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55자)

여섯 손가락

꿈에서 만나는 남녀북남 · 기담오

리광혁은 바닷가에 내려서자마자 유채의 얼굴부터 보았다⁠. 4월 24일 새벽 세 시 십 분이었다⁠. 유채는 철조망 앞 물속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단둥에서 보았던 그을린 얼굴이 꿈속 분홍빛 아래에서 더 어두워 보였다⁠. 철조망은 무릎 높이 그대로였다⁠.

“⁠할머니가 사진 봤어요⁠.⁠”

유채는 인사도 하지 않고 말했다⁠. 광혁은 맞은편 물속에 앉았다⁠. 물이 미지근했다⁠.

“⁠뭐라 하시던가⁠?⁠”

“⁠살구나무다⁠. 남민동 우물가 살구나무⁠. 그리고 내 오라비다⁠, 영수 오라비⁠.⁠”

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귀에 겹쳤다⁠. 남쪽 간 내 동생이다⁠, 옥순이⁠. 두 목소리가 강 하나를 건너 서로 꼭 맞물렸다⁠.

“⁠할머니 이름이 옥순이에요⁠. 이옥순⁠.⁠”

“⁠안다⁠.⁠”

유채가 고개를 들었다⁠.

“⁠사진 뒷면에 영수 옥순이라고 쓰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순아⁠, 하고 불렀다⁠. 지난번에 네가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알았다⁠. 말하기가 무서워서 안 했다⁠.⁠”

쇠줄이 아래로 움찔했다⁠. 말뚝이 한 뼘 줄었다⁠. 무릎에서 정강이로⁠. 숨긴 것을 꺼내 놓자 철조망이 먼저 알아들었다⁠.

“⁠왜 무서웠어요⁠?⁠”

“⁠지금 네 얼굴이 무서웠다⁠.⁠”

유채는 한참 광혁을 노려보다가 손가락을 하나씩 펴기 시작했다⁠.

“⁠할머니하고 당신 할아버지가 남매면⁠, 우리 아버지하고 당신 아버지가 사촌이에요⁠. 사촌의 자식끼리는⁠.⁠”

“⁠일촌이 남매가 아니가⁠?⁠”

“⁠남매는 이촌이에요⁠. 부모 자식이 일촌⁠.⁠”

“⁠그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촌⁠, 아버지들이 사촌이고⁠.⁠”

광혁은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다가 헷갈려서 처음부터 다시 셌다⁠. 유채가 철조망 너머로 손을 내밀어 광혁의 손가락을 하나씩 짚어 주었다⁠. 짚는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광혁은 마지막에 손가락 여섯 개를 펴 보였다⁠. 한 손은 다 펴고 다른 손은 엄지만 폈다⁠.

“⁠여섯⁠.⁠”

“⁠육촌⁠.⁠”

둘은 광혁의 손가락 여섯 개를 한참 보았다⁠. 광혁은 손을 천천히 거둬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유채의 손도 철조망 너머에서 허공에 멈췄다가 내려갔다⁠.

“⁠남쪽 법으로는 육촌이 혼인을 못 하나⁠?⁠”

“⁠팔촌까지 못 해요⁠.⁠”

“⁠북쪽도 비슷하다⁠. 기런데 팔촌이면 우리 동네 사람 절반이 친척이다⁠.⁠”

유채가 웃음을 터뜨렸다가 금방 그쳤다⁠. 웃음 끝이 갈라져 있었다⁠.

“⁠아직 몰라요⁠.⁠”

“⁠뭘 모르나⁠?⁠”

“⁠할머니가 뭔가 숨겨요⁠. 오라비가 할머니를 업고 대동강을 건너고 나서 북쪽으로 돌아갔대요⁠. 북쪽에 어머니가 있다고⁠. 근데 할머니 부모님은 그해 가을에 다 돌아가셨대요⁠. 내가 물으니까 할머니가 그랬어요⁠. 오라비 어머니가⁠.⁠”

광혁은 말을 곱씹었다⁠. 오라비 어머니⁠. 제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오라비 어머니라고 했다⁠.

“⁠남매면 어머니가 같다⁠.⁠”

“⁠그러니까요⁠.⁠”

“⁠할머니가 잘못 말씀하신 걸 수도 있다⁠. 아흔이시다⁠.⁠”

“⁠우리 할머니는 아흔이라도 말 한 글자 안 틀려요⁠. 홈쇼핑 전화번호도 다 외워요⁠.⁠”

쇠줄은 움직이지 않았다⁠. 둘 다 참말이었고⁠, 둘 다 아무것도 몰랐다⁠. 철조망은 모르는 것까지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둘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등을 돌려 앉았다⁠. 등과 등 사이에 쇠줄 한 가닥이 있었다⁠. 유채의 등이 철조망에 기대자 쇠줄이 조금 휘었다⁠. 광혁은 등으로 쇠줄의 휨을 느꼈다⁠. 휜 쇠줄 너머로 유채의 체온이 건너왔다⁠. 손을 맞댈 때보다 멀고⁠, 아무것도 안 닿을 때보다는 가까웠다⁠.

*

4월 25일 오전⁠, 신문실 복도가 시끄러웠다⁠. 구둣발 소리가 여럿이었다⁠. 경비병이 문을 열고 들어와 차렷 자세로 외쳤다⁠.

“⁠국장 동지 오십네다⁠!⁠”

예순 줄의 사내가 들어왔다⁠. 두툼한 몸에 짙은 남색 인민복을 입었고⁠, 머리가 하얗게 셌다⁠. 창익이 뒤를 따랐다⁠. 창익은 오늘 담배 개비를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 국장은 의자에 앉지 않고 광혁 앞에 멈췄다⁠. 국장의 눈은 광혁을 사람보다는 물건처럼 훑었다⁠.

“⁠이 사람이 그 하사인가⁠?⁠”

“⁠예⁠, 국장 동지⁠.⁠”

“⁠말라서 쓸모가 있겠나⁠?⁠”

“⁠잠은 잘 잡네다⁠.⁠”

창익의 대답에 국장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은 아니었다⁠.

“⁠남과 북 사이에 지금 줄이 하나도 없다⁠. 서해에서 남쪽 어선을 하나 붙잡았는데⁠, 저쪽에 말을 전할 길이 없다⁠. 전화는 우리가 끊었고⁠, 중국을 거치면 중국이 다 듣는다⁠. 이 하사 베개 위로 가면 아무도 못 듣는다⁠.⁠”

국장은 창익을 돌아보았다⁠.

“⁠오 소좌가 중개인 이름을 받는다는 계획은 들었다⁠. 작은 일이다⁠. 이제 이건 위에서 쓴다⁠.⁠”

창익의 턱이 한 번 굳었다⁠. 광혁은 그것을 보았다⁠. 창익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이 지금 국장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국장은 더 말하지 않고 나갔다⁠. 구둣발 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졌다⁠. 창익은 문을 닫고 한참 문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

“⁠들었지⁠.⁠”

창익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담배에 바로 불을 붙였다⁠.

“⁠지금부터 너는 나라 전갈을 나른다⁠. 한 글자도 틀리면 안 된다⁠. 그 여자도⁠.⁠”

“⁠조건이 있습네다⁠.⁠”

창익이 연기를 뱉다 말고 광혁을 보았다⁠.

“⁠조건⁠?⁠”

“⁠할아버지가 옥순이 할머니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한 번이면 됩네다⁠. 할아버지는 아흔셋입네다⁠.⁠”

“⁠네가 조건을 거는 자리가 아니다⁠.⁠”

“⁠꿈은 제가 잡네다⁠.⁠”

광혁은 창익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신문실에 온 뒤로 처음이었다⁠.

“⁠국장 동지 말씀대로 이 줄은 제 베개 위에 있습네다⁠. 제가 안 자면 줄은 끊깁네다⁠. 그 여자도 안 자면 끊깁네다⁠. 우리 둘은 이미 정했습네다⁠. 나라 전갈은 나르겠습네다⁠. 대신 할아버지 하나는 가져가겠습네다⁠.⁠”

“⁠언제 정했나⁠?⁠”

“⁠어젯밤에⁠. 등을 맞대고⁠.⁠”

창익은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가 연기를 길게 뱉었다⁠. 담뱃재가 탁자에 떨어졌다⁠. 창익은 재를 쓸지 않았다⁠.

“⁠이산가족이라⁠. 국장 동지가 싫어하지는 않겠다⁠. 저쪽도 거절할 핑계가 없지⁠. 아흔 살 할머니를 거절하는 나라는 욕먹는다⁠.⁠”

“⁠기럼 올려 주십시오⁠.⁠”

“⁠올리기는 올린다⁠. 위에서 어떻게 받을지는 모른다⁠.⁠”

창익은 담배를 비벼 끄고 일어났다⁠. 문고리를 잡고 돌아보았다⁠.

“⁠너 신문실 와서 많이 컸다⁠.⁠”

“⁠국수가 맛없어서 그렇습네다⁠. 소문으로 배를 채웠습네다⁠.⁠”

창익이 처음으로 신문실 안에서 소리 내어 웃었다⁠.

*

4월 26일 오후⁠, 마당이 시끄러워 광혁은 창가로 갔다⁠. 쇠창살 너머 마당 한가운데로 사내 다섯이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앞뒤로 총을 멘 경비병이 하나씩 붙었다⁠. 다섯은 이쪽 사람들과 옷이 달랐다⁠. 고무장화를 신었고⁠, 형광 주황 줄이 들어간 작업 점퍼를 입었다⁠. 맨 앞 사내의 점퍼 등판에 하얀 글씨가 찍혀 있었다⁠. 「⁠제삼 해성호⁠」⁠.

맨 뒤의 사내는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이였다⁠. 늙은이는 걸음이 느려서 자꾸 앞사람과 사이가 벌어졌고⁠, 벌어질 때마다 경비병이 개머리판으로 등을 가볍게 밀었다⁠. 늙은이가 비틀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눈이 신문실 창에 와서 멈췄다⁠. 광혁은 창살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늙은이는 광혁의 얼굴을 한참 보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무엇에 끄덕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창 안과 창 밖에 갇힌 사람끼리 하는 인사였다⁠.

다섯이 건물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경비병이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남쪽 어부들입네다⁠. 어제 남포에서 실려 왔습네다⁠.⁠”

“⁠여기서 지내나⁠?⁠”

“⁠아래층에 있습네다⁠. 기런데 하사 동지⁠, 그 사람들 밥은 우리보다 잘 먹습네다⁠. 손님이라고 쌀밥을 줍네다⁠. 저도 손님 하고 싶습네다⁠.⁠”

경비병은 진지한 얼굴로 투덜거리고 문을 닫았다⁠. 광혁은 창가에 남아 마당을 보았다⁠. 늙은이의 고무장화가 남긴 진흙 발자국이 마당에 드문드문 찍혀 있었다⁠. 스물아홉 해 전에는 민영의 아버지도 고무장화를 신고 어느 마당을 저렇게 걸었다⁠. 바다에서 끌려온 사람은 다 저렇게 걸었다⁠. 광혁은 스물아홉 해 전의 마당을 떠올리다가 그만두고⁠, 진흙 발자국을 하나씩 세었다⁠. 열아홉 개에서 발자국이 건물 그늘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

밤 열한 시⁠, 창밖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돌멩이가 쇠창살에 맞는 소리였다⁠. 광혁이 창가로 가서 내려다보았다⁠. 담 밑 어둠 속에 작고 통통한 그림자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하사님⁠! 하사님⁠!⁠”

철민이었다⁠. 철민은 보자기에 싼 무엇인가를 두 손으로 들어 보였다⁠.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높이였다⁠. 철민은 보자기를 휘휘 돌리다가 위로 던졌다⁠. 첫 번째는 벽에 맞고 떨어졌다⁠. 두 번째는 창살에 걸쳤다가 떨어졌다⁠. 세 번째에 광혁이 창살 사이로 손을 내밀어 받았다⁠. 보자기 안에 삶은 감자 세 알이 들어 있었다⁠. 아직 따뜻했다⁠.

“⁠하사님 어머니가 전해 달랍네다⁠! 하나는 하사님 거⁠, 하나는 할아버지가 보낸 거⁠, 하나는 제가 몰래 넣었습네다⁠!⁠”

“⁠목소리 낮추라⁠. 경비 온다⁠.⁠”

철민은 고개를 움츠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낮춰도 철민의 목소리는 컸다⁠.

“⁠하사님⁠, 저 오늘 소좌 동지한테 불려 갔습네다⁠.⁠”

광혁은 창살을 잡았다⁠.

“⁠3월 마지막 밤에 너도 강둑에 있었냐고 물었습네다⁠. 있었다 했습네다⁠. 하사님 손전등이 어디를 비췄냐고 물었습네다⁠.⁠”

“⁠뭐라 했나⁠?⁠”

“⁠계속 강을 비췄다 했습네다⁠. 한 번도 물로 안 떨어졌다 했습네다⁠.⁠”

“⁠철민아⁠.⁠”

“⁠저는 그 밤에 초소에서 잤습네다⁠. 코 골면서⁠. 하사님 손전등은 못 봤습네다⁠. 기러니까 거짓말입네다⁠.⁠”

철민은 담 밑에서 코를 훌쩍였다⁠. 어둠 속이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소좌 동지가 제 얼굴을 한참 보더니 가라 했습네다⁠. 하사님⁠, 저 이제 하사님 편입네다⁠. 원래도 편이었는데 이제는 진짜 편입네다⁠.⁠”

“⁠거짓 진술이 들키면 너는 제대 못 한다⁠.⁠”

“⁠제대 못 해도 장가는 갑네다⁠. 초소 개 나비하고라도⁠.⁠”

광혁은 감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감자가 손바닥 안에서 뭉개졌다⁠. 철민은 담 밑을 따라 기어서 사라졌다⁠. 사라지기 직전에 한마디가 올라왔다⁠.

“⁠니스워더웨이이⁠!⁠”

경비병의 손전등 불빛이 마당을 훑고 지나갔다⁠. 광혁은 창살에 이마를 댄 채로 뭉개진 감자를 먹었다⁠. 소금이 쳐져 있었다⁠. 어머니는 늘 소금을 넉넉히 쳤다⁠.

*

4월 27일 새벽 두 시⁠, 창익이 신문실 문을 열었다⁠.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타자기로 친 글씨였다⁠. 창익은 종이를 탁자에 내려놓고 등불을 끌어당겼다⁠.

“⁠위에서 내려왔다⁠. 네 조건도 같이 올렸다⁠. 할아버지 일은 답이 아직 없다⁠. 이것부터 나른다⁠.⁠”

광혁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짧은 문장 셋이었다⁠.

「⁠남쪽에 전한다⁠. 우리 바다에 들어온 남쪽 어선 제삼 해성호 선원 다섯을 돌려줄 수 있다⁠. 대신 지난 3월 남쪽으로 내려간 우리 공민 셋을 돌려 달라⁠.⁠」

광혁의 눈이 마지막 문장에서 멈췄다⁠. 지난 3월 남쪽으로 내려간 셋⁠. 파란 방수포⁠, 막대기 끝의 흰 천⁠, 손바닥을 들어 보이던 늙은 사내⁠. 엔진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물에 박아 두었던 손전등 빛⁠.

“⁠외워라⁠. 세 시 십 분이다⁠.⁠”

창익은 종이를 광혁 쪽으로 밀었다⁠. 광혁은 종이를 받지 않았다⁠. 손바닥에 남은 감자의 소금기가 따끔했다⁠.

“⁠소좌 동지⁠. 그 셋은 제가⁠.⁠”

“⁠안다⁠.⁠”

창익이 광혁의 말을 잘랐다⁠. 목소리가 낮았다⁠.

“⁠그러니까 네 입으로 나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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