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13자)

사리 만조 전날 밤, 길드장의 왼손 장갑이 녹았다

던전 안전 감독관 · 피오담

11월 30일 화요일 새벽 네 시⁠, 4층 바위턱에서 첫 고리 교체가 있었다⁠. 1조 짐꾼 열하나가 허리 벨트에서 고리를 풀어 바구니에 넣었고⁠, 태경은 새 고리를 하나씩 비틀어 건넸다⁠. 바구니에 쌓인 헌 고리는 여섯 시간 만에 쇠 빛깔이 흐려져 있었다⁠. 위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구니에 닿을 때마다 쉭 하고 작은 김이 올랐다⁠.

4층부터는 빛이 달랐다⁠. 바위 벽 전체가 안에서부터 푸르게 비쳤고⁠, 낭떠러지 아래 어딘가에서 파도 소리가 올라왔다⁠. 바다 밑에 있는 던전인데 안에 또 바다가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콧속이 소금기로 따가웠다⁠.

쉬는 시간에 짐꾼들은 바위턱에 둘러앉아 핫팩을 반찬통 밑에 깔았다⁠. 승재가 멸치볶음 뚜껑을 열자 갑수가 젓가락을 먼저 넣었다⁠.

“⁠반장님⁠, 그거 제 거예요⁠. 엄마가 바꿔 먹지 말랬어요⁠.⁠”

“⁠네 엄마가 나한테는 말 안 했어⁠.⁠” 갑수가 멸치를 씹으며 태경의 장조림을 넘겨다보았다⁠. “⁠감독관님 건 안 바꿔 먹으면 되지⁠.⁠”

태경은 장조림 통을 갑수 앞으로 밀었다⁠. 갑수가 놀란 얼굴로 태경을 보다가 메추리알 하나만 집었다⁠.

“⁠강화 때 진구가 장조림을 좋아했어⁠.⁠” 갑수가 메추리알을 입에 넣고 한참 씹었다⁠. “⁠맨날 엄마 장조림 자랑을 했지⁠.⁠”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바위턱 끝에서 예순 넘은 짐꾼 오씨가 배낭끈을 고쳐 매다 손을 떨었다⁠. 승재가 일어나 오씨의 배낭에서 물통 두 개를 꺼내 제 배낭에 옮겼다⁠. 태경은 못 본 척 고리 바구니를 정리했다⁠.

*

오후 두 시⁠, 6층⁠. 줄길이 가장 긴 층이었다⁠. 낭떠러지 건너 바위턱까지 오십 미터를 밧줄 두 가닥이 이었고⁠, 밧줄 양 끝은 바위에 박은 쇠 말뚝에 묶여 있었다⁠. 짐꾼들은 이 층에서 위쪽 3조에게서 짐을 받아 아래로 넘겼다⁠.

태경은 3조 짐꾼의 고리부터 비틀었다⁠. 열두 시간짜리 고리였다⁠. 잠금쇠가 손가락 밑에서 말랑하게 물렀고⁠, 비튼 자리에서 푸른 연기가 실처럼 피어올랐다⁠. 열에 넷이었다⁠.

갑수는 줄길 입구에서 말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수의 손이 밧줄 위에서 떨었다⁠. 말뚝 머리가 푸르게 부풀어 있었다⁠. 갑수가 목에 건 오리 호루라기를 물었다⁠.

꽥⁠, 꽥⁠, 꽥⁠.

줄길 위의 짐꾼들이 딛고 있던 자리에서 멈췄다⁠. 1조도 3조도 바위턱으로 몸을 붙였다⁠. 소리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져 바다 소리에 섞였다⁠. 앞서가던 대원 둘이 돌아보았고⁠, 곧 무열이 바위턱으로 올라왔다⁠. 갑옷 무릎판에 푸른 얼룩이 번져 있었다⁠.

“⁠누가 불었습니까⁠?⁠”

“⁠내가 불었소⁠.⁠” 갑수가 호루라기를 입에서 뗐다⁠. “⁠말뚝이 삭았어⁠. 강화 6층도 말뚝부터 갔어⁠.⁠”

“⁠말뚝은 대원들이 새로 박습니다⁠. 한 시간이면 됩니다⁠.⁠” 무열이 3조 짐꾼들을 둘러보았다⁠. “⁠3조는 지금 멈추면 오늘 일당 반입니다⁠. 짐을 넘겨야 1조가 내려갑니다⁠.⁠”

태경이 무열과 갑수 사이로 들어갔다⁠.

“⁠작업을 멈춘 사람에게 불리한 처우를 하면 안 됩니다⁠. 일당을 깎는 것도 불리한 처우입니다⁠. 짐꾼은 위험이 우려되면 멈추고 대피할 수 있습니다⁠. 하청이어도 원청에 멈추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법은 압니다⁠.⁠” 무열이 태경을 내려다보았다⁠. “⁠만조까지 열네 시간 남았습니다⁠. 아직 7층도 못 갔습니다⁠. 감독관님은 법을 지키시고⁠, 저는 바닷물을 지키겠습니다⁠. 바닷물은 법을 안 봅니다⁠.⁠”

“⁠3조 고리 열에 넷이 삭았습니다⁠. 길드장님이 열두 시간으로 늘린 고리입니다⁠.⁠”

무열이 3조 고리 하나를 받아 쇠 장갑으로 비틀었다⁠. 장갑 속에서 고리가 휘어 부러졌다⁠. 무열은 부러진 고리를 오래 보았다⁠.

“⁠3조와 4조는 부두로 올라갑니다⁠. 일당은 다 줍니다⁠.⁠” 무열이 대원들에게 손짓했다⁠. “⁠남은 새 고리는 1조와 대원이 씁니다⁠. 짐은 우리가 직접 집니다⁠. 말뚝은 새로 박고요⁠.⁠”

대원들이 웅성거렸다⁠. 짐을 지는 대원은 없었다⁠. 무열이 제 망토를 벗어 접어서 배낭에 쑤셔 넣고 상자 하나를 어깨에 올렸다⁠. 대원들이 하나씩 상자를 들었다⁠.

갑수가 태경 옆으로 와서 낮게 말했다⁠. “⁠저 양반이 짐 지는 거 처음 봐⁠.⁠”

“⁠늦어지겠네요⁠.⁠”

“⁠늦어지지⁠. 세 시간은⁠.⁠” 갑수는 상자를 들고 비틀거리는 대원 하나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 친구 무릎 봐⁠. 칼은 휘둘러도 짐은 처음이야⁠. 허리로 들면 안 되는데⁠.⁠”

갑수가 줄길 입구로 가서 대원의 상자를 반쯤 받쳐 주었다⁠. “⁠다리로 들어⁠, 다리로⁠. 칼 쓰는 사람이 허리 나가면 우리가 업고 올라가야 돼⁠. 그건 일당에 없어⁠.⁠” 대원이 얼굴이 빨개져서 다리로 상자를 들었다⁠. 갑수가 호루라기를 조끼 속에 넣었다⁠. “⁠근데 꽥 소리가 먹혔어⁠. 오리가 일을 했네⁠.⁠”

*

밤 열한 시⁠, 7층에서 길이 막혔다⁠. 9층으로 내려가는 바위 계단이 아래에서 차오른 물에 반쯤 잠겨 있었다⁠. 물은 바다처럼 짜고 차가웠고 안에서 푸른빛이 맥박처럼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핵이 숨을 쉽니다⁠. 만조가 가까워져서요⁠.⁠” 무열이 말했다⁠. “⁠9층까지는 못 갑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무열은 7층 바위벽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벽에 사람 머리만 한 푸른 결정이 박혀 맥을 쳤다⁠. 맥을 칠 때마다 발밑 물이 한 뼘씩 올라왔다⁠.

“⁠중간 핵입니다⁠. 9층 핵이 위로 뻗은 숨구멍입니다⁠. 이걸 깨면 넘치는 물이 반으로 줍니다⁠. 아파트 일층은 지킵니다⁠.⁠”

“⁠깨러 가면 물이 더 올라옵니다⁠. 1조는 6층 위로 먼저 올려 보내십시오⁠.⁠”

무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태경의 말을 바로 받았다⁠. 갑수가 1조를 이끌고 계단을 거슬러 올라갔다⁠. 승재가 계단참에서 돌아보았다⁠. 태경은 손짓으로 가라고 했다⁠.

대원 넷이 망치를 들고 중간 핵 앞에 섰고⁠, 핵이 맥을 칠 때마다 망치가 튕겨 나왔다⁠. 푸른 물이 벽에서 뿜어져 대원 하나를 무릎까지 적셨다⁠. 무열이 대원들을 물렸다⁠. 왼손 쇠 장갑을 벗지 않은 채로 핵에 손바닥을 댔다⁠.

쉬이익⁠. 쇠 장갑이 핵에 닿은 자리에서 푸른 김이 솟았다⁠. 손가락 판이 녹아 흘러내렸다⁠. 핵의 맥이 느려졌다⁠. 한 번 뛰고 쉬는 사이가 길어졌다⁠. 무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이를 악문 턱 근육이 수염 아래서 꿈틀거렸다⁠.

“⁠지금⁠!⁠”

대원들의 망치가 한꺼번에 떨어졌다⁠. 핵이 쩍 갈라지며 빛을 잃었다⁠. 무열이 손을 떼었을 때 왼손 쇠 장갑은 손목 판만 남아 있었다⁠. 맨손 손등이 푸르게 데어 있었다⁠.

“⁠핵은 쇠를 먹습니다⁠.⁠” 무열이 손목 판을 풀어 바닥에 던졌다⁠. “⁠먹는 동안은 숨이 느려지죠⁠. 이건 길드 사람만 압니다⁠. 감독관님 보고서에는 안 쓰셨으면 좋겠네요⁠.⁠”

“⁠보고서에 씁니다⁠.⁠”

무열이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아래에서 큰 물소리가 올라왔다⁠. 깨진 중간 핵 뒤에서 9층의 물이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

6층 줄길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1조 짐꾼들이 오십 미터 줄길을 한 사람씩 건넜다⁠. 낭떠러지 아래에서 푸른 물이 끓어오르며 올라왔다⁠. 태경은 맨 뒤에서 무열과 함께 줄길 입구에 닿았다⁠.

승재가 줄길 한가운데에 있었다⁠. 승재 앞에서 오씨가 건너고 있었다⁠. 오씨 허리에서 반짝이는 고리가 새것이었다⁠. 승재 허리의 고리는 쇠 빛깔이 흐렸다⁠. 4층 쉬는 시간⁠, 물통을 옮겨 주면서 바꿔 찬 것이었다⁠.

물이 줄길 아래 밧줄을 쳤다⁠. 줄길이 크게 출렁였고⁠, 승재의 고리에서 푸른 연기가 피었다⁠.

“⁠승재야⁠!⁠”

딱⁠. 고리가 두 동강 나며 승재의 몸이 아래 밧줄에서 미끄러졌다⁠. 태경은 고리도 채우지 않고 줄길로 몸을 던졌다⁠. 오른손으로 위쪽 밧줄을 감고 왼손으로 승재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이 젖어 미끄러웠다⁠. 태경은 손가락에 힘을 넣었다⁠. 고리를 비틀 때 쓰던 엄지와 검지였다⁠. 뒤에서 무열이 태경의 벨트를 움켜쥐고 버텼다⁠. 쇠 장갑 하나와 맨손 하나였다⁠.

승재가 아래 밧줄에 발을 걸고 올라왔다⁠. 끊어진 고리 반쪽이 낭떠러지 아래 물속으로 사라졌다⁠.

바위턱에 닿자 승재가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형⁠, 이거 특혜야⁠.⁠”

“⁠왜 바꿨어⁠.⁠”

“⁠아저씨 손 떨리잖아⁠.⁠” 승재가 오씨를 턱으로 가리켰다⁠. 오씨가 바위턱에 주저앉아 승재의 새 고리를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

12월 1일 수요일 새벽 네 시 사십 분⁠, 부두에서 공략조 예순 명의 머리 수를 세던 태경의 귀에 바위 안쪽에서 북 치는 소리가 울렸다⁠. 던전 입구에서 푸른 물이 쏟아졌다⁠. 부교가 물살에 들려 뒤집혔고⁠, 차단봉과 「⁠작업 중지⁠」 팻말이 함께 떠내려갔다⁠. 물은 부두를 덮고 해안 도로를 넘어 아파트 단지 지하 주차장으로 흘러 들어갔고⁠, 일층 창문 아래 한 뼘에서 멈췄다⁠.

태경은 숫자를 끝까지 셌다⁠. 예순⁠.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

갑수가 배낭에서 분홍 고무장갑 한 켤레를 꺼내 무열에게 내밀었다⁠. “⁠길드장님⁠, 손 데었잖아⁠. 이거라도 껴요⁠. 우리 마누라 설거지 장갑⁠.⁠”

무열은 분홍 장갑을 받아 데인 왼손에 끼었다⁠. 은빛 갑옷 끝에 분홍 손 하나가 달렸다⁠. 하늬가 드론을 띄우려다 태경 눈치를 보고 내렸다⁠. 대원들은 웃지 않으려고 바다만 보았다⁠.

구급차 뒷문 앞에서 승재가 은박 담요를 두르고 앉아 있었다⁠. 손목에 태경의 손가락 자국이 다섯 개 푸르게 남아 있었다⁠. 태경이 옆에 앉자 승재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공씨네⁠」였다⁠.

「⁠엄마 : 뉴스에 송도 물난리났다는데 물류쎈타는 괜찮니⁠」

「⁠엄마 : 태경이 너도 거기니 둘다 대답해⁠」

「⁠승재 : 물류센터 멀쩡해요 형도 멀쩡⁠」

“⁠거짓말 늘었다⁠.⁠”

“⁠형이 맨날 정확하게 말하니까 내가 반반 맞추는 거야⁠.⁠” 승재가 담요를 여몄다⁠. “⁠다음 사리 때도 들어갈 거야⁠. 보름 뒤⁠.⁠”

“⁠안 돼⁠.⁠”

“⁠형⁠, 오늘 일당 칠십 받았어⁠. 3조 아저씨들도 다 받았대⁠. 형이 무열이 아저씨 앞에서 법 읊어서⁠.⁠” 승재가 형 손에서 젖은 서류판을 빼앗아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러니까 다음에도 형이 같이 들어가⁠. 그럼 되잖아⁠.⁠”

태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승재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보다가 눈을 돌렸다⁠. 바다에서 올라온 해가 물에 잠긴 해안 도로를 하얗게 비췄고⁠, 경찰차 두 대가 물가에서 사이렌을 끈 채 멈춰 있었다⁠. 도로 위로 누군가의 슬리퍼 한 짝이 떠내려갔다⁠.

해가 뜰 무렵 하늬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뉴스 제목 둘이 나란히 떠 있었다⁠. 「⁠흑철 길드장⁠, 맨손으로 중간 핵 깨 송도 지켜⁠」⁠. 바로 아래에 「⁠감독관 공략 중지 하루⁠… 송도 해안 도로 침수⁠」⁠. 이어서 관측소 예보가 들어왔다⁠.

「⁠송도 던전 수위 예보 — 핵 9층 그대로 · 다음 사리 만조 12월 16일 목요일 아침 아홉 시 십 분 · 넘침 확률 구십팔 퍼센트 · 예상 범위 송도 해안 단지 전체⁠」

곧 과장 탁인규의 전화가 왔다⁠.

“⁠연합이 성명 냈다⁠. 감독관 하나 때문에 송도가 잠겼대⁠. 내일 아침 길드 연합 긴급 총회야⁠. 노동부 설명하러 네가 가⁠.⁠”

“⁠제가요⁠?⁠”

“⁠네가 멈췄잖아⁠.⁠” 인규가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고리 가져가⁠. 삭은 거⁠.⁠”

태경은 바닷물에 젖은 조끼 주머니를 뒤졌다⁠. 6층에서 3조 짐꾼에게서 받은 푸른 고리 하나가 손가락에 닿았다⁠. 바다 위 바위 절벽은 물을 다 토하고 조용히 푸른빛만 흘렸다⁠. 부두 끝 철망에 「⁠작업 중지⁠」 팻말이 떠밀려 와 거꾸로 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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