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572자)

밀대 두 번

층간소음 전쟁 석 달째 · 지마루

천장의 울림이 이마에서 빠져나가는 데 숨 한 번이 걸렸다⁠. 단우는 펜을 내려다보았다⁠. 귀남의 펜이었다⁠. 몸통에 「⁠솔철물 · 망원시장 2길⁠」이라는 금색 글씨가 박혀 있었다⁠.

“⁠사장님⁠, 이건 못 씁니다⁠.⁠”

단우는 펜을 종이 위에 도로 얹어 귀남 쪽으로 밀었다⁠. 귀남의 웃음은 그대로였다⁠. 웃음을 유지한 채 펜을 집어 셔츠 주머니에 꽂았다⁠.

“⁠그래⁠, 강요는 안 한다⁠. 대신 하나만 알아 둬⁠. 너 계약도 12월이지⁠? 갱신하면 월세 삼십 올린다⁠. 이 동네 시세가 그래⁠. 요즘 망원동 원룸 시세 알지⁠?⁠”

“⁠제 계약은 지난봄에 올렸는데요⁠.⁠”

“⁠그러니까 이번에 또 올리는 거지⁠. 재건축 얘기 돌면 다 올라⁠.⁠”

귀남은 파일을 닫았다⁠.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돌아보았다⁠.

“⁠단우야⁠. 위층 놈은 12월에 나간다⁠. 나가고 나면 너 혼자 비싼 월세 내면서 조용히 자는 거야⁠. 서명 하나로 그 삼십 빼 줄 수 있었는데⁠.⁠”

귀남의 발소리가 1층까지 내려갔다⁠. 1층 현관문 여닫히는 소리가 나고⁠, 화분에 물 주던 반차순 할머니의 목소리가 계단통을 타고 올라왔다⁠.

“⁠총각⁠, 또 누구 내쫓으러 왔어⁠?⁠”

“⁠할머니⁠, 귀 어둡다면서 그런 건 잘 들리시네⁠.⁠”

“⁠귤 먹고 가⁠.⁠”

“⁠안 먹어요⁠.⁠”

단우는 현관문을 닫고 문에 등을 기댔다⁠. 알람까지 이십 분이 남아 있었다⁠. 다시 잘 수 없었다⁠.

*

차무헌은 악기점에 가지 않았다⁠. 신발을 신다 말고 거실로 돌아와 드럼 의자에 앉았다⁠. 접은 종이를 다시 펼쳐 「⁠112 신고 1회⁠」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침의 전화가 떠올랐다⁠. 박자는 맞았어요⁠. 일 분에 백이십 번⁠.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로 경찰을 불렀다⁠.

무헌은 오른발을 페달 위에 올리고 있는 힘껏 밟았다⁠. 둥⁠.

한 번 밟고 나서 발을 뗐다⁠. 아래층이 지금 자는 시간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화가 나 있으면서 아래층 잠잘 시간이 떠오르는 자기가 우스웠다⁠. 무헌은 종이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202호 현관문은 무헌이 노크하기도 전에 열렸다⁠. 단우가 문간에 서 있었다⁠. 잠옷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눈 밑이 거뭇했다⁠. 무헌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았다⁠.

“⁠그거⁠, 저도 받았습니다⁠. 다른 종이로⁠.⁠”

“⁠112 신고하셨어요⁠?⁠”

“⁠안 했습니다⁠.⁠”

“⁠구청 민원은요⁠?⁠”

“⁠안 했습니다⁠. 쪽지 아흔한 장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단우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너무 정중해서 무헌은 단우의 대답이 화난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단우가 몸을 옆으로 비켰다⁠.

“⁠들어오세요⁠. 아까 그 소리⁠, 연습 시간 아니었는데⁠.⁠”

“⁠화나서 한 번 밟았어요⁠.⁠”

“⁠알아요⁠. 일 분에 백이십 번이 아니라 한 번이었어요⁠. 한 번은 화난 거예요⁠.⁠”

*

단우의 거실은 무헌의 거실과 구조가 같았다⁠. 드럼 자리에 빨래 건조대가 서 있었고 건조대에 병원 근무복 세 벌이 널려 있었다⁠. 식탁 위에 약 봉지와 수면 안대와 귀마개 통이 놓여 있었다⁠. 귀마개 통은 반쯤 비어 있었다⁠. 무헌은 귀마개 통을 오래 보았다⁠.

“⁠석 달 동안 쓰신 거예요⁠?⁠”

“⁠한 쌍에 사흘쯤 갑니다⁠. 귀가 아파서요⁠.⁠”

단우는 서랍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악기점 영수증 마흔다섯 장이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무헌이 쓴 쪽지들이었다⁠. 무헌은 단우가 이것을 버리지 않았다는 데 놀랐다⁠. 놀란 얼굴을 숨기려고 한 박자 늦게 휴대전화를 꺼냈다⁠.

“⁠잠깐만요⁠. 제 것도 가져올게요⁠.⁠”

무헌이 위층에서 운동화 상자를 들고 내려왔을 때 단우는 거실 바닥에 쪽지를 번호 순서대로 늘어놓고 있었다⁠. 1번부터⁠. 무헌은 상자를 열고 단우 옆에 앉아 처방 메모지들을 번호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둘은 말없이 일했다⁠. 거실 바닥에 쪽지가 길게 이어졌다⁠. 1번은 6월 3일이었다⁠. 단우의 글씨였다⁠. 「⁠위층 분께⁠. 오전에 주무시는 분이 아래층에 있습니다⁠. 조금만 살살 부탁드립니다⁠. 202호 드림⁠.⁠」

“⁠첫 장은 착했네요⁠.⁠”

“⁠첫 장은 다 착합니다⁠.⁠”

열 장째부터 글씨가 날카로워졌다⁠. 서른 장째부터는 둘 다 번호만 보고도 서로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쉰몇 번째의 「⁠박자는 엉망이시던데⁠」에서 단우가 손을 멈췄다⁠. 무헌은 쪽지를 집어 단우가 보지 못하게 뒤집어 놓았다⁠. 단우가 다시 뒤집었다⁠.

“⁠버리지 마세요⁠. 제가 쓴 거니까요⁠.⁠”

일흔 장째를 넘겼을 때 무헌이 손을 멈췄다⁠.

“⁠이거 제가 안 썼어요⁠.⁠”

영수증이었다⁠. 다만 악기점 영수증이 아니었다⁠. 「⁠솔철물 · 망원시장 2길 · 고무 패킹 2⁠,000원⁠」 뒷면에 볼펜으로 쓴 글씨가 있었다⁠.

「⁠아래층 간호사 양반⁠. 병원에 전화해서 밤에 뭐 하는지 물어볼까⁠? 67⁠.⁠」

단우는 67번을 기억했다⁠. 67번을 받은 날⁠, 단우는 출근해서 응급실 탈의실에 앉아 오래 손을 떨었다⁠.

“⁠이거 차무헌 씨가 쓴 줄 알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쓸 줄 알았어요⁠?⁠”

“⁠석 달이면 사람은 뭐든 씁니다⁠.⁠”

둘은 나머지를 다시 보았다⁠. 솔철물 영수증이 무헌의 쪽지들 사이에 세 장 더 섞여 있었다⁠. 67번⁠, 72번⁠, 80번⁠. 단우의 처방 메모지들 사이에서도 무헌이 처음 보는 글씨가 세 장 나왔다⁠. 메모지는 같은 병원 메모지였다⁠. 그런데 글씨가 달랐다⁠. 글씨가 컸고 ‘⁠ㅎ⁠’ 받침을 길게 내리긋는 버릇이 있었다⁠.

「⁠계속 치면 경찰 부릅니다⁠. 이번엔 진짜⁠. 74⁠.⁠」

“⁠이거 제가 안 썼습니다⁠. 저 이런 말 안 씁니다⁠. 저는 경찰 안 부르고 그냥 독하게 씁니다⁠.⁠”

“⁠독하게 쓴 건 아세요⁠?⁠”

“⁠압니다⁠.⁠”

무헌은 74번을 손에 쥐고 처방 메모지 맨 위의 병원 이름을 보았다⁠. 응급실 간호사만 쓰는 메모지가 아니었다⁠. 병원 일 층 원무과 앞에 쌓여 있는⁠, 누구나 집어 갈 수 있는 메모지였다⁠. 단우가 아흔 장 가까이 쓴 메모지를 누군가 한 장 집어 갔다⁠.

여섯 장이었다⁠. 둘 다 쓰지 않은 쪽지가 여섯 장⁠. 번호는 정확하게 끼워져 있었다⁠. 쪽지를 쓴 사람은 석 달 동안 두 집 현관문 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정해요⁠. 신호⁠.⁠”

단우가 말했다⁠. 거실 바닥의 쪽지를 다시 고무줄로 묶으면서였다⁠.

“⁠신호요⁠?⁠”

“⁠쪽지는 이제 안 됩니다⁠. 누가 끼워 넣을 수 있으니까요⁠. 소리로 합시다⁠. 이 건물에서 소리는 가짜를 못 만듭니다⁠.⁠”

단우는 베란다에서 청소용 밀대를 가져왔다⁠. 밀대 손잡이 끝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제가 이걸로 천장을 두 번 치면 잡니다⁠. 그때부터 페달은 밟지 마세요⁠. 세 번 치면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는 밟으셔도 됩니다⁠.⁠”

무헌이 웃었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스틱 한 짝을 꺼냈다⁠. 늘 한 짝은 들고 다녔다⁠.

“⁠그럼 저는 이걸로 바닥을 한 번 치면 연습 시작⁠, 두 번 치면 끝⁠.⁠”

“⁠한 번 치면 저 깹니다⁠.⁠”

“⁠살살 칠게요⁠. 스틱 끝으로⁠. 들릴 만큼만⁠.⁠”

“⁠해 보세요⁠.⁠”

무헌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단우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삼십 초쯤 뒤에 천장에서 작은 소리가 떨어졌다⁠. 똑⁠. 빗방울 하나가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단우는 일어나 밀대를 들고 천장을 세 번 쳤다⁠. 쿵⁠, 쿵⁠, 쿵⁠. 위에서 다시 소리가 왔다⁠. 똑⁠, 똑⁠. 두 번⁠. 연습 끝⁠.

단우는 밀대를 쥔 채로 혼자 웃었다⁠. 석 달 만에 처음으로 천장에서 들은 소리가 듣기 싫지 않았다⁠.

쪽지를 맞춰 본 날 저녁⁠, 단우가 출근하려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문틈에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았다⁠. 대신 문손잡이에 비닐봉지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안에 새 귀마개 한 통이 들어 있었다⁠. 귀가 덜 아프다는⁠, 말랑한 실리콘 귀마개였다⁠. 쪽지는 없었다⁠.

1층 현관을 나설 때 반차순 할머니가 화분 앞 낮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귤 하나를 까다 말고 단우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보았다⁠.

“⁠위층 총각이 준 거지⁠.⁠”

“⁠할머니 귀 어두우신 거 맞으세요⁠?⁠”

“⁠귀는 어두워⁠. 눈이 밝아⁠.⁠”

할머니는 깐 귤을 반으로 갈라 반쪽을 단우의 손바닥에 올렸다⁠. 손톱 밑이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석 달 동안 계단에서 두 총각이 서로 문 앞에 쪽지 끼우고 도망가는 거 다 봤어⁠. 둘 다 끼우고 나서 한참 문 앞에 서 있더라⁠. 답장 오나 하고⁠. 쪽지 하나 더 끼우는 건 처음 봤어⁠. 키 큰 총각이었어⁠. 세 번⁠.⁠”

“⁠세 번이요⁠?⁠”

“⁠밤에⁠. 너희 둘 다 없을 때⁠. 계단 불 안 켜고⁠.⁠”

할머니는 남은 귤 반쪽을 제 입에 넣었다⁠. 단우는 귤을 손바닥에 쥔 채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키 큰 총각이 무헌이 아니라는 것을 단우는 알았다⁠. 무헌은 밤마다 클럽에 있었다⁠.

*

“⁠너 미쳤구나⁠. 귀마개를 샀어⁠? 귀마개를⁠?⁠”

송찬열은 악기점 계산대에 팔꿈치를 괴고 무헌의 휴대전화 결제 내역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헌이 휴대전화를 빼앗았다⁠.

“⁠귀가 아프대⁠.⁠”

“⁠그 사람 귀가 아픈 걸 네가 왜 알아⁠?⁠”

“⁠귀마개 통이 반쯤 비어 있었어⁠.⁠”

“⁠무헌아⁠. 남의 집 귀마개 통이 얼마나 비었는지 보는 사람을 우리는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건물주가 우리 쪽지에 가짜를 끼워 넣었어⁠.⁠”

찬열의 입이 다물렸다⁠. 무헌은 가짜 쪽지 여섯 장 이야기를 했다⁠. 솔철물 영수증⁠, 병원 원무과 메모지⁠, 길게 내리긋는 ‘⁠ㅎ⁠’⁠. 찬열은 다 듣고 나서 한참 계산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노래할 때처럼 박자가 정확했다⁠.

“⁠솔철물이 건물주 거야⁠?⁠”

“⁠몰라⁠. 근데 건물주가 아까 준 펜에 솔철물이라고 적혀 있었대⁠.⁠”

“⁠그럼 월세 영수증 봐⁠. 너 월세 현금으로 내지⁠? 영수증 손으로 써 주지⁠?⁠”

무헌은 찬열을 보았다⁠. 찬열이 처음으로 제 연애 말고 남의 일에 쓸모 있는 말을 했다⁠.

*

이튿날 오전 열한 시⁠, 무헌은 옥상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단우가 열 시에 밀대로 천장을 두 번 쳤고⁠, 무헌은 페달 대신 빨래를 했다⁠. 옥상에는 빨랫줄 세 가닥이 대각선으로 매여 있었고⁠, 구석에 고무 대야와 반차순 할머니의 고추 말리는 채반이 놓여 있었다⁠. 9월 햇볕이 따가웠다⁠. 빨랫줄 너머로 망원동 지붕들이 한강 쪽으로 낮아지다 끝에서 아파트 숲에 막혔다⁠.

계단 문이 열리고 귀남이 올라왔다⁠. 귀남은 무헌을 보고 웃으며 다가왔다⁠. 빨랫줄에 널린 무헌의 티셔츠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무헌아⁠. 옥상 빨랫줄은 공용인데⁠, 이제 너는 쓰지 마라⁠.⁠”

“⁠왜요⁠?⁠”

“⁠너 나가는 사람이잖아⁠. 나가는 사람이 공용 시설 쓰다 다치면 내가 책임져야 돼⁠. 방수 공사도 해야 되고⁠.⁠”

귀남은 무헌의 티셔츠를 빨랫줄에서 걷어 고무 대야에 던졌다⁠. 두 번째 티셔츠를 집었다⁠. 무헌이 귀남의 손목을 잡았다⁠. 은팔찌가 손바닥에 차가웠다⁠.

“⁠사장님⁠. 민원 세 번 넣은 집 아래층 아니던데요⁠.⁠”

귀남의 웃음이 멈췄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럼 다른 집이겠지⁠.⁠”

“⁠다른 집 아니에요⁠. 아래층이 안 썼다는 쪽지가 우리 쪽지 사이에 끼어 있었어요⁠. 여섯 장⁠.⁠”

무헌은 귀남의 손목을 놓고 바지 주머니에서 두 가지를 꺼냈다⁠. 하나는 솔철물 영수증⁠, 67번 쪽지였다⁠. 다른 하나는 지난달 월세 영수증이었다⁠. 귀남이 현금을 받고 현관에 선 채로 영수증 책에 손으로 써서 뜯어 준 것이었다⁠. 「⁠302호 차무헌 8월 월세 육십만 원 정히 영수함 · 염귀남⁠」

무헌은 두 장을 나란히 들어 귀남의 눈앞에 내밀었다⁠. 쪽지의 「⁠아래층 간호사 양반⁠」과 영수증의 「⁠영수함⁠」 두 글씨 모두 ‘⁠ㅎ⁠’ 받침이 종이 밑으로 길게 내리그어져 있었다⁠. 볼펜을 누르는 힘이 같아 종이 뒤까지 자국이 났다⁠.

귀남은 두 장을 오래 보았다⁠. 옥상 바람에 빨랫줄이 흔들렸다⁠. 대야에 처박힌 티셔츠가 물을 먹어 무거워졌다⁠.

“⁠사장님 글씨예요⁠.⁠”

귀남이 손을 뻗어 영수증을 집으려 했다⁠. 무헌은 손을 등 뒤로 돌렸다⁠. 아래층에서 아무 소리도 올라오지 않았다⁠. 단우는 자고 있었다⁠.

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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