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415자)

두 번째 문

8조 해킹한 정찰총국 막내 해커 · 금나율

2026년 11월 27일 금요일 밤 열 시⁠, 선양⁠. 리명길은 송이 상자 옆 바닥에 앉아 쏟아진 귤을 줍고 있었다⁠. 금철의 양복 바지 무릎에 먼지가 하얗게 묻었다⁠. 화상이 끊긴 지 사십 분이 지났는데도 사무실 안에서 아무도 자리에 앉지 않았다⁠.

염상혁이 먼저 터졌다⁠.

“⁠사장님⁠,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막내가 저쪽이랑 신호를 주고받았습니다⁠. 반룡산⁠, 기숙사 창문⁠, 신문지⁠. 저한테는 놀이에 나오는 용이라고 했습니다⁠. 다니엘 계정도 안 지웠습니다⁠. 오늘 밤 저 여자가 나온 것도 막내 때문입니다⁠.⁠”

금철은 군복 윗단추를 풀고 있었다⁠. 단추 하나를 푸는 데 오래 걸렸다⁠.

“⁠안다⁠.⁠”

상혁이 입을 벌렸다⁠. “⁠아신다고요⁠?⁠”

“⁠반룡산은 첫날부터 알았다⁠. 신문지는 네가 피드백 파일을 열어 본 날 나도 열어 봤다⁠.⁠”

“⁠그런데 왜 두셨습니까⁠?⁠”

“⁠두라고 했으니까⁠.⁠” 금철이 단추를 다 풀고 의자에 앉았다⁠. “⁠상혁아⁠, 나는 저 여자 눈이 서울에서 막내한테 붙어 있기를 바랐다⁠. 오늘 밤 저 여자 눈은 막내 얼굴에 붙어 있었다⁠. 그거면 됐다⁠.⁠”

명길은 귤 하나를 손에 쥔 채 멈췄다⁠. 상혁이 명길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금철을 보았다⁠. 상혁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하얘졌다⁠.

“⁠사장님⁠, 그럼 저는 뭘 한 겁니까⁠? 막내 감시하라고 하셨잖습니까⁠?⁠”

“⁠너는 네 일을 했다⁠.⁠” 금철이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그 얘기는 막내 앞에서 안 한다⁠.⁠”

상혁이 입을 다물었다⁠. 창가의 조장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조장은 명길의 어깨를 한 번 짚고 나갔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막내⁠, 귤 다 주웠으면 에릭 지워라⁠. 오늘 말고 월요일 밤에⁠. 서울 사람들이 주말 동안 에릭 얼굴을 실컷 들여다보게 둬라⁠.⁠”

*

11월 30일 월요일 밤 열 시 사십 분⁠. 명길은 에릭의 계정을 지웠다⁠. 지우기 단추를 누르기 전에 대화창을 맨 처음부터 내려 읽었다⁠. 10월 31일 첫 인사⁠, 망고 산책 사진⁠, 콩이 사진⁠, 과제⁠, 신문지⁠, 고향 산⁠, 「⁠선생님은 왜 가셨습니까⁠?⁠」⁠, 어머니가 가라고 하셨대요⁠, 신문지를 새로 끼웠어요⁠. 사흘 전 밤 화면 속 얼굴⁠.

계정이 사라지자 화면에 회색 동그라미 하나가 남았다⁠. 「⁠탈퇴한 사용자⁠」⁠. 명길은 회색 동그라미를 오래 보았다⁠. 망고는 원래 없는 개였다⁠. 그래도 망고가 사라진 자리가 허전했다⁠.

상혁이 등 뒤에서 말했다⁠.

“⁠다니엘도 지워라⁠.⁠”

“⁠다니엘은 바이낸스 일이 끝나면 지우라고 하셨습니다⁠. 사장님이 아직 끝났다고 안 하셨습니다⁠.⁠”

“⁠너 그 말 지난달에도 했다⁠.⁠”

“⁠지난달에도 안 끝났습니다⁠.⁠”

상혁이 명길의 의자 등받이를 발로 툭 찼다⁠. 의자가 반 바퀴 돌았다⁠. 명길은 의자를 도로 돌려 앉았다⁠. 휴대전화 속 다니엘은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

12월 1일 화요일 오후⁠, 금철이 명길을 옥상으로 불렀다⁠. 18층 건물의 옥상에는 물탱크와 빨랫줄이 있었고⁠, 빨랫줄에 누군가의 작업복이 얼어 있었다⁠. 바람이 세서 명길은 점퍼 지퍼를 목까지 올렸다⁠. 금철은 양복 위에 외투도 걸치지 않았다⁠. 손에 귤 하나를 쥐고 있었다⁠.

“⁠막내⁠, 하나 알려 줄 것이 있다⁠.⁠”

“⁠예⁠.⁠”

“⁠면접은 처음부터 미끼였다⁠.⁠”

명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빨랫줄의 작업복이 바람에 한 번 펄럭였다가 얼어서 다시 굳었다⁠.

“⁠보안팀장이 김책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저 여자가 우리 버릇을 알아볼 줄 알았다⁠. 알아보면 저 여자는 버릇을 따라온다⁠. 따라오는 동안 저 여자 눈은 재하한테⁠, 에릭한테⁠, 너한테 붙어 있다⁠. 그동안 상혁이가 다른 문을 열었다⁠.⁠”

“⁠다른 문이 무엇입니까⁠?⁠”

“⁠너는 몰라도 된다⁠. 11월 초부터 상혁이가 서울의 다른 사람하고 따로 일을 했다⁠. 그 사람은 보안팀장한테 아무 말도 안 했다⁠.⁠”

명길은 재하가 넘긴 지갑팀 소개를 떠올렸다⁠. 이름 세 개가 있었다⁠. 새 프로그램을 서버에 올리는 사람이 둘이었다⁠. 명길은 이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이를 물었다⁠.

“⁠사장님⁠, 저를 미끼로 쓰셨습니까⁠?⁠”

“⁠그렇다⁠.⁠”

“⁠알고 계셨으면서⁠, 제가 저쪽한테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고 계셨으면서⁠.⁠”

“⁠다 알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저 여자 눈이 너한테 붙어 있으면 됐다⁠.⁠” 금철이 귤껍질을 한 줄로 벗기기 시작했다⁠. “⁠막내⁠, 너도 다니엘로 사람을 미끼로 썼다⁠. 바이낸스 엔지니어는 딸 이야기를 하다가 일자리를 잃었을 거다⁠. 너는 엔지니어 딸 사진을 아직도 휴대전화에 넣고 다니지⁠.⁠”

명길의 손이 점퍼 안주머니로 갔다가 멈췄다⁠.

“⁠그게 다르다고 말하고 싶으냐⁠?⁠”

“⁠다릅니다⁠.⁠”

“⁠뭐가 다르냐⁠?⁠”

“⁠엔지니어는 다니엘을 몰랐습니다⁠. 저는 사장님을 압니다⁠.⁠”

금철의 손에서 귤껍질이 끊어졌다⁠. 금철이 귤껍질을 끊은 것을 명길은 처음 보았다⁠. 금철은 끊어진 껍질 두 조각을 내려다보다가⁠, 바람에 날려 보냈다⁠. 껍질이 옥상 난간 너머로 사라졌다⁠.

“⁠그래서 너한테 말하는 거다⁠. 모르는 사람한테는 안 한다⁠.⁠”

금철이 귤을 반으로 갈라 반쪽을 명길에게 내밀었다⁠. 명길은 받지 않았다⁠. 금철은 반쪽을 다시 쥐었다⁠.

“⁠평양 송이가 급하다⁠. 바이낸스 송이가 묶여서 열다섯 상자 기한이 12월 15일이다⁠. 우리 사무실이 서른 상자를 못 채우면 너희 어머니와 은정이⁠, 우리 집사람과 딸⁠, 상혁이 처자⁠, 조장 식구까지 지방으로 간다⁠. 막내 하나가 미끼로 쓰이는 것과 식구 열한 명이 짐을 싸는 것 중에 무엇이 무겁냐⁠?⁠”

“⁠열한 명입니까⁠?⁠”

“⁠열한 명이다⁠. 내가 셌다⁠.⁠”

바람이 멈췄다⁠. 방송탑 꼭대기의 붉은 등이 대낮인데도 깜박였다⁠. 명길은 열한 명을 머릿속으로 셌다⁠. 어머니⁠, 은정⁠, 금철의 아내와 딸⁠, 상혁의 아내와 갓난아기⁠, 조장의 식구⁠. 조장의 식구가 몇인지 명길은 몰랐다⁠. 금철은 알았다⁠.

“⁠금요일 새벽이다⁠. 12월 4일⁠, 평양 시간 다섯 시 오 분⁠.⁠”

“⁠바이낸스와 같은 시각입니다⁠.⁠”

“⁠같은 시각이 손에 익는다⁠. 조장 말이다⁠.⁠” 금철이 귤 반쪽을 입에 넣었다⁠. “⁠너는 바이낸스 때처럼 바깥을 본다⁠. 가람엑스 공지⁠, 이용자 게시판⁠, 보안팀 움직임⁠. 저쪽 보안팀장은 지금 회사에 없다⁠. 대기 발령이다⁠. 그래도 저쪽이 알아차리는 순간을 네가 제일 먼저 외친다⁠.⁠”

“⁠제가 못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럼 상혁이가 한다⁠. 그리고 너는 금요일 아침에 단둥행 기차를 탄다⁠. 혼자⁠.⁠”

금철이 옥상 문을 열었다⁠. 계단에서 따뜻한 공기가 올라왔다⁠.

“⁠막내⁠, 네가 바깥을 보는 게 낫다⁠. 상혁이는 너무 크게 외친다⁠.⁠”

*

12월 2일 수요일 밤⁠, 상혁이 해바라기씨 봉지를 들고 명길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지난 금요일 이후로 상혁은 명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닷새 만이었다⁠.

“⁠막내⁠, 이제 알았지⁠? 네 노래는 반주였다⁠.⁠”

“⁠알았습니다⁠.⁠”

“⁠나도 몰랐다⁠. 사장님이 나한테도 반만 말씀하셨다⁠.⁠” 상혁이 해바라기씨를 하나 까서 명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화해하자는 손짓이었다⁠. “⁠금요일에 끝나면 나는 23일 백일에 맞춰 평양 간다⁠. 너도 간다⁠. 다 간다⁠. 연말 총화 끝나면 사무실 문 닫는다는 말도 있다⁠.⁠”

“⁠문을 닫습니까⁠?⁠”

“⁠미국 놈들이 중국한테 우리 같은 회사 명단을 넘겼단다⁠. 공안이 요새 서탑 송이 가게들을 하나씩 둘러본다⁠. 류 사장네도 다녀갔다⁠.⁠”

상혁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송이 트럭 편으로 새 사진이 왔다고 했다⁠. 강보를 벗은 아기가 엄마 팔에 안겨 처음으로 웃고 있었다⁠. 잇몸이 다 보였다⁠.

“⁠봐라⁠. 웃는다⁠. 나 닮았다⁠.⁠”

“⁠선배님 닮았으면 영업을 잘하겠습니다⁠.⁠”

“⁠영업은 엄마 닮아야 한다⁠. 엄마는 송이 남쪽 북쪽 안 지어낸다⁠.⁠”

상혁이 웃었다⁠. 웃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막내⁠, 금요일 새벽에 딴생각 하지 마라⁠. 네가 딴생각 하면 내 딸 첫 웃음이 날아간다⁠. 이건 협박 아니다⁠. 부탁이다⁠.⁠”

“⁠알겠습니다⁠.⁠”

“⁠알겠다는 말 말고⁠.⁠”

명길은 책상 위 해바라기씨를 집어 입에 넣었다⁠. 짰다⁠.

“⁠선배님 따님 웃음이 날아가는 일은 없게 하겠습니다⁠.⁠”

상혁이 명길을 한참 보았다⁠. 지난 금요일 아침에도 들은 문장이었다⁠. 상혁은 알아차린 얼굴로 봉지를 접었다⁠.

*

12월 3일 목요일 오후 네 시⁠, 단둥으로 가는 송이 트럭이 건물 뒤 골목에 들어왔다⁠. 진짜 송이 상자 열두 개 사이에 사무실 사람들의 짐 상자 하나가 끼어 갔다⁠. 막내가 짐 상자를 꾸리는 날이었다⁠.

금철이 손 크림 다섯 개를 상자 바닥에 깔았다⁠. 은정 몫 두 개⁠, 금철의 딸 몫 세 개였다⁠. 금철은 크림 위에 명길의 편지 봉투를 올렸다⁠. 풀칠하지 않은 채로 금철의 책상에 두었던 봉투였는데⁠, 이제는 입구가 풀로 단정하게 붙어 있었다⁠.

“⁠사장님이 붙이셨습니까⁠?⁠”

“⁠읽고 붙였다⁠. 다음 사람이 뜯을 때 찢어지지 말라고⁠.⁠”

금철은 자기 봉투도 하나 넣었다⁠. 겉봉에 딸의 이름 대신 「⁠학과 학생 황씨⁠」라고만 적혀 있었다⁠. 명길이 겉봉을 보고 있자 금철이 상자 덮개를 덮었다⁠.

상혁은 아기 내복 두 벌을 넣었다⁠. 중국 시장에서 산 노란 내복이었고⁠, 가슴에 오리가 수놓여 있었다⁠. 상혁은 내복을 세 번 접었다 폈다 하다가 결국 오리가 위로 오게 넣었다⁠.

마지막으로 조장이 왔다⁠. 조장은 말없이 분유 두 통을 상자 귀퉁이에 끼웠다⁠. 상혁이 분유 통을 보고 눈이 커졌다⁠.

“⁠조장 동지⁠, 아기가 있으셨습니까⁠?⁠”

조장은 대답 대신 테이프로 상자를 감았다⁠. 테이프를 세 바퀴 돌리고 이로 끊었다⁠. 상자 옆면에 매직으로 「⁠송이 견본 — 반품⁠」이라고 쓰고 돌아섰다⁠. 명길은 탕비실 거울 앞에서 맡았던 분유 냄새를 떠올렸다⁠. 열한 명 가운데 명길이 셀 수 없던 숫자가 상자 귀퉁이에 분유 두 통으로 들어 있었다⁠.

트럭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금철은 트럭의 꽁무니가 큰길로 사라질 때까지 골목에 서 있었다⁠.

*

12월 3일 목요일 밤 열한 시⁠, 사무실 불이 다 꺼지고 명길의 모니터만 켜져 있었다⁠. 금철은 칸막이 안 간이침대에서 잤고⁠, 상혁과 조장은 평양 시간 새벽 네 시에 나오기로 했다⁠. 막내는 사무실을 지켰다⁠.

명길의 화면에는 가람엑스의 공지 화면과 이용자 게시판이 떠 있었다⁠. 화면 맨 아래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보안 취약점 신고 — 가람엑스 보안팀이 24시간 확인합니다⁠」⁠. 누구든 메일을 보낼 수 있는 주소였다⁠.

이용자 게시판에는 한밤에도 글이 올라왔다⁠. 「⁠바이낸스 다음은 어디냐⁠」 「⁠가람엑스 보안 이상 무라던데 믿어도 됨⁠?⁠」 밑에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이상 무는 군대 말 아님⁠?⁠」 「⁠대표가 군대 다녀와서 그럼⁠」 「⁠그럼 이상 유는 언제 뜸⁠」⁠. 명길은 댓글을 소리 없이 따라 읽다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손등으로 눌렀다⁠. 저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의 돈이 다섯 시간 뒤에 송이가 될 것이었다⁠.

명길은 점퍼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다니엘 추의 계정이 그대로 있었다⁠. 골든레트리버⁠, 저수지 둘레길⁠, 피아노 발표회⁠. 지우지 않은 단 하나의 사람이었다⁠. 다니엘의 메일 주소도 살아 있었다⁠.

명길은 신고 주소를 한 번 소리 내지 않고 입술로 읽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엎어 놓았다⁠.

벽에서 평양 시간 시계가 열두 시를 넘겼다⁠. 12월 4일 금요일이었다⁠. 다섯 시 오 분까지 다섯 시간이 남아 있었다⁠. 명길은 엎어 둔 휴대전화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휴대전화가 차가웠다가⁠, 천천히 명길의 체온을 닮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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