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5,338자)

육수 한 그릇

8조 해킹한 정찰총국 막내 해커 · 금나율

2026년 12월 10일 목요일 오전⁠, 선양 서탑⁠. 김옥화는 동무네 냉면 창가 탁자에 앉아 문에 달린 종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아이가 쥐여 준 쪽지는 외투 주머니에 있었다⁠. 펼치지 않았다⁠. 맞은편에 황금철이 앉아 있는 동안에는 펼치지 않기로 했다⁠.

주방에서 늙은 주인이 나왔다⁠. 흰 앞치마에 연변 말투를 쓰는 여자였다⁠. 주인은 금철을 보더니 손뼉을 쳤다⁠.

“⁠황 동무⁠, 또 왔소⁠? 이번엔 여자 동무를 데리고 왔네⁠. 열다섯 해 전에도 이 자리에 이 동무 데리고 왔지⁠?⁠”

금철이 대답하지 않자 주인이 옥화를 들여다보았다⁠.

“⁠맞네⁠. 그때 그 학생이네⁠. 머리는 하얘졌는데 눈은 그대로네⁠. 냉면 두 개지⁠? 그때처럼 하나는 식초 많이⁠, 하나는 겨자 많이⁠.⁠”

“⁠기억하십니까⁠?⁠”

“⁠냉면집 하는 사람은 얼굴은 잊어도 식초는 안 잊소⁠.⁠”

주인이 주방으로 돌아갔다⁠. 옥화는 탁자 위에 두 손을 얹었다⁠. 2011년 2월⁠, 옥화가 떠나기 한 달 전 금철이 연구소 출장길에 옥화를 데리고 선양에 왔었다⁠. 김책의 젊은 연구원 둘이 처음 나라 밖으로 나온 날이었다⁠. 금철이 냉면을 사 주며 말했다⁠. 바깥은 생각보다 가깝다⁠. 옥화는 한 달 뒤 금철의 말을 따라갔다⁠.

2011년 3월 밤의 평양역 대합실은 석탄 난로 하나로 데워졌다⁠. 신의주행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난로 둘레에 쪼그려 앉아 있었고⁠, 옥화는 난로에서 가장 먼 기둥 옆에 서 있었다⁠. 외투 단추를 목까지 채웠다⁠. 어머니가 채워 준 단추였다⁠. 출장 가방을 든 금철이 대합실에 들어왔을 때 옥화는 숨을 멈췄다⁠. 금철이 옥화를 보았다⁠. 손에 든 표를 보았다⁠. 신의주행이었다⁠. 금철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매대에서 신문 한 부를 사서 펼쳐 들고⁠, 옥화에게 등을 돌린 채 난로 앞에 앉았다⁠. 기차가 들어올 때까지 금철은 한 번도 신문을 내리지 않았다⁠. 신문이 넘어가는 소리를 옥화는 열다섯 해 동안 기억했다⁠.

냉면 두 그릇이 나왔다⁠. 금철 앞에는 식초가 많이⁠, 옥화 앞에는 겨자가 많이⁠. 둘 다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

“⁠동무가 떠난 뒤에 나는 연구소에서 나왔소⁠.⁠” 금철이 먼저 말했다⁠. “⁠동무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나였소⁠. 평양역 대합실에서 아무것도 못 봤다고 했지만⁠, 못 본 사람도 벌을 받소⁠. 연구소 대신 송이를 받았소⁠. 열다섯 해 동안 송이를 팔았소⁠.⁠”

“⁠압니다⁠. 선배님이 보셨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선배님이 무엇을 내셨을지 알았습니다⁠.⁠”

“⁠알면서 남쪽에 내 이름을 안 썼구려⁠.⁠”

“⁠쓰면 선배님이 또 냈을 겁니다⁠.⁠”

금철이 처음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냉면 위의 삶은 달걀 반쪽을 젓가락 끝으로 굴리기만 하고 먹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아이를 저한테 보내셨습니까⁠? 열다섯 해 송이를 판 대가를 받으려고요⁠?⁠”

“⁠대가가 아니오⁠.⁠” 금철이 달걀을 놓았다⁠. “⁠서른 상자가 필요했소⁠. 서울 보안팀장이 김책 사람인 걸 알았을 때⁠, 동무가 우리 버릇을 알아볼 줄 알았소⁠. 알아보면 동무는 아이를 살리려 할 거고⁠, 살리려는 사람은 지키는 일을 놓소⁠. 동무 눈이 아이한테 붙어 있는 동안 다른 문을 열었소⁠.⁠”

옥화는 겨자 그릇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그릇이 탁자 위에서 한 뼘 미끄러졌다⁠.

“⁠선배님은 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쓰셨습니다⁠.⁠”

“⁠그렇소⁠.⁠”

“⁠아이도 쓰셨습니다⁠.⁠”

“⁠그렇소⁠. 우리 집사람과 딸⁠, 아이 어머니와 동생⁠, 상혁이 처자⁠, 조장 식구⁠. 열한 명이 평양에 있소⁠. 동무 한 사람과 아이 한 사람으로 열한 명을 평양에 둘 수 있으면⁠, 나는 열 번이라도 쓰오⁠.⁠”

“⁠그런데 아이가 저를 살렸습니다⁠.⁠”

금철의 손이 멈췄다⁠.

“⁠알고 있소⁠. 다니엘이 보낸 편지를 내가 읽었소⁠. 창문을 닫으라고 썼더군⁠. 두 번째 문이 지갑팀 안에 있다고⁠.⁠” 금철이 냉면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열아홉 상자가 그 편지 한 통이오⁠. 그 편지가 평양에 가면 아이는 총살이오⁠. 나는 그 편지를 평양에 안 보냈소⁠.⁠”

“⁠왜 안 보내셨습니까⁠?⁠”

“⁠동무는 왜 내 이름을 안 썼소⁠?⁠”

옥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의 승합차 운전석에서 아이가 앞만 보고 앉아 있었다⁠. 회색 점퍼 깃이 귀까지 올라와 있었다⁠.

“⁠문 앞에서 아이를 봤소⁠?⁠” 금철이 창밖을 보지 않고 물었다⁠.

“⁠봤습니다⁠.⁠”

“⁠어떻디까⁠?⁠”

“⁠망고 이야기에 웃었습니다⁠.⁠”

금철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 아이는 사무실에서 소리 내어 웃은 적이 없소⁠. 상혁이가 송이 남쪽 북쪽 하는 날에도 볼 안쪽을 깨물었지⁠. 동무 앞에서는 웃었구려⁠.⁠”

*

주인이 동치미 한 그릇을 더 가져왔다⁠. 서비스라고 했다⁠. 열다섯 해 만에 왔으니 동치미는 공짜고 냉면 값은 그대로 받겠다고 했다⁠. 금철이 주인에게 고개를 숙였고⁠, 주인은 손사래를 치며 돌아갔다⁠. 주방 문이 닫히자 금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동무 어머니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소⁠.⁠”

옥화의 등이 의자에서 떨어졌다⁠.

“⁠함흥으로 들어가는 돈 말이오⁠. 연길의 김 선생 줄⁠. 해마다 얼마가 들어가는지⁠, 사진을 몇 장 찍었는지⁠, 평양은 다 알고 있소⁠. 쓸모가 있어서 두었소⁠. 줄이 살아 있으면 줄 끝에 누가 매달려 있는지 언제든 볼 수 있으니까⁠.⁠”

“⁠이달 초에 보위부 사람이 어머니 집에 다녀갔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시작이오⁠. 동무가 오늘 선양에 왔소⁠. 공안도 봤고⁠, 우리 쪽 사람도 봤소⁠. 동무가 아이를 데려가면 평양은 줄을 끊는 걸로 안 끝내오⁠. 줄 끝을 당기오⁠.⁠”

옥화는 탁자 아래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손톱이 손등을 눌렀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줄을 동무가 먼저 끊으시오⁠. 돈도⁠, 사진도⁠, 김 선생도⁠. 끊으면 동무 어머니는 쓸모가 없어지오⁠. 쓸모없는 노인은 그냥 두오⁠.⁠”

“⁠끊으면 어머니는 겨울을 어떻게 납니까⁠?⁠”

금철이 옥화를 오래 보았다⁠. 아래턱을 조금 내밀었다⁠.

“⁠동무가 열다섯 해 전 조사실에서 남쪽 사람한테 한 질문이라고 들었소⁠. 대답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소⁠.⁠”

옥화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경에 김이 서렸다⁠. 안경을 벗어 외투 자락에 닦았다⁠. 닦는 동안 금철의 얼굴이 흐렸다⁠.

“⁠선배님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조사실 이야기를요⁠.⁠”

“⁠남쪽에도 우리 귀가 있고⁠, 우리 쪽에도 남쪽 귀가 있소⁠. 그래서 동무 어머니 이름은 동무 나라 서류에 없는 거요⁠. 그 신참이 잘 지켰더군⁠.⁠”

옥화는 창밖을 보았다⁠. 길 건너 양꼬치 가게 앞에서 차승규가 두 번째 고구마를 꺼내고 있었다⁠. 승규는 옥화의 눈을 피하지 않고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

“⁠선배님⁠, 아이는요⁠?⁠”

금철이 젓가락을 들었다⁠. 이번에는 냉면을 집었다⁠. 국수 한 젓가락을 식초 육수에 적셔 입에 넣었다⁠. 오래 씹었다⁠. 금철이 냉면을 먹는 모습은 열다섯 해 전과 같았다⁠. 면을 끊지 않고 끝까지 빨아들였다⁠.

“⁠그 아이는 금요일 단둥행 기차를 탄다⁠. 다음 주 금요일⁠, 아침 기차⁠. 내가 데리고 간다⁠.⁠”

“⁠들어가면 그 아이는 열아홉 상자를 집니다⁠.⁠”

“⁠총화에서 내가 덮겠소⁠.⁠”

“⁠선배님이 덮을 수 있습니까⁠?⁠”

“⁠모르오⁠.⁠”

금철은 또 한 젓가락을 먹었다⁠. 옥화는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아이한테 물어보셨습니까⁠?⁠”

“⁠물었소⁠. 탄다고 했소⁠. 어머니와 동생을 두고 못 간다고⁠.⁠”

“⁠선배님이 열한 명을 세어 준 다음에 물으셨겠지요⁠.⁠”

금철의 젓가락이 그릇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동무⁠, 세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 아니오⁠. 동무는 열다섯 해 전에 몇 명을 셌소⁠? 동무 어머니 하나였소⁠. 나는 그 하나를 세다가 내 열한 명을 못 셀 뻔했소⁠.⁠”

옥화는 대답하지 못했다⁠. 금철의 말에 틀린 데가 없었다⁠. 열다섯 해 전 옥화는 어머니 하나를 두고 떠났고⁠, 금철은 열다섯 해 동안 옥화가 두고 간 것을 대신 졌다⁠.

“⁠선배님⁠, 아이 옆자리 선배가 총화에서 다 말하겠다고 했다면서요⁠.⁠”

“⁠어떻게 아오⁠?⁠”

“⁠아이 얼굴에 쓰여 있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내릴 때요⁠.⁠”

금철이 국물을 들이켰다⁠. 그릇을 내려놓자 바닥에 식초 냄새만 남았다⁠. 금철은 지갑에서 인민폐 지폐 몇 장을 꺼내 그릇 옆에 놓았다⁠. 두 그릇 값이었다⁠.

“⁠냉면은 내가 사오⁠. 열다섯 해 전처럼⁠.⁠”

금철이 외투를 들고 일어섰다⁠. 문으로 가다가 돌아서서 옥화를 내려다보았다⁠.

“⁠동무⁠, 아이 쪽지는 내가 안 보는 데서 펴시오⁠. 그 아이가 밤새 세 번 고쳐 쓴 거요⁠.⁠”

종이 울렸다⁠. 문이 닫혔다⁠. 유리창 너머로 금철이 승합차 조수석에 오르는 것이 보였다⁠. 승합차가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이는 끝까지 앞만 보았다⁠.

*

주인이 빈 그릇을 치우러 나왔다⁠. 금철이 놓고 간 지폐를 세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옥화 앞의 그대로인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황 동무는 열다섯 해 전에도 먼저 나갔소⁠. 그때도 여자 동무 그릇은 그대로였지⁠.⁠”

“⁠그때도 제가 안 먹었습니까⁠?⁠”

“⁠먹다 말았지⁠. 다 먹으면 떠나는 게 쉬워질까 봐 그랬나⁠.⁠” 주인이 행주로 탁자를 훔쳤다⁠. “⁠황 동무는 그 뒤로 해마다 3월이면 혼자 왔소⁠. 냉면 두 그릇을 시켜서 하나만 먹고 갔소⁠. 나머지 하나는 나더러 먹으라고⁠. 올해 3월에도 왔소⁠. 나는 그게 누구 몫인지 몰랐는데⁠, 오늘 알았네⁠.⁠”

옥화는 대답하지 못했다⁠. 주인은 행주를 어깨에 걸치고 주방으로 들어가다가 돌아보았다⁠.

“⁠여자 동무⁠, 그 냉면 다 먹고 가요⁠. 열다섯 해 치 불었소⁠.⁠”

*

옥화는 외투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세 번 접혀 있었다⁠. 신문지를 접듯이 작고 단단하게⁠. 옥화는 접힌 자국을 손톱으로 펴며 한 겹씩 열었다⁠.

「⁠선생님⁠. 저는 다음 주 금요일 아침 기차를 탑니다⁠. 어머니와 은정이를 두고 갈 수 없습니다⁠. 선생님도 어머니를 두고 오셨으니 아실 것입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바이낸스 엔지니어에게 딸이 있습니다⁠. 앞니가 빠진 채 케이크 앞에서 두 손으로 브이를 했습니다⁠. 엔지니어는 과제 결과가 언제 나오느냐고 물었고⁠, 딸이 아빠 새 회사 이름을 묻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엔지니어 이름을 몰라서 선생님께 씁니다⁠. 미안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딸에게도⁠.

망고는 원래 없는 개였습니다⁠. 재하 씨에게도 미안합니다⁠.

리명길⁠」

옥화는 마지막 석 자를 오래 보았다⁠. 이름 석 자만 볼펜을 세게 눌러 써서⁠, 뒷면에 글자 자국이 도드라져 있었다⁠. 리⁠, 명⁠, 길⁠. 열흘 넘게 쫓던 손에 이름이 생겼다⁠. 국정원이 알아 오라던 이름이었고⁠, 아이가 스스로 적어 보낸 이름이었다⁠. 아이는 이름을 묻지 말라는 교원에게서 배웠고⁠, 이름을 맨 끝에 썼다⁠.

종이 울렸다⁠. 승규가 고구마 봉지를 들고 들어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금철이 앉았던 자리였다⁠. 승규는 비어 있는 그릇과 그대로인 그릇을 번갈아 보더니⁠, 옥화 앞의 냉면을 끌어당겼다⁠.

“⁠팀장님⁠, 안 드실 거면 제가 먹을게요⁠. 아깝잖아요⁠.⁠”

옥화는 쪽지를 다시 세 번 접었다⁠. 승규가 겨자를 듬뿍 푼 냉면을 한 젓가락 먹고 기침을 했다⁠. 기침을 하면서도 젓가락은 놓지 않았다⁠.

“⁠차 선생님⁠.⁠”

“⁠네⁠.⁠”

“⁠이름 알아 왔습니다⁠.⁠”

승규의 젓가락이 멈췄다⁠. 옥화는 접은 쪽지를 탁자 위에 놓지 않고 손바닥 안에 쥐었다⁠. 주방에서 주인이 동치미 한 그릇을 더 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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