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408자)

서탑 냉면집 앞

8조 해킹한 정찰총국 막내 해커 · 금나율

2026년 12월 10일 목요일 아침 아홉 시⁠, 선양⁠. 리명길이 사무실 문을 열자 금철이 열쇠 꾸러미를 흔들었다⁠. 사무실 차 열쇠였다⁠. 송이 상자를 나르는 회색 승합차였고⁠, 뒷좌석 바닥에서 늘 솔잎 냄새가 났다⁠.

“⁠막내⁠, 오늘 운전은 네가 한다⁠. 서탑⁠, 동무네 냉면⁠.⁠”

염상혁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사장님⁠, 막내가 운전하면 안 됩니다⁠. 운전대를 잡은 놈은 어디로든 갑니다⁠.⁠”

“⁠어디로 갈 데가 있으면 가라고 해라⁠.⁠”

“⁠사장님⁠!⁠”

“⁠상혁아⁠, 너는 오늘 류 사장한테 북쪽 송이 다섯 상자 갖다 줘라⁠. 왕 경관이 북쪽 걸 좋아한다더라⁠.⁠”

상혁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금철은 감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군복이 아니었다⁠. 넥타이를 매지 않았고⁠, 셔츠 맨 윗단추를 풀었다⁠. 평양에 보고하는 날도⁠, 사무실에서 사장 노릇을 하는 날도 아닌 차림이었다⁠. 명길은 그런 금철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막내⁠.⁠” 금철이 열쇠를 명길의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어제 그 여자한테 보낸 답장⁠, 베이징 시간은 왜 붙였니⁠?⁠”

명길은 열쇠를 쥐었다⁠. 어젯밤 금철은 명길에게 「⁠서탑⁠, 내일 열두 시⁠」라고만 보내라고 했다⁠. 명길은 한 줄을 덧붙였다⁠.

“⁠선양에 처음 오는 사람은 평양 시간을 모릅니다⁠. 늦을까 봐 붙였습니다⁠.⁠”

“⁠서울은 평양하고 같은 시간이다⁠.⁠”

명길은 대답하지 못했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바이낸스의 다섯 시 오 분도⁠, 가람엑스의 다섯 시 오 분도 서울과 평양이 같은 시각이었다⁠. 알고 있었는데⁠, 답장을 쓸 때는 옥화가 선양 공항에서 시계를 돌릴 것만 떠올랐다⁠.

“⁠그 여자는 시계를 안 돌려도 된다⁠. 열다섯 해 동안 평양 시간으로 살았다⁠.⁠” 금철이 외투를 집었다⁠. “⁠가자⁠.⁠”

명길이 점퍼 지퍼를 올리는데 창가의 조장이 의자를 돌렸다⁠. 조장은 서랍에서 목장갑 한 켤레를 꺼내 명길에게 던졌다⁠. 손가락 끝이 다섯 개 다 잘려 있었다⁠. 승합차 운전대가 겨울에는 얼음처럼 차갑다는 것을 조장은 알았다⁠. 장갑 손가락 끝을 잘라 끼우라는 말은 명길이 은정에게 보낸 편지에 있었다⁠. 조장이 편지를 읽었을 리는 없었다⁠. 손가락 끝이 시린 겨울을 조장도 김책에서 났을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조장 동지⁠.⁠”

조장은 대답하지 않고 의자를 창가로 돌렸다⁠. 상혁이 장갑을 보고 투덜거렸다⁠. “⁠나는 장갑 없니⁠?⁠”

*

승합차 안은 추웠다⁠. 히터가 더운 바람을 내기까지 오 분이 걸렸다⁠. 명길은 운전대를 쥐고 사무실 건물 뒤 골목을 빠져나왔다⁠. 늘 하던 대로 오른쪽 골목으로 꺾으려는데 조수석의 금철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큰길로 가라⁠.⁠”

“⁠총영사관 앞으로 지나갑니다⁠.⁠”

“⁠안다⁠. 오늘은 돌아가지 마라⁠.⁠”

명길은 운전대를 바로 했다⁠. 큰길에는 출근하는 차들이 줄을 이었다⁠. 승합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갈 때마다 히터 바람에서 솔잎 냄새가 났다⁠.

“⁠사장님⁠, 하나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라⁠.⁠”

“⁠조장 동지가 열아홉 상자를 혼자 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손이 늦었다고 하시겠답니다⁠.⁠”

금철은 앞만 보았다⁠. “⁠조장이 그러더냐⁠.⁠”

“⁠예⁠. 총화에서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밖에 알렸다고 하겠습니다⁠. 조장 동지 손은 늦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열한 명 다 간다⁠.⁠”

“⁠그래도 조장 동지 혼자 지는 건 틀립니다⁠.⁠”

“⁠틀린 거 안다⁠.⁠” 금철이 처음으로 명길을 돌아보았다⁠. “⁠막내⁠, 틀린 것과 무거운 것은 다르다⁠. 조장이 혼자 지면 조장 식구 다섯이 지방 간다⁠. 네가 말하면 네 어머니⁠, 은정이⁠, 조장 식구⁠, 상혁이 식구⁠, 우리 식구가 다 간다⁠. 너는 맞는 말을 하고 열한 명을 보내고⁠, 조장은 틀린 말을 하고 다섯을 보낸다⁠. 어느 것을 하겠니⁠?⁠”

명길의 손이 운전대 위에서 하얘졌다⁠.

“⁠사장님은 어느 것을 하시겠습니까⁠?⁠”

“⁠나는 아직 안 골랐다⁠. 그래서 오늘 냉면 먹으러 간다⁠.⁠”

신호가 바뀌었다⁠. 승합차가 교차로를 건너자 오른쪽으로 회색 건물이 나왔다⁠. 정문 위 태극기는 바람이 없어 늘어져 있었다⁠. 창구 앞에 비자를 받으려는 중국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공안 둘이 줄 옆에서 발을 굴렀다⁠. 횡단보도 열네 걸음⁠, 정문까지 열 걸음⁠. 명길은 속으로 세지 않으려 했는데 세고 있었다⁠.

금철은 총영사관을 보지 않았다⁠. 앞 유리 너머 방송탑만 보았다⁠. 승합차가 총영사관을 지나칠 때까지 금철은 숨을 한 번도 크게 쉬지 않았다⁠. 명길은 백미러로 태극기가 작아지는 것을 보았다⁠.

“⁠막내⁠, 지금 몇 걸음이었니⁠?⁠”

명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금철도 더 묻지 않았다⁠.

*

서탑 거리는 점심 장사 준비로 바빴다⁠. 김치 가게 앞에 배추 상자가 쌓여 있었고⁠, 노래방 간판의 불은 꺼져 있었다⁠. 「⁠동무네 냉면⁠」은 골목 안쪽⁠, 이층짜리 낡은 건물 아래층에 있었다⁠. 간판의 한글이 바래서 「⁠동무⁠」의 ㅁ이 거의 지워져 있었다⁠. 「⁠동우네 냉면⁠」처럼 읽혔다⁠.

베이징 시간 열 시 오십오 분⁠, 승합차가 냉면집 앞에 멈췄다⁠. 명길은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운전수가 사장에게 하는 일이었다⁠. 금철이 내리며 외투 깃을 세웠다⁠.

냉면집 유리문 옆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턱선에서 자른 단발에 흰머리가 몇 가닥⁠, 검은 뿔테 안경⁠, 회색 외투⁠. 외투 단추는 맨 위 하나만 풀려 있었다⁠. 화면에서 볼 때보다 키가 작았다⁠. 명길이 상상한 것보다 손이 컸다⁠. 손등이 바람에 붉게 터 있었다⁠.

금철이 여자 앞을 지나 냉면집 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눈을 마주쳤지만 인사하지 않았다⁠. 문에 달린 종이 한 번 울렸다⁠.

명길과 옥화가 문 앞에 남았다⁠.

명길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화면에서는 말이 나왔다⁠. 여기서는 바람 소리와 김치 가게 주인이 배추 상자를 내리는 소리만 들렸다⁠. 옥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에릭 씨⁠, 망고는 잘 있습니까⁠?⁠”

명길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터지고 나서야 웃음인 줄 알았다⁠. 옥화의 입꼬리도 아주 조금 올라갔다⁠.

“⁠망고는 원래 없는 개였습니다⁠.⁠”

“⁠압니다⁠. 재하 씨가 망고 진짜 좋아했다고 전해 달랍니다⁠.⁠”

명길은 점퍼 안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 밤새 쓰고 세 번 고친 쪽지였다⁠. 금철이 들어간 유리문 안쪽을 한 번 보고⁠, 옥화의 손에 쪽지를 쥐여 주었다⁠. 옥화의 손이 차가웠다⁠.

옥화는 쪽지를 펼치지 않고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대신 다른 주머니에서 냉면집 냅킨 한 장을 꺼냈다⁠. 냅킨에 볼펜으로 숫자가 적혀 있었다⁠. 중국 휴대전화 번호였다⁠.

“⁠이 번호는 선양에 있는 동안만 삽니다⁠. 오늘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명길은 냅킨을 받았다⁠. 얇아서 손바닥에서 구겨졌다⁠.

유리문 안에서 금철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옥화가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문을 열었다⁠. 종이 다시 울렸다⁠. 문이 닫히기 전에 냉면 육수 냄새가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식초와 겨자와 동치미 냄새였다⁠. 김책 기숙사 식당에서 일 년에 두 번 나오던 냄새였다⁠.

*

명길은 승합차로 돌아와 운전석에 앉았다⁠. 냉면집 유리창 너머로 두 사람이 보였다⁠. 창가 탁자였다⁠. 금철은 문을 등지고⁠, 옥화는 문을 마주 보고 앉았다⁠. 둘 사이에 냉면 두 그릇이 놓였다⁠. 둘 다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명길은 입 모양을 읽으려다 그만두었다⁠. 금철의 등과 옥화의 얼굴만 보였다⁠. 옥화가 말을 하면 금철의 어깨가 움직이지 않았고⁠, 금철이 말을 하면 옥화가 안경을 고쳐 썼다⁠. 십 분이 지나도록 냉면은 그대로였다⁠.

명길은 쪽지가 들어 있던 안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이제는 비어 있었다⁠. 쪽지는 어젯밤 탕비실 정수기 옆에서 세 번 고쳐 쓴 것이었다⁠.

첫 번째 쪽지에는 한 줄만 썼다⁠.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쓰고 나서 오래 들여다보았다⁠. 어머니가 계단에서 은정의 팔을 잡는 모습이 글자 위에 겹쳤다⁠. 명길은 쪽지를 개수대에서 라이터로 태웠다⁠. 재가 물에 젖어 배수구로 내려갔다⁠.

두 번째 쪽지는 길었다⁠. 바이낸스 엔지니어에게 쓰는 사과였다⁠. 다니엘이 누구였는지⁠, 딸의 피아노 사진을 어디서 골랐는지⁠, 과제 결과를 묻는 엔지니어의 마지막 메시지에 왜 답하지 않았는지⁠. 종이 앞뒤를 다 채우고 나서 명길은 알았다⁠. 이 쪽지는 엔지니어에게 갈 수 없었다⁠. 엔지니어의 이름을 명길은 몰랐다⁠. 바이낸스 보고서에서 엔지니어는 B였다⁠.

세 번째 쪽지는 짧았다⁠. 명길은 그것을 접어서 안주머니에 넣었고⁠, 오늘 아침 냉면집 앞에서 꺼냈다⁠. 무엇을 썼는지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면 다시 고치고 싶어질 것이었다⁠.

길 건너편 양꼬치 가게 앞에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오전 열한 시였고⁠, 가게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남자는 손에 군고구마 봉지를 들고 있었고⁠, 고구마를 먹으면서 냉면집 유리창을 보았다⁠. 배가 조금 나왔고⁠, 패딩 점퍼 안에 넥타이를 맸다⁠. 중국 사람은 넥타이에 패딩을 입지 않았다⁠. 남자는 고구마를 다 먹고 두 번째 고구마를 꺼냈다⁠.

명길은 남자를 알아보았다⁠. 사진으로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저렇게 오래⁠, 저렇게 맛있게⁠, 저렇게 티 나게 먹으면서 남의 가게 유리창을 보는 사람은 국정원 사람이라고 명길은 짐작했다⁠. 상혁이 말한 「⁠다 찍는다⁠」의 남쪽이었다⁠.

남자가 명길의 승합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고구마를 든 손을 아주 조금 들어 올렸다⁠. 인사인지 고구마를 보여 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명길은 앞 유리 너머로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명길은 점퍼 주머니에서 냅킨을 꺼냈다⁠. 숫자 열한 개⁠. 옥화의 글씨는 반듯했고 숫자 7에 가로줄이 있었다⁠. 김책 실습실의 교원들이 7을 그렇게 썼다⁠. 한창범 교원도 그렇게 썼다⁠. 명길도 그렇게 썼다⁠.

*

베이징 시간 열두 시 이십 분⁠, 냉면집 종이 울렸다⁠. 금철이 혼자 나왔다⁠. 외투 깃을 세우고 승합차까지 걸어오는 걸음이 느렸다⁠. 옥화는 유리창 너머 탁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냉면 두 그릇 가운데 하나만 비어 있었다⁠.

금철이 조수석에 앉았다⁠. 문을 닫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히터 바람이 금철의 외투에서 차가운 냄새를 밀어냈다⁠.

“⁠사무실로 가라⁠. 골목으로⁠.⁠”

명길은 시동을 걸었다⁠. 승합차가 서탑 골목을 빠져나가는 동안 금철은 창밖을 보았다⁠. 길 건너 양꼬치 가게 앞의 남자는 세 번째 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금철이 남자를 보고 혀를 찼다⁠.

“⁠남쪽 사람들은 아직도 저렇게 먹으면서 서 있니⁠.⁠”

“⁠사장님도 아십니까⁠?⁠”

“⁠저 사람은 모른다⁠. 저렇게 먹는 사람을 안다⁠.⁠” 금철이 손을 내밀었다⁠. “⁠막내⁠, 저 여자가 너한테 뭘 줬니⁠?⁠”

명길은 운전대를 쥔 채 잠깐 망설였다⁠. 금철의 손바닥은 펼쳐진 채 기다렸다⁠. 명길은 점퍼 주머니에서 냅킨을 꺼내 금철의 손에 올려놓았다⁠.

금철이 냅킨을 펼쳐 숫자를 보았다⁠. 숫자 7의 가로줄에서 금철의 눈이 멈췄다⁠. 금철은 한참 냅킨을 보다가⁠, 냅킨을 세 번 접었다⁠. 반으로⁠, 다시 반으로⁠, 다시 반으로⁠. 기숙사 창문 틈에 끼우던 신문지처럼 작고 단단하게⁠.

금철이 접은 냅킨을 명길의 점퍼 왼쪽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붉은 배지 바로 아래였다⁠.

“⁠세 번 접어야 바람이 덜 들어온다⁠. 그 여자가 가르쳤다⁠.⁠”

승합차가 골목을 돌았다⁠. 금철은 더 말하지 않았다⁠. 명길은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가슴 주머니에서 냅킨의 모서리가 배지 아래를 콕콕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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