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460자)

다섯 시 오 분, 강남

8조 해킹한 정찰총국 막내 해커 · 금나율

2026년 12월 4일 금요일 새벽 네 시 칠 분⁠, 서울 노원⁠. 김옥화는 휴대전화 진동에 눈을 떴다⁠. 반룡이가 이불 위에서 몸을 일으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 「⁠주태강⁠」이 떠 있었다⁠.

“⁠팀장님⁠, 주무셨어요⁠? 죄송해요⁠. 근데 이거⁠, 떡볶이로 못 바꾸겠어요⁠.⁠”

“⁠읽어 주십시오⁠.⁠”

“⁠취약점 신고 메일로 들어왔어요⁠. 세 시 오십팔 분에요⁠. 보낸 사람 이름이 다니엘 추고요⁠, 제목이 없어요⁠. 본문이 짧아요⁠.⁠” 태강이 숨을 한 번 쉬고 읽었다⁠. “⁠가람엑스 보안팀 김옥화 선생님께⁠. 오늘 다섯 시 오 분⁠. 창문을 닫으십시오⁠. 두 번째 문은 지갑팀 안에 있습니다⁠. 끝⁠.⁠”

옥화는 이불을 걷었다⁠. 바닥이 차가웠다⁠. 반룡이가 이불에서 뛰어내렸다⁠.

“⁠태강 씨⁠, 끝이라고 쓰여 있습니까⁠?⁠”

“⁠아니요⁠, 끝은 제가 붙였어요⁠. 다 읽었다고요⁠.⁠”

“⁠메일 지우지 말고 그대로 두십시오⁠. 우 책임님 깨우십시오⁠. 저는 대표님께 전화하겠습니다⁠.⁠”

“⁠팀장님⁠, 창문이 뭐예요⁠? 우리 회사 창문은 안 열리잖아요⁠. 19층인데⁠.⁠”

옥화는 대답하지 않고 외투를 집었다⁠. 외투 단추를 채우다가 손이 멈췄다⁠. 목까지 채우던 버릇이었다⁠. 옥화는 단추 두 개를 남기고 현관으로 나갔다⁠.

*

네 시 십육 분⁠, 택시 안에서 옥화는 강도원의 번호를 세 번 눌렀다⁠. 세 번째에 잠긴 목소리가 받았다⁠.

“⁠김 팀장님⁠? 지금 몇 시예요⁠?⁠”

“⁠네 시 십육 분입니다⁠. 대표님⁠, 다섯 시 오 분에 공격이 들어온다는 신고가 왔습니다⁠. 네 시 오십 분부터 출금을 멈춰야 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이불 소리가 났다⁠. 강도원이 일어나 앉는 소리였다⁠.

“⁠신고가 어디서 왔는데요⁠?⁠”

“⁠신고 메일입니다⁠. 보낸 사람은 저쪽 사람입니다⁠.⁠”

“⁠저쪽이요⁠? 북한이요⁠? 북한이 우리한테 털 거라고 미리 알려 줬다고요⁠?⁠”

“⁠한 사람이 알려 줬습니다⁠.⁠”

“⁠팀장님⁠.⁠” 강도원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팀장님 지금 대기 발령이에요⁠. 출금 멈추는 결정은 팀장님 권한이 아니에요⁠. 그리고 새벽에 출금을 멈추면 아침에 이용자들이 깨서 제일 먼저 뭘 보겠어요⁠? 출금 정지⁠. 그게 기사가 돼요⁠. 은행 재계약이 다음 주 수요일이에요⁠. 메일 한 통으로 회사 문을 닫으라는 거예요⁠?⁠”

“⁠메일 한 통으로 회사 문이 닫히는 걸 막자는 겁니다⁠.⁠”

“⁠그 메일이 장난이면요⁠? 저쪽이 우리를 흔들려고 일부러 보낸 거면요⁠? 출금 막고 아무 일도 없으면⁠, 그다음은 누가 책임져요⁠?⁠”

“⁠제가 집니다⁠.⁠”

“⁠팀장님은 지금 질 수 있는 자리가 없어요⁠.⁠”

택시가 영동대교를 건넜다⁠. 강물 위로 가로등 불빛이 길게 흔들렸다⁠. 옥화는 창밖을 보며 숨을 골랐다⁠. 강도원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틀리지 않은 말이 지금 다섯 시 오 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대표님⁠, 그럼 회사로 오십시오⁠. 다섯 시 오 분에 상황실에 계십시오⁠. 대표님 눈으로 보고 대표님이 정하십시오⁠.⁠”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갈게요⁠. 대신 다섯 시 오 분에 아무 일도 없으면⁠, 그 징계위원회 양식 이름 칸 제가 오늘 채워요⁠.⁠”

“⁠채우십시오⁠.⁠”

옥화는 전화를 끊고 차승규에게 걸었다⁠. 승규는 신호가 한 번 가기 전에 받았다⁠. 뒤에서 라면 끓는 소리가 났다⁠.

“⁠팀장님⁠, 태강 씨가 저한테도 보냈어요⁠. 지금 나가요⁠. 레이철 씨한테도 연락했어요⁠.⁠”

“⁠차 선생님⁠, 라면은요⁠?⁠”

“⁠가면서 먹을게요⁠.⁠”

*

네 시 사십일 분⁠, 테헤란로 유리 건물 로비⁠. 옥화의 출입증을 대자 출입문에 빨간 불이 켜졌다⁠. 경비원이 경비실에서 뛰어나왔다⁠.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김 팀장님⁠? 팀장님 대기 발령이시잖아요⁠. 출입증 꺼져 있어요⁠.⁠”

“⁠압니다⁠. 문 좀 열어 주십시오⁠.⁠”

“⁠제가 마음대로 못 열어요⁠. 대표님 지시가 있어야⁠…⁠…⁠.⁠”

“⁠대표님 지금 오십니다⁠.⁠”

“⁠그럼 대표님 오시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태강이 슬리퍼 차림으로 뛰어나왔다⁠. 한 손에 옥화의 수첩을 들고 있었다⁠.

“⁠아저씨⁠, 이분 저희 팀장님이에요⁠! 제가 모시러 왔어요⁠. 제 카드로 들어가시면 되잖아요⁠!⁠”

“⁠그건 규정 위반인데⁠…⁠…⁠.⁠”

“⁠규정은 제가 나중에 혼날게요⁠. 아저씨⁠, 저 떡볶이 사 드릴게요⁠.⁠”

경비원이 태강과 옥화를 번갈아 보더니⁠, 경비실로 돌아가 아무것도 못 본 사람처럼 모니터 앞에 앉았다⁠. 태강이 자기 카드를 대고 옥화를 밀어 넣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강이 수첩을 돌려주었다⁠. 「⁠배⁠」 옆의 눈사람 밑에 태강의 글씨가 한 줄 늘어 있었다⁠. 「⁠배 선임님 — 어제 밤 11시까지 회사에 계심⁠」⁠.

*

네 시 오십육 분⁠, 19층 상황실⁠. 벽에 붙은 큰 화면에 가람엑스 지갑의 잔액이 떠 있었다⁠. 이용자들의 돈 가운데 바로 내줄 수 있게 열어 둔 지갑이었다⁠. 숫자는 고요했다⁠. 우 책임이 패딩을 입은 채 자판 앞에 앉아 있었고⁠, 머리에 베개 자국이 눌려 있었다⁠.

“⁠팀장님⁠, 출금 멈추는 단추는 제가 누를 수 있어요⁠. 대표님 말씀만 있으면요⁠.⁠”

“⁠배 선임님은요⁠?⁠”

“⁠전화 안 받으세요⁠. 새벽이니까요⁠.⁠”

다섯 시 이 분⁠, 강도원이 들어왔다⁠. 운동복 바지에 양복 윗옷을 걸쳤고⁠,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강도원은 화면의 숫자를 보고⁠, 옥화를 보고⁠, 다시 숫자를 보았다⁠.

“⁠아무 일도 없네요⁠.⁠”

“⁠삼 분 남았습니다⁠.⁠”

“⁠팀장님⁠, 삼 분 뒤에도 아무 일 없으면요⁠.⁠”

“⁠채우십시오⁠.⁠”

다섯 시 사 분⁠. 상황실 안에 숨소리만 있었다⁠. 태강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다가 옥화의 눈짓에 멈췄다⁠.

다섯 시 오 분⁠, 숫자가 움직였다⁠.

처음에는 맨 뒷자리였다⁠. 다음은 바로 앞자리였다⁠. 잔액 숫자가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줄었다⁠. 상황실의 다른 화면에 출금 목록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에⁠, 처음 보는 주소로⁠, 금액이 커지면서⁠.

“⁠대표님⁠.⁠”

강도원은 숫자를 보고 있었다⁠. 입이 조금 열려 있었다⁠. 바이낸스 기사를 읽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남의 일을 읽던 얼굴이 자기 일을 보는 얼굴로 바뀌는 데 몇 초가 걸렸다⁠.

“⁠태강 씨⁠, 지금 얼마예요⁠?⁠”

“⁠떡볶이로요⁠? 아니⁠, 원으로요⁠? 잠깐만요⁠, 자릿수가⁠…⁠… 백억이요⁠. 아니⁠, 방금 백이십억이요⁠.⁠”

“⁠대표님⁠, 정하십시오⁠.⁠”

다섯 시 칠 분⁠, 강도원이 말했다⁠.

“⁠막아요⁠.⁠”

우 책임이 단추를 눌렀다⁠. 출금 목록이 멈췄다⁠. 잔액 숫자는 두 번 더 깜박이고 나서 멈췄다⁠. 다섯 시 구 분이었다⁠.

화면에 남은 숫자를 우 책임이 소리 내어 읽었다⁠. 1⁠,140만 달러⁠, 원으로 160억 원이 조금 넘었다⁠. 사 분 동안이었다⁠. 바이낸스는 이십 분 동안 8조 4천억 원을 잃었다⁠. 옥화는 숫자 두 개를 나란히 놓아 보았다⁠. 메일 한 통이 없었다면 사 분은 이십 분이 되었을 것이다⁠.

강도원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운동복 바지 무릎을 두 손으로 쥐었다⁠.

“⁠팀장님⁠, 메일 장난 아니었네요⁠.⁠”

“⁠장난 아니었습니다⁠.⁠”

“⁠다섯 시 사 분에 막았으면 한 푼도 안 나갔겠네요⁠.⁠”

“⁠네 시 오십 분에 막았으면요⁠.⁠”

강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

다섯 시 사십 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배 선임이 복도로 나왔다⁠. 우 책임이 보낸 문자를 열한 통째 받고 나서였다⁠. 점퍼 지퍼를 반만 올렸고⁠, 맨발에 운동화를 신었다⁠. 상황실 유리문 앞에서 옥화와 마주쳤다⁠.

“⁠팀장님⁠, 얼마예요⁠?⁠”

“⁠160억 원입니다⁠.⁠”

배 선임의 입술이 하얘졌다⁠. 복도 벽에 등을 댔다가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앉았다⁠. 운동화 끈이 풀려 있었다⁠.

“⁠저 아니에요⁠. 회사 노트북으로는 안 했어요⁠. 팀장님이 하지 말라고 해서 진짜 안 했어요⁠.⁠”

옥화는 배 선임 앞에 쪼그려 앉았다⁠. 눈높이가 맞았다⁠.

“⁠배 선임님⁠, 자문 회사에서 받은 파일⁠, 어디서 여셨습니까⁠?⁠”

배 선임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한참 만에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토요일에요⁠. 회사에서요⁠. 집에서 하면 애가 옆에서 놀자고 해서요⁠. 회사 노트북 말고 제 노트북으로 했어요⁠. 회사 노트북 바로 옆에서요⁠. 그게 그렇게 되는 줄 몰랐어요⁠.⁠”

옥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이낸스 보고서의 다섯 줄이 머릿속에서 한 줄씩 지나갔다⁠. 배 선임은 바보가 아니었다⁠. 바보라서 넘어간 사람은 없었다⁠. 토요일에 아이를 피해 회사에 나온 사람이 넘어갔다⁠.

“⁠애 학원비가 한 달에 이백이에요⁠. 자문료가 한 달에 삼백이었어요⁠. 코인으로 줬어요⁠. 팀장님⁠, 그 코인도 그 사람들 거예요⁠?⁠”

“⁠아마 바이낸스에서 온 돈일 겁니다⁠.⁠”

배 선임이 고개를 들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났다⁠.

“⁠저 그럼 바이낸스 돈으로 우리 애 영어 학원 보냈어요⁠?⁠”

옥화는 배 선임의 운동화 끈을 집어 매어 주었다⁠. 두 번 묶었다⁠. 배 선임은 끈 매는 손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있었다⁠.

“⁠수사관이 오면 오늘 말씀하신 대로만 말씀하십시오⁠. 숨기지 마시고요⁠. 저도 그 말만 하겠습니다⁠.⁠”

*

여섯 시 반⁠, 상황실 한쪽 탁자에서 강도원이 공지문 초안을 고치고 있었다⁠. 홍보팀장이 잠옷 위에 코트를 걸치고 와서 노트북을 열었다⁠.

“⁠대표님⁠, 제목을 ‘⁠이상 거래 선제 차단⁠’으로 하면 어떨까요⁠?⁠”

“⁠좋네요⁠. 선제 차단⁠.⁠”

“⁠선제가 아닙니다⁠.⁠” 옥화가 말했다⁠. “⁠다섯 시 오 분에 나갔고 다섯 시 구 분에 멈췄습니다⁠. 160억 원이 나갔습니다⁠.⁠”

“⁠그걸 제목에 쓰면 아침에 이용자들이 다 빼요⁠.⁠”

“⁠쓰지 않아도 오후에 기자가 씁니다⁠. 블록체인은 누구나 봅니다⁠. 숫자가 이미 밖에 있습니다⁠.⁠”

강도원이 노트북 화면을 오래 보았다⁠. 홍보팀장이 볼펜을 입에 물었다⁠. 강도원이 자판에 손을 올려 제목을 지우고⁠, 천천히 새로 쳤다⁠.

「⁠가람엑스⁠, 해킹으로 가상자산 약 160억 원 유출 — 피해는 회사가 전액 부담합니다⁠」

“⁠바이낸스처럼요⁠.⁠” 강도원이 중얼거렸다⁠. “⁠바이낸스처럼 할 돈은 없는데⁠.⁠”

“⁠이벤트보다는 낫습니다⁠.⁠”

강도원이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옥화를 보았다⁠.

“⁠팀장님⁠, 대기 발령은 아직이에요⁠. 그건 은행 재계약 끝나고 다시 얘기해요⁠. 근데 오늘은 여기 계세요⁠.⁠”

*

일곱 시⁠, 차승규와 레이철 문이 함께 들어왔다⁠. 승규의 손에 컵라면이 들려 있었다⁠. 다 불어서 국물이 없었다⁠. 레이철은 태강의 모니터 앞에 서서 신고 메일을 한 줄씩 읽었다⁠.

“⁠김 팀장님⁠, 보낸 사람 이름이 다니엘 추입니까⁠?⁠”

“⁠예⁠. 싱가포르 핀테크 채용 담당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이철이 태블릿을 열어 무언가를 찾았다⁠. 화면을 옥화에게 돌렸다⁠. 골든레트리버 사진이 있었다⁠. 저수지 둘레길이 있었다⁠. 피아노 앞에서 인사하는 아이가 있었다⁠.

“⁠이 계정이 바이낸스 엔지니어에게 6주 동안 말을 건 가짜 면접관입니다⁠. 바이낸스 조사팀이 저희한테 넘긴 이름입니다⁠. 아직 언론에는 안 나갔습니다⁠.⁠”

상황실이 조용해졌다⁠. 승규가 불어 터진 컵라면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팀장님⁠, 그러니까 오늘 새벽에 우리를 살린 아이가⁠, 바이낸스 8조의 첫 문을 연 아이예요⁠.⁠”

옥화는 메일의 마지막 줄을 다시 보았다⁠. 「⁠두 번째 문은 지갑팀 안에 있습니다⁠.⁠」 화면 끝에 다니엘 추라는 이름이 작게 박혀 있었다⁠. 아이는 자기가 누구인지 숨길 수 있는 계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남의 돈을 처음 연 이름으로 남의 돈을 지켰다⁠.

레이철이 태블릿을 덮었다⁠.

“⁠김 팀장님⁠, 미국 법무부가 이 사람을 원할 겁니다⁠.⁠”

옥화는 창밖을 보았다⁠. 19층 유리창은 열리지 않았다⁠. 동쪽 하늘이 막 밝아 오고 있었다⁠.

12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