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88자)

감자 두 알

꿈에서 만나는 남녀북남 · 기담오

리광혁은 초소 창틀에 기대어 강 건너가 밝아 오는 것을 보았다⁠. 4월 4일 아침 여섯 시 반이었다⁠. 압록강은 아직 검었고⁠, 강 건너 중국 도시 단둥의 높은 건물들이 불을 하나씩 끄고 있었다⁠. 밤새 켜져 있던 붉은 글씨 간판이 꺼지자 건너편이 갑자기 가까워 보였다⁠. 강폭은 넓은 데가 오백 미터 남짓이었다⁠. 바람이 불면 건너편 유람선 선착장의 음악이 이쪽 철조망까지 넘어왔다⁠.

손가락 끝이 아직 따뜻했다⁠. 꿈에서 물을 떠 흘린 손이었다⁠. 광혁은 군복 바지에 손을 문질렀다⁠. 깨어나면 늘 손끝이 먼저 꿈을 기억했다⁠. 모래의 온도⁠, 미지근한 쇠줄⁠, 그리고 짜장면 곱빼기라는 말⁠.

“⁠하사님⁠, 배급 나왔습네다⁠.⁠”

상등병 문철민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스물네 살 철민은 키가 작고 볼이 통통했는데⁠, 배가 고프면 볼부터 홀쭉해졌다⁠. 철민은 두 손에 감자를 두 알씩 쥐고 있었다⁠. 한 사람에 두 알이었다⁠. 철민은 제 몫 두 알을 들여다보고⁠, 광혁의 두 알을 들여다보고⁠, 다시 제 몫을 들여다보았다⁠.

“⁠하사님은 어제 꿈에서 뭐 드셨습네까⁠?⁠”

“⁠꿈에서 무슨 밥을 먹나⁠.⁠”

“⁠지난번에 잠꼬대로 짜장⁠, 짜장 하셨습네다⁠. 그게 뭔지 몰라도 맛있는 거 같았습네다⁠.⁠”

광혁은 감자 두 알을 받아 하나를 철민의 손에 도로 얹었다⁠. 철민의 볼이 금세 둥글어졌다⁠.

“⁠하사님⁠, 중국 드라마에서 이럴 때 하는 말이 있습네다⁠. 니스워더웨이이⁠.⁠”

“⁠무슨 말이가⁠?⁠”

“⁠너는 내 하나뿐인 사람이다⁠, 그런 말입네다⁠.⁠”

“⁠감자 한 알에 무슨 하나뿐이가⁠. 먹고 근무 서라⁠.⁠”

철민은 감자를 군복 주머니에 넣고 경례를 붙였다⁠. 초소 개 나비가 문틈으로 코를 들이밀었다⁠. 철민은 주머니를 손으로 덮고 나비를 노려보았다⁠.

광혁은 감자 한 알을 손에 쥐고 강을 보았다⁠. 3월 마지막 밤도 이 창틀에 기대 있었다⁠. 자정을 넘긴 하구에서 엔진 소리가 콜록거렸다⁠. 손전등을 비추자 파란 방수포 밑에서 얼굴 셋이 올라왔다⁠. 여자는 눈을 감지 않았다⁠. 늙은 사내가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빌지도 않았고 흔들지도 않았다⁠. 그냥 손바닥을 보였다⁠. 광혁은 손전등을 내려 물을 비췄다⁠. 강물에 동그란 빛이 떨렸다⁠. 엔진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빛을 물에 두었다⁠. 하구에서 고기를 잡던 아버지가 늘 하던 말이 있었다⁠. 물에 뜬 사람은 일단 건지고 본다⁠.

*

오후 두 시⁠, 강둑 길로 지프 한 대가 먼지를 끌고 왔다⁠. 초소장인 중위가 철모를 고쳐 쓰고 뛰어나갔다⁠. 지프에서 내린 사람은 쉰 줄의 사내였다⁠. 회색 인민복 위에 낡은 가죽 잠바를 걸쳤고⁠,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 한 개비를 굴리고 있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보위부 오창익 소좌다⁠.⁠”

소좌는 군대로 치면 소령쯤 되는 계급이었다⁠. 보위부는 북쪽에서 사람을 캐는 곳이었다⁠. 초소장의 목소리가 한 음 올라갔다⁠. 창익은 초소 안 난롯가에 앉더니 철민이 데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을 마시는 동안 창익의 눈은 초소 안의 모든 것을 한 번씩 훑었다⁠. 침상⁠, 총가⁠, 근무 일지가 꽂힌 판자⁠, 벽에 걸린 손전등⁠.

“⁠3월 마지막 밤⁠, 하구 쪽 근무 누가 섰나⁠?⁠”

초소장이 광혁을 보았다⁠. 광혁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리광혁 하사⁠, 제가 섰습네다⁠.⁠”

“⁠기래⁠. 그 밤에 배 한 척이 나갔다⁠. 하구 어부네 목선이다⁠. 사람이 셋 탔지⁠.⁠”

창익은 담배 개비를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목소리는 느렸고 다정했다⁠. 다정해서 듣기 거북했다⁠.

“⁠남쪽 방송이 떠들더라⁠. 백령도 앞바다에서 셋을 건졌다고⁠. 제보를 받고 나갔다고⁠. 남쪽 누군가 배 자리를 미리 알았다는 기다⁠.⁠”

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익은 난로 뚜껑을 열고 불씨를 들여다보았다⁠.

“⁠배 자리를 남쪽에 알려 준 사람이 이 강가 어딘가에 있다⁠. 전화기 없이는 못 하는 일이지⁠.⁠”

창익이 턱짓을 하자 같이 온 사내 둘이 침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담요를 털고⁠, 배낭을 쏟고⁠, 군화 속에 손을 넣었다⁠. 철민의 배낭에서 납작한 중국 손전화 하나가 떨어졌다⁠. 화면에 금이 간 낡은 전화기였다⁠. 철민의 얼굴이 감자 껍질 색이 되었다⁠.

“⁠그⁠, 그건 드라마 보는 겁네다⁠! 유심도 없습네다⁠!⁠”

“⁠드라마⁠?⁠”

“⁠니스워더웨이이⁠, 그런 거 봅네다⁠!⁠”

창익은 전화기를 손가락 두 개로 집어 들고 뒤집어 보았다⁠. 철민은 숨을 몰아쉬다가 말을 쏟았다⁠. 겁이 많으면 입이 먼저 열리는 아이였다⁠.

“⁠저 아닙네다⁠, 소좌 동지⁠! 남쪽 여자 이름 부르는 건 광혁 하사님입네다⁠! 밤마다 잠꼬대로 유채⁠, 유채 합네다⁠! 망원동⁠, 짜장⁠, 그런 말도 합네다⁠!⁠”

초소 안이 조용해졌다⁠. 난로 속에서 장작이 툭 터졌다⁠. 창익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광혁을 보았다⁠.

“⁠유채⁠?⁠”

광혁은 철민을 보지 않았다⁠. 전화기가 근무 일지에 오르면 철민은 제대를 못 했다⁠. 제대를 못 하면 장가도 못 갔다⁠. 철민이 감자 한 알에 둥글어지던 볼이 떠올랐다⁠.

“⁠전화기는 철민이 드라마 보는 데 쓴 겁네다⁠. 배 자리는 제가 알려 줬습네다⁠.⁠”

“⁠어떻게⁠?⁠”

“⁠꿈에서⁠.⁠”

초소장이 헛기침을 했다⁠. 창익의 사내 하나가 피식 웃었다⁠. 창익만 웃지 않았다⁠. 담배 개비가 손가락 사이에서 멈췄다⁠.

“⁠다시 말해 봐라⁠.⁠”

광혁은 다 말했다⁠. 3월 첫 밤부터 같은 바닷가에서 남쪽 여자를 만난다는 것⁠, 같은 시각에 잠들어야 만난다는 것⁠, 꿈에서 들은 말은 깨어나도 남는다는 것⁠, 여자가 마포라는 곳의 소방관이라는 것⁠. 목선을 일부러 못 본 척했다는 말만은 하지 않았다⁠.

창익은 다 듣고 나서 난로 앞에 쪼그려 앉았다⁠. 담배에 처음으로 불을 붙였다⁠. 연기를 천천히 뱉고 강 쪽 창을 보았다⁠.

“⁠강은 사람을 삼킨다⁠. 나는 강가에서 그걸 스무 해 봤다⁠.⁠”

광혁은 창익이 왜 강 이야기를 꺼내는지 몰랐다⁠. 창익은 연기를 한 번 더 뱉었다⁠.

“⁠좋다⁠. 그 꿈 나도 좀 쓰자⁠. 다음에 그 여자를 만나면 하나만 물어라⁠. 남쪽에서 이 일로 그 여자를 찾아온 기관 사람이 있을 기다⁠. 그 사람 이름⁠.⁠”

“⁠못 받아 오면 말입네까⁠?⁠”

“⁠그럼 그 배는 네가 보낸 거다⁠. 전화기는 이 상등병 거고⁠.⁠”

창익은 철민의 전화기를 가죽 잠바 주머니에 넣었다⁠. 철민이 울상을 지었다⁠.

*

해 질 녘⁠, 광혁은 철민과 강둑 순찰을 나갔다⁠. 물가 갈대가 바람에 한쪽으로 누웠다⁠. 철민은 백 걸음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철민이 백 걸음을 말없이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사님⁠, 저 때문에⁠.⁠”

“⁠너 때문 아니다⁠. 내 잠꼬대 때문이다⁠.⁠”

“⁠잠꼬대를 제가 일러바쳤습네다⁠.⁠”

“⁠기러니까 내 잠꼬대 때문이다⁠.⁠”

철민은 코를 훌쩍이다가 주머니에서 감자를 꺼냈다⁠. 아침에 광혁이 도로 얹어 준 감자였다⁠. 반으로 쪼개 큰 조각을 내밀었다⁠. 광혁은 작은 조각을 집었다⁠.

“⁠어머니 약은 구하셨습네까⁠?⁠”

“⁠장마당에 중국 약이 들어왔다더라⁠. 다음 휴가 때 가 본다⁠.⁠”

“⁠제가 제대하면 장마당에서 약 장사 하갔습네다⁠. 하사님 어머니는 공짜로 드리갔습네다⁠.⁠”

“⁠너 장사하면 약을 네가 다 먹는다⁠.⁠”

철민이 감자를 문 채로 웃었다⁠. 강 건너 단둥의 유람선이 불을 켜고 지나갔다⁠. 갑판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강 건너 사람들에게 이쪽 강둑은 구경거리였다⁠. 철민이 유람선을 향해 손을 흔들려다 광혁의 눈치를 보고 손을 내렸다⁠.

“⁠하사님⁠, 그 남쪽 여자는 예쁩네까⁠?⁠”

광혁은 대답 대신 걸음을 빨리했다⁠. 철민이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며 니스워더웨이이를 흥얼거렸다⁠.

*

창익은 4월 4일 밤을 초소에서 보냈다⁠. 잠은 자지 않았다⁠. 광혁을 난롯가에 앉혀 놓고 새벽까지 물었다⁠. 바닷가의 모래 색⁠, 물의 높이⁠, 철조망 말뚝의 개수⁠, 여자의 키⁠. 광혁은 여자의 키를 물을 때만 잠깐 대답을 늦췄다⁠. 자기보다 조금 작고⁠, 어깨는 자기보다 넓다고 했다⁠. 창익이 처음으로 웃었다⁠.

“⁠남쪽 여자들은 어깨가 넓은가⁠?⁠”

“⁠그 여자만 그렇습네다⁠. 사람을 업고 계단을 내려온다 했습네다⁠.⁠”

한 시 반이 지나갔다⁠. 광혁은 벽시계 바늘이 숫자 하나를 지날 때마다 손바닥에 손톱을 박았다⁠. 유채가 지금 숙직실에서 눈을 감았을 것이다⁠. 창익의 질문은 세 시 반에야 끝났다⁠.

광혁은 세 시 사십 분에 침상에 누웠다⁠. 눈을 감자 발바닥에 모래가 닿았다⁠.

모래가 차가웠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은 발목까지 왔지만 미지근하지 않았고⁠, 하늘 끝 분홍빛도 엷었다⁠. 철조망 건너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광혁은 철조망을 따라 바다 쪽으로 걸었다⁠. 물이 정강이에 닿고 무릎에 닿았다⁠. 쇠줄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건너편 모래에는 발자국 하나 없었다⁠. 광혁은 말뚝 하나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못 알아듣는 말이 나왔을 때 하던 신호였다⁠. 대답하는 손가락은 없었다⁠.

깨어 보니 다섯 시였다⁠. 창익은 난롯가 의자에서 팔짱을 끼고 졸고 있었다⁠.

*

둘이 정해 둔 약속이 하나 있었다⁠. 만나지 못한 밤 다음에는 세 시 십 분⁠. 4월 6일 새벽 세 시 십 분⁠, 광혁은 철조망 앞에 먼저 와 있었다⁠. 유채가 물을 첨벙거리며 뛰어왔다⁠. 활동복 바짓단이 다 젖었다⁠.

“⁠어제 왜 안 왔어요⁠? 한 시 반에 누웠다가 혼자 바닷가 끝까지 걸었어요⁠. 모래가 차가웠어요⁠.⁠”

“⁠나도 차가웠다⁠. 세 시 사십 분에⁠.⁠”

“⁠세 시 사십 분이면 나 벌써 깼어요⁠. 출동 나갔어요⁠.⁠”

“⁠불 껐나⁠?⁠”

“⁠주차장에서 차 한 대⁠. 사람은 없었어요⁠.⁠”

둘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모래가 다시 따뜻했다⁠. 광혁은 그제야 어제의 차가운 모래가 무슨 뜻이었는지 알았다⁠. 혼자 온 바닷가는 차가웠다⁠.

유채가 먼저 말했다⁠. 정보기관 사람이 소방서 차고로 찾아왔다고⁠, 신고 녹음을 틀었다고⁠, 꿈 이야기를 해 버렸다고⁠. 광혁도 말했다⁠. 보위부 소좌가 초소 난롯가에 앉았다고⁠, 철민의 전화기가 나왔다고⁠, 자기도 꿈 이야기를 해 버렸다고⁠.

“⁠우리 둘 다 들킨 거네요⁠.⁠”

“⁠들킨 기 아니라 말한 거다⁠.⁠”

“⁠그게 더 바보 같은데요⁠.⁠”

유채가 웃었다⁠. 광혁은 웃음을 참으려다 실패했다⁠. 철조망 쇠줄에 맺힌 물방울이 흔들렸다⁠.

“⁠그 소좌가 나에 대해서 뭐 물어봤어요⁠?⁠”

“⁠키⁠.⁠”

“⁠키를 왜요⁠?⁠”

“⁠모른다⁠. 나보다 조금 작다 했다⁠.⁠”

“⁠내가 더 커요⁠. 지난번에 말뚝에 대 봤잖아요⁠.⁠”

“⁠군화 신으면 내가 크다⁠.⁠”

“⁠여긴 다 맨발이에요⁠.⁠”

광혁은 제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갔다⁠. 유채가 철조망 말뚝 옆에 등을 대고 서서 손바닥으로 정수리를 짚었다⁠. 광혁도 맞은편에서 똑같이 했다⁠. 유채의 손바닥이 반 뼘 위에 있었다⁠. 광혁은 발뒤꿈치를 슬쩍 들었다⁠. 유채가 “⁠반칙⁠!⁠” 하고 소리쳤다⁠. 소리가 물 위로 멀리 굴러갔다⁠.

“⁠그 사람이 너희 쪽 기관 사람 이름을 받아 오라 한다⁠. 못 받아 오면 배는 내가 보낸 거고⁠, 철민이 전화기는 철민이 거가 된다⁠.⁠”

유채는 한참 물을 내려다보았다⁠. 무릎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광혁은 기다렸다⁠. 강가에서 기다리는 일은 몸에 익어 있었다⁠.

“⁠서민영⁠. 서쪽 할 때 서⁠, 민영⁠.⁠”

“⁠그 사람한테 혼나지 않나⁠?⁠”

“⁠혼나겠죠⁠. 근데 당신은 그 사람한테 혼나는 정도가 아니잖아요⁠.⁠”

유채가 철조망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분홍빛이 그을린 뺨에 번졌다⁠.

“⁠우리 쪽도 시험을 하재요⁠. 당신 초소에 기관총이 몇 정인지⁠.⁠”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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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산책2026.11.01· 2화

    짜장면 곱빼기랑 감자 두 알 바꾸는 장면 너무 귀여운데, 마지막에 기관총 몇 정이냐고 물으니까 확 차가워지네요.

    • 기담오작가2026.11.01

      꿈속 바닷가는 둘만의 자리처럼 보여도, 깨어나면 두 기관이 기다리고 있어요. 철조망이 언제 움직이는지 잘 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