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542자)

보일러

층간소음 전쟁 석 달째 · 지마루

무헌은 신혼부부 남편의 손에 들린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봉투는 두툼했고⁠, 남편의 엄지가 봉투 귀퉁이를 구기고 있었다⁠.

“⁠받으세요⁠.⁠”

무헌이 말했다⁠. 귀남이 반 박자 늦게 무헌을 보았다⁠. 남편도 무헌을 보았다⁠.

“⁠봉투는 받으세요⁠. 아기 있잖아요⁠. 근데 합의서는 지금 쓰지 마세요⁠. 401호 형한테 보여 주고 쓰세요⁠. 그 형 행정고시 삼 년째예요⁠. 법조문 다 외워요⁠.⁠”

“⁠무헌아⁠.⁠”

귀남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다정해서 계단통이 서늘해졌다⁠.

“⁠사인 안 하면 돈도 없다⁠. 이건 합의금이야⁠. 선물이 아니고⁠.⁠”

귀남은 남편의 손에서 봉투를 빼냈다⁠. 남편의 엄지가 봉투 귀퉁이를 놓쳤다⁠. 귀남은 봉투를 파일 안에 넣고 합의서를 봉투 위에 얹었다⁠.

“⁠생각해 봐⁠. 다음 주까지⁠. 다음 주 지나면 이백으로 내려간다⁠.⁠”

귀남은 계단을 내려갔다⁠. 1층 현관문이 닫혔다⁠. 계단참에 넷이 남았다⁠. 아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 진짜 나가야 돼요⁠. 아기 방이 없어요⁠.⁠”

“⁠알아요⁠.⁠”

단우가 대답했다⁠.

“⁠나가시는 건 괜찮습니다⁠. 다만 사장님이 정한 날에⁠, 사장님이 정한 돈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그것만요⁠.⁠”

아내가 남편을 보았다⁠. 남편은 빈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이튿날 고시생이 합의서 사진을 들고 할머니 거실에 내려왔다⁠. 남편이 몰래 찍어 둔 사진이었다⁠. 고시생은 안경을 이마로 올리고 사진을 손가락으로 크게 키웠다⁠.

“⁠여기요⁠. 셋째 항⁠. 퇴거일을 하루라도 넘기면 하루에 이사비의 십 분의 일을 위약금으로 낸다⁠. 오백 받고 열흘 늦으면 오백 다 토해 내는 거예요⁠. 넷째 항⁠. 퇴거 후 원상 복구 비용은 임차인 부담⁠, 금액은 임대인이 정한다⁠.⁠”

“⁠금액을 사장님이 정해요⁠?⁠”

라이더가 헬멧을 무릎에 올린 채 물었다⁠. 새벽 배달을 마치고 들어와 잠도 안 자고 내려온 참이었다⁠.

“⁠네⁠. 그러니까 오백 주고 원상 복구비 육백 받으면 끝이에요⁠.⁠”

할머니가 귤을 까다 말고 혀를 찼다⁠. 유학생이 손을 들었다⁠.

“⁠곰팡이 원상 복구는 얼마입니까⁠?⁠”

“⁠그건 사장님 마음이에요⁠.⁠”

“⁠그럼 저는 곰팡이를 지키겠습니다⁠.⁠”

거실에 웃음이 터졌다⁠. 유학생은 왜 다들 웃는지 모르는 얼굴로 휴대전화의 곰팡이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

10월 셋째 주⁠, 서울에 첫 추위가 왔다⁠. 아침 기온이 영하 1도로 내려갔다⁠. 솔빌라 지하 공용 보일러실은 1층과 2층 네 집에 난방과 온수를 대고 있었다⁠. 3층과 4층은 2000년대에 개별 보일러를 달았다⁠. 셋째 주 화요일 새벽⁠, 지하 보일러가 멈췄다⁠.

반차순 할머니 집의 방바닥이 식었다⁠. 할머니는 전기장판 하나로 밤을 났다⁠. 아침에 단우가 일어나 보니 할머니가 이불 두 채를 덮고 앉아 손을 비비고 있었다⁠. 영감님 영정 사진 앞의 물 잔에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단우가 전화를 걸자 귀남은 세 번째 신호에 받았다⁠.

“⁠아이고⁠, 보일러⁠? 부품이 없대⁠. 그 기종 단종됐어⁠. 주문하면 다음 달⁠.⁠”

“⁠다음 달이요⁠? 할머니 일흔셋이십니다⁠.⁠”

“⁠그러니까 딸네 가 계시라고 해⁠. 인천 딸 있잖아⁠. 내가 차비 드릴게⁠.⁠”

전화가 끊겼다⁠. 단우는 휴대전화를 쥔 채 지하 보일러실 쪽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귀남은 할머니에게 딸이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오후에 할머니의 딸이 인천에서 차를 몰고 왔다⁠. 쉰 줄이었고 할머니와 눈매가 똑같았다⁠. 딸은 할머니 짐을 싸면서 단우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했다⁠. 엄마가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총각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차에 타기 전에 단우의 손을 잡았다⁠.

“⁠사흘만 있다 올게⁠. 사흘 안에 보일러 안 고치면 내가 철물점 가서 드러누울 거야⁠.⁠”

“⁠할머니⁠, 진짜 그러실 거죠⁠?⁠”

“⁠진짜야⁠. 영감 영정 들고 갈 거야⁠.⁠”

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단우는 할머니 집 열쇠를 쥐고 1층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집은 식어 있었다⁠. 202호는 벽이 터져 있었다⁠. 저녁 일곱 시였다⁠. 단우는 오늘과 내일 근무가 없었다⁠.

단우는 할머니 집 문을 잠그고 지하로 내려갔다⁠. 보일러실 철문에 자물쇠가 새로 달려 있었다⁠. 번쩍이는 새것이었다⁠. 솔철물 상표 스티커가 아직 붙어 있었다⁠. 라이더가 배달 가방을 멘 채 지하 계단을 내려왔다⁠.

“⁠형⁠, 뭐 해요⁠?⁠”

“⁠보일러 보려고요⁠. 잠겼네요⁠.⁠”

라이더는 자물쇠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이거 어제 없었어요⁠. 저 어제 여기서 오토바이 배터리 충전했거든요⁠. 콘센트가 여기밖에 없어서⁠.⁠”

“⁠어제는 보일러 돌았습니까⁠?⁠”

“⁠돌았죠⁠. 웅웅거렸어요⁠. 근데 밤 열한 시쯤 누가 내려왔어요⁠. 손전등 들고⁠. 저는 오토바이 뒤에서 배터리 빼고 있었고요⁠. 은팔찌 소리 났어요⁠. 짤랑짤랑⁠.⁠”

단우는 자물쇠를 내려다보았다⁠. 쇳덩이에 지하 형광등 불빛이 번들거렸다⁠. 라이더가 헬멧을 고쳐 썼다⁠.

“⁠형⁠, 이거 말하면 저 쫓겨나요⁠?⁠”

“⁠쫓겨나실 때는 같이 나가겠습니다⁠.⁠”

“⁠그건 위로가 아닌데요⁠.⁠”

라이더는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오토바이 시동 소리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단우는 휴대전화로 자물쇠 사진을 찍었다⁠. 스티커까지 나오게 찍었다⁠.

계단 위에서 소리가 내려왔다⁠. 똑⁠. 스틱 끝으로 바닥을 한 번 치는 소리였다⁠. 연습 시작⁠. 단우는 웃었다⁠. 연습 시작이 아니라는 것을 단우는 알았다⁠. 위층 남자가 할 줄 아는 말이 스틱 한 번밖에 없었다⁠.

*

차무헌의 거실은 따뜻했다⁠. 3층 개별 보일러가 웅웅 돌았다⁠. 천장 처진 자리에는 라이더와 무헌이 옥상에 올라가 덮은 방수포 덕분에 물이 더 떨어지지 않았다⁠. 석고가 누렇게 마른 자국만 남았다⁠. 드럼 매트 세 겹은 젖었다가 말라서 가장자리가 쭈글쭈글했다⁠.

단우는 매트 위에 앉아 무헌이 끓여 준 라면을 먹었다⁠. 계란이 두 개 들어 있었다⁠. 무헌은 드럼 의자에 걸터앉아 라면 먹는 단우를 보았다⁠.

“⁠계란 두 개는 왜요⁠?⁠”

“⁠할머니가 밥 해 주라고 했다면서요⁠. 저 이것밖에 못 해요⁠.⁠”

단우는 국물까지 다 마셨다⁠. 그릇을 내려놓고 매트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천장을 보았다⁠. 석고에 남은 누런 물 자국이 구름 같았다⁠. 단우는 석 달 동안 저 천장 반대편을 올려다보았다⁠.

“⁠여기 누우니까 이상합니다⁠. 제 천장 위에 누워 있으니까요⁠.⁠”

“⁠제 바닥 위에 누워 있는 거예요⁠.⁠”

무헌이 의자에서 내려와 단우 옆에 앉았다⁠. 오른발이 페달 옆에 놓였다⁠. 반창고는 떨어지고 없었다⁠. 발등에 굳은살이 있었다⁠.

“⁠밟아 보세요⁠.⁠”

단우가 누운 채로 말했다⁠.

“⁠지금요⁠?⁠”

“⁠지금⁠. 한 번만⁠. 아래층엔 아무도 없습니다⁠.⁠”

무헌은 페달 위에 발을 올렸다⁠. 살짝 밟았다⁠. 둥⁠. 매트 아래 바닥이 울렸고⁠, 울림이 단우의 등을 타고 올라왔다⁠. 단우는 눈을 감았다⁠. 등뼈 마디마디가 소리를 받았다⁠. 이마도 가슴도 아니었다⁠. 몸 전체였다⁠.

“⁠이런 소리였네요⁠.⁠”

단우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석 달 동안 이게 무서웠습니다⁠. 지금은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무헌은 페달에서 발을 뗐다⁠. 단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단우가 눈을 떴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무헌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사람이었다⁠. 손가락 끝의 굳은살이 단우의 손목에 닿았다⁠. 맥이 뛰는 자리였다⁠. 단우가 웃었다⁠.

“⁠거기는 제 자리입니다⁠. 제가 짚는 자리예요⁠.⁠”

“⁠알아요⁠.⁠”

무헌은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단우의 맥이 무헌의 손끝 아래에서 빨라졌다⁠. 무헌은 맥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다 세기 전에 단우가 몸을 일으켜 무헌의 목을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았다⁠. 라면 국물의 짠맛이 났다⁠. 단우의 손이 무헌의 뒷머리를 쥐었다⁠. 무헌은 단우의 등을 매트 위로 천천히 눕혔다⁠. 매트가 둘의 무게를 받아 한 번 꺼졌다⁠. 오른발이 닿던 움푹한 자리였다⁠.

보일러가 웅웅 돌았다⁠. 창밖에서 골목 고양이가 울었다⁠. 무헌의 손이 단우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단우의 쇄골 위에 응급실 마스크 끈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무헌은 붉은 자국을 입술로 따라갔다⁠. 단우의 숨이 무헌의 귀에 닿았다⁠. 숨은 처음엔 길었다가 점점 짧아졌고⁠, 짧아진 숨이 박자를 만들었다⁠. 무헌은 숨의 박자를 알았다⁠. 일 분에 백이십⁠. 무헌이 평생 손목으로 지켜 온 박자였다⁠. 단우는 무헌의 등에 손가락을 세우고⁠, 석 달 동안 쪽지에 쓰지 못한 말 대신 이름을 불렀다⁠. 무헌아⁠. 처음 부르는 이름이었다⁠. 무헌은 대답 대신 단우의 손을 찾아 손가락을 끼웠다⁠. 굳은살과 소독약에 튼 손가락이 맞물렸다⁠.

밤 두 시⁠, 둘은 매트 위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단우가 무헌의 팔을 베고 있었다⁠. 무헌의 팔이 저렸다⁠. 무헌은 팔을 빼지 않았다⁠.

“⁠이제 밀대 두 번 칠 데가 없네요⁠.⁠”

“⁠위에서 치면 되잖아요⁠. 제 바닥을⁠.⁠”

“⁠그럼 제 천장이 됩니다⁠.⁠”

“⁠지금은 우리 바닥이에요⁠.⁠”

단우가 웃었다⁠. 웃음이 무헌의 팔을 타고 어깨까지 울렸다⁠.

새벽 네 시⁠, 무헌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반 할머니⁠」라고 떠 있었다⁠. 무헌이 받자 할머니 목소리가 방 안까지 새어 나왔다⁠.

“⁠총각⁠, 우리 단우 밥 먹였어⁠?⁠”

“⁠네⁠. 라면이요⁠. 계란 두 개⁠.⁠”

“⁠라면이 무슨 밥이야⁠. 아침엔 쌀 씻어⁠. 쌀은 우리 집 쌀통에 있어⁠. 그리고 둘이 이불 덮고 자⁠. 3층도 새벽엔 추워⁠.⁠”

전화가 끊겼다⁠. 무헌은 휴대전화를 든 채 단우를 내려다보았다⁠. 단우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이불 속에서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할머니가 왜 둘이라고 하십니까⁠. 제가 여기 있다고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저도 없어요⁠.⁠”

이불 밖으로 단우의 발가락만 나와 있었다⁠. 무헌은 발가락을 이불 속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

아침 여덟 시⁠, 육단우는 302호를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할머니 집에 두고 온 근무복을 가지러 가는 길이었다⁠. 머리가 한쪽으로 눌려 있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 잘못 끼웠다⁠. 1층까지 내려가서야 알았다⁠.

지하 보일러실 문이 열려 있었다⁠. 문 앞에 귀남이 서 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남자 하나가 보일러실 안에서 연장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수리 기사였다⁠. 귀남은 단우를 보고 웃었다⁠. 귀남의 눈이 단우의 눌린 머리와 잘못 끼운 단추를 지나 계단 위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

“⁠단우야⁠, 일찍 나왔네⁠. 위에서⁠.⁠”

“⁠보일러 고치시는 겁니까⁠?⁠”

“⁠보러 왔지⁠. 부품 확인⁠. 기사님이 다음 달이래⁠.⁠”

수리 기사가 보일러실에서 나오며 단우를 보지 않고 연장 가방을 어깨에 멨다⁠. 기사는 귀남에게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계단을 올라 현관 밖으로 나갔다⁠. 단우는 기사의 등을 보았다⁠. 연장 가방 옆구리에 새 부품 상자 하나가 삐죽 나와 있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상자였다⁠. 상자 옆면에 보일러 상표가 찍혀 있었다⁠. 지하 보일러와 같은 상표였다⁠.

“⁠사장님⁠. 부품 있지 않습니까⁠. 지금 기사님 가방에⁠.⁠”

귀남은 대답하지 않았다⁠. 웃으며 보일러실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단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은팔찌가 단우의 잘못 끼운 단추를 가리켰다⁠.

“⁠단우야⁠. 너 신촌 대학병원 응급실이지⁠? 간호부장 이름 내가 알아⁠. 우리 철물점 단골 아들이 그 병원 원무과야⁠.⁠”

귀남은 목소리를 낮췄다⁠. 계단통으로 소리가 올라가지 않을 만큼만⁠.

“⁠야간 간호사가 쉬는 날 남자 집에서 자고 나오는 걸⁠, 간호부장이 알면 어떨까⁠. 환자 보호자들이 알면⁠. 요즘 그런 거 사진 한 장이면 다 돌잖아⁠.⁠”

계단 위에서 맨발이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단우는 돌아보지 않았다⁠. 잘못 끼운 단추를 하나씩 풀어 다시 끼웠다⁠. 손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일곱 시간을 잔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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