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73자)

대기 발령

8조 해킹한 정찰총국 막내 해커 · 금나율

2026년 11월 27일 금요일 밤 아홉 시 십이 분⁠, 서울 강남⁠. 김옥화는 화면 속 붉은 배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지 위로 군복 깃이 있었고⁠, 깃 위로 열다섯 해 늙은 얼굴이 있었다⁠. 눈가가 내려앉았고 머리가 짧아졌지만⁠, 생각할 때 아래턱을 조금 내미는 버릇은 그대로였다⁠.

“⁠황금철 선배님⁠.⁠”

옥화의 입에서 남쪽 말투가 빠져나갔다⁠. 등 뒤에서 차승규가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고⁠, 레이철 문이 숨을 멈추는 소리가 났다⁠. 옥화는 돌아보지 않았다⁠.

“⁠동무 말투가 많이 변했소⁠. 끝이 올라가오⁠.⁠” 금철이 화면 가까이 얼굴을 댔다⁠. “⁠2011년 3월⁠, 평양역 대합실⁠. 동무는 함흥행이 아니라 신의주행 표를 쥐고 있었소⁠. 외투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나는 연구소 출장 가는 길이었고⁠.⁠”

“⁠압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봤소⁠. 그 뒤로도 못 봤다고 했소⁠.⁠”

“⁠압니다⁠. 선배님이 보셨다는 것도 압니다⁠.⁠”

금철이 잠깐 웃었다⁠. 웃음이 짧아서 옥화는 화면이 한 번 끊겼다가 이어진 줄 알았다⁠.

“⁠오늘 면접은 여기까지요⁠. 과제는 없소⁠.⁠”

“⁠선배님⁠, 하나만 묻겠습니다⁠. 그 아이를 왜 저한테 보내셨습니까⁠?⁠”

“⁠동무가 알아볼 줄 알았으니까⁠.⁠”

금철이 손을 뻗었다⁠. 화면이 까맣게 꺼졌다⁠. 「⁠상대방이 회의를 종료했습니다⁠」⁠. 미끼 노트북 화면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과제 파일도⁠, 접속도⁠, 숫자도 없었다⁠. 국정원 기술 요원이 빈 화면을 오 분 동안 노려보다가 헤드폰을 벗었다⁠.

레이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김 팀장님⁠, 저 남자를 아십니까⁠?⁠”

옥화는 꺼진 화면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김책 연구소 선배입니다⁠. 제가 떠난 밤에 저를 본 사람입니다⁠.⁠”

승규가 일어섰다⁠. 먹던 것이 없었다⁠. 손이 빈 채로 탁자를 짚었다⁠.

“⁠팀장님⁠, 그 얘기 열다섯 해 전 조사 때 하셨어요⁠?⁠”

“⁠안 했습니다⁠.⁠”

*

11월 28일 토요일 오전 열 시⁠, 국정원이 빌린 강남의 한 오피스텔⁠. 창문에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고⁠, 탁자 하나에 의자 셋이 놓여 있었다⁠. 승규는 그냥 빌린 사무실이라고 말했지만⁠, 옥화는 열다섯 해 전 조사실의 의자와 같은 높이라는 것을 앉자마자 알았다⁠.

승규 옆에 처음 보는 과장이 앉았다⁠. 과장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승규도 오늘은 먹지 않았다⁠.

“⁠김옥화 씨⁠, 2011년 평양역에서 황금철을 봤다는 사실을 왜 진술하지 않았습니까⁠?⁠”

“⁠황 선배가 저를 보고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남쪽에서 그 이름을 말하면⁠, 언젠가 그 이름이 북쪽으로 새어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국정원에서 새어 간다고요⁠?⁠”

“⁠어디서든 새어 갑니다⁠. 저는 그 사람한테 빚이 있었습니다⁠.⁠”

과장이 볼펜으로 수첩을 두드렸다⁠. “⁠그 사람이 지금 정찰총국 상좌이고⁠, 김옥화 씨 회사를 털려고 아이를 보냈습니다⁠. 아이를 보낸 까닭이 김옥화 씨가 알아볼 줄 알아서랍니다⁠. 이걸 저희가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옥화는 과장을 보지 않고 승규를 보았다⁠. 승규가 처음으로 옥화의 눈을 피했다⁠.

“⁠차 선생님도 그렇게 읽으십니까⁠?⁠”

“⁠팀장님⁠.⁠” 승규가 탁자 위 손을 깍지 꼈다⁠. “⁠저쪽이 팀장님을 알고 보냈다면⁠, 팀장님이 저쪽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제가 위에 어떻게 증명합니까⁠? 저는 믿어요⁠. 그런데 제가 믿는 건 서류에 안 들어가요⁠.⁠”

“⁠그럼 무엇이 들어갑니까⁠?⁠”

“⁠빠뜨린 이름이 하나 있어요⁠.⁠” 승규가 수첩을 펼쳤다⁠. 2011년이라고 적힌 장이었다⁠. 옥화가 말한 이름들 밑에 줄이 그어져 있었다⁠. “⁠열다섯 해 전에 팀장님 조건이 다섯 개였잖아요⁠. 그중 하나가 어머니 이름은 서류에 쓰지 말아 달라는 거였어요⁠. 그건 지켰어요⁠. 이름 하나를 지켜 드렸는데⁠, 팀장님은 이름 하나를 저한테 숨기셨네요⁠.⁠”

옥화는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반박할 말이 있었고⁠, 반박하면 안 되는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과장이 수첩을 덮었다⁠. “⁠당분간 가람엑스 일에서 손 떼십시오⁠. 재하 계정은 저희가 넘겨받습니다⁠.⁠”

“⁠아이한테 말을 거는 손은 저 하나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과장이 승규를 보았다⁠. 승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탁자 끝에 승규가 들고 온 귤 봉지가 묶인 채로 있었다⁠. 승규가 먹을 것을 사 와서 풀지도 않은 날은 옥화가 아는 한 처음이었다⁠.

*

토요일 오후⁠, 노원 아파트 현관 벨이 울렸다⁠. 문을 열자 윤재하가 편의점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봉지 안에 고양이 간식과 컵떡볶이 두 개가 들어 있었다⁠.

“⁠팀장님⁠, 태강 씨가 주소 알려 줬어요⁠. 혼나실 것 같아서 왔어요⁠.⁠”

“⁠혼나는 건 제 일입니다⁠. 재하 씨가 왜 옵니까⁠?⁠”

“⁠제가 콩이 사진 너무 많이 보내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반룡이가 현관으로 나와 재하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재하가 쪼그려 앉아 고양이 간식을 뜯었다⁠. 반룡이가 간식을 먹는 동안 재하가 바닥을 보며 말했다⁠.

“⁠팀장님⁠, 저 그날 화면 뒤에서 다 봤어요⁠. 그 사람이 팀장님 이름 부를 때요⁠. 무서웠는데⁠, 이상하게 그 아저씨도 무서워하는 것 같았어요⁠. 무서운 사람이 무서워하는 거⁠, 그거 더 무섭던데요⁠.⁠”

옥화는 컵떡볶이 뚜껑을 열었다⁠. 김이 안경에 서렸다⁠. 안경을 벗자 재하의 얼굴이 흐려졌다⁠.

“⁠재하 씨⁠, 지갑팀 배 선임님⁠, 요즘 어떻습니까⁠?⁠”

“⁠금요일에 또 연차 쓰셨어요⁠. 오늘은 회사에 나와 계세요⁠. 토요일인데요⁠.⁠”

옥화는 젓가락을 멈췄다⁠. 반룡이가 빈 간식 봉지를 핥는 소리만 났다⁠.

*

11월 30일 월요일 아침 여덟 시⁠, 대표실 탁자에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인사 발령 — 보안팀장 김옥화⁠, 2026년 12월 1일부터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 발령⁠」⁠. 강도원은 오늘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목요일 투자 설명회는 잘 끝났다고 홍보팀장이 사내 메신저로 알렸고⁠, 대표 얼굴은 설명회 이후로 한결 편해 보였다⁠.

“⁠팀장님⁠, 국정원에서 공문이 왔어요⁠. 보안팀장이 수사 협조 대상이라 당분간 회사 일에서 빼 달라고요⁠. 저는 따르는 거예요⁠.⁠”

“⁠따르시는 김에 하나만 더 따라 주십시오⁠. 지갑팀 배 선임의 서버 권한을 당분간 묶어 주십시오⁠.⁠”

“⁠배 선임은 왜요⁠?⁠”

“⁠금요일마다 연차를 쓰고⁠, 외부 자문을 하고⁠, 토요일에 혼자 회사에 나옵니다⁠.⁠”

“⁠그게 다예요⁠?⁠”

“⁠지금은 그게 다입니다⁠.⁠”

강도원이 서류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팀장님⁠, 배 선임은 우리 회사에서 열여섯 해 일한 사람이에요⁠. 우리 지갑을 처음 만든 사람이고요⁠. 팀장님은 지금 국정원 조사 받는 사람이에요⁠. 둘 중에 누구 말을 들어야 해요⁠? 은행 실사팀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은행 실사팀은 돈이 나간 다음에 옵니다⁠.⁠”

“⁠팀장님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근데 지금 배 선임 권한을 묶으면 지갑팀은 둘이 다섯 명 일을 해요⁠. 그러다 사고 나면요⁠?⁠”

옥화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강도원의 걱정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갑팀을 셋으로 둔 대표가 꺼내는 걱정이라 더 답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출입증은 오늘 저녁 여섯 시에 꺼져요⁠. 짐은 두셔도 돼요⁠. 금방 돌아오실 거예요⁠. 그렇게 믿어요⁠.⁠”

강도원이 손을 내밀었다⁠. 옥화는 손을 잡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대표실을 나오면서 옥화는 보도자료 초안이 아직 탁자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보안 이상 무⁠」⁠.

*

오후 세 시⁠, 옥화는 짐을 챙기기 전에 지갑팀 자리에 한 번 더 들렀다⁠. 우 책임은 자리에 없었고⁠, 배 선임은 모니터 두 대 앞에서 김밥을 먹고 있었다⁠. 노트북의 「⁠프리랜스 어드바이저⁠」 스티커 옆에 스티커가 하나 더 늘어 있었다⁠. 이번에는 싱가포르 사자 머리였다⁠.

“⁠배 선임님⁠, 싱가포르 다녀오셨습니까⁠?⁠”

배 선임이 김밥을 씹다가 멈췄다⁠. “⁠팀장님⁠, 대기 발령 받으셨다면서요⁠. 소문 다 났어요⁠.⁠”

“⁠내일부터입니다⁠. 오늘은 아직 팀장입니다⁠.⁠”

“⁠그럼 팀장님으로서 마지막으로 물어보시는 거네요⁠.⁠” 배 선임이 의자를 돌려 옥화를 똑바로 보았다⁠. “⁠스티커는 자문하는 회사에서 보내 준 거예요⁠. 싱가포르 회사니까 사자겠죠⁠. 팀장님⁠, 저도 하나 물어볼게요⁠. 국정원 사람이 팀장님 조사한다면서요⁠? 팀장님이 북에서 오셔서요⁠?⁠”

옥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배 선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저는 열여섯 해 동안 이 회사 지갑 만들었어요⁠. 북에서 온 사람이 저더러 의심스럽다고 하면⁠, 저는 누구한테 억울하다고 해요⁠?⁠”

지갑팀 자리의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옥화는 배 선임의 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틀린 데가 없는 말이 가장 아팠다⁠.

“⁠억울하시면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대신 회사 노트북으로는 자문 일 하지 마십시오⁠. 지난번에 드린 부탁 그대로입니다⁠.⁠”

“⁠안 한다고 했잖아요⁠.⁠”

배 선임이 김밥 은박지를 구겨 휴지통에 던졌다⁠. 은박지가 휴지통 가장자리를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배 선임은 줍지 않았다⁠. 옥화가 허리를 숙여 주워 휴지통에 넣었다⁠.

*

오후 다섯 시 반⁠, 옥화는 주태강을 비상계단으로 불렀다⁠. 태강은 계단에 앉자마자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팀장님 진짜 가세요⁠? 저 혼자 보안팀이에요⁠? 보안팀이 저 하나면 이건 보안 혼자예요⁠.⁠”

“⁠두 사람 더 있습니다⁠.⁠”

“⁠그분들은 아홉 시에 오셔서 여섯 시에 가세요⁠. 새벽에는 저밖에 없어요⁠.⁠”

“⁠그래서 태강 씨한테 부탁합니다⁠.⁠”

옥화는 수첩을 내밀었다⁠. 맨 앞 장에 지갑팀 세 사람의 이름이 있었고⁠, 「⁠배⁠」 옆에 동그라미 두 개가 눈사람처럼 겹쳐 있었다⁠.

“⁠새벽 당직 때 이상한 것이 들어오면⁠, 신고 메일이든 전화든 경보든⁠, 저한테 바로 전화하십시오⁠. 대기 발령이어도 제 휴대전화는 안 꺼집니다⁠.⁠”

“⁠이상한 거 기준이 뭐예요⁠?⁠”

“⁠태강 씨가 떡볶이로 바꿔 볼 수 없는 숫자입니다⁠.⁠”

태강이 수첩을 받아 들고 눈사람을 한참 보았다⁠.

“⁠팀장님⁠, 이거 진짜 눈사람 아니죠⁠?⁠”

“⁠아닙니다⁠.⁠”

“⁠알았어요⁠. 눈사람 지킬게요⁠.⁠”

*

밤 열한 시⁠, 옥화의 노트북은 회사 망에서 끊겨 있었다⁠. 출입증은 여섯 시 정각에 꺼졌고⁠, 로비 출입문은 옥화의 카드에 빨간 불을 켰다⁠. 경비원이 미안한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

집 식탁에서 옥화는 개인 휴대전화로 구직 사이트에 들어갔다⁠. 재하의 계정은 이제 국정원이 쥐고 있었지만⁠, 에릭의 공개 프로필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프로필 사진의 망고가 혀를 내밀고 있었다⁠. 옥화는 망고의 혀를 오래 보았다⁠.

밤 열한 시 사십 분⁠, 화면을 새로 고치자 망고가 사라졌다⁠. 회색 동그라미 하나가 남았다⁠. 이름 칸에 「⁠탈퇴한 사용자⁠」⁠.

옥화는 승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승규는 신호가 한 번 가기 전에 받았다⁠.

“⁠차 선생님⁠, 에릭이 없어졌습니다⁠.⁠”

“⁠압니다⁠. 저희 쪽 재하 계정 대화창도 다 비었어요⁠. 저쪽이 지운 거예요⁠.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요⁠.⁠”

“⁠그 아이는요⁠?⁠”

승규가 한참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것도 씹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팀장님⁠, 이제 그 친구한테 닿을 줄이 하나도 없어요⁠.⁠”

옥화는 전화를 내려놓았다⁠. 반룡이가 식탁에 올라와 휴대전화 화면 위에 앉았다⁠. 회색 동그라미가 고양이 배 밑으로 사라졌다⁠. 옥화는 고양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창밖으로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첫눈은 아직이었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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