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44자)

구조 계획

꿈에서 만나는 남녀북남 · 기담오

강유채는 꿈에서 깨자마자 휴대전화부터 찾았다⁠. 5월 15일 새벽 다섯 시였다⁠. 할머니 방 돌침대 위였다⁠. 지갑 속에 한 달 넘게 들어 있던 명함을 꺼냈다⁠. 「⁠서민영⁠」 석 자와 전화번호뿐인 명함이었다⁠. 신호가 한 번 가기도 전에 민영이 받았다⁠.

“⁠네⁠.⁠”

목소리가 잠긴 데가 없었다⁠. 자다 깬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사람 왔어요⁠. 전갈 있어요⁠. 판문점이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아주 오래 조용했다⁠.

“⁠택시 타고 오세요⁠. 요금은 제가 내요⁠.⁠”

*

여섯 시 반⁠, 안가 부엌 식탁에 민영이 앉아 있었다⁠. 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식탁 위 등만 켜져 있었다⁠. 민영의 눈 밑이 검었다⁠. 박하사탕 그릇은 비어 있었다⁠. 요원이 소파에서 담요를 덮고 자다가 유채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확인했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요⁠.⁠”

“⁠오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유채는 민영 맞은편에 앉지 않고 선 채로 말했다⁠. 광혁이 한 대로 또박또박⁠. 오월 스무날 정오⁠, 판문점⁠. 선원 다섯을 판문점에서 넘긴다⁠. 세 사람의 일도 판문점에서 정한다⁠. 이산가족 한 쌍⁠, 리영수와 이옥순⁠. 그리고⁠.

“⁠서민영 담당관에게⁠. 서덕환을 데려간다⁠. 십 분⁠.⁠”

민영은 받아 적지 않았다⁠. 볼펜이 손가락 사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민영은 한참 식탁 위 등불을 보다가 수첩을 펴고 한 글자씩 적었다⁠. 서⁠, 덕⁠, 환⁠. 다 적고 나서 이름 밑에 줄을 그었다⁠. 그은 줄 위로 볼펜이 한 번 더 지나갔다⁠.

“⁠십 분⁠.⁠”

민영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스물아홉 해에 십 분⁠.⁠”

“⁠담당관님⁠.⁠”

“⁠말 시키지 마세요⁠. 이번에는 다른 뜻이에요⁠.⁠”

민영은 수첩을 덮고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요구르트 하나를 꺼내 유채 앞에 놓았다⁠. 뚜껑을 따 주기까지 했다⁠.

*

점심때 차장이 왔다⁠. 차장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유채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결국 다시 강 소방장이네요⁠.⁠”

“⁠그 사람이 저한테만 와요⁠.⁠”

“⁠알아요⁠. 그래서 한숨이 나와요⁠.⁠”

차장은 소파에 앉아 민영이 정리한 전갈을 돋보기로 읽었다⁠. 다 읽고 나서 돋보기를 접었다⁠.

“⁠받읍시다⁠. 선원 다섯이 돌아오고⁠, 이산가족이 만나고⁠, 세 사람 일은 그 자리에서 우리 원칙대로 지키면 돼요⁠. 나쁠 게 없어요⁠.⁠”

차장은 잠깐 말을 멈추고 민영을 보았다⁠. 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미리 맞춰 둔 고갯짓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판문점 회담장 남쪽 문은 그날 열어 둘 거예요⁠.⁠”

유채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리광혁 하사가 넘어오면 받아요⁠. 그 사람은 저쪽에서 손전등 군인으로 찍혔어요⁠. 돌아가면 다시는 강가에 못 서요⁠. 넘어오면 살아요⁠.⁠”

“⁠그 사람이 원하지 않으면요⁠?⁠”

“⁠저쪽도 알아요⁠? 문 열어 두는 거⁠.⁠”

“⁠알면 안 되죠⁠. 알면 저쪽은 그 사람을 판문점에 안 데려와요⁠.⁠”

“⁠그럼 그 사람은 문이 열린 것도 모르고 오는 거예요⁠?⁠”

“⁠그래서 강 소방장이 필요한 거예요⁠. 미리 알려 줄 사람이⁠.⁠”

차장은 돋보기를 안경집에 넣었다⁠. 안경집을 닫는 소리가 딸깍 났다⁠.

“⁠고르는 건 그 사람이 해요⁠. 우리는 문만 열어요⁠. 문을 안 열어 두면 고를 수도 없잖아요⁠.⁠”

유채는 반박할 말을 찾았다⁠. 찾지 못했다⁠. 차장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틀린 데가 없어서 더 싫었다⁠.

“⁠원하게 해 주세요⁠.⁠”

민영이 말했다⁠. 차장이 아니었다⁠. 유채가 민영을 보았다⁠. 민영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늘 밤부터 꿈에서 말해 주세요⁠. 넘어오라고⁠. 문이 열려 있다고⁠. 남쪽에서 다 지켜 준다고⁠.⁠”

“⁠지켜 준다는 거 참말이에요⁠?⁠”

“⁠참말이에요⁠. 우리는 넘어온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아요⁠. 세 사람도 안 돌려보내잖아요⁠.⁠”

“⁠그럼 왜 담당관님이 말해요⁠? 차장님 일이잖아요⁠.⁠”

민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장이 대신 말했다⁠.

“⁠서 담당관이 제일 잘 알아서요⁠. 국경 너머에 사람을 두고 사는 게 어떤 건지⁠.⁠”

차장은 일어나서 사탕 그릇이 빈 것을 보고 주머니에서 사탕 두 개를 꺼내 그릇에 넣었다⁠. 처음 왔을 때 집어 간 사탕이었다⁠.

*

5월 16일 오후⁠, 마포 소방서 차고에서 민석이 빈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할머니가 쓸 휠체어였다⁠. 차고 바닥에 주황 고깔 여섯 개가 줄지어 서 있었다⁠. 민석은 고깔 사이를 지그재그로 돌다가 세 번째 고깔을 넘어뜨렸다⁠.

“⁠다시⁠!⁠”

팀장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소방서에 호루라기가 있는 줄 유채는 처음 알았다⁠.

“⁠판문점 바닥은 울퉁불퉁할 수도 있어⁠. 콘크리트 턱도 있다더라⁠. 턱 앞에서는 앞바퀴를 들고 뒷바퀴로 넘어⁠. 할머니 고개가 뒤로 젖혀지면 안 돼⁠.⁠”

“⁠팀장님 판문점 가 보셨어요⁠?⁠”

“⁠유튜브로 봤다⁠.⁠”

할머니는 차고 구석 의자에 앉아 감독관처럼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할머니는 민석이 고깔을 넘어뜨릴 때마다 혀를 찼다⁠.

“⁠저놈 손에 내 목숨 맡기면 대동강 얼음 위가 낫겠다⁠.⁠”

“⁠할머니⁠, 저 소방관이에요⁠. 사람 실어 나르는 게 일이에요⁠.⁠”

“⁠사람을 실어 나르지 말고 모셔라⁠. 짐이냐⁠?⁠”

민석은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고깔 사이로 휠체어를 밀었다⁠. 이번에는 하나도 안 넘어뜨렸다⁠.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이 박수를 쳤다⁠.

판문점 안까지는 유채만 보호자로 들어갈 수 있었다⁠. 팀장과 민석은 임진강 앞 검문소까지 할머니를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차장이 허락한 것은 거기까지였다⁠. 팀장은 그것도 감지덕지라며 펌프차 대신 자기 승합차를 닦았다⁠.

“⁠할머니⁠, 오라비 만나시면 무슨 말씀 하실 거예요⁠?⁠”

민석이 물었다⁠. 할머니는 오래 대답하지 않다가 손을 저었다⁠.

“⁠니가 알 거 없다⁠. 그리고 너⁠, 내 얼굴에 분 좀 발라 줄 사람 알아 와라⁠. 오라비 앞에 늙은 얼굴로 가기 싫다⁠.⁠”

“⁠제 여자 친구가 메이크업 배워요⁠!⁠”

“⁠여자 친구⁠? 니가⁠?⁠”

“⁠매칭됐어요⁠.⁠”

할머니가 처음으로 민석을 위아래로 다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좋아졌다⁠.⁠”

*

5월 18일 저녁⁠, 망원동 할머니 집 마루에 민석의 여자 친구가 화장품 가방을 펼쳤다⁠. 스물다섯 살⁠, 눈이 동그랗고 말이 빨랐다⁠. 할머니는 마루 끝에 꼿꼿이 앉아 눈을 감고 얼굴을 내밀었다⁠.

“⁠할머님⁠, 피부가 좋으세요⁠.⁠”

“⁠구십 년 동안 화장을 안 해서 그렇다⁠. 바를 일이 없었다⁠.⁠”

“⁠내일은 바를 일이 있으시네요⁠.⁠”

“⁠있다⁠. 일흔여덟 해 만에⁠.⁠”

여자 친구는 분첩을 들고 잠깐 멈칫했다가 할머니 볼에 분을 가볍게 두드렸다⁠. 민석이 마당에서 휠체어 바퀴에 바람을 넣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할머니⁠, 예뻐요⁠!⁠”

“⁠시끄럽다⁠. 바퀴나 넣어⁠.⁠”

화장이 끝나자 할머니는 장롱 깊은 데서 보자기를 하나 꺼냈다⁠. 보자기 안에 빛바랜 회색 털실 뭉치가 들어 있었다⁠. 실 끝에 빨간 실이 몇 가닥 섞여 있었다⁠.

“⁠피란 나올 때 이것만 들고 나왔다⁠. 오라비한테 털모자를 떠 주다 남은 실이다⁠. 회색 실이 모자라서 귀 덮는 데는 빨간 실로 떴다⁠. 오라비가 촌스럽다고 투덜거리면서 썼다⁠.⁠”

유채는 털실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실이 손바닥 위에서 가벼웠다⁠. 할머니가 털실을 다시 보자기에 싸서 휠체어 옆 가방에 넣었다⁠.

“⁠내일 이거 가져간다⁠. 오라비가 아직 그 모자를 쓰면⁠, 내가 맞게 본 거다⁠.⁠” 바닷가는 따뜻했다⁠. 쇠줄은 물 밑에 가라앉아 있었다⁠. 광혁은 쇠줄 앞에 앉아 맨발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유채가 오자 물장구를 멈췄다⁠.

유채는 쇠줄 앞에 앉았다⁠. 발끝이 광혁의 발끝에 닿았다⁠.

“⁠할 말이 있어요⁠. 철조망 보면서 할게요⁠.⁠”

“⁠기래⁠.⁠”

“⁠남쪽은 판문점에서 문 하나를 열어 두기로 했어요⁠. 당신이 넘어오면 받는대요⁠. 돌아가면 손전등 군인으로 다시는 강가에 못 선다고⁠. 넘어오면 산다고⁠. 나한테 당신을 설득하래요⁠. 오늘 밤부터⁠.⁠”

쇠줄은 움직이지 않았다⁠.

광혁은 한참 물을 내려다보았다⁠. 유채가 말을 이었다⁠. 숨을 한 번 쉬고 나서였다⁠.

“⁠그리고 나도 바라요⁠. 당신이 넘어오면 좋겠어요⁠.⁠”

쇠줄은 움직이지 않았다⁠. 참말이었다⁠. 유채는 쇠줄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철조망 앞에서는 숨길 수가 없었다⁠.

광혁이 유채의 발등에 제 발을 올렸다⁠. 차갑고 거친 발바닥이었다⁠.

“⁠나는 안 넘어간다⁠.⁠”

쇠줄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모시고 와야 한다⁠. 철민이는 제대할 때까지 내가 지켜야 한다⁠. 그리고⁠.⁠”

광혁은 말을 고르다 그만두고 다른 말을 했다⁠.

“⁠할아버지도 대동강을 건넜다가 돌아왔다⁠. 어머니가 강 이쪽에 있다고⁠.⁠”

“⁠할아버지 어머니요⁠?⁠”

“⁠기래⁠.⁠”

“⁠할머니도 그랬어요⁠. 오라비 어머니가 북쪽에 있어서 돌아갔다고⁠.⁠”

둘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남긴 말을 같이 곱씹었다⁠. 광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라비 어머니⁠. 네 할머니 어머니가 아니고⁠.⁠”

“⁠그러니까요⁠.⁠”

“⁠판문점에서 물어보자⁠. 둘이 같이 있을 때⁠.⁠”

유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다가 광혁의 발 위에 얹힌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판문점에서 우리는요⁠?⁠”

“⁠한 번 손잡자⁠. 꿈 말고 거기서⁠. 그다음은 각자 집으로 간다⁠.⁠”

쇠줄은 움직이지 않았다⁠. 유채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채로 웃었다⁠.

“⁠한 번 반은 안 돼요⁠?⁠”

“⁠한 번 반은 반칙이다⁠.⁠”

둘은 물가 모래에 나란히 누웠다⁠. 물 밑 쇠줄이 둘 사이로 지나갔다⁠. 유채의 왼팔과 광혁의 오른팔이 쇠줄 위에서 맞닿았다⁠. 물이 밀려와 맞닿은 팔꿈치를 적셨다가 빠져나갔다⁠. 모래가 등 밑에서 따뜻하게 꺼졌다⁠. 해는 끝내 올라오지 않았고⁠, 하늘 끝 분홍빛만 조금씩 짙어졌다⁠. 유채는 광혁의 팔에 돋은 소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광혁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내쉰 숨이 유채의 귓바퀴에 닿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으면 거짓말도 참말도 없었고⁠, 쇠줄은 물 밑에서 조용했다⁠.

*

5월 19일 아침⁠, 민영이 부엌 식탁에서 유채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첩이 펼쳐져 있었고⁠, 수첩 위에 볼펜이 놓여 있었다⁠. 민영은 유채가 앉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오늘 새벽 저쪽 전갈에 한 줄이 더 붙어 왔다죠⁠. 소방장님이 받아 오셨어요⁠. 판문점 남쪽 문은 닫아 두라⁠, 우리 하사는 안 넘어간다고 제 입으로 말했다⁠.⁠”

“⁠네⁠.⁠”

“⁠말했죠⁠? 문을 열어 둔다는 거⁠.⁠”

“⁠네⁠. 그대로 말했어요⁠.⁠”

민영은 볼펜을 집었다⁠. 누르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에서 한 바퀴 돌렸다⁠. 창익이 담배 개비를 굴리던 손짓과 닮아 있었다⁠.

“⁠설득하라고 했지⁠, 일러 주라고는 안 했어요⁠.⁠”

“⁠거짓말하면 철조망이 올라와요⁠. 목까지 올라오는 거 한 번 봤어요⁠. 그다음에 일이 다 이렇게 됐어요⁠.⁠”

민영은 한참 유채를 보았다⁠. 그러다 볼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신도시의 첫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가 떠났다⁠.

“⁠우리 아버지가 내일 저 사람들 차를 타고 내려와요⁠. 소방장님 그 사람도요⁠. 둘 다 내일 그 방에 있을 거예요⁠. 그리고 둘 다 그 방에서 어느 문으로 나갈지 고를 거예요⁠.⁠”

민영은 고개를 돌려 유채를 보았다⁠. 눈이 붉었지만 젖어 있지는 않았다⁠.

“⁠내일 그 사람이 넘어오면 나는 막지 않아요⁠. 당신도 막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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