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97자)

시험 문장

꿈에서 만나는 남녀북남 · 기담오

강유채는 낯선 침대 위에서 천장의 화재 감지기부터 찾았다⁠. 직업병이었다⁠. 둥근 감지기는 침대 바로 위에 있었고⁠, 초록 불이 깜빡였다⁠. 경기도 어느 신도시 아파트 12층이었다⁠. 거실에는 소파와 식탁이 있었고 냉장고에는 생수와 요구르트가 줄 맞춰 들어 있었다⁠. 작은방 하나만 이상했다⁠. 침대 머리맡에 노트북과 선이 잔뜩 달린 상자가 놓여 있었고⁠, 벽에서는 큰 시계가 째깍거렸다⁠.

“⁠여기서 주무시면 돼요⁠. 집처럼 쓰세요⁠.⁠”

서민영이 박하사탕을 식탁 위 유리그릇에 쏟아부으며 말했다⁠. 정보기관이 쓰는 비밀 숙소라고 했다⁠. 민영은 이런 집을 안가라고 불렀다⁠.

“⁠집처럼 쓰라면서 침대에 전깃줄이 열여섯 개예요⁠.⁠”

“⁠뇌파 재는 거예요⁠. 몇 시에 잠드셨는지⁠, 언제 꿈을 꾸시는지 보려고요⁠.⁠”

소방서에는 2주 교육 파견으로 처리됐다⁠. 아침에 팀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교육 가서 개그도 좀 배워 와라 요즘 민석이가 내 개그에 안 웃는다⁠」⁠. 민석에게서도 왔다⁠. 「⁠선배님 교육 어디예요⁠?⁠? 거기 매칭 잘 되는 데예요⁠?⁠?⁠」 유채는 둘 다 답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전화로 바로 물었다⁠.

“⁠교육은 무슨 교육이냐⁠. 니 목소리가 교육 가는 목소리가 아니다⁠.⁠”

“⁠교육 맞아⁠, 할머니⁠.⁠”

“⁠니 귀 빨개졌지⁠?⁠”

“⁠전화로 그게 어떻게 보여⁠.⁠”

“⁠구십 년 살면 전화로도 보인다⁠. 밥 꼭 먹어라⁠. 옥순이 할미 말 안 들으면 섭섭하다⁠.⁠”

할머니는 할 말을 다 하면 인사 없이 끊었다⁠. 유채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제 귀를 만졌다⁠. 뜨거웠다⁠.

*

민영은 식탁에 수첩을 펴 놓고 마주 앉았다⁠. 옆에는 스물여덟 살쯤 된 남자 요원이 노트북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요원은 말끝마다 “⁠확인했습니다⁠”를 붙였다⁠.

“⁠제 이름을 줬다고요⁠.⁠”

“⁠네⁠.⁠”

“⁠북쪽 보위부에⁠.⁠”

“⁠안 주면 그 사람이 다쳐요⁠. 배를 보낸 사람으로 몰려요⁠.⁠”

민영은 볼펜을 딸깍 눌렀다⁠. 한 번 누르고 한참 있다가 또 눌렀다⁠. 화가 났는지 아닌지 얼굴로는 알 수 없었다⁠.

“⁠잘하셨어요⁠.⁠”

“⁠네⁠?⁠”

“⁠저쪽이 제 이름을 받았으면⁠, 저쪽도 지금 이게 진짜인지 궁금할 거예요⁠. 진짜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예요⁠. 시험 문장⁠.⁠”

민영은 수첩에 한 줄을 적어 유채 쪽으로 돌렸다⁠.

「⁠사월 아흐레 정오⁠, 초소 지붕에 흰 천 두 장⁠.⁠」

“⁠이 말을 그대로 전해 주세요⁠. 저쪽이 천을 올리면 우리가 봐요⁠. 단둥에 우리 사람이 있어요⁠. 강 건너에서 망원 렌즈로 보면 초소 지붕이 다 보여요⁠.⁠”

“⁠그 사람한테 위험한 거 아니에요⁠?⁠”

“⁠흰 천 두 장이 무슨 위험이에요⁠. 빨래 너는 거랑 같아요⁠.⁠”

요원이 “⁠확인했습니다⁠” 하고 노트북에 무엇인가를 쳤다⁠. 민영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부탁드린 거요⁠. 기관총 수⁠.⁠”

“⁠그건⁠.⁠”

“⁠그 사람 이름은 안 물어볼게요⁠. 대신 숫자 하나는 주세요⁠. 이게 진짜라면 숫자 하나쯤은 맞아야 하잖아요⁠.⁠”

유채는 식탁 위의 박하사탕 그릇을 보았다⁠. 하얀 사탕이 수북했다⁠. 민영은 사람 앞에 사탕을 쌓아 두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

4월 7일 새벽 세 시 십 분⁠. 유채는 머리에 전극 열여섯 개를 붙인 채 눈을 감았다⁠. 요원이 문틈으로 “⁠수면 개시 확인했습니다⁠” 하고 속삭였다⁠. 속삭임이 거슬려서 숨을 열 번 넘게 세었다⁠. 열한 번째 숨에서 모래가 발바닥에 닿았다⁠.

광혁은 물속에 쪼그려 앉아 조개껍데기를 줍고 있었다⁠. 꿈속 조개껍데기는 아무리 주워도 깨어나면 손에 없었다⁠. 광혁도 알았지만 습관처럼 주웠다⁠.

“⁠오늘은 머리에 전깃줄 열여섯 개 붙이고 왔어요⁠.⁠”

“⁠전깃줄⁠?⁠”

“⁠잘 때 머릿속을 재는 거래요⁠.⁠”

“⁠남쪽 사람들은 잘 때도 전기를 쓰는가⁠?⁠”

“⁠남쪽 사람 다는 아니고 나만요⁠.⁠”

광혁이 조개껍데기를 물에 놓아주며 일어났다⁠. 유채는 수첩의 한 줄을 그대로 말했다⁠. 사월 아흐레 정오⁠, 초소 지붕에 흰 천 두 장⁠. 광혁은 입속으로 한 번 따라 했다⁠.

“⁠빨래 너는 거랑 같다더라고요⁠.⁠”

“⁠초소에서 빨래를 지붕에 너는 사람은 없다⁠.⁠”

“⁠그럼 위험해요⁠?⁠”

“⁠소좌가 하라면 위험하지 않다⁠. 소좌가 하지 말라면 위험하다⁠.⁠”

유채는 다음 말을 꺼내기 전에 물을 한 번 걷어찼다⁠. 물방울이 철조망에 튀었다⁠.

“⁠기관총 수도 물어보래요⁠.⁠”

광혁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강가에서 기다리는 사람답게 오래 기다리게 했다⁠. 그러더니 손가락 넷을 펴 보였다⁠.

“⁠네 정이다⁠. 초소에 둘⁠, 강둑 진지에 둘⁠.⁠”

“⁠그걸 왜 말해 줘요⁠?⁠”

“⁠너는 물었고⁠, 나는 너한테 거짓말 안 하기로 했다⁠.⁠”

광혁은 말을 마치고 귀 끝이 붉어졌다⁠. 유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철조망 말뚝을 손가락으로 한 번 두드렸다⁠. 못 알아들은 말이 나왔을 때 하던 신호였다⁠. 광혁이 신호를 보고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

아침 일곱 시⁠, 유채는 식탁에서 요구르트 뚜껑을 핥고 있었다⁠. 민영이 맞은편에 앉아 수첩을 폈다⁠.

“⁠전하셨어요⁠?⁠”

“⁠전했어요⁠. 정오에 흰 천 두 장⁠.⁠”

“⁠숫자는요⁠?⁠”

유채는 요구르트 통을 내려놓았다⁠. 손가락 넷이 눈앞에 떠올랐다⁠. 초소에 둘⁠, 강둑에 둘⁠. 남쪽 지도에 넷이라는 숫자가 찍히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유채는 몰랐다⁠. 모르니까 더 무서웠다⁠. 지도 위에서는 숫자가 클수록 초소도 커 보였다⁠.

“⁠두 정이요⁠.⁠”

민영이 수첩에 적었다⁠. 유채는 활동복 깃을 세워 목을 덮었다⁠. 귀까지는 덮이지 않았다⁠. 민영은 수첩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확인했습니다⁠.⁠”

요원이 노트북을 치며 말했다⁠. 유채는 요원을 노려보았다⁠. 요원이 영문을 모르고 눈을 껌벅였다⁠.

오후에는 요원이 설문지를 들고 왔다⁠. 꿈속 바닷가를 기록하는 칸이 서른 개 넘게 있었다⁠. 요원은 질문을 하나 읽을 때마다 볼펜을 고쳐 쥐었다⁠.

“⁠바닷가의 수온은 몇 도입니까⁠?⁠”

“⁠목욕물이요⁠.⁠”

“⁠목욕물은 몇 도입니까⁠?⁠”

“⁠우리 할머니 목욕물이요⁠. 뜨거워요⁠.⁠”

“⁠바다 냄새가 납니까⁠?⁠”

유채는 처음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한 달 넘게 바닷가를 걸었는데 냄새를 맡아 본 기억이 없었다⁠. 모래의 온도는 알았고 물의 높이도 알았고 쇠줄의 미지근함도 알았다⁠. 냄새만은 없었다⁠.

“⁠안 나요⁠. 냄새는 없어요⁠. 다 살갗으로만 와요⁠.⁠”

“⁠살갗으로만⁠, 확인했습니다⁠.⁠”

“⁠상대방 남성의 인상착의를 말씀해 주십시오⁠.⁠”

“⁠말랐어요⁠. 머리 짧고⁠, 턱이 각졌어요⁠. 웃을 때 소리를 안 내요⁠.⁠”

“⁠웃을 때 소리를 안 냄⁠, 확인했습니다⁠.⁠”

요원이 진지하게 받아 적는 것을 보고 유채는 웃음이 터졌다⁠. 요원은 이유를 모르는 채로 「⁠피면담자 웃음⁠」이라고 한 줄 더 적었다⁠.

*

4월 9일 정오⁠, 유채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 놓고 있었다⁠. 화면은 보지 않았다⁠. 민영은 거실 창가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서 있었다⁠. 열두 시 이 분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영은 화면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유채에게 내밀었다⁠.

강 건너에서 당겨 찍은 사진이었다⁠. 흐릿한 갈대밭 너머 낮은 콘크리트 초소가 있었고⁠, 초소 지붕에 하얀 천 두 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한 장은 넓고 한 장은 좁았다⁠. 좁은 천은 아무리 봐도 군용 속옷이었다⁠. 사진 아래 귀퉁이에는 단둥 유람선의 붉은 난간이 찍혀 있었다⁠. 민영의 사람은 관광객들 틈에 끼어 셔터를 눌렀다⁠. 누군가 내민 브이 자 손가락이 초소 귀퉁이를 반쯤 가렸다⁠.

“⁠빨래 맞네요⁠.⁠”

유채가 말하자 요원이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가 민영을 보고 입을 막았다⁠. 민영은 웃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베란다로 나갔다⁠. 유리문 너머로 목소리가 조금 새어 나왔다⁠.

“⁠네⁠, 차장님⁠. 확인됐습니다⁠. 진짜입니다⁠.⁠”

민영은 베란다에서 십 분 넘게 통화했다⁠. 돌아왔을 때 민영의 얼굴이 달라져 있었다⁠. 아침보다 더 웃고 있었고⁠, 눈은 더 웃지 않았다⁠.

“⁠강 소방장님⁠. 오늘부터 이건 우리 둘 일이 아니에요⁠.⁠”

“⁠그럼 누구 일인데요⁠?⁠”

“⁠나라 일이요⁠. 남과 북 사이에 지금 연락선이 하나도 없어요⁠. 군 통신선도 끊겼고⁠, 판문점 직통 전화도 저쪽이 안 받아요⁠. 그런데 엿들을 수도 없고 끊을 수도 없는 줄이 하나 생긴 거예요⁠. 소방장님 베개 위에⁠.⁠”

“⁠그 사람 베개 위에도요⁠.⁠”

“⁠네⁠, 그 사람 베개 위에도요⁠.⁠”

민영은 수첩을 넘겼다⁠. 새 장에 이미 몇 줄이 적혀 있었다⁠.

“⁠이제 그 사람 이름이 필요해요⁠. 근무 순서⁠, 초소장 계급⁠, 강둑 진지 위치⁠.⁠”

“⁠안 돼요⁠.⁠”

“⁠소방장님⁠.⁠”

“⁠이름 주면 그 사람이 남쪽에 아는 사람 있는 군인이 돼요⁠. 그쪽 소좌가 그걸 모를 것 같아요⁠?⁠”

“⁠저쪽 소좌는 벌써 알아요⁠. 그러니까 소방장님 이름을 물었겠죠⁠.⁠”

유채는 입을 다물었다⁠. 민영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부드러울수록 물러서지 않는 목소리였다⁠.

“⁠법 얘기 한 번만 할게요⁠. 북쪽 사람과 만나거나 연락하면 미리 신고해야 해요⁠. 안 하면 처벌받아요⁠. 소방장님은 한 달 넘게 신고 안 하셨어요⁠. 저는 그걸 덮어 드릴 수 있어요⁠. 대신 저한테 숫자를 주셔야 해요⁠. 맞는 숫자를⁠.⁠”

맞는 숫자라는 말에 유채는 손가락을 오므렸다⁠. 민영은 사탕 하나를 까서 유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박하 냄새가 코끝까지 올라왔다⁠.

*

4월 10일 새벽 세 시 십 분⁠. 바닷가는 따뜻했고⁠, 철조망은 여전히 무릎 높이였다⁠. 광혁은 철조망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조개껍데기를 줍지 않았다⁠. 군복 윗단추까지 채우고⁠, 손을 등 뒤로 모으고 있었다⁠.

“⁠지붕에 올라간 거 봤대요⁠. 하나는 속옷이던데요⁠.⁠”

“⁠철민이 거다⁠. 흰 천이 모자랐다⁠.⁠”

유채는 웃다가 광혁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거뒀다⁠. 광혁은 등 뒤에서 손을 풀지 않았다⁠.

“⁠소좌가 너희 쪽 담당관한테 전하라는 말이 있다⁠. 한 글자도 바꾸지 말라 했다⁠.⁠”

“⁠말해요⁠.⁠”

광혁은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초소에서 근무 보고를 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서민영 담당관에게⁠. 1999년 6월 서해에서 데려온 어선 제칠 순풍호의 선장 서덕환은 지금 신의주에 산다⁠. 살아 있다⁠.⁠”

물이 발목에서 찰랑거렸다⁠. 유채는 문장을 입속으로 따라 했다⁠. 서덕환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다⁠. 하지만 서라는 성은 알았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나도 모른다⁠. 소좌는 이 말을 전하면 너희 쪽 사람이 다 알 거라 했다⁠.⁠”

“⁠담당관 아버지예요⁠?⁠”

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모른다고 할 때의 얼굴이었다⁠.

*

새벽 여섯 시⁠, 유채는 전극을 떼지도 않고 작은방을 나왔다⁠. 선 몇 가닥이 머리카락에 매달려 덜렁거렸다⁠. 민영은 벌써 일어나 부엌 식탁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유채를 보더니 커피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저쪽 소좌가 담당관님한테 전하래요⁠. 한 글자도 바꾸지 말라고 했대요⁠.⁠”

민영이 수첩을 집었다⁠. 볼펜 끝을 눌렀다⁠. 유채는 광혁이 한 대로 또박또박 말했다⁠.

“⁠서민영 담당관에게⁠. 1999년 6월 서해에서 데려온 어선 제칠 순풍호의 선장 서덕환은 지금 신의주에 산다⁠. 살아 있다⁠.⁠”

볼펜이 수첩 위에서 멈췄다⁠. 민영은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입에 물고 있던 박하사탕이 이에 부딪혀 딱 소리를 냈다⁠. 민영은 사탕을 깨물지도 뱉지도 않고 한참 그대로 있었다⁠. 창밖에서 신도시의 첫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며 문을 열었다⁠. 커피 주전자 주둥이에서 김이 한 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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