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297자)

귤

층간소음 전쟁 석 달째 · 지마루

귀남은 손을 거두고 웃었다⁠. 옥상 바람에 금테 안경이 햇빛을 튕겼다⁠.

“⁠무헌아⁠. 이 동네에 ‘⁠ㅎ⁠’ 길게 쓰는 사람이 나 하나겠냐⁠?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쓰셨다⁠. 망원동 영감들 다 그렇게 써⁠.⁠”

“⁠솔철물 영수증은요⁠?⁠”

“⁠솔철물은 망원시장 철물점이야⁠. 동네 사람 다 거기서 패킹 사⁠. 너도 사고 아래층 간호사도 사⁠.⁠”

귀남은 고무 대야에 던져 놓은 무헌의 티셔츠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귀남은 티셔츠를 무헌에게 내밀었다⁠.

“⁠쪽지 몇 장⁠, 누가 장난으로 끼웠다고 치자⁠. 그게 죄냐⁠? 민원은 진짜야⁠. 구청에 기록 있어⁠. 112에도 있어⁠. 그건 네 북소리 때문에 들어간 거고⁠.⁠”

무헌은 젖은 티셔츠를 받았다⁠. 차가운 물이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흘렀다⁠.

“⁠그리고 너 바닥에 매트 세 겹 깔았지⁠? 접착 매트⁠. 나갈 때 장판 다 들뜬다⁠. 원상 복구비는 보증금에서 뺀다⁠. 그건 계약서에 있다⁠.⁠”

귀남은 계단 문으로 걸어가다 돌아보았다⁠.

“⁠그 영수증⁠, 증거로 쓰고 싶으면 써⁠. 대신 빨래는 빨래방 가서 말려라⁠. 옥상 방수 공사 다음 주부터다⁠.⁠”

무헌은 옥상에 혼자 남아 젖은 티셔츠를 쥐고 있었다⁠. 빨랫줄 너머 골목 건너편 다세대 주택 담벼락에서 재건축 현수막이 바람에 배를 부풀렸다⁠. 무헌은 처음으로 현수막의 글씨를 끝까지 읽었다⁠. 「⁠망원 2블록 소규모 재건축 추진 — 동의율 육십 퍼센트 달성 시 사업 신청⁠」 맨 밑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추진위원회 연락처 · 솔철물⁠」

*

오후 다섯 시⁠, 단우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천장이 조용했다⁠. 오전 열 시에 밀대로 두 번 쳤고⁠, 천장은 정말로 다섯 시까지 조용했다⁠. 석 달 만에 처음으로 일곱 시간을 이어서 잤다⁠. 단우는 일어나 앉아 자기 몸이 낯설어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가벼웠다⁠. 손끝이 떨리지 않았다⁠.

단우는 밀대를 들고 천장을 세 번 쳤다⁠. 일어났다는 신호였다⁠.

일 분 뒤 현관문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무헌이 귤 한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뒤에 처음 보는 남자가 하나 더 있었다⁠. 무헌보다 조금 작고 머리를 탈색해 노랗게 물들였다⁠. 남자는 무헌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쭉 빼고 단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송찬열입니다⁠. 무헌이 친구고⁠, 밴드 보컬이고⁠, 오늘은 심사위원이에요⁠.⁠”

“⁠무슨 심사요⁠?⁠”

“⁠무헌이가 귀마개 사 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무헌이 찬열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쳤다⁠. 찬열은 맞고도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단우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오세요⁠. 심사는 짧게 해 주십시오⁠. 두 시간 뒤에 출근합니다⁠.⁠”

*

송찬열은 단우의 식탁에 앉자마자 질문을 쏟았다⁠. 몇 살이에요⁠. 병원 어디예요⁠. 응급실이면 피 많이 봐요⁠? 피 보면 밥이 넘어가요⁠? 연애는요⁠? 쪽지 쓸 때 무헌이 얼굴 상상했어요⁠? 어떻게 상상했어요⁠?

단우는 질문마다 정중하게 대답했다⁠. 스물아홉입니다⁠. 신촌입니다⁠. 많이 봅니다⁠. 넘어갑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했습니다⁠. 키 작은 고등학생으로 상상했습니다⁠.

찬열이 무헌을 돌아보았다⁠.

“⁠키 작은 고등학생⁠.⁠”

“⁠알아⁠. 아침에 들었어⁠.⁠”

“⁠너 석 달 동안 고등학생이었어⁠.⁠”

찬열은 웃다가 식탁 위의 귀마개 통을 집어 들었다⁠. 무헌이 사 준 실리콘 귀마개였다⁠.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나도 안 썼네요⁠.⁠”

단우가 귤을 까다 말고 대답했다⁠.

“⁠오늘은 필요 없었습니다⁠. 위층이 조용해서요⁠.⁠”

찬열은 귀마개 통을 내려놓고 무헌을 보았다⁠. 무헌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귀가 빨갰다⁠. 찬열이 식탁을 두 손으로 짚고 일어섰다⁠.

“⁠심사 끝⁠. 합격⁠. 나는 간다⁠. 너희 둘이 알아서 해⁠.⁠”

“⁠아직 안 끝났어⁠.⁠”

무헌이 찬열의 손목을 잡아 도로 앉혔다⁠. 옥상에서 찍은 현수막 사진을 휴대전화로 띄워 식탁 가운데 놓았다⁠. 「⁠추진위원회 연락처 · 솔철물⁠」

“⁠건물주가 재건축 추진위원회야⁠. 솔빌라 비워서 넘기려는 거야⁠.⁠”

*

단우는 출근 전까지 사십 분 동안 무헌⁠, 찬열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귤 껍질이 식탁 위에 작은 산을 이루었다⁠.

무헌이 들은 것을 말했다⁠. 민원 세 번은 진짜이고⁠, 구청과 112에 기록이 남아 있다⁠. 귀남은 쪽지는 장난이라고 넘겼다⁠. 무헌은 11월 말에 나가야 하고⁠, 나갈 때 보증금에서 바닥 복구비를 뗀다⁠. 단우는 12월에 월세가 삼십 오른다⁠.

“⁠민원은 누가 넣었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까⁠?⁠”

단우가 물었다⁠. 찬열이 대답했다⁠.

“⁠구청 민원은 이름 안 알려 줘요⁠. 112는 신고자 정보 경찰만 알고⁠. 우리 엄마가 동사무소 다녀서 알아요⁠.⁠”

“⁠그럼 민원은 못 이깁니다⁠.⁠”

단우는 귤 한 쪽을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응급실에서 이길 수 없는 환자를 볼 때처럼⁠, 단우는 이길 수 있는 것부터 셌다⁠.

“⁠건물주는 빌라를 비우고 싶습니다⁠. 302호를 내보내는 건 시작입니다⁠. 다음은 누구입니까⁠?⁠”

“⁠너⁠.⁠”

찬열이 단우를 가리켰다⁠.

“⁠월세 삼십 올리면 나가라는 거잖아요⁠.⁠”

“⁠저는 안 나갑니다⁠. 삼십 올라도 냅니다⁠. 야간 수당 있습니다⁠.⁠”

“⁠그럼 다음은⁠.⁠”

무헌이 식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 아래⁠, 202호 아래는 102호였다⁠. 102호는 지난봄부터 비어 있었다⁠. 102호 옆집이 101호였다⁠.

“⁠할머니⁠.⁠”

셋이 동시에 바닥을 보았다⁠. 1층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반차순 할머니는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 두었다⁠. 귀가 어둡다는 핑계였다⁠. 텔레비전에서 뉴스 앵커가 말하고 있었다⁠. 정부가 노후 저층 주거지의 소규모 재건축 요건을 완화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

찬열이 다녀간 밤⁠, 응급실은 조용한 편이었다⁠. 새벽 세 시⁠, 구급차가 요양원에서 할머니 한 분을 싣고 왔다⁠. 여든둘이었다⁠. 열이 39도였고⁠, 손등에 멍이 다섯 군데 있었다⁠. 요양원 직원이 서류 봉투를 내밀며 보호자는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단우는 할머니 손목에 손가락 두 개를 대고 맥을 셌다⁠. 일 분에 백십⁠. 손목이 종잇장처럼 얇았다⁠. 수액 바늘을 찾으려고 팔을 걷자 할머니가 단우의 손을 잡았다⁠. 힘이 없는 손이었는데 놓지 않았다⁠.

“⁠총각⁠, 우리 집에 가야 돼⁠.⁠”

“⁠할머니 댁이 어디세요⁠?⁠”

“⁠아현동⁠. 골목 끝 파란 대문⁠. 고추 말려 놨어⁠.⁠”

요양원 직원이 단우의 귀에 대고 말했다⁠. 아현동 집은 재개발로 사 년 전에 헐렸다고⁠. 단우는 대답하지 않고 할머니의 손등에서 멍이 없는 자리를 찾았다⁠. 한 번에 찔렀다⁠. 일곱 시간을 잔 손이었다⁠.

할머니가 잠든 뒤 단우는 처치실 개수대에서 손을 씻었다⁠. 손을 씻으며 1층 화분 앞의 낮은 의자를 생각했다⁠. 귤 바구니와 주황색으로 물든 손톱을 생각했다⁠. 단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무헌에게 문자를 보냈다⁠. 처음 보내는 문자였다⁠. 쪽지 번호처럼 끝에 숫자를 붙였다⁠.

「⁠할머니한테는 다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음이 있고요⁠. 92⁠.⁠」

답은 일 분 뒤에 왔다⁠. 새벽 세 시 반⁠, 무헌은 클럽 공연을 마치고 장비를 나르는 중이라고 했다⁠.

「⁠알아요⁠. 93⁠.⁠」

*

이틀 뒤 오후⁠, 단우는 퇴근하고 일곱 시간을 잔 뒤 망원시장에 장을 보러 나갔다⁠. 손에 계란 한 판과 두부 한 모를 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솔빌라 1층 현관 앞에 귀남이 서 있었다⁠. 반차순 할머니가 화분 앞 낮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 무릎 위에 귤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귀남은 허리를 굽혀 할머니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종이를 받지 않고 귤을 깠다⁠.

“⁠어머니⁠, 이거 보셔야 돼요⁠. 12월 만기예요⁠. 갱신 안 합니다⁠.⁠”

“⁠뭐라고⁠?⁠”

“⁠만기라고요⁠. 12월⁠. 나가셔야 돼요⁠.⁠”

“⁠안 들려⁠.⁠”

할머니는 깐 귤 한 쪽을 귀남의 입 쪽으로 내밀었다⁠. 귀남은 고개를 젖혀 피했다⁠. 단우는 계단참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 귀남이 단우를 보고 웃었다⁠.

“⁠단우야⁠, 마침 잘 왔다⁠. 할머니 귀가 어두우셔서⁠. 네가 좀 설명해 드려⁠.⁠”

“⁠무슨 설명이요⁠?⁠”

“⁠12월에 전세 만기라고⁠. 이 건물 방수 공사에 보일러 교체까지 해야 돼서⁠, 1층은 비워야 된다고⁠. 내가 이사비는 챙겨 드린다고⁠. 요양원도 알아봐 드리고⁠.⁠”

단우는 계란 판을 두 손으로 고쳐 쥐었다⁠. 판 귀퉁이가 손바닥을 눌렀고⁠, 계란 하나가 판 안에서 달그락 굴렀다⁠. 요양원이라는 말에 할머니의 귤 까던 손가락이 반 박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사장님⁠. 할머니 다 들으십니다⁠.⁠”

“⁠못 들으셔⁠.⁠”

“⁠들으십니다⁠. 이틀 전에 제가 쪽지 맞춰 볼 때도 다 들으셨습니다⁠. 계단에서 누가 밤에 쪽지 끼우는 것까지 보셨답니다⁠. 키 큰 총각이 세 번⁠.⁠”

귀남의 웃음이 처음으로 얼굴에서 흔들렸다⁠. 할머니가 귤 껍질을 바구니에 내려놓았다⁠. 귀남을 올려다보았다⁠. 귀 어두운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총각⁠.⁠”

할머니는 귀남을 불렀다⁠. 귀남은 쉰여섯이었다⁠. 할머니는 솔빌라의 모든 남자를 총각이라고 불렀다⁠.

“⁠서른 해 전에 이 땅⁠, 우리 영감 거였어⁠.⁠”

계단통이 조용해졌다⁠. 2층 어딘가에서 문이 조금 열리는 소리가 났다⁠. 201호 신혼부부의 현관이었다⁠.

“⁠우리 영감이 여기 텃밭 했어⁠. 상추⁠, 고추⁠, 호박⁠. 총각 아버지가 와서 땅 팔라고 했어⁠. 빌라 짓는다고⁠. 우리 영감이 그랬어⁠. 팔 테니까 우리 둘 죽을 때까지 1층에서 살게 해 달라고⁠. 전세금 그대로⁠, 한 푼도 안 올리고⁠. 총각 아버지가 그러라고 했어⁠. 영감이랑 막걸리 마시면서 손가락 걸었어⁠. 내가 옆에서 부침개 부쳤어⁠.⁠”

할머니는 귤 한 쪽을 마저 입에 넣었다⁠.

“⁠영감은 십 년 전에 갔어⁠. 나는 아직 안 갔어⁠.⁠”

귀남은 할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은팔찌를 손목에서 한 바퀴 돌렸다⁠. 돌리는 동안 웃음이 돌아왔다⁠. 아까보다 얇은 웃음이었다⁠. 201호 문틈이 조금 더 벌어졌고⁠, 문틈 안쪽에서 누군가 숨을 죽이는 소리가 났다⁠. 귀남도 숨소리를 들었다⁠. 목소리를 한 단 낮췄다⁠.

“⁠어머니⁠. 그건 아버지랑 영감님이 막걸리 마시면서 하신 얘기고요⁠.⁠”

귀남은 파일에서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이번에는 할머니가 아니라 단우에게 내밀었다⁠. 단우는 계란 판을 겨드랑이에 끼고 종이를 받았다⁠. 복사한 종이였다⁠. 「⁠부동산 임대차 계약서(⁠전세⁠)⁠」 임대인 칸에 염귀남⁠, 임차인 칸에 반차순⁠. 계약 기간 2024년 12월부터 2026년 12월까지⁠. 아래쪽 특약 칸이 비어 있었다⁠. 할머니의 도장이 빨갛게 찍혀 있었다⁠.

“⁠손가락 건 거 말고⁠, 도장 찍은 거⁠. 이게 법이야⁠, 단우야⁠. 어머니가 2년마다 직접 찍으셨어⁠. 특약 없이⁠.⁠”

할머니가 단우를 보았다⁠. 단우는 종이를 보았다⁠. 특약 칸은 하얬다⁠. 서른 해 동안 할머니는 2년마다 이 하얀 칸 옆에 도장을 찍었다⁠.

계단 위에서 발소리가 내려왔다⁠. 맨발이 아니라 운동화였다⁠. 무헌이었다⁠. 무헌은 계단참에서 멈춰 섰다⁠. 손에 스틱 한 짝을 쥐고 있었다⁠. 무헌은 단우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고⁠, 할머니를 보고⁠, 귀남을 보았다⁠.

귀남이 무헌을 보며 웃었다⁠.

“⁠무헌아⁠, 너도 내려왔냐⁠. 잘됐다⁠. 둘이 할머니 짐 싸는 거 좀 도와드려라⁠. 젊은 사람이 둘이나 있으니까⁠.⁠”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책갈피곰2026.10.31· 3화

    ㅎ을 길게 쓰는 사람이 귀남 하나뿐이냐는 말, 범인 찾기가 갑자기 어려워졌어요.

    • 지마루작가2026.10.31

      망원동 영감님들 필체가 다 비슷하다는 게 이 동네의 함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