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50자)

받아쓰기

꿈에서 만나는 남녀북남 · 기담오

강유채는 꿈에서 들은 문장을 아침 식탁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4월 27일 아침 일곱 시였다⁠. 문장은 한 글자도 흐려지지 않았다⁠. 남쪽에 전한다⁠. 우리 바다에 들어온 남쪽 어선 제삼 해성호 선원 다섯을 돌려줄 수 있다⁠. 대신 지난 3월 남쪽으로 내려간 우리 공민 셋을 돌려 달라⁠.

민영은 받아 적다가 볼펜을 멈췄다⁠. 요원이 노트북에 같은 문장을 치고 「⁠확인했습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민영은 수첩을 덮고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유채는 요구르트를 따지 않고 쥐고만 있었다⁠. 꿈에서 광혁은 문장을 다 말하고 나서 한참 물속을 내려다보았다⁠. 셋은 내가 보낸 사람들이다⁠, 하고 광혁이 말했을 때 철조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참말이었다⁠. 돌려보내면 셋이 어떻게 되는지 광혁은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유채는 알았다⁠. 돌려보내면요⁠, 하고 유채가 물었을 때 광혁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모래에 선을 그었다가 지웠다⁠. 강 하구⁠, 바다⁠, 섬 하나⁠. 3월에 백령도를 그리던 손가락이었다⁠. 지운 자리로 물이 들어와 모래가 금방 평평해졌다⁠. 광혁은 평평해진 모래를 오래 내려다보았고⁠, 유채는 광혁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

점심때 차장이 왔다⁠. 예순 줄의 사내였다⁠. 머리숱이 적었고⁠, 돋보기를 코끝에 걸쳤다가 내렸다가 했다⁠. 차장은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식탁의 박하사탕 그릇에서 사탕 세 개를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민영의 사탕 버릇이 어디서 왔는지 유채는 그제야 알았다⁠.

“⁠강 소방장이 그 꿈의 주인이구만⁠. 반가워요⁠. 고생이 많아요⁠.⁠”

차장은 악수를 하고 나서 바로 노트북을 펼쳤다⁠. 화면에 문서 한 장이 떠 있었다⁠. 차장은 돋보기를 코끝에 걸치고 소리 내어 읽었다⁠.

“⁠남쪽에서 북쪽에 전한다⁠. 첫째⁠, 제삼 해성호 선원 다섯은 조업 중 엔진 고장으로 경계선을 넘었다⁠. 조건 없이 돌려 달라⁠. 둘째⁠, 지난 3월 내려온 세 사람은 스스로 남쪽에 머물기를 원한다⁠. 세 사람의 뜻을 따르는 것이 우리 원칙이다⁠. 셋째⁠, 북쪽은 세 사람이 남쪽에 꾀여 왔다고 하나⁠, 세 사람은 해경 조사에서 떠나던 밤 북쪽 초소 군인이 손전등을 물로 돌려 보내 주었다고 진술했다⁠. 북쪽은 먼저 자기 군인을 살피라⁠.⁠”

차장은 문서를 끝까지 읽었다⁠. 넷째와 다섯째가 더 있었다⁠. 경계선 어로 문제⁠, 다음 연락 시각⁠. 모두 열한 줄이었다⁠. 유채의 귀에는 셋째 줄만 남았다⁠.

“⁠셋째 줄 빼 주세요⁠.⁠”

차장이 돋보기를 내리고 유채를 보았다⁠.

“⁠왜요⁠?⁠”

“⁠그 군인이 그 사람이에요⁠. 그 줄이 저쪽으로 가면 그 사람 죽어요⁠.⁠”

차장은 민영을 보았다⁠. 민영은 수첩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강 소방장⁠, 저쪽은 우리가 세 사람을 꾀어 왔다고 해요⁠. 그 말을 그냥 두면 우리가 세 사람을 붙잡아 두는 나라가 되고⁠, 저쪽은 그걸 핑계로 선원 다섯을 안 돌려줄 수 있어요⁠. 세 사람이 스스로 왔다는 걸 보여 주려면 셋째 줄이 있어야 해요⁠.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니까 더 안 돼요⁠.⁠”

“⁠그쪽 군인 하나가 우리 선원 다섯보다 무거운가요⁠?⁠”

차장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정말로 묻는 목소리였다⁠. 유채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섯 명의 얼굴은 몰랐다⁠. 광혁의 얼굴은 알았다⁠. 아는 얼굴이 모르는 얼굴 다섯보다 무겁다고 입 밖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담당관님도 같은 생각이세요⁠?⁠”

유채가 민영에게 물었다⁠. 민영은 수첩을 덮었다⁠.

“⁠셋째 줄은 들어가야 해요⁠.⁠”

“⁠담당관님 아버지도 그렇게 끌려가셨잖아요⁠. 다섯이 다 담당관님 아버지예요⁠. 그건 알아요⁠. 근데 그 군인도 누구 아들이에요⁠.⁠”

민영의 얼굴이 굳었다⁠. 차장이 헛기침을 했다⁠.

“⁠강 소방장⁠. 줄은 우리가 쓰고⁠, 소방장은 나르기만 하면 돼요⁠. 이건 소방장이 정할 일이 아니에요⁠.⁠”

차장은 노트북을 닫고 일어났다⁠.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도로 꺼내 유채 앞에 놓았다⁠.

“⁠사흘 뒤 세 시 십 분⁠. 그때까지 외워요⁠. 한 글자도 틀리지 말고⁠.⁠”

*

밤 열한 시⁠, 민영은 베란다에서 맥주 캔을 따고 있었다⁠. 유채가 유리문을 열고 나가자 민영은 캔 하나를 더 꺼내 내밀었다⁠. 신도시 아파트 단지의 불빛이 줄을 맞춰 켜져 있었다⁠. 저 멀리 고속도로에서 트럭 불빛이 흘렀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아버지 얘기 꺼낸 거⁠.⁠”

“⁠아니에요⁠. 맞는 말이었어요⁠.⁠”

민영은 캔을 한 모금 마셨다⁠. 박하사탕을 물고 맥주를 마시면 무슨 맛일지 유채는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열 살 때부터 해마다 6월이면 연안부두에 나갔어요⁠. 배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서요⁠. 스무 살 넘어서는 혼자 갔고⁠,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일 핑계로 갔어요⁠. 제칠 순풍호가 들어올 리 없는 거 알면서요⁠.⁠”

민영은 난간에 팔을 걸쳤다⁠.

“⁠셋째 줄이 빠지면 저쪽은 우리가 세 사람을 꾀었다고 계속 말할 거예요⁠. 그러면 선원 다섯은 오래 붙잡혀 있을 거고⁠, 아버지 소식을 주던 소좌는 더는 저한테 아무것도 안 줄 거예요⁠. 저는 그걸 알아요⁠. 그래서 셋째 줄을 넣자고 한 거예요⁠.⁠”

“⁠그 군인은요⁠?⁠”

“⁠그 군인은⁠.⁠”

민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캔을 쥔 손가락이 하얘졌다⁠. 한참 뒤에 민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방장님은 그 사람 얼굴을 알잖아요⁠. 저는 우리 아버지 얼굴을 열 살 때 것밖에 몰라요⁠.⁠”

둘은 더 말하지 않았다⁠. 맥주 캔이 손바닥 안에서 미지근해졌다⁠. 아래 놀이터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그네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

열한 줄은 길었다⁠. 유채는 문서를 출력해 거실 바닥에 펼쳐 놓고 소리 내어 읽었다⁠. 꿈에서 들은 말은 깨어나면 한 글자도 안 흐려졌지만⁠, 꿈으로 가져가는 말은 달랐다⁠. 잠들기 전에 제 머리에 넣어 둔 만큼만 가져갈 수 있었다⁠. 열 번을 읽어도 넷째 줄에서 막혔다⁠. 「⁠경계선 인근 수역에서의 어로 활동과 관련한 상호 통보 절차의 복원을 제안한다⁠.⁠」

“⁠이걸 누가 말로 해요⁠? 혀가 꼬여요⁠.⁠”

요원이 노트북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외교 문장은 원래 혀가 꼬이게 씁니다⁠. 확인했습니다⁠.⁠”

“⁠뭘 확인했는데요⁠?⁠”

“⁠혀가 꼬이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튿날 오후⁠, 민영이 문을 열어 주자 팀장과 민석이 들어왔다⁠. 유채가 민영에게 사정했다⁠. 열한 줄을 외우는 데 사람이 필요하다고⁠, 무엇을 외우는지는 말하지 않겠다고⁠. 민영은 하루를 고민하다 허락했다⁠. 대신 두 사람에게 서약서를 받았다⁠. 팀장은 서약서에 이름을 쓰다 말고 민영을 보았다⁠.

“⁠우리 유채가 무슨 큰일 하는 거죠⁠?⁠”

“⁠큰일은 아니고요⁠, 잠을 자는 일입니다⁠.⁠”

“⁠잠은 내가 전문인데⁠.⁠”

팀장은 거실을 둘러보고 민석은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팀장이 유채 앞에 쪼그려 앉았다⁠.

“⁠유채야⁠. 무슨 일인지 다 말 안 해도 돼⁠. 근데 하나만 묻자⁠. 사람 다치는 일이냐⁠?⁠”

유채는 대답하지 않았다⁠. 팀장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알았다⁠. 그럼 구조대는 안 빠진다⁠.⁠”

팀장은 유채가 펼쳐 놓은 종이를 보려다 민영의 눈짓에 고개를 돌렸다⁠. 대신 다른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출동 무전 교범이었다⁠.

“⁠긴 거 외울 땐 무전으로 바꿔⁠. 무전은 짧게 끊고 끝에 꼭 붙이는 말이 있지⁠.⁠”

“⁠이상⁠.⁠”

“⁠그래⁠. 한 줄마다 이상⁠. 몸이 기억한다⁠.⁠”

민석이 요구르트를 하나 들고 와서 거들었다⁠.

“⁠선배님⁠, 저는 소개팅 앱 자기소개를 이렇게 외웠어요⁠. 마포 소방서 나민석⁠, 스물여섯⁠, 취미는 헬스⁠, 이상⁠.⁠”

“⁠그래서 매칭됐어⁠?⁠”

“⁠이상이 너무 많다고 차단당했어요⁠.⁠”

팀장이 바닥에 드러누워 웃었다⁠. 유채도 웃었다⁠. 이틀 만에 처음 웃는 웃음이었다⁠. 셋은 저녁까지 거실에 앉아 연습했다⁠. 유채가 문서의 한 줄을 속으로 읽고⁠, 무전 말투로 바꿔 소리 내어 말하면⁠, 팀장이 「⁠수신 양호⁠」를 외쳤다⁠. 내용은 팀장과 민석이 못 듣게 입속으로만 읽고⁠, 끝의 「⁠이상⁠」만 크게 했다⁠. 「⁠이상⁠」이 거실에 열한 번 울렸다⁠. 열한 번째 「⁠이상⁠」에서 민석이 박수를 쳤다⁠.

유채는 셋째 줄을 읽을 때마다 입속에서 목이 메었다⁠. 팀장은 보지 못한 척했다⁠.

*

4월 29일 밤⁠, 할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영수 오라비 언제 만나냐 나 구십이다 기다리다 죽는다 옥순이⁠」⁠. 유채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 할머니는 오 분 뒤에 한 통을 더 보냈다⁠. 「⁠답 안 하면 더 섭섭하다⁠」⁠.

유채는 결국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는 신호가 한 번 가자마자 받았다⁠.

“⁠할머니⁠, 조금만 기다려⁠. 사람들이 알아보고 있어⁠.⁠”

“⁠무슨 사람들⁠?⁠”

“⁠나라 사람들⁠.⁠”

“⁠나라가 언제부터 내 오라비를 알아봤냐⁠. 일흔여덟 해 동안 모르던 나라가⁠.⁠”

할머니는 혀를 차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유채야⁠. 니 그 집 손자 좋아하냐⁠?⁠”

유채는 대답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수화기 너머에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알았다⁠. 자라⁠.⁠”

할머니는 인사 없이 끊었다⁠. 평소와 같았는데 평소와 달랐다⁠. 끊기 전에 무슨 말을 하려다 삼킨 숨이었다⁠.

유채는 휴대전화를 엎어 두고 출력한 문서를 다시 집었다⁠. 셋째 줄을 손가락으로 덮었다⁠. 덮으니 열 줄이었다⁠. 열 줄도 말이 되었다⁠. 선원 다섯을 돌려 달라는 말도⁠, 세 사람이 스스로 머물기를 원한다는 말도 그대로였다⁠. 빠진 것은 손전등뿐이었다⁠.

손가락을 떼고 셋째 줄을 다시 보았다⁠. 「⁠북쪽 초소 군인이 손전등을 물로 돌려 보내 주었다⁠」⁠. 꿈에서 광혁은 손전등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대신 흰 천이 어느 쪽으로 펄럭였는지를 두 번 말했다⁠. 말하지 않은 손전등을 남쪽이 북쪽에 일러 주는 꼴이었다⁠.

유채는 셋째 줄을 연필로 그었다⁠. 그은 줄 위로 다시 한 번 그었다⁠. 종이가 찢어질 만큼 눌렀다⁠.

*

4월 30일 새벽 세 시 십 분⁠. 바닷가는 따뜻했다⁠. 철조망은 정강이 높이였다⁠. 광혁은 군복 윗단추까지 채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라 전갈을 받는 날이라서였다⁠.

“⁠말하라⁠. 다 외웠다⁠.⁠”

“⁠외울 건 나예요⁠.⁠”

“⁠나도 너한테 들은 걸 외워야 한다⁠. 깨면 남는 건 내 쪽이다⁠.⁠”

유채는 숨을 들이쉬었다⁠. 거실에서 연습한 대로 한 줄씩 끊었다⁠. 첫째 줄⁠, 선원 다섯⁠. 둘째 줄⁠, 세 사람의 뜻⁠. 그리고 넷째 줄로 건너뛰었다⁠. 혀가 꼬이는 어로 통보 절차⁠. 다섯째⁠, 여섯째⁠. 열한 번째 줄 대신 열 번째에서 멈췄다⁠.

“⁠이게 다예요⁠.⁠”

쇠줄이 움찔했다⁠.

정강이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말뚝이 솟았다⁠. 멈추지 않았다⁠. 허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쇄골로⁠. 가시가 쇠줄 마디마다 새로 돋았다⁠. 바닷가에 온 뒤로 이렇게 높이 올라간 적이 없었다⁠. 철조망이 유채의 목에 닿았다⁠. 턱 밑에 뾰족한 가시 끝이 겨누어졌다⁠.

유채는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숙이면 가시가 목에 박혔다⁠.

광혁은 철조망 너머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광혁의 목에도 가시가 닿아 있었다⁠. 광혁은 유채를 보지 않고 철조망을 보았다⁠. 쇠줄이 언제 움찔했는지⁠, 몇 번째 줄 다음이었는지 다 본 얼굴이었다⁠. 강가에서 손전등 하나로 밤을 새운 사람의 눈은 그런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게 다냐⁠?⁠”

유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쇠줄이 한 뼘 더 올라왔다⁠.

광혁이 목에 닿은 가시를 피하지 않고 한 걸음 다가왔다⁠. 가시 끝이 광혁의 목살을 눌렀다⁠.

“⁠뭘 뺐나⁠?⁠”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느린독자2026.11.01· 9화

    목에 가시 닿은 채로 서로 쳐다보는 장면, 숨 참고 읽었어요. 유채가 뭘 뺀 거예요?

    • 기담오작가2026.11.01

      유채가 뺀 한 줄이 다음 화부터 두 사람 사이에 남습니다. 광혁은 쇠줄이 움찔한 순간을 다 봤어요.

받아쓰기 · 꿈에서 만나는 남녀북남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