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06자)
새벽배송
층간소음 전쟁 석 달째 · 지마루
무헌은 스틱을 쥔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스틱 끝이 허벅지를 눌렀다.
“안 도와요.”
“뭐?”
“할머니 짐 싸는 거, 안 도와요. 저 이 집 이삿짐 센터 아니에요.”
귀남은 웃었다. 웃으며 계약서 사본을 단우의 손에서 도로 가져갔다. 파일에 넣고 고무줄을 감았다.
“그래. 너희 둘 다 바쁘지.”
무헌은 계단을 마저 내려와 할머니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귤 바구니 속에서 귤 하나를 꺼내 까기 시작했다. 껍질을 한 번에 동그랗게 벗겨 할머니 손바닥에 올렸다. 할머니가 껍질을 보고 웃었다.
“총각 손재주 좋네.”
“할머니, 손가락 걸 때 할머니 말고 본 사람 또 있어요? 부침개 부치신 할머니 말고요.”
할머니는 껍질을 손바닥에서 굴리며 생각했다. 생각하는 동안 눈이 귀남에게 갔다가 돌아왔다.
“있지. 막걸리 판 사람. 시장 입구 「솔밭」 주막. 그 집 주인이 막걸리 들고 왔어. 셋이 마셨어. 우리 영감, 총각 아버지, 주막 주인.”
“그분 아직 계세요?”
“있지. 나보다 한 살 많아. 귀는 나보다 더 어두워.”
귀남의 얼굴에서 웃음이 떨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귀남은 파일을 옆구리에 끼고 할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기억은 다 흐려지는 거예요. 저도 우리 아버지 얼굴이 가물가물해요.”
귀남은 현관을 나서다 말고 무헌을 돌아보았다.
“무헌아. 302호 천장 누수, 다음 주 수리 잡혀 있던 거 취소한다. 나가는 집에 돈 안 쓴다. 비 오면 대야 받쳐라.”
*
「망원 지하」는 망원시장 뒤 골목 끝, 사 층짜리 상가 건물 지하에 있었다. 계단을 스무 개 내려가면 철문이 나왔고, 철문을 밀면 담배 냄새와 맥주 냄새와 앰프 열기가 한꺼번에 얼굴을 덮었다. 무대는 무릎 높이였고, 객석은 백 명이 서면 꽉 찼다.
토요일 밤 열 시, 무헌은 무대 뒤에서 스틱을 손가락 사이로 굴리고 있었다. 「새벽배송」의 두 번째 순서였다. 찬열이 무대 앞 커튼 틈으로 객석을 보다가 무헌을 돌아보았다.
“왔다.”
“누가.”
“고등학생.”
무헌은 커튼 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객석 맨 뒤, 기둥 옆에 단우가 서 있었다. 검은 패딩 조끼에 운동화. 병원 근무복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못 알아볼 뻔했다. 단우는 맥주를 들고 있지 않았다. 두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고 무대를 보고 있었다. 오늘이 단우의 쉬는 날이라는 것을 무헌은 알았다. 쪽지 대신 오가는 문자에 번호가 아흔아홉까지 쌓여 있었다.
“무헌아, 너 손 떨어.”
“안 떨어.”
“스틱 떨어뜨렸어.”
무헌은 바닥에 떨어진 스틱을 주웠다. 클럽 사장이 무대 뒤로 와서 무헌의 어깨를 쳤다. 예순 줄이었고 은퇴한 베이시스트였다. 사장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12월 첫 토요일, 단독. 확정했다. 세 시간 다 너희 거다.”
“진짜요?”
“진짜. 대신 그날 꽉 채워라. 건물주가 요즘 나한테 계약 얘기를 자꾸 해. 이 건물도 2블록이야.”
*
육단우는 첫 박에 숨을 멈췄다.
조명이 무대 위로 떨어지자 무헌이 드럼 세트 뒤에 앉아 있었다. 고무 패드가 아니었다. 진짜 북이었다. 크고 작은 북 다섯 개와 금빛 쇠판 세 장. 무헌이 스틱 두 개를 머리 위에서 네 번 부딪쳤다. 딱, 딱, 딱, 딱. 그리고 오른발이 내려갔다.
둥.
소리가 단우의 가슴에 떨어졌다. 이마가 아니었다. 석 달 동안 천장 너머로 이마에 받던 소리가 오늘은 가슴뼈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갈비뼈가 소리를 받아 안쪽으로 한 번 울렸다. 심장이 북 박자를 따라갔다. 단우는 손을 패딩 주머니에서 꺼내 제 손목에 손가락 두 개를 댔다. 버릇이었다. 맥이 빨랐다. 북과 같은 박자였다. 일 분에 백이십.
찬열이 노래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높고 맑았다. 기타와 베이스가 따라붙었다. 단우는 노래를 듣지 않았다. 무헌의 손을 보았다. 무헌은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스틱이 북 위에서 튀어 오를 때마다 손목이 부드럽게 꺾였다. 오른발은 쉬지 않았다. 천장 너머로 듣던 소리가 이런 손에서 나왔다.
세 번째 곡이 끝났을 때 찬열이 마이크를 잡고 객석을 둘러보았다.
“이번 곡은 우리 드러머가 가사를 썼어요. 처음이에요. 제목은 「아흔한 장」 아래층 사는 분한테 바칩니다.”
객석이 휘파람을 불었다. 무헌이 드럼 뒤에서 찬열에게 스틱을 던졌다. 찬열은 스틱을 받아 들고 웃으며 노래를 시작했다.
「오전 열 시에 너는 잠들고 / 오전 열 시에 나는 깨어나 / 바닥 하나 사이로 / 우리는 서로의 박자를 세었지」
단우는 기둥에 등을 붙였다. 주머니 속 손가락이 손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공연이 끝난 새벽 한 시, 무헌은 장비를 차에 싣지 않고 클럽에 맡겼다. 단우와 함께 걸어서 솔빌라로 돌아갔다. 망원시장 셔터들이 다 내려가 있었다. 골목 가로등 아래로 둘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무헌의 손가락 끝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굳은살 위로 물집 하나가 터져 있었다.
“손 보여 주십시오.”
단우가 걸음을 멈추고 무헌의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가로등 아래에서 손바닥을 펴 보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스틱이 닿는 자리가 붉게 부어 있었다. 단우는 패딩 주머니에서 일회용 밴드를 꺼냈다. 응급실 간호사는 밴드를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발등에도 붙이셨죠. 처음 봤을 때.”
“페달 밟다가 까졌어요.”
“제 천장 때문에 까진 거네요.”
단우는 밴드 포장을 이로 뜯어 무헌의 손가락에 감았다. 감는 손이 빨랐다. 다 감고 나서도 무헌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손목에 손가락 두 개를 댔다. 버릇이었다. 맥이 손끝에 닿았다.
“빠르네요.”
“세 시간 쳤잖아요.”
“공연은 삼십 분 전에 끝났습니다.”
무헌은 대답하지 못했다. 단우가 손목에서 손가락을 뗐다. 둘은 다시 걸었다. 솔빌라 1층 현관 앞에서 무헌이 먼저 계단을 올라가다 2층 계단참에서 멈춰 돌아보았다. 단우는 202호 문 앞에 서서 열쇠를 꺼내고 있었다.
“단우 씨. 「아흔한 장」 가사, 찬열이가 쓴 거 아니에요. 제가 썼어요.”
“압니다. 찬열 씨가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단우는 문을 열고 들어가다 말고 계단참을 올려다보았다.
“박자가 좋았습니다. 일 분에 백이십.”
문이 닫혔다. 무헌은 계단참에 서서 밴드 감긴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3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운동화를 벗어 손에 들었다.
*
9월 마지막 주, 서울에 호우 경보가 내렸다. 장마가 끝난 지 한 달 만이었다. 비는 저녁부터 쏟아져 밤새 그치지 않았다. 텔레비전 뉴스는 반지하 주택 침수 피해를 걱정했고, 휴대전화에는 구청의 재난 문자가 세 번 왔다.
새벽 한 시, 무헌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잠이 깼다. 똑. 똑. 거실 한가운데였다. 드럼 매트 바로 위였다. 무헌은 불을 켜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옆 석고 천장이 누렇게 젖어 아래로 볼록하게 처져 있었다. 볼록한 한가운데에서 물방울이 맺혔다 떨어졌다. 떨어지는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무헌은 대야를 받쳤다. 대야 하나로는 모자랐다. 물이 처진 천장 가장자리를 따라 번져 다른 자리에서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헌은 냄비를 받치고 세숫대야를 받치고 빈 북 케이스를 받쳤다. 연습 패드 위로 물이 튀었다.
무헌은 바닥을 스틱으로 쳤다. 한 번. 연습 시작. 새벽 한 시였다. 연습 시간이 아니었다. 아래층에서 단우가 이 신호를 이상하게 여길 것이었다.
단우는 오늘 근무가 없었다. 일 분 뒤 아래에서 밀대가 천장을 세 번 쳤다. 일어났다.
이 분 뒤 현관문 노크 소리가 났다. 단우가 서 있었다. 잠옷 위에 패딩을 걸치고, 손에 대야 하나와 수건 한 묶음을 들고 있었다.
“새벽 한 시에 연습 시작이라니, 뭐가 무너졌습니까?”
“천장이요.”
*
둘은 거실에서 세 시간 동안 물을 받았다. 중간에 1층에서 반차순 할머니가 올라왔다. 할머니는 계단 손잡이를 짚고 한 칸씩 올라와 302호 문간에서 숨을 골랐다. 손에 양은 대야 하나를 들고 있었다. 영감이 텃밭에서 쓰던 대야라고 했다. 할머니는 대야를 문간에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내려갔다. 대야 바닥에 귤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대야가 차면 단우가 들고 화장실로 가 비웠고, 무헌은 새로 떨어지는 자리를 찾아 그릇을 옮겼다. 말이 많지 않았다. 물소리가 그릇마다 다른 높이로 났다. 대야는 낮게, 냄비는 높게, 북 케이스는 둔하게. 무헌이 그릇들을 둘러보다 웃었다.
“이거 박자 맞아요.”
“새벽 세 시에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들어 봐요.”
단우가 수건을 쥔 채 멈췄다. 귀를 기울였다. 똑, 통, 둑. 똑, 통, 둑. 정말로 박자가 있었다. 단우는 웃음을 참다가 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젖은 수건에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새벽 네 시, 무헌의 현관문이 열렸다. 노크는 없었다. 귀남이 우산을 접으며 들어왔다. 비옷 위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단우가 무헌의 집에 있는 것을 보고 귀남의 눈이 반 박자 멈췄다.
“구청 재난 문자 보고 건물 돌고 있다. 302호가 제일 걱정돼서.”
귀남은 거실 한가운데 처진 천장 아래에 섰다. 물방울 하나가 귀남의 금테 안경 위에 떨어졌다. 귀남은 안경을 벗어 닦았다.
“심하네. 옥상 방수가 터졌구나.”
“수리하세요.”
무헌이 말했다. 귀남은 안경을 다시 쓰고 무헌을 보았다.
“무헌아, 말했잖아. 나가는 집에 돈 안 쓴다. 옥상 방수는 빌라 다 비우고 한 번에 한다. 그게 싸.”
“지금 천장이 무너지는데요.”
“그러니까 빨리 나가라고. 위험하잖아. 내가 너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귀남은 처진 천장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석고가 손가락 모양으로 꺼지며 물이 한 줄기 쏟아졌다. 무헌이 대야를 들어 물줄기 아래로 밀어 넣었다. 물이 대야 바닥을 세게 때렸다. 무헌의 손목에 물이 튀었다.
“사장님.”
단우가 귀남을 불렀다. 정중한 목소리였다.
“구청에서 노후 빌라 보수 공사 지원금 나오는 거 아십니까? 응급실에 오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구청 주택과에 계셨습니다. 지원금 받으면 옥상 방수 반값이라고 하시던데요.”
귀남의 얼굴이 한 번 굳었다. 굳은 얼굴로 웃었다.
“단우야. 너는 환자나 봐.”
아래층에서 소리가 났다. 퍽. 무언가 터지는 소리였다. 단우가 고개를 돌렸다. 202호였다. 단우는 현관을 뛰쳐나가 계단을 내려갔다. 무헌이 뒤따랐다. 귀남은 따라오지 않았다.
202호 거실 벽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벽지가 배처럼 부풀었다가 터져 있었다. 터진 자리에서 누런 물이 바닥으로 흘러 단우의 침대 다리를 적셨다. 침대 머리맡 벽, 석 달 동안 킥 드럼 소리가 내려오던 벽이었다. 벽 안의 배관이 터진 것이었다.
단우는 침대 위의 병원 근무복을 끌어안았다. 무헌이 수건을 벽에 대고 눌렀다. 물이 수건을 뚫고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단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문자였다. 단우는 근무복을 안은 채 화면을 보았다. 무헌의 휴대전화도 같은 순간 바지 주머니에서 울렸다. 둘에게 같은 문자가 와 있었다.
「솔빌라 202·302호 안전 문제로 거주 불가. 12월 1일까지 두 집 모두 비워 주세요. 보증금은 원상 복구 후 정산합니다. 염귀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