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563자)

대동강 얼음

꿈에서 만나는 남녀북남 · 기담오

리광혁은 할아버지의 털모자가 자꾸 미끄러지는 것을 손으로 붙잡았다⁠. 5월 19일 밤 열한 시⁠, 신의주를 떠난 승합차는 평양으로 가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뒷좌석에 누워 있었다⁠. 회색 털모자는 귀 덮는 데만 빨간 실로 떠 있었고⁠, 빨간 실이 바래서 분홍에 가까웠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모자가 할아버지 이마로 흘러내렸다⁠.

“⁠하사님⁠, 제가 잡겠습네다⁠.⁠”

철민이 앞좌석에서 몸을 돌렸다⁠. 창익은 할아버지를 차에 옮길 사람이 필요하다며 철민을 불렀다⁠. 철민은 출발할 때부터 들떠 있었다⁠. 판문점에 가는 상등병은 초소에서 처음이라고 했다⁠.

“⁠너는 앞이나 봐라⁠. 멀미한다⁠.⁠”

“⁠저 멀미 안 합네다⁠. 아까 감자 세 알 먹었습네다⁠.⁠”

“⁠기러니까 멀미한다⁠.⁠”

운전대를 잡은 창익이 백미러로 둘을 보았다⁠. 창익은 출발한 뒤로 담배를 한 개비도 피우지 않았다⁠. 뒷좌석에 누운 아흔세 살 노인 때문이었다⁠. 대신 불붙지 않은 담배 개비를 운전대 위에서 손가락으로 굴렸다⁠.

뒤에는 버스 한 대가 따라왔다⁠. 버스에는 제삼 해성호 선원 다섯이 타고 있었다⁠. 맨 뒤로 작은 차 한 대가 붙었다⁠. 작은 차에 누가 탔는지 창익은 말하지 않았고⁠, 광혁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았다⁠.

*

새벽 네 시쯤 차가 다리 하나를 건넜다⁠. 창밖으로 넓은 강물이 검게 흘렀다⁠. 다리 난간의 가로등이 하나씩 뒤로 물러갔다⁠. 할아버지가 눈을 떴다⁠.

“⁠얼음⁠.⁠”

“⁠할아버지⁠, 오월입네다⁠. 얼음 없습네다⁠.⁠”

“⁠대동강이다⁠.⁠”

할아버지는 창밖을 보려고 고개를 들려 했다⁠. 광혁이 할아버지의 어깨를 받쳐 일으켰다⁠. 할아버지는 차창에 이마를 대고 강물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 이마를 떼지 않았다⁠. 다리가 끝나자 할아버지는 다시 누웠고⁠, 털모자를 두 손으로 끌어내려 눈을 덮었다⁠.

*

아침 아홉 시⁠, 승합차가 판문점 북쪽 대기 건물 앞에 멈췄다⁠. 창익은 시동을 끄고도 한참 내리지 않았다⁠. 철민은 할아버지 담요를 챙기러 뒤로 갔다⁠. 창익이 백미러로 광혁을 보았다⁠.

“⁠남쪽이 오늘 문 하나를 열어 둔다지⁠. 그 여자가 말했지⁠?⁠”

“⁠예⁠.⁠”

“⁠나도 안다⁠. 서민영이 바보가 아니다⁠. 저쪽이 문을 열어 두는 걸 내가 모를 리 없다는 것도 서민영은 안다⁠.⁠”

창익은 가죽 잠바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봉투째 뒤로 내밀었다⁠. 광혁이 받아 열었다⁠. 살구나무 앞의 소년과 소녀⁠. 뒷면의 네 글자⁠.

“⁠네 할아버지 거다⁠. 오늘 할머니 앞에서 네가 꺼내라⁠. 내 손으로 꺼내면 보위부 물건이 된다⁠.⁠”

“⁠감사합네다⁠.⁠”

“⁠고맙다는 말 그만해라⁠. 오늘 너한테 고맙다는 말 들으면⁠, 네가 문 앞에 섰을 때 내가 뭐라 할 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하실 겁네까⁠?⁠”

창익은 대답하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 내리다 말고 돌아보았다⁠.

“⁠아무 말도 안 할 거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다⁠.⁠”

창익이 문을 닫았다⁠. 광혁은 사진을 군복 가슴 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채웠다⁠. 이번에는 손가락이 미끄러지지 않았다⁠.

*

판문점은 생각보다 작았다⁠. 낮은 파란 건물 몇 채가 나란히 서 있었고⁠, 건물과 건물 사이 땅바닥에 낮은 콘크리트 턱 하나가 줄처럼 놓여 있었다⁠. 무릎은커녕 발목에도 안 닿는 높이였다⁠.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이 바로 콘크리트 턱이었다⁠. 턱 북쪽에는 이쪽 군인들이⁠, 남쪽에는 남쪽 군인들이 서 있었다⁠. 남쪽 군인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철민이 선글라스를 보고 입을 벌렸다⁠.

“⁠하사님⁠, 저 사람들 해도 없는데 왜 안경을 씁네까⁠?⁠”

“⁠눈을 안 보이려고⁠.⁠”

“⁠우리도 쓰면 안 됩네까⁠?⁠”

“⁠우리는 눈을 보여 줘야 한다⁠. 그래야 저쪽이 겁낸다⁠.⁠”

철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부릅떴다⁠. 너무 부릅떠서 눈물이 났다⁠.

정오⁠, 광혁은 파란 회담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긴 탁자 하나가 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탁자 한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지나간다고 했다⁠. 탁자 위에 마이크 선이 길게 놓여 있었다⁠. 마이크 선이 줄 노릇을 했다⁠. 탁자 북쪽 끝에 창익이 앉았다⁠. 광혁은 창익 뒤에 자리를 잡았다⁠. 할아버지는 방 구석 접이식 의자에 담요를 덮고 앉혔다⁠.

남쪽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맨 앞에 남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 마흔이 조금 안 되어 보였고⁠, 머리를 귀 뒤로 단정하게 넘겼다⁠. 여자 뒤로 휠체어 하나가 들어왔다⁠. 휠체어를 미는 사람은 키가 컸다⁠.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었고⁠, 주황 줄 두른 남색 소방 활동복을 입고 있었다⁠. 꿈에서 늘 보던 옷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방 안을 한 번 훑더니 광혁에게서 멈췄다⁠.

광혁은 숨을 멈췄다⁠. 강 한가운데보다 가까웠다⁠. 탁자 하나만큼 멀었다⁠.

*

민영은 탁자 남쪽 끝에 앉았다⁠. 코트 주머니에서 박하사탕 하나를 꺼내 탁자 위 군사분계선 바로 남쪽에 내려놓았다⁠. 창익이 사탕을 내려다보았다⁠.

“⁠오창익 소좌님이시죠⁠.⁠”

“⁠서민영 담당관⁠.⁠”

둘은 한동안 서로를 보기만 했다⁠. 꿈 두 개를 건너 말을 주고받은 사람들이었다⁠.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선원 다섯은 밖에 있소⁠. 서류에 도장 찍으면 바로 넘어간다⁠.⁠”

창익이 먼저 말했다⁠. 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 일은요⁠.⁠”

“⁠셋을 돌려 달라는 말은 국장 동지가 거두지 않았다⁠. 대신 오늘은 이렇게 하자⁠. 셋이 제 얼굴로 제 입으로 말하는 걸 우리 쪽 가족이 보게 해라⁠.⁠”

민영은 서류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탁자 위로 밀었다⁠. 군사분계선 위에서 태블릿이 멈췄다⁠.

“⁠어제 찍었어요⁠. 셋 다요⁠. 가족들한테 하는 말이에요⁠. 남겠다는 말도 있고⁠, 미안하다는 말도 있어요⁠.⁠”

창익은 태블릿을 집지 않았다⁠. 화면에 비친 여자의 얼굴을 한참 보았다⁠. 3월 마지막 밤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 눈을 감지 않던 얼굴이었다⁠. 광혁은 창익의 어깨 너머로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여자가 화면 속에서 울면서 웃고 있었다⁠.

“⁠가져가겠다⁠.⁠”

창익이 태블릿을 끌어당겼다⁠. 민영은 손을 떼지 않았다⁠. 태블릿이 군사분계선 위에서 두 사람의 손가락에 붙들렸다⁠.

“⁠조건이 하나 있어요⁠. 리광혁 하사 처분을 거두세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광혁은 민영을 보았다⁠. 유채도 민영을 보았다⁠. 창익의 손가락이 태블릿 모서리에서 굳었다⁠.

“⁠그건 우리 일이오⁠.⁠”

“⁠우리 아버지 일은 소좌님이 남의 일로 쓰셨잖아요⁠. 저도 남의 일 하나 쓸게요⁠.⁠”

“⁠저 하사는 우리 공민 셋을 남쪽으로 보낸 사람이오⁠. 손전등을 물로 돌렸소⁠. 그걸 덮으면 강가의 모든 초소병이 손전등을 돌린다⁠. 손전등을 돌리면 강에 사람이 더 들어가고⁠, 더 빠진다⁠. 나는 스무 해 동안 강에서 건졌소⁠.⁠”

“⁠저는 스물아홉 해 동안 부두에서 기다렸어요⁠. 그 사람이 손전등을 돌려서 세 사람은 살았어요⁠. 소좌님 강에 빠진 사람이 아니에요⁠. 바다에서 건져진 사람이에요⁠.⁠”

둘은 태블릿을 붙든 채로 마주 보았다⁠. 둘 다 손을 놓지 않았다⁠. 민영의 말도 창익의 말도 틀린 데가 없었다⁠. 광혁은 그것을 알았다⁠. 유채도 아는 얼굴이었다⁠.

창익이 먼저 손가락을 폈다⁠. 태블릿이 민영 쪽으로 조금 밀렸다가 멈췄다⁠.

“⁠처분은 내가 정하는 일이 아니오⁠. 대신 저 하사가 오늘 어느 문으로 나가든⁠, 오늘 일은 내 서랍에서 안 나온다⁠. 그건 내가 정할 수 있소⁠.⁠”

민영은 태블릿을 놓았다⁠. 창익이 태블릿을 가방에 넣었다⁠.

*

할아버지가 앉은 구석으로 휠체어가 다가갔다⁠. 유채가 휠체어를 밀었다⁠. 광혁은 할아버지 의자 옆에 붙어 있었다⁠. 회담장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경비 서는 남쪽 군인 하나가 선글라스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는 휠체어에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화장한 얼굴이었다⁠. 볼에 분홍빛이 돌았다⁠. 할머니의 눈이 할아버지 얼굴에서 털모자로 갔다⁠. 빨간 실로 뜬 귀덮개에서 멈췄다⁠.

“⁠아직 그거 쓰냐⁠.⁠”

할머니가 말했다⁠. 이북 말씨가 진하게 돌아와 있었다⁠.

“⁠촌스럽다며⁠.⁠”

할아버지의 탁한 눈이 할머니 얼굴을 헤맸다⁠. 한참 헤매다 멈췄다⁠.

“⁠순아⁠.⁠”

할머니가 손을 뻗어 털모자의 귀덮개를 쓰다듬었다⁠. 바랜 빨간 실을 손가락으로 한 올씩 쓸었다⁠. 휠체어 옆 가방에서 보자기를 꺼내 할아버지 무릎에 올렸다⁠. 회색 털실 뭉치⁠, 끝에 빨간 실 몇 가닥⁠.

“⁠남은 실이다⁠. 모자 떠 주고 남은 거⁠.⁠”

광혁은 가슴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할아버지 손에 쥐여 드렸다⁠. 할아버지가 사진을 할머니 쪽으로 내밀었다⁠. 할머니는 사진을 받지 않고 들여다보기만 했다⁠. 살구나무 앞의 두 아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사진사가 웃으라 했는데⁠.⁠”

할아버지가 더듬더듬 말했다⁠. 할머니가 코를 훌쩍였다⁠.

“⁠지금은 웃어라⁠. 일흔여덟 해 늦었다⁠.⁠”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털실 뭉치를 두 손으로 감쌌다⁠. 손이 떨렸다⁠. 할머니가 떨리는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마른 손 넷이 털실 위에서 포개졌다⁠.

할머니가 고개를 들어 유채를 보고⁠, 광혁을 보았다⁠. 그러고는 회담장이 다 들리게 말했다⁠.

“⁠우리 피 안 섞였다⁠.⁠”

유채의 손이 휠체어 손잡이에서 굳었다⁠. 광혁은 할아버지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오라비는 옆집 오라비다⁠. 1950년 가을에 우리 엄마 아버지 다 죽고 나 혼자 남으니까⁠, 오라비가 나를 데리고 나왔다⁠. 피란 줄에서 군인들이 식구 아니면 안 끼워 준다길래 오라비가 내 동생이라 했다⁠. 사진 뒤에 남매라고 안 쓴 것도 그래서다⁠. 대동강 얼음 위에서도 동생이라 하고 업었다⁠. 건너편에 고모가 있다고 했다⁠. 고모는 처음 보는 아줌마였다⁠. 오라비가 아줌마한테 내 동생 좀 맡아 달라고 빌었다⁠. 그 아줌마가 나를 키웠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손등을 엄지로 쓸었다⁠.

“⁠오라비는 제 어머니한테 돌아갔다⁠. 강 북쪽에 오라비 어머니가 있었다⁠. 나는 일흔여덟 해 동안 아무한테도 이 말 안 했다⁠. 오라비라고 부르기로 한 거니까⁠. 부르기로 했으면 오라비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리게⁠, 두 번⁠.

“⁠순아는 내 동생이다⁠.⁠”

할아버지 목소리가 작았는데 방 안 끝까지 갔다⁠.

“⁠피는 상관없다⁠.⁠”

회담장이 조용했다⁠. 철민이 문가에서 광혁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췄는데 다 들렸다⁠.

“⁠하사님⁠, 기럼 육촌 아닙네까⁠? 혼인해도 됩네까⁠?⁠”

창익이 헛기침을 했다⁠. 민영이 박하사탕을 깨물었다⁠. 남쪽 군인 하나가 선글라스 밑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유채의 귀가 빨개졌다⁠. 광혁의 귀도 빨개졌다⁠. 할머니가 둘을 번갈아 보더니 혀를 찼다⁠.

“⁠귀 빨개지는 것까지 쌍둥이네⁠. 피도 안 섞였는데⁠.⁠”

*

오후 두 시⁠, 서류에 도장이 찍혔다⁠. 선원 다섯이 버스에서 내려 콘크리트 턱을 건넜다⁠. 고무장화를 신은 늙은이가 맨 뒤에서 걸었다⁠. 신문실 창밖으로 광혁에게 고개를 끄덕이던 늙은이였다⁠. 늙은이는 턱 앞에서 한 번 멈추고 발을 들어 턱을 넘었다⁠. 넘고 나서 무릎을 꿇었다⁠. 남쪽 군인이 늙은이를 부축했다⁠.

광혁은 회담장 북쪽 문 앞에 서 있었다⁠. 할아버지를 차에 옮겨 드리러 나가는 길이었다⁠. 문 바로 바깥 땅바닥에 콘크리트 턱이 지나갔다⁠. 턱 너머 남쪽 문이 열려 있었다⁠. 아까는 닫혀 있던 문이었다⁠. 남쪽 군인 둘이 문 양옆으로 한 걸음씩 비켜났다⁠. 길이 났다⁠.

회담장 안의 소리가 멎었다⁠. 창익이 서류 가방을 든 채 멈췄다⁠. 민영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멈췄다⁠. 철민이 할아버지 담요를 든 채 멈췄다⁠. 유채가 휠체어 손잡이를 쥔 채 멈췄다⁠.

모두의 눈이 콘크리트 턱 앞의 광혁에게 갔다⁠. 턱은 발목에도 닿지 않았다⁠. 한 걸음이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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