와 함께 들어가는 곳이었다⁠. 지금 경계석을 넘으면 소율은 숲지기에게 붙잡혀도 할 말이 없었다⁠. 소율은 이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엘프에게 붙잡힌 사람을 점검단이 첫 갱차에 태울 수는 없었다⁠.

“⁠리엘 씨는 위에서 기다려요⁠. 구멍 앞까지만 같이 가 줘요⁠.⁠”

리엘이 대답하지 않았다⁠. 소율을 보지 않고 숲을 봤다⁠. 오래 그러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공문 말투가 아니었다⁠.

“⁠형이 나한테 너는 인간 곁에 너무 오래 있었다고 했어요⁠.⁠”

“⁠알아요⁠.⁠”

“⁠형 말이 맞아요⁠. 그래서 내려갈 거예요⁠. 위에서 기다리면 나는 내일도 양쪽 말만 옮기는 엘프로 남아요⁠.⁠”

“⁠뿌리 아래는 돌아가신 분들 자리라면서요⁠.⁠”

“⁠그러니까 가 봐야죠⁠. 누가 그분들 자리를 파고 있는지⁠.⁠”

둘은 경계석을 넘었다⁠. 사백 걸음의 노란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회색으로 서 있었다⁠. 잎 떨어지는 소리가 밤에는 더 크게 들렸다⁠.

*

쓰러진 나무 앞 말뚝 사이에서 시월이 잠들어 있었다⁠. 은박 담요를 덮고 있었다⁠. 숲지기 하나가 이 곁을 지키다 리엘을 보고 일어섰다⁠. 리엘이 엘프어로 짧게 말했다⁠. 숲지기가 소율을 한참 보더니 다시 앉았다⁠. 리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소율은 묻지 않았다⁠.

소율이 밧줄을 찾는 소리에 시월이 눈을 떴다⁠. 은박 담요가 바스락거렸다⁠. 시월은 소율의 머리 전등과 리엘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묻지도 않고 상황을 알아챘다⁠.

“⁠내려가요⁠?⁠”

“⁠네⁠.⁠”

“⁠그럼 하나만 들어요⁠.⁠” 시월이 묶인 손으로 흙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동그라미 둘레에 점을 여럿 찍었다⁠. “⁠막장에 이렇게 구멍이 둥글게 뚫려 있으면 그건 굴 넓히는 배치가 아니에요⁠. 위에 있는 걸 넘어뜨리는 배치예요⁠. 큰 거⁠. 그거 보면 사진 찍지 말고 그냥 나와요⁠. 그 사람들 그거 보는 사람 싫어해요⁠.⁠”

시월이 머리맡에 두었던 노란 안전모를 리엘에게 내밀었다⁠. 전등이 달린 것이었다⁠.

“⁠엘프 통역님⁠, 이거 써요⁠. 귀가 길어서 안 들어가려나⁠.⁠”

리엘이 안전모를 받아 머리에 얹었다⁠. 귀 끝이 양쪽으로 비죽 삐져나왔다⁠. 시월이 소리 없이 웃었다⁠. 숲지기가 이 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리엘은 덩굴 밧줄을 쓰러진 나무 둥치에 감았다⁠. 둥치에 손바닥을 대고 엘프어로 길게 말했다⁠. 소율이 처음 구멍에 내려갈 때보다 훨씬 길었다⁠. 그러고는 소율보다 먼저 밧줄을 잡았다⁠.

리엘은 구멍 벽 중간에서 한 번 멈췄다⁠. 잘린 뿌리 하나가 리엘의 어깨에 닿아 있었다⁠. 소율은 위에서 머리 전등으로 리엘을 비췄다⁠. 리엘의 손이 밧줄 위에서 하얗게 굳어 있었다⁠. 숨소리가 짧았다⁠. 그러다 다시 내려갔다⁠. 바닥에 발이 닿았을 때 리엘은 무릎을 꿇었다⁠. 흙에 두 손을 짚고 오래 숨을 쉬었다⁠.

“⁠괜찮아요⁠?⁠”

“⁠돌아가신 분들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다행입니다⁠.⁠”

*

바깥뜰 쪽 갱도는 메워져 있었다⁠. 무너진 벽에서 몇십 걸음만 가면 회색 흙과 자갈이 천장까지 차 있었다⁠. 엘프 궁수들이 엿새 동안 손가락으로 센 갱차 이백마흔 대가 부은 흙이었다⁠. 소율은 이 흙벽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마른 흙이었다⁠. 이 너머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숲 안쪽 갱도는 열려 있었다⁠.

천장 전등이 켜져 있었다⁠. 레일이 반질반질했다⁠. 갱목은 새것이었고 송진 냄새가 났다⁠. 소율과 리엘은 레일을 따라 걸었다⁠. 소율은 걸음을 셌다⁠. 걸음이 백을 넘고 이백을 넘는 동안 공기가 점점 따뜻해졌다⁠. 벽 흙 사이로 주황빛 돌들이 점점 촘촘해졌다⁠. 손을 대지 않아도 열이 뺨에 닿았다⁠.

삼백 걸음쯤에서 갱도가 갈라졌다⁠. 오른쪽 벽에 새 굴 하나가 입을 벌리고 합쳐졌다⁠. 바깥뜰 쪽에서 비스듬히 뻗어 온 굴이었다⁠. 이 굴의 레일이 소율이 걸어온 레일보다 더 반질반질했다⁠. 소율은 쪼그려 앉아 레일에 손가락을 댔다⁠. 갓 지나간 바퀴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메운 굴은 하나였다⁠. 굴은 둘이었다⁠. 새 굴은 메운 구간을 옆으로 돌아 철문 쪽 곁굴로 곧장 이어졌고⁠, 온석 실은 갱차가 날마다 이 길로 울면서 나갔다⁠.

“⁠전하의 궁수들은 철문만 셌어요⁠.⁠” 소율이 말했다⁠. “⁠철문 안에서 굴이 몇 갈래인지는 안 셌어요⁠.⁠”

리엘은 대답하지 않고 이 갈림길의 갱목에 손바닥을 댔다⁠. 새 나무였다⁠. 은껍질나무가 아니라 문 너머에서 실어 온 소나무였다⁠.

오백 걸음을 넘자 천장에서 뿌리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가락만 했다⁠. 다음에는 팔뚝만 했다⁠. 다음에는 사람 허리만 했다⁠. 갱목 사이로 비집고 내려온 뿌리들이 레일 위까지 늘어졌다⁠. 리엘이 이 뿌리 하나하나에 손을 대며 걸었다⁠. 손바닥을 대고 떼고⁠, 다음 뿌리에 대고 떼고⁠.

칠백 걸음쯤에서 리엘이 멈췄다⁠.

갱도 천장 전체가 뿌리였다⁠. 은빛 껍질의 뿌리 하나가 갱도를 가로질러 휘어 있었다⁠. 둘레가 갱차 하나만 했다⁠. 이 껍질 사이로 금빛 실 같은 결이 흘렀다⁠. 이 뿌리의 한쪽이 잘려 있었다⁠. 톱 자국이었다⁠. 잘린 면에서 수액이 뚝뚝 떨어져 레일 위에 고였다⁠. 꿀 냄새가 숨이 막히게 짙었다⁠. 여왕의 나무 계단을 올라갈 때 맡은 냄새였다⁠.

리엘이 노란 안전모를 벗어 레일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잘린 면에 이마를 댔다⁠. 수액이 리엘의 머리카락에 묻었다⁠.

“⁠여왕의 나무입니다⁠.⁠” 리엘이 말했다⁠. 목소리가 뿌리 사이로 낮게 울렸다⁠. “⁠첫 여왕께서 묻히신 자리에서 자란 나무입니다⁠. 폐하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아주 먼 어머니입니다⁠. 실바렌의 모든 엘프가 이 나무 아래 계신 분의 아이들입니다⁠.⁠”

소율은 레일 위에 고인 수액을 내려다봤다⁠. 머리 전등 빛에 금빛으로 번들거렸다⁠. 레일 옆에 갓 뚫은 구멍들이 줄지어 있었다⁠. 사람 팔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들이 잘린 뿌리 둘레를 따라 둥글게 박혀 있었다⁠. 아직 비어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율은 머리 전등을 껐다⁠. 레일 위의 노란 안전모를 집어 이 전등도 끄고 리엘의 품에 안겼다⁠. 리엘의 팔을 잡아 갱목 뒤 뿌리 틈으로 끌었다⁠. 둘은 뿌리와 흙벽 사이에 몸을 붙였다⁠. 갱도 안쪽 더 깊은 데서 전등 불빛 셋이 다가왔다⁠. 레일을 밟는 구둣발 소리가 났고⁠, 이 사이에 소리 없는 발이 하나 섞여 있었다⁠.

흰 안전모가 먼저 보였다⁠. 표재곤이었다⁠. 뒤에 노란 안전모를 쓴 기술자 둘이 측량 막대와 태블릿을 들고 따라왔다⁠. 그리고 이 옆에⁠, 안전모를 쓰지 않은 머리 하나가 있었다⁠. 길게 땋은 검은 머리였고⁠, 어깨에는 은실 잎 문양이 있었다⁠.

엘드린이 뿌리 아래를 걷고 있었다⁠.

리엘의 몸이 소율 옆에서 굳었다⁠. 소율은 리엘의 손을 쥐었다⁠. 리엘의 손톱이 소율의 손등을 파고들었다⁠.

표재곤이 잘린 뿌리 앞에서 멈췄다⁠. 기술자들에게 둥글게 박힌 구멍들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엘드린을 돌아봤다⁠. 한국어였다⁠. 엘드린의 대답도 한국어였다⁠. 쇠 맛이 난다던 말을 엘드린은 여기서는 막힘없이 썼다⁠.

“⁠전하 덕분에 자리를 바로 잡았습니다⁠. 여기가 제일 두껍습니다⁠. 이틀이면 됩니다⁠.⁠”

“⁠어머니 나무다⁠.⁠” 엘드린이 잘린 뿌리를 올려다봤다⁠. 수액이 떨어지는 자리를 오래 봤다⁠. “⁠이게 쓰러지면 원로원은 내 말을 듣는다⁠. 어머니는 더 이상 나무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그다음 나는 문을 닫는다⁠.⁠”

“⁠문 닫히면 저희도 못 옵니다⁠.⁠”

“⁠그러니까 서둘러라⁠. 첫서리 전에⁠. 가져갈 만큼 가져가라⁠. 문이 닫히면 너희가 가져간 것은 너희 것이고⁠, 남은 것은 우리 것이다⁠.⁠”

“⁠메우는 공사는요⁠? 엘프분들은 메운 줄 아실 텐데⁠.⁠”

“⁠바깥쪽은 메웠다⁠. 궁수들이 세었다⁠. 수는 맞다⁠.⁠” 엘드린이 웃었다⁠. 이를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소율은 이 웃음을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났다⁠. 출근 첫날 경계석 앞⁠, 지진이냐고 묻던 얼굴이었다⁠. “⁠인간들이 약속을 못 지키는 것은 첫서리가 와야 드러난다⁠. 그때 이 나무도 쓰러져 있겠지⁠.⁠”

기술자 하나가 태블릿을 들고 구멍 수를 세어 스물넷이라고 말했다⁠. 표재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율의 손이 리엘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리엘이 이 손을 다시 잡으려 했다⁠. 놓쳤다⁠. 소율은 뿌리 틈에서 걸어 나왔다⁠. 머리 전등을 켰다⁠. 하얀 빛이 표재곤의 흰 안전모를 비추고⁠, 엘드린의 얼굴을 비췄다⁠.

“⁠전하⁠. 뿌리 아래 오시면 안 되잖아요⁠.⁠”

기술자 둘이 뒷걸음질했다⁠. 태블릿이 레일 위에 떨어졌다⁠. 표재곤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율의 전등 빛에 눈을 가늘게 떴다⁠.

“⁠마소율 씨⁠. 직위 해제된 분이 여기 왜 계십니까⁠? 아니⁠,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위에서요⁠. 전무님이 판 구멍으로요⁠.⁠”

엘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의 활을 내렸다⁠. 화살 하나를 시위에 걸었다⁠. 소율의 이마를 겨눴다⁠. 출근 첫날처럼⁠. 당시에는 나뭇가지 위였고 지금은 세 걸음 앞이었다⁠. 화살촉이 머리 전등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너는 오늘 밤 여기 없었다⁠.⁠” 엘드린이 한국어로 말했다⁠. “⁠아무도 너를 보지 못했다⁠.⁠”

표재곤이 흰 안전모를 벗어 손에 들고 손바닥으로 천천히 먼지를 털었다⁠.

“⁠여기는 무너지는 갱도입니다⁠, 마소율 씨⁠. 무너진 데가 또 무너지죠⁠. 직위 해제된 공무원이 밤에 혼자 몰래 들어왔다가 사고가 났다⁠. 엘프 숲 규정 위반이고⁠, 회사 안전 구역 무단 침입이고⁠.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합니다⁠.⁠”

“⁠혼자 아니에요⁠.⁠”

엘드린의 시위가 조금 더 당겨졌다⁠. 화살촉이 흔들리지 않았다⁠.

소율 뒤에서 뿌리가 흔들렸다⁠. 마른 흙이 쏟아졌다⁠. 노란 안전모 하나가 뿌리 틈에서 나왔다⁠. 시월의 것이었다⁠. 이 양옆으로 엘프의 귀 끝이 비죽 삐져나와 있었다⁠. 녹색 웃옷에 흙이 묻어 있었고⁠, 안전모 아래 머리카락 끝에 여왕의 나무 수액이 금빛으로 엉겨 있었다⁠. 리엘이 소율 뒤에 섰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와 소율 옆에 섰다⁠.

엘드린의 화살촉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소율의 이마에서 리엘의 가슴으로⁠, 다시 소율에게로⁠.

리엘이 엘드린을 봤다⁠. 형 앞에서처럼 입이 굳지 않았다⁠. 엘프어였다⁠. 소율은 이 말을 다 알아들었다⁠. 리엘이 협정문 여백에⁠, 소율이 출장소 첫 주에 다 외운 단어들이었다⁠.

“⁠저는 보았습니다⁠, 전하⁠.⁠”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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