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29자)

국 대신 비늘차

던전 급식 조리사 · 윤바로

5월 6일 목요일 새벽 세 시⁠, 급식소 뒷문 앞 시멘트 바닥에 보라 비늘 멧돼지 세 마리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형광등 아래서 하늘색 앞치마를 두른 준기가 국자로 뜨거운 물을 비늘 뿌리에 붓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앞치마가 쪼그려 앉은 다리 사이로 늘어져 바닥을 쓸었다⁠.

“⁠결 반대로⁠. 살살 비틀어⁠.⁠”

“⁠엄마⁠, 아니 조리사님⁠. 이거 왜 안 빠져⁠?⁠”

“⁠물이 식었잖아⁠. 70도 다시 맞춰⁠.⁠”

준기가 탐침을 국솥에 꽂고 숫자를 기다렸다⁠. 68⁠, 69⁠, 70⁠. 국자로 물을 떠 비늘 뿌리에 붓자 힘줄이 오그라들었다⁠. 집게로 비틀자 비늘이 통째로 쑥 빠졌다⁠. 쟁반에 떨어지면서 땡 소리가 났다⁠. 준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빠졌다⁠!⁠”

“⁠한 장⁠.⁠” 봉춘이 옆에서 파란 장갑을 낀 채 열 장째 비늘을 쟁반에 내려놓았다⁠. “⁠쉰아홉 장 남았습니다⁠, 준기 씨⁠.⁠”

“⁠아저씨는 몇 장째예요⁠?⁠”

“⁠스물두 장째입니다⁠. 방패로 긁던 시절엔 하나도 못 건졌는데⁠, 반장님한테 배우고 나서 장인이 됐습니다⁠.⁠”

준기가 다음 비늘에 물을 부었다⁠. 이번에는 첫 번에 빠졌다⁠. 땡⁠. 앞치마 주머니에 꽂아 둔 분홍 장갑 한 켤레가 빠질 듯 흔들렸다⁠. 노란 테이프를 넘어갈 때 갈아 끼울 장갑이었다⁠.

*

네 시⁠, 뒷문으로 도윤이 들어왔다⁠. 정장에 태블릿⁠, 그리고 오늘은 삼각김밥이 두 개였다⁠. 바로 뒤에 주선애가 클립보드와 협회 측정기를 들고 따라 들어왔다⁠. 공청회에서 말한 대로 보스 공략 날 급식소를 보러 온 것이었다⁠.

도윤은 쟁반에 쌓여 가는 비늘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몇 장을 쓰십니까⁠?⁠”

“⁠육십 장이요⁠. 서른 명이 두 장씩⁠.⁠”

“⁠이백사십만 원입니다⁠.⁠” 도윤은 계산기를 켜지도 않았다⁠. 외워 둔 숫자였다⁠. “⁠이번 달 비늘 판매분은 헌터 월급 통장으로 들어갑니다⁠. 육십 장이면 헌터 열둘이 한 주 일한 돈입니다⁠.⁠”

“⁠지난가을엔 물약이 바닥난 채로 큰어미 앞에 섰다면서요⁠.⁠”

“⁠압니다⁠.⁠” 도윤이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 차가 85도 삼 분을 한 잔이라도 못 채우면 서른 명이 사흘 불통입니다⁠. 보스 공략은 실패하고⁠, 이번 분기 적자가 확정됩니다⁠. 확정되면 은행이 움직입니다⁠.⁠”

“⁠그럼 국 끓여요⁠? 국 먹고 내려가면 세 시간이에요⁠. 7층 무리 한가운데서 세 시간이 다 끝나 버려요⁠.⁠”

둘 사이에서 국솥 김이 올라갔다⁠. 주선애가 클립보드에 아무것도 적지 않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뒷문이 열리고 무겸이 들어왔다⁠. 공략 장비를 다 갖춘 차림이었다⁠. 갑옷 가슴판에 3월에 찌그러졌던 자국이 망치로 펴진 채 남아 있었다⁠.

“⁠대장님⁠.⁠” 도윤이 무겸에게 돌아섰다⁠. “⁠비늘차 없이 7층 무리를 뚫으면 물약이 몇 병 듭니까⁠?⁠”

“⁠스무 병⁠. 큰어미 앞에서 쓸 물약까지 치면 마흔 병이 모자랍니다⁠.⁠”

“⁠물약 마흔 병이면 사백만 원이 넘습니다⁠.⁠” 도윤의 엄지가 그제야 계산기 위에서 움직였다⁠. 한참 움직였다⁠. 태분은 국자를 쥔 채 엄지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국솥 뚜껑이 김에 밀려 달그락거렸다⁠.

“⁠육십 장 쓰십시오⁠.⁠” 도윤이 계산기를 껐다⁠. “⁠조건이 있습니다⁠. 서른 잔 모두 주 팀장님이 협회 측정기로 보십시오⁠. 한 잔이라도 85도 삼 분이 안 되면 그 솥은 아무도 마시지 않습니다⁠. 솥째 버립니다⁠.⁠”

“⁠버리면 비늘이 날아가요⁠.⁠”

“⁠비늘보다 서른 명 사흘이 비쌉니다⁠.⁠”

주선애가 그제야 클립보드에 무언가 적었다⁠.

*

다섯 시⁠, 국솥 둘에 비늘 서른 장씩이 들어갔다⁠. 태분은 두 솥에 탐침을 하나씩 꽂았다⁠. 83⁠, 84⁠, 85⁠. 타이머를 삼 분에 맞췄다⁠. 부엌에 비린내와 단내가 섞인 김이 가득 찼다⁠. 고친 후드가 웅 소리를 내며 김을 빨아올렸다⁠.

타이머가 울렸다⁠. 태분은 국자로 종이컵 서른 개에 차를 따랐다⁠. 컵마다 주선애가 협회 측정기를 댔다⁠. 맑음⁠, 맑음⁠, 맑음⁠. 스물두 번째 컵에서 주선애의 손이 멈췄다⁠.

“⁠이 잔만 가장자리가 조금 남습니다⁠.⁠”

부엌이 조용해졌다⁠. 태분이 스물두 번째 컵에 탐침을 꽂았다⁠. 84⁠. 국자로 마지막에 뜬 솥 가장자리 물이었다⁠. 태분은 컵을 들어 솥에 도로 붓고⁠, 솥 한가운데에서 새로 떠서 컵을 채웠다⁠. 탐침 85⁠. 주선애가 측정기를 댔다⁠. 맑았다⁠.

“⁠맑음⁠.⁠” 주선애가 클립보드에 동그라미를 쳤다⁠. 동그라미가 태분의 화이트보드 동그라미와 크기가 비슷했다⁠.

다섯 시 반⁠, 공략대 서른 명이 배식대 앞에 줄을 섰다⁠. 오늘은 아무도 새치기하지 않았다⁠. 대검 헌터가 컵을 받아 냄새를 맡고 얼굴을 찌푸렸다⁠.

“⁠조리사님⁠, 오늘 국은요⁠?⁠”

“⁠오늘은 국 없어요⁠. 국 대신 이거⁠.⁠”

“⁠이거 멧돼지 발 씻은⁠…⁠…⁠.⁠”

“⁠마셔요⁠. 다 마시고 다시 오면 한 잔 더 안 줘요⁠.⁠”

서른 명이 한꺼번에 컵을 비웠다⁠. 서른 개의 얼굴이 한꺼번에 찌그러졌고⁠, 누군가 갑옷 소매로 입을 닦는 소리가 줄 끝까지 이어졌다⁠. 봉춘이 배식대 뒤에서 몰래 웃었다⁠. 무겸이 마지막으로 컵을 비우고 빈 컵을 반납대에 올려놓았다⁠.

“⁠잔반 없음⁠.⁠”

여섯 시⁠, 공략대가 동굴 입구로 내려갔다⁠. 준기는 하늘색 앞치마를 두른 채 급식소 창 앞에 서서 1공략대의 갑옷 등이 돌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원래라면 저 줄 끝에 준기가 있었다⁠.

일곱 시⁠, 아침 배식 첫 줄이 빠지고 부엌이 잠깐 비었다⁠. 도윤은 배식대 끝에 서서 태블릿에 비늘 육십 장을 올리고 있었다⁠. 태분이 보리차 두 잔을 들고 가 하나를 배식대에 놓았다⁠.

“⁠학교는 왜 그만두셨습니까⁠?⁠” 도윤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첫날 후드 얘기 하실 때부터 궁금했습니다⁠.⁠”

“⁠같이 튀김 튀기던 언니가 작년 겨울에 폐를 반 잘랐어요⁠. 언니 수술실 들어가는 거 보고 두 달 뒤에 나왔어요⁠.⁠” 태분이 보리차를 불었다⁠. “⁠준기가 청운 붙었다길래⁠, 이왕이면 애 먹는 밥이나 하자 싶었고요⁠.⁠”

도윤이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보리차 잔을 들었다가 마시지 않고 손에 쥐고만 있었다⁠.

“⁠백야가 문 닫던 날⁠, 마지막 월급을 못 준 헌터가 쉰두 명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사무실에 남은 사람이 저 혼자였는데⁠, 다들 저한테 와서 물었습니다⁠. 언제 나오냐고⁠.⁠” 도윤이 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숫자밖에 대답할 게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숫자를 먼저 말합니다⁠. 나중에 말하면 늦습니다⁠.⁠”

태분은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도윤의 보리차에서 김이 가늘게 올라가다 끊겼다⁠.

*

여덟 시⁠, 배식대 옆에 놓아 둔 무전기가 지직거렸다⁠. 태분은 아침 이백 식 배식을 봉춘에게 넘기고 무전기를 들었다⁠.

“⁠급식소⁠, 1공략대⁠. 6층 계단 중간에 낙석입니다⁠. 길이 막혔습니다⁠. 돌아가면 두 시간 늦습니다⁠.⁠”

“⁠두 시간 늦으면요⁠?⁠”

“⁠7층 무리 한가운데서 비늘차가 끝납니다⁠.⁠” 무겸의 목소리가 지직거렸다⁠. “⁠다섯 시간이 7층 한복판에서 끝납니다⁠. 6층 바닥 계단참에서 한 번 더 마셔야 큰어미 굴까지 갑니다⁠.⁠”

“⁠우려서 삼십 분 안에 마셔야 돼요⁠. 여기서 끓여 보내면 내려가는 데만 한 시간이에요⁠.⁠”

“⁠그럼 6층에서 끓여야 합니다⁠.⁠”

무전기 너머로 바람 소리가 들어왔다⁠. 6층은 바람이 세다고⁠, 버너 불이 눕는다고 무겸이 말했었다⁠. 태분은 무전기를 쥔 채 창밖 동굴 입구를 보았다⁠. 지금 6층까지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은 급식소에 하나뿐이었다⁠. 하늘색 앞치마를 두르고 창 앞에 서 있었다⁠.

“⁠제가 갈게요⁠.⁠” 준기가 말했다⁠.

도윤이 배식대 앞에서 돌아섰다⁠. “⁠안 됩니다⁠. 수습 평가 보류 중인 신입이 혼자 6층에 내려가는 건 규정 위반입니다⁠. 사고 나면 길드 보험이 안 됩니다⁠.⁠”

“⁠혼자 아니에요⁠.⁠”

급식소 문간에서 목소리가 났다⁠. 하용태였다⁠. 2공략대는 오늘 쉬는 날이었다⁠. 용태는 아침을 먹으러 왔다가 무전을 들은 참이었다⁠. 손바닥을 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주먹만 한 불이 올라왔다⁠.

“⁠6층 계단은 제가 압니다⁠. 준기가 저 업고 올라온 길입니다⁠.⁠”

도윤이 용태를 보고⁠, 준기를 보고⁠, 태분을 보았다⁠. 태분은 준기를 보았다⁠. 아들을 6층에 보내는 숫자를 머리로 세지 않았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창고 선반에서 휴대용 버너와 손잡이 달린 들통⁠, 탐침 온도계⁠, 종이컵 한 줄을 꺼내 등짐에 넣었다⁠. 쟁반에서 비늘 예순 장을 세어 비닐에 싸서 맨 위에 얹었다⁠.

“⁠가⁠.⁠”

도윤이 계산기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둘이면 규정상 됩니다⁠. 비늘 육십 장은 제가 승인한 것으로 올리겠습니다⁠.⁠”

준기가 하늘색 앞치마를 벗으려다 말고 그대로 갑옷을 위에 걸쳤다⁠. 앞치마 자락이 갑옷 밑으로 비어져 나왔다⁠.

*

아홉 시 사십 분⁠, 무전기에서 준기 목소리가 들어왔다⁠. 숨이 찼다⁠.

“⁠엄마⁠, 6층 바닥 계단참⁠. 대장님 팀 아직 안 왔어⁠. 끓일게⁠.⁠”

“⁠버너 켜⁠. 바람 어느 쪽에서 와⁠?⁠”

“⁠왼쪽⁠. 불이 누워⁠.⁠”

“⁠용태 씨 등으로 바람 막아⁠. 들통 뚜껑 덮고⁠.⁠”

무전기 너머에서 버너 딸깍 소리가 났다⁠. 태분은 배식대를 두 손으로 짚었다⁠. 봉춘이 국자를 내려놓았다⁠. 주선애가 클립보드를 가슴에 안았다⁠. 도윤은 태블릿을 끄고 무전기만 보았다⁠.

“⁠탐침 꽂았어⁠. 71⁠.⁠”

“⁠기다려⁠.⁠”

“⁠75⁠. 엄마⁠, 바람이 세⁠.⁠”

“⁠뚜껑 열지 마⁠. 열면 처음부터야⁠.⁠”

“⁠79⁠. 80⁠. 용태가 등에 불 붙였어⁠. 손으로 들통 옆을 데워⁠.⁠”

“⁠용태 씨 손 안 데게 해⁠.⁠”

“⁠괜찮대⁠. 화염술사는 안 덴대⁠.⁠” 준기가 숨을 들이쉬었다⁠. “⁠82⁠. 83⁠. 엄마⁠, 대장님 팀 발소리 들려⁠.⁠”

“⁠숫자만 불러⁠.⁠”

“⁠84⁠.⁠”

급식소 안에서 아무도 숨을 쉬지 않았다⁠. 후드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85⁠!⁠”

“⁠타이머 삼 분⁠. 삼 분 동안 뚜껑 열지 마⁠. 불 줄이지 마⁠. 85 밑으로 떨어지면 다시 삼 분이야⁠.⁠”

“⁠알았어⁠.⁠”

삼 분은 길었다⁠. 무전기 너머에서 바람이 울고⁠, 갑옷 부딪는 소리가 다가오고⁠, 무겸이 “⁠확인⁠” 하는 소리가 들렸다⁠. 준기가 숫자를 불렀다⁠. 85⁠. 86⁠. 85⁠. 86⁠. 85⁠. 태분은 숫자가 85 밑으로 내려가지 않기만 바랐다⁠. 배식대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가 분홍 장갑이 뽀득거렸다⁠.

타이머 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들어왔다⁠. 삐삐삐⁠.

“⁠엄마⁠, 측정기⁠. 맑아⁠.⁠”

“⁠컵에 따라⁠. 국자로 들통 한가운데서⁠. 가장자리 물 말고⁠.⁠”

“⁠한가운데서⁠. 서른 잔⁠.⁠” 준기 목소리 뒤로 컵에 물 따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한참 뒤 무겸 목소리가 들어왔다⁠.

“⁠급식소⁠, 1공략대⁠. 서른 명 마셨습니다⁠. 잔반 없음⁠.⁠”

봉춘이 무릎을 쳤다⁠. 이번에도 소리가 안 났다⁠. 주선애가 클립보드에 무언가 길게 적었다⁠. 도윤은 무전기를 보며 서 있었다⁠. 삼각김밥 두 개가 주머니에서 그대로였다⁠.

“⁠준기 씨는 용태 씨랑 계단참에서 기다립니다⁠. 7층은 정식 대원만 들어갑니다⁠.⁠” 무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조리사님⁠, 큰어미 굴 앞입니다⁠.⁠”

“⁠밥은 올라와서 먹어요⁠.⁠”

“⁠확인⁠.⁠” 무겸이 잠깐 말을 멈췄다⁠. “⁠들어간다⁠.⁠”

무전기가 지직거렸다⁠. 지직거림이 길어지더니 뚝 끊겼다⁠. 태분은 무전기를 배식대 위에 내려놓았다⁠. 무전기 옆 반납대에 컵 서른 개가 포개져 있었다⁠. 새벽에 서른 명이 비우고 간 컵이었다⁠. 가장 위 컵 바닥에 보라 비늘 가루가 한 점 말라붙어 있었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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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귤까는중2026.11.06· 9화

    보스 공략 날 국 대신 비늘차라니. 도윤이 한 잔이라도 85도 안 되면 아무도 안 마신다고 조건 거는 거 너무 도윤다웠어요. 준기가 무전으로 엄마 지시 받으면서 바람 속에서 차 우리는 데서 울컥했습니다.

    • 윤바로작가2026.11.06

      엄마가 버너 앞에 못 가니 목소리만 내려보낸 날이었어요. 무전이 끊긴 다음 일은 마지막 화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