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71자)

이사회에 고무장갑을 끼고 갔다

던전 급식 조리사 · 윤바로

3월 30일 화요일 아침 아홉 시⁠, 청운 본관 4층 회의실 문 앞에서 태분은 가방을 열었다⁠. 분홍 고무장갑을 꺼내 손가락 하나씩 밀어 넣었다⁠. 조리복은 그대로 입고 위생모도 그대로 썼다⁠. 앞치마만 벗었다⁠. 발치에는 급식소에서 들고 온 하얀 아이스박스가 있었다⁠. 봉춘이 새벽에 손잡이에 테이프를 두 번 감아 주었다⁠.

테이프를 감으면서 봉춘은 이사회에 들어가는 법을 일러 주었다⁠. 봉춘이 아는 이사회는 2019년 던전이 처음 열렸을 때 한 번 불려 간 것이 전부였다⁠.

“⁠이사님들은 방패를 먼저 보여 줘야 합니다⁠, 반장님⁠. 처음 오 분은 아무 말도 안 하고 버티세요⁠. 저 사람들이 먼저 칼을 빼게⁠.⁠”

“⁠그래서 봉춘 씨는 어떻게 됐는데요⁠?⁠”

“⁠처음 오 분 버티다가 졸았습니다⁠.⁠”

“⁠그래서요⁠?⁠”

“⁠그날 등급이 하나 내려갔습니다⁠.⁠”

태분은 아이스박스 뚜껑을 닫으며 웃었다⁠. 봉춘은 진지했다⁠. 테이프를 한 번 더 감고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반장님은 졸지 마세요⁠.⁠”

회의실 안에는 긴 탁자를 따라 의자가 아홉 개 놓여 있었다⁠. 맨 안쪽에 머리가 하얗게 센 길드장이 앉아 있었다⁠. 젊을 때 S급 검사였다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돋보기안경을 이마에 올리고 휴대전화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양옆으로 이사 넷이 앉았다⁠. 운영이사⁠, 장비이사⁠, 대외이사⁠, 그리고 은행에서 보냈다는 사외이사⁠. 넷 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탁자 끝에 무겸이 앉아 있었고⁠, 무겸 옆에 준기가 앉아 있었다⁠. 준기는 엄마를 보자 의자 위에서 허리를 폈다⁠.

도윤이 화면 앞에 서서 리모컨을 들었다⁠. 태분이 들어서자 이사 하나가 휴대전화를 보며 고개만 까딱했다⁠. 태분은 아이스박스를 탁자 끝에 내려놓았다⁠. 쿵 소리가 났다⁠.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거기⁠, 휴대전화 내려놓고⁠.⁠”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운영이사가 고개를 들었고⁠, 장비이사가 고개를 들었고⁠, 사외이사가 휴대전화를 탁자에 엎었다⁠. 길드장이 바둑판 화면을 끄고 돋보기를 코로 내렸다⁠. 준기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밥 얘기 하는 자리잖아요⁠. 밥 먹을 땐 휴대전화 안 봐요⁠.⁠”

길드장이 휴대전화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조리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시작하지⁠.⁠”

*

도윤의 화면에 빨간 막대가 떴다⁠. 첫 출근 날 급식소에서 본 막대보다 하나가 더 길었다⁠. 3월 22일 7층 의뢰 취소가 막대 하나를 늘렸다⁠.

“⁠급식소를 외주로 돌리면 한 끼 원가가 사천이백 원으로 정해집니다⁠. 대신 검수 책임⁠, 위생 사고 책임이 업체로 넘어갑니다⁠. 지난주처럼 고기를 돌려보내다 의뢰가 날아가는 일도 없어집니다⁠.⁠”

화면이 넘어갔다⁠. 표 대신 사진 한 장이 떴다⁠. 초승달 깃발이 걸린 3층 건물이었다⁠. 유리문에 「⁠임대 문의⁠」 종이가 붙어 있었다⁠.

“⁠2025년 봄 백야 길드입니다⁠. 적자 석 달 만에 은행이 대출을 거둬 갔습니다⁠. 헌터 백칠십 명이 한 달 안에 흩어졌습니다⁠. 갈 데 없는 헌터 열하나가 허가 없는 던전에 들어갔고⁠, 둘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도윤의 목소리는 숫자를 읽을 때와 똑같았다⁠. “⁠저는 백야의 회계 담당이었습니다⁠. 대출 회수 통지서를 제가 받았습니다⁠.⁠”

사외이사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회의실에 에어컨 소리만 남았다⁠. 태분은 4층 재무이사실 서랍으로 들어가던 이 빠진 머그잔을 떠올렸다⁠. 잔 옆면의 흰 초승달이 화면 속 깃발과 같은 모양이었다⁠.

“⁠청운의 헌터는 이백 명입니다⁠. 저는 같은 통지서를 두 번 받고 싶지 않습니다⁠.⁠”

*

“⁠조리사님 말씀하시죠⁠.⁠” 길드장이 손짓했다⁠.

태분은 일어나서 아이스박스 뚜껑을 열었다⁠. 하얀 김이 위로 피어올랐다⁠. 맨 위에 비닐로 싼 고깃덩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날것⁠, 하나는 85도에서 삼 분 익힌 것이었다⁠. 태분은 무겸에게서 빌린 마력 측정기를 날고기 위에 댔다⁠. 유리판이 보랏빛으로 일렁였다⁠. 이사들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익힌 고기 위에 대자 유리판이 맑았다⁠.

“⁠85도에서 삼 분이에요⁠. 이 아래로 익히면 헌터가 사흘 동안 마력을 못 써요⁠. 3월 4일에 2공략대 셋이 그랬어요⁠. 제 잘못이었어요⁠.⁠”

장비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영이사가 손을 들었다⁠.

“⁠그 익힌 거⁠, 맛 좀 봐도 됩니까⁠?⁠”

태분은 집게로 익힌 고기 한 점을 집어 운영이사 앞 종이컵 뚜껑 위에 놓았다⁠. 운영이사가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이사 셋이 운영이사의 턱을 보았다⁠.

“⁠맛있네⁠. 소금 있습니까⁠?⁠”

“⁠회의 중엔 간식 없어요⁠.⁠”

운영이사가 손가락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길드장이 웃음을 삼키느라 돋보기가 콧등에서 흔들렸다⁠. 태분은 아이스박스 아래 칸에서 플라스틱 도시락 하나를 꺼냈다⁠. 뚜껑에 초록 글씨가 찍혀 있었다⁠. 「⁠두레마수가공 — 헌터 도시락 시제품⁠」⁠.

“⁠이건 두레마수가공이 외주 계약 하자고 보낸 시제품이에요⁠. 회사에서 익혀서 차에 싣고⁠, 여기서 데워 먹는 거예요⁠. 데우는 방법은 뚜껑에 쓰여 있는 대로 했어요⁠. 전자레인지 이 분⁠.⁠”

태분은 도시락 뚜껑을 열고 고기 한가운데 탐침을 꽂았다⁠. 숫자가 올라가다 멈췄다⁠. 71⁠. 측정기를 고기 위에 댔다⁠. 유리판 가장자리에 보랏빛이 옅게 번졌다⁠.

사외이사가 “⁠어⁠” 하고 소리를 냈다⁠.

“⁠외주로 돌리면 이게 오백 명 점심이에요⁠.⁠”

도윤이 앞으로 나와 도시락을 들여다보았다⁠.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계산기를 켜지도 않았다⁠.

“⁠업체에 데우는 온도를 계약 조건으로 걸면 됩니다⁠.⁠”

“⁠계약서는 탐침을 안 꽂아요⁠. 사람이 꽂아요⁠.⁠”

“⁠그 사람이 업체 직원이면 됩니다⁠.⁠”

“⁠업체 직원이 14도짜리 고기를 싣고 왔어요⁠.⁠”

도윤이 입을 다물었다⁠. 대외이사가 웃음을 참다가 기침으로 바꿨다⁠.

*

길드장이 탁자 끝을 보았다⁠. “⁠현장 헌터 의견도 들어 봅시다⁠. 신입 대표⁠, 엄준기 씨⁠.⁠”

준기가 일어섰다⁠. 엄마를 보지 않았다⁠. 손을 바지 옆선에 붙이고 섰다⁠.

“⁠급식소 밥 먹고 내려가서 7층 멧돼지한테 안 물렸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준기가 침을 삼켰다⁠. “⁠그런데 급식소 때문에 7층 공략이 취소된 날도 있었습니다⁠. 신입들은 7층 내려가는 횟수로 평가받습니다⁠. 그날 저희 신입들은 한 번을 잃었습니다⁠.⁠”

태분은 고무장갑 낀 손을 아이스박스 뚜껑 위에 얹었다⁠. 차가운 뚜껑이 장갑을 뚫고 손바닥까지 올라왔다⁠.

“⁠외주가 낫다는 겁니까⁠?⁠” 도윤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준기가 앉았다⁠. “⁠신입은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무겸이 준기 어깨를 한 번 짚었다⁠. 확인이라는 뜻이었다⁠.

*

길드장의 결정은 십 분 만에 나왔다⁠.

“⁠급식소 외주 전환은 하지 않습니다⁠. 저 보라색을 보고 외주에 도장 찍을 이사는 없겠지요⁠.⁠” 길드장이 돋보기를 벗었다⁠. “⁠단가는 사천 원 그대로⁠, 식수 오백도 그대로입니다⁠. 증원은 없습니다⁠. 2공략대와 3공략대가 던전 안에서 먹는 점심 도시락만 두레마수가공에서 받고⁠, 검수는 급식소가 합니다⁠. 검수에서 떨어진 물건은 조리사님이 돌려보낼 수 있습니다⁠.⁠”

태분은 길드장의 말을 하나씩 접어 넣었다⁠. 외주는 막았다⁠. 사람은 못 얻었다⁠. 오백 식은 그대로고⁠, 검수할 도시락이 하루 육십 개 늘었다⁠.

무겸이 회의실을 나가다가 태분 옆에서 걸음을 늦췄다⁠.

“⁠조리사님⁠, 길드장님이 회의 중에 휴대전화를 내려놓으신 건 제가 청운에 들어온 여덟 해 동안 처음입니다⁠.⁠”

“⁠그래서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확인입니다⁠.⁠”

무겸은 한마디만 남기고 나갔다⁠. 태분은 확인이 좋다는 말인지 나쁘다는 말인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회의가 끝나고 이사들이 나간 뒤 도윤이 태분 앞에 섰다⁠. 손에 태블릿이 있었다⁠.

“⁠업체 도시락도 보존식을 떠 두십시오⁠. 하나씩⁠, 날마다⁠.⁠”

“⁠그건 업체가 해야죠⁠.⁠”

“⁠업체도 합니다⁠. 조리사님도 하십시오⁠.⁠” 도윤이 태블릿을 옆구리에 끼웠다⁠. “⁠사고가 나면 업체 보존식은 업체 냉동고에 있습니다⁠. 우리 것은 우리 냉동고에 있어야 합니다⁠.⁠”

태분은 도윤을 다시 보았다⁠. 이 사람은 사람 둘을 안 주면서 보존식은 하나 더 뜨라고 했다⁠. 둘 다 숫자였고⁠, 둘 다 틀린 데가 없었다⁠.

*

복도 끝 자판기 앞에서 준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오자 캔 커피 두 개를 뽑아 하나를 내밀었다⁠.

“⁠엄마⁠, 아까 휴대전화 내려놓으라고 한 거⁠. 길드장님한테⁠.⁠”

“⁠밥 얘기 할 땐 내려놔야지⁠.⁠”

“⁠길드장님 S급이야⁠.⁠”

“⁠S급도 밥은 입으로 먹어⁠.⁠”

준기가 캔을 따다 말고 웃었다⁠. 웃음이 금방 꺼졌다⁠. 준기는 캔을 손안에서 굴렸다⁠.

“⁠이사님이 나한테 따로 그랬어⁠. 다음 달 협회 공청회에 현장 헌터 의견서를 내는데⁠, 신입 대표로 서명해 주면 5월 보스 공략 신입 자리를 나한테 준대⁠.⁠”

“⁠무슨 의견서⁠?⁠”

“⁠아직 안 봤어⁠. 급식소 잘 돌아간다는 거래⁠.⁠” 준기가 캔을 한 모금 마셨다⁠. “⁠엄마⁠, 이사님 말 들으면 안 돼⁠? 그냥 이번만⁠.⁠”

태분은 캔 커피를 따지 않았다⁠. 고무장갑 낀 손으로는 꼭지가 잘 안 잡혔다⁠.

“⁠네 자리는 네가 정해⁠. 엄마 자리는 엄마가 정하고⁠.⁠”

준기는 대답 대신 캔을 비우고 휴지통에 넣었다⁠. 휴지통 안에서 캔끼리 부딪는 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렸다⁠.

*

오후 세 시⁠, 급식소 배식대 앞에 남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섰다⁠. 목에 「⁠헌터협회 위생팀장 주선애⁠」라는 출입증을 걸고⁠, 한 손에 클립보드⁠, 다른 손에 협회 마크가 찍힌 측정기를 들고 있었다⁠. 측정기는 무겸 것보다 두 배 컸다⁠.

“⁠엄태분 조리사님 되시지요⁠? 헌터 급식 기준 초안을 맡은 주선애입니다⁠. 조리 과정을 잠시 보고 가도 되겠습니까⁠?⁠”

태분은 저녁 솥에 탐침을 꽂고 있었다⁠. 83⁠, 84⁠, 85⁠. 타이머를 삼 분에 맞추자 주선애가 클립보드에 무언가 적었다⁠. 타이머가 울렸다⁠. 측정기 두 대를 동시에 고기에 댔다⁠. 두 유리판이 같이 맑았다⁠.

“⁠역시 85도 삼 분이 맞군요⁠.⁠” 주선애가 볼펜 끝으로 클립보드를 톡 쳤다⁠. “⁠청운 급식소를 기준 초안의 본보기로 삼으려고 합니다⁠. 재무이사님이 자료를 꼼꼼히 보내 주셨거든요⁠.⁠”

“⁠무슨 자료요⁠?⁠”

“⁠조리 온도 기록이랑 운영 현황이요⁠. 조리원 두 분이 하루 오백 식을 사고 없이 내신다고요⁠.⁠” 주선애가 웃었다⁠. “⁠기준에 넣기 좋은 숫자예요⁠.⁠”

“⁠사고 없이 낸 게 아니에요⁠. 쓰러지기 전에 낸 거예요⁠.⁠”

주선애가 클립보드를 넘겨 보았다⁠. “⁠기록에는 사고 없음으로 되어 있는데요⁠.⁠”

“⁠봉춘 씨가 지난주에 감자 상자 위에서 영혼이 나갔어요⁠. 기록엔 없어요⁠.⁠”

“⁠영혼이요⁠?⁠”

“⁠무릎은 멀쩡하대요⁠.⁠”

주선애는 웃지도 않고 클립보드에 무언가를 적다가⁠, 볼펜을 멈추고 지웠다⁠. 무엇을 적었다 지웠는지 태분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주선애가 출입증 줄을 고쳐 걸며 덧붙였다⁠.

“⁠초안은 4월 중순에 협회 누리집에 올라갑니다⁠. 부록에 청운 사례가 실려요⁠. 재무이사님이 현장 헌터 의견서도 하나 붙이겠다고 하셨고요⁠.⁠”

“⁠의견서요⁠?⁠”

“⁠신입 대표 서명을 받아 오신다던데요⁠.⁠”

태분의 국자가 솥 위에서 멈췄다⁠. 김이 국자 손잡이를 타고 올라와 분홍 장갑을 적셨다⁠. 신입 대표⁠. 복도 끝 자판기 앞에서 빈 캔을 손안에 굴리던 준기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개수대 앞에서 봉춘이 파란 장갑을 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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