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39자)

세 시 십 분

꿈에서 만나는 남녀북남 · 기담오

강유채는 연기 속에서 할아버지의 허리띠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계단을 내려왔다⁠. 망원동 다세대 주택 3층⁠, 새벽 두 시 십 분이었다⁠. 공기 호흡기 면체 안에서 제 숨소리가 크게 울렸고⁠, 등에 업힌 할아버지는 내려오는 내내 한 가지만 외쳤다⁠.

“⁠나비⁠! 나비 먼저⁠!⁠”

“⁠나비는 팀장님이 안고 나와요⁠!⁠”

2층 계단참에서 돌아보니 팀장이 정말로 고양이를 안고 내려오고 있었다⁠. 노란 줄무늬 고양이가 방화복 어깨에 발톱을 박고 매달려 울었다⁠. 팀장은 면체 너머로 소리쳤다⁠.

“⁠나는 지금 냥이 구조 중이다⁠! 불은 민석이가 꺼⁠!⁠”

3층에서 막내 민석이 관창을 잡은 채 “⁠네에⁠!⁠” 하고 길게 대답했다⁠. 불은 부엌 가스레인지에서 시작해 찬장 문 두 짝을 태우고 멈춰 있었다⁠. 할아버지가 라면 물을 올려놓고 깜빡 잠든 사이였다⁠.

골목에 내려서자 찬 봄바람이 땀에 젖은 목덜미로 들어왔다⁠. 유채는 할아버지를 구급대 들것에 앉히고 헬멧과 면체를 벗었다⁠. 하나로 묶은 갈색 머리가 땀에 젖어 목에 들러붙었다⁠. 할아버지는 산소마스크를 쓴 채로 유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가씨 어깨가 우리 집 냉장고만 하네⁠.⁠”

“⁠양문형이에요⁠, 할아버지⁠.⁠”

구급대원이 웃음을 참느라 마스크 줄을 두 번 잘못 걸었다⁠. 팀장이 고양이를 할아버지 품에 넘겨주자 고양이는 언제 울었냐는 얼굴로 할아버지 턱에 머리를 비볐다⁠.

*

숙직실은 땀 냄새와 믹스커피 냄새가 반반이었다⁠. 유채는 방화복을 벗고 주황 줄 두른 남색 활동복으로 갈아입은 뒤⁠, 이층 침대 아래 칸에 걸터앉아 휴대전화를 켰다⁠. 알림이 하나 떠 있었다⁠.

「⁠03⁠:10 눕기⁠」

맞은편 침대에서 민석이 고개를 내밀었다⁠. 스물여섯 살 막내는 출동 뒤에도 소개팅 앱을 놓지 않았다⁠. 화면에서는 오늘도 「⁠아쉽게도 매칭되지 않았어요⁠」가 떴다⁠.

“⁠선배님 그거 수면 루틴이에요⁠? 저도 앱에서 하라는 대로 열한 시에 눕는데 매칭이 안 돼요⁠.⁠”

“⁠잠이랑 매칭은 상관없어⁠.⁠”

“⁠그럼 선배님은 왜 꼭 세 시 십 분이에요⁠?⁠”

팀장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들어왔다⁠. 쉰여섯 살 팀장은 불을 끈 날이면 꼭 아재 개그를 하나씩 했다⁠.

“⁠유채는 신데렐라야⁠. 세 시 십 분이 되면 마법이 풀려⁠.⁠”

“⁠신데렐라는 열두 시예요⁠, 팀장님⁠.⁠”

“⁠소방관 신데렐라는 출동 끝나고 세 시 십 분이야⁠. 유리 구두 대신 방화화 벗고⁠.⁠”

민석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끅끅 웃었다⁠. 유채는 대꾸하지 않고 누웠다⁠. 할머니에게서 온 문자가 화면 위쪽에 떠 있었다⁠. 「⁠밥은 먹었냐 불은 다 껐냐 옥순이 할미가⁠」⁠. 아흔 살 할머니는 문자 끝마다 꼭 이름을 붙였다⁠. 유채는 「⁠다 껐어 할머니 자⁠」 하고 보낸 뒤 화면을 엎었다⁠. 세 시 구 분이었다⁠. 눈을 감고 숨을 천천히 셌다⁠. 일곱 번째 숨에서 이불의 감촉이 사라지고⁠, 발바닥에 따뜻한 모래가 닿았다⁠.

*

바닷가는 늘 해 뜨기 직전이었다⁠. 하늘 끝은 분홍빛으로 번져 있고 머리 위는 맑은 하늘빛이었다⁠. 해는 끝내 올라오지 않았다⁠. 유채는 맨발이었고⁠, 발목까지 오는 물은 목욕물처럼 따뜻했다⁠. 모래알이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때마다 간지러웠다⁠.

물속에는 철조망이 한 줄 놓여 있었다⁠. 나무 말뚝에 가는 쇠줄을 친 철조망이 모래밭에서 시작해 바다 끝까지 이어졌다⁠. 끝은 보이지 않았다⁠. 3월 첫 밤에는 철조망이 가슴께까지 왔는데⁠, 지금은 무릎 높이였다⁠. 까닭은 둘 다 몰랐다⁠. 고개를 들면 하늘 끝 구름 위에 작은 빨간 지붕이 하나 떠 있었다⁠. 소방서 지붕이었다⁠. 철조망 건너편 하늘에는 철조망을 두른 작은 초소가 떠 있었다⁠.

리광혁은 철조망 건너편 모래에 앉아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국방색 얼룩무늬 군복은 늘 같았다⁠. 마른 몸에 군복이 헐렁했고⁠, 짧게 깎은 검은 머리 아래로 턱이 각지게 떨어졌다⁠. 광혁은 유채를 보더니 일어나서 엉덩이의 모래를 털었다⁠.

“⁠늦었구만⁠.⁠”

“⁠불 끄고 왔어요⁠. 할아버지 한 명⁠, 고양이 한 마리⁠.⁠”

“⁠고양이 이름은⁠?⁠”

“⁠나비⁠.⁠”

“⁠우리 초소 개 이름도 나비다⁠.⁠”

“⁠개가 왜 나비예요⁠?⁠”

“⁠철민이가 지었다⁠. 날래서⁠.⁠”

유채는 웃다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잠들기 전에 초콜릿 하나를 꼭 쥐고 누웠다⁠. 오늘은 놓치지 않으려고 손가락이 아플 만큼 쥐었다⁠. 주머니 안에는 따뜻한 모래만 한 줌 들어 있었다⁠.

“⁠또 없어요⁠.⁠”

“⁠지난번엔 귤을 쥐고 잤다 하지 않았나⁠.⁠”

“⁠그 전엔 양갱이요⁠.⁠”

“⁠남쪽 단것은 다 바다에 빠지는가 보다⁠.⁠”

광혁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광혁은 웃을 때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유채는 소리 없이 웃는 얼굴을 보려고 한 달 넘게 쓸데없는 것들을 쥐고 잠들었다⁠.

3월 첫 밤⁠, 둘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한참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광혁이었다⁠. “⁠여기 어디요⁠?⁠” 유채는 대답 대신 “⁠거기 북한 군복이에요⁠?⁠” 하고 되물었다⁠. 광혁은 제 군복을 내려다보고 나서 “⁠조선 인민군 군복이오⁠” 하고 바로잡았다⁠. 첫마디부터 말이 엇나갔다⁠. 이후로 둘은 서로 못 알아듣는 낱말이 나올 때마다 철조망 말뚝을 손가락으로 한 번씩 두드리기로 했다⁠. 첫 주에는 말뚝이 쉴 틈이 없었다⁠.

둘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물가에 나란히 앉았다⁠. 늘 하던 대로 저녁에 먹은 것부터 말했다⁠. 광혁은 강냉이밥에 감자 두 알이었고⁠, 유채는 짜장면 곱빼기였다⁠.

“⁠곱빼기는 뭐이가⁠?⁠”

“⁠두 배요⁠.⁠”

“⁠남쪽 사람들은 밥을 두 배로 먹나⁠?⁠”

“⁠소방관만요⁠. 불 끄면 배고파요⁠.⁠”

“⁠강 지켜도 배고프다⁠.⁠”

광혁이 물을 한 움큼 떠서 손가락 사이로 흘렸다⁠. 물방울이 철조망 쇠줄에 맺혔다가 떨어졌다⁠. 유채는 쇠줄에 손을 대 보았다⁠. 미지근했다⁠. 가시는 끝이 뭉툭해 찔리지 않았다⁠.

“⁠부탁이 하나 있다⁠.⁠”

광혁은 물을 보고 말했다⁠. 유채는 쇠줄에서 손을 뗐다⁠.

“⁠나흘 전 밤에 강 하구에서 목선 하나가 나갔다⁠. 작은 배다⁠. 파란 방수포를 덮었고⁠, 돛대 대신 막대기에 흰 천을 묶었다⁠. 사람이 셋이다⁠. 여자 하나⁠, 남편⁠, 늙은 아버지⁠.⁠”

“⁠나간 건 어디로요⁠?⁠”

“⁠남쪽으로⁠. 엔진이 시원치 않았다⁠. 이틀 전부터 바람이 북서로 불었으니 엔진이 꺼졌으면 떠밀려 내려갔을 기다⁠. 물때로 보면 오늘쯤은 큰 섬 서쪽 바다에 있을 기다⁠. 백령도라 하는 섬⁠.⁠”

광혁은 손가락으로 모래에 선을 그었다⁠. 강 하구⁠, 바다⁠, 섬 하나⁠. 아버지가 강 하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고⁠, 광혁은 3월에 말한 적이 있었다⁠. 물때를 손으로 짚는 손짓이 몸에 붙어 있었다⁠.

“⁠남쪽 바다 지키는 사람들한테 말해 줄 수 있나⁠?⁠”

“⁠그 사람들⁠, 누군데요⁠?⁠”

“⁠모른다⁠. 내 근무 날 밤에 나갔다⁠.⁠”

광혁의 눈이 철조망 말뚝 끝으로 갔다⁠. 유채는 구조 현장에서 그런 눈을 많이 보았다⁠. 할 말이 있는데 입 밖으로는 안 내는 사람의 눈이었다⁠.

“⁠당신이 보내 줬어요⁠?⁠”

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흰 천이 바람에 어느 쪽으로 펄럭였는지⁠, 방수포 귀퉁이 하나가 찢어져 있었는지를 한 번 더 말했다⁠. 유채는 물속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들었다⁠.

“⁠내일은 한 시 반이다⁠. 근무가 바뀐다⁠.⁠”

“⁠한 시 반⁠. 알았어요⁠.⁠”

“⁠늦지 말라⁠.⁠”

“⁠불나면 늦어요⁠.⁠”

“⁠불 끄고 오라⁠.⁠”

광혁이 일어나 철조망 앞까지 왔다⁠. 둘 사이에는 쇠줄 한 가닥과 물 한 뼘이 있었다⁠. 분홍빛이 광혁의 각진 턱에 번졌다⁠. 유채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발밑의 모래가 꺼지듯 흘러내렸다⁠.

*

여섯 시 십 분에 눈을 떴다⁠. 민석은 이불을 걷어차고 코를 골았고⁠, 창밖에서 차고 셔터가 덜컹거렸다⁠. 유채는 누운 채로 광혁의 말을 처음부터 다시 떠올렸다⁠. 꿈에서 들은 말은 깨어나도 한 글자도 흐려지지 않았다⁠. 3월부터 늘 그랬다⁠. 유채는 볼펜으로 왼손 바닥에 적어 내려갔다⁠. 목선⁠, 파란 방수포⁠, 막대기에 흰 천⁠, 셋⁠, 엔진 꺼짐⁠, 백령도 서쪽⁠.

복도 끝 비상계단으로 나가 122를 눌렀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신고하는 해양 긴급 신고 번호였다⁠. 상황실 직원은 목소리가 차분했다⁠.

“⁠배를 직접 보셨어요⁠?⁠”

“⁠아뇨⁠. 아는 사람이 봤대요⁠.⁠”

“⁠아는 분이 어디서 보셨는데요⁠?⁠”

“⁠배에서요⁠. 아니⁠, 바다에서요⁠.⁠”

유채는 제 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을 하면 귀부터 빨개졌다⁠. 직원은 위치를 두 번 되물었고⁠, 유채는 손바닥을 보며 두 번 똑같이 불렀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제 번호로 걸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

오후 한 시⁠, 소방서 식당의 텔레비전에서 속보가 떴다⁠. 유채는 콩나물국을 뜨다가 숟가락을 멈췄다⁠.

「⁠서해 백령도 서쪽 해상서 북한 목선 발견 … 3명 구조⁠, 엔진 고장으로 표류⁠」

화면에 해경 함정이 찍은 영상이 나왔다⁠. 파도 위에 작은 나무배가 기울어 있었다⁠. 파란 방수포 귀퉁이 하나가 찢어져 바람에 펄럭였고⁠, 막대기 끝에서 흰 천이 흔들렸다⁠. 아래로 자막이 하나 더 지나갔다⁠. 「⁠중국 단둥 세관⁠, 북중 화물 통관 이틀째 중단⁠」⁠.

“⁠와⁠, 진짜 목선이다⁠.⁠”

민석이 숟가락을 든 채 화면을 가리켰다⁠. 팀장은 깍두기를 씹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유채야⁠, 너 아침에 계단에서 누구한테 배 얘기 하더라⁠?⁠”

“⁠팀장님 잘못 들으셨어요⁠.⁠”

“⁠내가 귀는 밝아⁠. 아재 개그는 귀가 밝아야 받아쳐⁠.⁠”

유채는 국그릇에 얼굴을 묻었다⁠. 왼손 바닥의 볼펜 글씨가 땀에 번져 있었다⁠.

*

저녁 여섯 시⁠, 유채는 차고에서 펌프차 호스를 말고 있었다⁠. 셔터 밖에서 구두 소리가 들어왔다⁠. 굽이 낮은 검은 구두였다⁠. 남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펌프차 앞까지 와서 멈췄다⁠. 마흔이 조금 안 되어 보였고⁠, 머리를 귀 뒤로 단정하게 넘겼다⁠. 여자는 코트 주머니에서 박하사탕 두 개를 꺼내 하나를 유채에게 내밀었다⁠.

“⁠강유채 소방장님이시죠⁠? 서민영이라고 합니다⁠.⁠”

여자가 신분증을 펼쳤다가 금방 접었다⁠. 유채가 읽은 것은 맨 위의 한 줄이었다⁠. 정보기관 이름이었다⁠.

“⁠오늘 아침 여섯 시 이십삼 분에 122로 전화하셨죠⁠.⁠”

민영은 휴대전화를 꺼내 녹음을 틀었다⁠. 비상계단의 울림 속에서 제 목소리가 나왔다⁠. 「⁠배에서요⁠. 아니⁠, 바다에서요⁠.⁠」 유채는 호스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들으셨는지만 여쭤보려고요⁠.⁠”

“⁠낚시 동호회 단톡방에서요⁠.⁠”

“⁠단톡방 이름 말씀해 주시겠어요⁠?⁠”

유채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민영이 사탕 껍질을 까서 제 입에 넣었다⁠. 사탕이 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차고 안에 작게 울렸다⁠.

“⁠배에 탄 분이 조사에서 그러시더라고요⁠. 떠나던 밤에 강가 초소 군인이 손전등을 다른 데로 돌렸대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대요⁠. 엔진이 꺼지면 흰 천을 흔들라고⁠, 찾아 줄 사람이 있다고⁠.⁠”

민영은 유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차고 천장의 형광등이 웅웅거렸다⁠.

“⁠북쪽에서도 지금쯤 그 초소를 뒤지고 있을 거예요⁠. 보위부라고⁠, 북쪽에서 사람 캐는 곳이요⁠. 배 한 척이 사라졌는데 그냥 둘 리가 없죠⁠. 그 군인 이름 아세요⁠?⁠”

유채는 대답하지 않았다⁠. 광혁의 손가락이 모래에 그은 선이 눈앞에 떠올랐다⁠. 강 하구⁠, 바다⁠, 섬 하나⁠.

“⁠강 소방장님⁠. 북쪽 군인하고 연락하는 건 법이 정해 둔 일이에요⁠. 저는 그 얘기부터 하고 싶지는 않아요⁠.⁠”

“⁠연락 안 했어요⁠.⁠”

“⁠그럼 어떻게 아셨어요⁠?⁠”

“⁠꿈에서요⁠.⁠”

말이 먼저 나갔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버릇은 입에도 있었다⁠. 유채는 민영이 웃기를 기다렸다⁠. 팀장처럼 웃든⁠, 민석처럼 끅끅거리든⁠, 웃고 나면 끝날 일이었다⁠.

민영은 웃지 않았다⁠. 사탕을 어금니 쪽으로 옮기고 코트 안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볼펜 끝을 딸깍 눌렀다⁠.

“⁠몇 시에 주무세요⁠?⁠”

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