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491자)
추진위
층간소음 전쟁 석 달째 · 지마루
서랍 안에 누런 봉투가 하나 있었다. 봉투 위에 붓펜으로 「등기」라고 적혀 있었다. 영감님 글씨였다. 반차순 할머니는 봉투를 꺼내 탁자 위 귤 알 여덟 개 옆에 놓았다.
“나는 글을 반밖에 못 읽어. 영감이 다 읽어 줬어. 총각이 읽어 봐.”
할머니가 봉투를 고시생 쪽으로 밀었다. 고시생이 안경을 내리고 봉투를 열었다. 안에서 접힌 종이 두 장이 나왔다. 1990년 4월 날짜의 등기 권리증이었다. 고시생은 한참 읽었다. 읽는 동안 안경이 콧등에서 두 번 미끄러졌다.
“할머니. 영감님이 땅을 다 판 게 아니네요.”
“그렇다니까.”
“솔빌라 땅이 여덟 몫으로 나뉘어 있어요. 일곱 몫은 사장님 아버님께 갔고요. 한 몫, 101호 아래 땅 한 몫은 영감님 이름으로 남았어요. 영감님 돌아가시고 할머니께 넘어왔으면, 할머니가 솔빌라 땅 주인 가운데 한 분이에요.”
거실이 조용해졌다. 단우가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귤 알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천천히 씹었다.
“그러니까 내가 서른 해 동안 내 땅 위에서 전세 살았네.”
염귀남은 등기 권리증을 보지 않았다. 볼 필요가 없는 얼굴이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무헌은 귀남의 은팔찌가 손목에서 멈춘 것을 보았다. 귀남이 웃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사장님. 알고 계셨습니까?”
단우가 물었다. 정중했다. 네 칸이었다.
“알았다.”
귀남이 말했다. 다정한 반말이 아니었다. 문서 얘기를 할 때 쓰는 존댓말도 아니었다. 그냥 쉰여섯 살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죽을 때 말했어. 101호 땅은 반 씨네 거라고. 영감님이 살아 있는 동안 1층은 그 집 거라고 손가락 걸었다고. 근데 아버지는 계약서를 전세로 썼어. 영감님이 글을 다 못 읽는 걸 알고. 나는 그걸 서른 해 동안 덮었다.”
“왜요?”
무헌이 물었다.
“땅 한 몫이 남아 있으면 솔빌라는 내 거가 아니니까. 재건축하려면 땅 주인 전부가 동의해야 돼. 어머니가 도장 안 찍으면 솔빌라는 못 헐어.”
귀남이 일어났다. 파일을 옆구리에 끼었다. 할머니를 내려다보았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지 않고 귤을 씹었다.
“공사는 한다. 약속했으니까. 월요일부터.”
귀남은 현관으로 가다가 멈췄다.
“그런데 어머니. 솔빌라 하나만 헐 거면 어머니 도장이 필요해요. 골목 전체를 묶으면 얘기가 달라요. 블록 땅 주인 셋 중 둘이 찬성하면 추진위가 신청할 수 있어요. 그럼 어머니 한 몫은 서른 몫 중 하나예요.”
현관문이 닫혔다. 은팔찌 소리가 계단통에 남지 않았다. 할머니가 귤 껍질을 바구니에 던졌다.
“이제야 솔직하네. 서른 해 걸렸어.”
밤 열한 시, 육단우는 할머니 이불을 펴 드리다가 물었다. 할머니는 영정 사진 앞의 물 잔을 갈고 있었다.
“할머니. 알고 계셨죠? 등기요.”
할머니는 물 잔을 내려놓았다. 한참 영정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 영감님은 밀짚모자를 벗고 있었다. 이마가 넓었다.
“알았지. 영감이 죽기 전에 서랍 열쇠를 줬어. 저고리 안에 넣고 다니라고. 누가 나가라고 하면 열라고.”
“그런데 왜 서른 해 동안 안 여셨어요?”
“아무도 나가라고 안 했으니까. 귀남이 아버지도, 귀남이도. 전세금 안 올리고 서른 해를 살게 해 줬어. 거짓말한 놈들이 나를 내쫓지는 않았어.”
할머니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도장이 무서웠어. 도장 찍을 일이 생기면 사람이 변해. 서른 해 전에 영감이 도장 찍고 나서 사흘을 못 잤어. 땅 판 사람은 다 그래. 나는 도장 없이 살고 싶었어.”
단우는 이불 끝을 할머니 어깨 밑으로 접어 넣었다. 응급실에서 하는 손이었다.
“이제는 도장이 있으십니다.”
“그러니까 이제 무서워.”
할머니가 눈을 감았다. 금방 코를 골았다. 단우는 실리콘 귀마개를 꺼내 끼지 않았다. 코 고는 소리를 일 분 동안 세었다. 열여섯. 고른 숨이었다.
*
월요일 아침 여덟 시, 솔빌라 앞 골목에 트럭 두 대가 멈췄다.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이 사다리를 내렸다. 옥상 방수 업체와 보일러 업체였다. 지하 보일러실 자물쇠가 열렸다. 수리 기사는 단우를 보고 처음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연장 가방 옆구리에서 새 부품 상자를 꺼냈다. 포장이 뜯겨 있었다.
차무헌은 302호 창문으로 옥상 방수 작업을 내다보았다. 업체 사람들이 석고 천장 위로 녹색 방수제를 바르고 있었다. 냄새가 창틈으로 들어왔다. 고약한 냄새였다. 무헌은 방수제 냄새를 일 분 넘게 맡았다. 석 달 동안 기다린 냄새였다.
고시생이 사다리 옆에서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공사 날짜, 업체 이름, 자재 상자. 영수증은 공사가 끝나면 받기로 했다. 라이더가 배달 가방을 멘 채 지나가다 업체 사람들에게 박카스 한 상자를 내려놓았다. 유학생은 곰팡이 핀 벽 앞에 서서 작별 사진을 찍었다.
“잘 가라. 너는 나의 첫 서울 친구였다.”
외벽 보수 기사가 유학생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같은 날 밤, 육단우는 응급실 간호사실에서 12월 근무표를 받았다. 첫째 주 토요일 칸에 「N」이 찍혀 있었다. 밤 근무였다. 저녁 일곱 시 출근. 단우는 근무표를 들고 수간호사 책상 앞에 섰다.
“수간호사님. 12월 첫째 토요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수간호사가 안경 너머로 단우를 보았다.
“연말 토요일 밤을 누가 받아 주냐. 응급실 일 년 중 제일 바쁜 밤이야. 송년회 끝나고 넘어진 사람, 싸운 사람,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
“다른 날 두 번 서겠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도 서겠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네가?”
수간호사가 펜을 내려놓았다. 단우를 한참 보았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올해 세 번째였다.
“드러머 공연이냐.”
“네.”
“경위서 쓴 지 한 달 만에 공연 보러 간다고 근무를 바꿔 달래.”
수간호사는 근무표를 받아 들고 아무 말 없이 서랍에 넣었다. 바꿔 주겠다는 말도, 안 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단우는 고개를 숙이고 간호사실을 나왔다. 대답이 없는 서랍은 응급실에서 처음 보았다.
월요일 저녁, 골목 게시판에 종이 한 장이 붙었다. 「망원 2구역 소규모 재건축 추진위원회 주민 설명회 안내」 날짜는 아직 비어 있었다. 아래에 추진위원장의 이름이 있었다. 단우는 게시판 앞에서 이름을 오래 보았다. 응급실 차트 맨 위에 한 달에 한 번씩 적히던 이름이었다.
*
화요일 밤, 차무헌은 「망원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사장이 불렀다. 무대에는 불이 꺼져 있었고 바 위에 맥주 두 병이 놓여 있었다. 사장이 한 병을 무헌 쪽으로 밀었다.
“옥상 공연 봤다. 할머니가 귤 주시더라. 경로당 어르신들도 계시고. 그 어르신들이 우리 가게 민원 넣은 분들이잖아. 박수 치시던데.”
“낮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생각했다. 낮까지는 못 해도, 열 시 전에 끝내자.”
사장이 벽에 붙은 달력을 가리켰다. 12월 첫째 토요일에 빨간 동그라미가 다시 그려져 있었다. 지웠던 자국 위에 새로 그린 동그라미였다.
“여덟 시 시작, 아홉 시 오십 분 끝. 앙코르 없다. 문은 내가 지킨다. 열 시 일 분에 북 소리 나면 너 내 손에 죽는다.”
무헌은 맥주병을 쥔 채 달력을 보았다. 손가락이 바 위를 두드렸다. 둥, 둥. 사장이 무헌의 손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근데 무헌아. 건물주가 요새 전화를 안 받는다. 월세 얘기만 하면 끊어. 스물두 해 동안 이런 적이 없었다. 뭔가 있다.”
사장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무대를 보았다. 불 꺼진 무대 위에 드럼 자리만 하얗게 테이프로 표시되어 있었다. 스물두 해 동안 수백 명이 앉았던 자리였다.
*
목요일 저녁 일곱 시, 망원동 경로당 2층에 골목 건물주 열네 명이 모였다. 단우와 무헌은 맨 뒷줄에 앉았다. 할머니가 같이 가자고 했다. 땅 주인 한 몫이니까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맨 앞줄에 앉아 귤 봉지를 무릎에 올렸다.
추진위원장이 앞으로 나왔다. 혈압약 봉투를 셔츠 주머니에 꽂고 있었다. 단우와 눈이 마주쳤다. 위원장이 먼저 눈을 피했다.
벽에 큰 지도가 붙어 있었다. 망원동 한 블록이었다. 빨간 선이 블록을 둘렀다. 솔빌라가 선 안에 있었다. 순댓국집, 세탁소, 솔철물, 빌라 아홉 동. 그리고 골목 끝 3층 상가 건물. 지하에 「망원 지하」가 있는 건물이었다.
“정부 법안이 상임위를 통과했습니다. 내년부터 동의율 기준이 낮아집니다. 블록을 크게 묶을수록 용적률을 더 받습니다.”
위원장이 빨간 선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골목 끝 상가 건물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이 건물 주인께서 어제 동의서를 내셨습니다.”
뒷줄에서 무헌이 몸을 일으켰다. 단우가 무헌의 손목을 잡았다. 맥이 뛰는 자리였다. 무헌은 다시 앉았다. 앉아서 오른발을 바닥에 댔다. 밟지 않았다.
경로당 건물주들 사이에서 박수가 나왔다. 대부분 일흔이 넘은 사람들이었다. 위원장이 말한 대로였다. 낡은 집 하나 들고 혈압약 먹으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맨 앞줄의 할머니 옆에 앉은 세탁소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귤을 하나 얻어 들고 말했다.
“차순 씨. 우리도 엘리베이터 있는 집에서 죽어 보자고.”
할머니가 대답했다.
“나는 내 땅에서 죽을 거야. 엘리베이터는 하늘 갈 때 타면 돼.”
경로당 2층이 웃었다. 위원장도 웃었다. 귀남은 위원장 옆자리에 앉아 웃지 않았다.
“그럼 설명회 날짜를 정하겠습니다.”
위원장이 말했다. 귀남이 위원장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위원장이 종이를 보았다. 잠깐 멈췄다. 단우를 보았다. 다시 종이를 보았다.
“12월 첫째 주 토요일, 저녁 여덟 시. 장소는 이 경로당입니다. 철거 일정과 이주비 설명을 드립니다. 땅 주인과 세입자 모두 오십시오. 세입자분들 이주비도 이 자리에서 정합니다.”
단우가 고개를 들었다. 12월 첫째 주 토요일, 저녁 여덟 시. 무헌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날짜였다. 취소됐다가 「망원 지하」 사장이 다시 살려 준 단독 공연이었다. 아홉 시 오십 분에 끝내는 조건으로.
“위원장님.”
단우가 뒷줄에서 일어났다. 경로당의 열네 명이 돌아보았다.
“세입자 이주비를 정하는 자리면 세입자가 다 와야 합니다. 그날 저녁 솔빌라 세입자 일곱 집 중 넷이 같은 골목 「망원 지하」에 있습니다. 공연이 있습니다. 날짜를 바꿔 주십시오.”
위원장이 단우를 보았다. 귀남을 보았다. 귀남이 탁자 밑에서 위원장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위원장의 혈압약 봉투가 셔츠 주머니에서 흔들렸다.
“육 간호사.”
위원장의 목소리가 작았다.
“날짜는 위원회가 정합니다. 세입자분들은 대리인을 보내셔도 됩니다.”
무헌이 일어났다. 단우가 이번에는 손목을 잡지 않았다.
“설명회 끝나면 「망원 지하」도 철거 일정에 들어가요?”
“블록 안 건물은 전부 들어갑니다.”
“그럼 그날이 마지막 공연이네요.”
경로당이 조용해졌다. 귀남이 처음으로 무헌을 똑바로 보았다. 웃지 않았다.
“무헌아. 너는 북 쳐. 우리는 도장 찍을 테니까. 각자 할 일 하자.”
할머니가 귤 봉지를 들고 일어났다. 지팡이를 짚었다. 열네 명의 건물주 앞을 천천히 지나 뒷줄의 단우와 무헌에게 왔다. 두 사람의 손에 귤을 하나씩 쥐여 주었다. 그리고 경로당이 다 듣도록 말했다.
“나는 그날 공연 가. 내 도장은 내 주머니에 있어. 도장 받고 싶으면 「망원 지하」로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