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39자)

콘크리트 턱

꿈에서 만나는 남녀북남 · 기담오

강유채는 휠체어 손잡이를 놓았다⁠. 손잡이에 손바닥 땀이 남았다⁠. 5월 20일 오후 두 시 십 분⁠, 판문점 회담장 안에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열린 남쪽 문으로 오월 햇빛이 들어와 바닥에 네모를 그렸다⁠. 북쪽 문 앞에 광혁이 서 있었다⁠. 광혁의 군화 앞 땅바닥으로 콘크리트 턱이 지나갔다⁠.

넘어오라고 말하면 안 됐다⁠. 넘어오지 말라고 말해도 안 됐다⁠. 민영이 막지 말라고 했고⁠, 유채도 막지 않기로 했다⁠. 꿈에서 광혁은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고⁠, 철조망은 움직이지 않았다⁠. 참말이었다⁠. 참말인 것을 알면서도 유채는 열린 문을 보았다⁠. 문은 넓었다⁠. 사람 하나가 지나가기에 넉넉했다⁠.

광혁이 유채를 보았다⁠. 유채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구석 의자의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털실 뭉치를 무릎에 얹고 털모자를 쓴 채 광혁을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일흔여덟 해 전 대동강 남쪽 얼음 끝에서 옥순이를 내려놓고 돌아서던 얼굴도 저랬겠다고⁠, 유채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광혁이 한 걸음 내디뎠다⁠.

회담장 안의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광혁의 군화가 콘크리트 턱 바로 앞에서 멈췄다⁠. 군화 앞코가 턱에 닿았다⁠. 넘지 않았다⁠. 광혁은 턱 앞에 멈춘 채 오른손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를 향해 있었다⁠. 턱 너머 남쪽 땅 위의 허공으로⁠.

남쪽 군인들이 서로를 보았다⁠. 북쪽 군인 하나가 총 멜빵을 고쳐 잡았다⁠. 창익은 서류 가방을 든 채 꼼짝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채는 걸었다⁠. 다리가 먼저 나갔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버릇이었다⁠. 휠체어 옆을 지나고⁠, 탁자 끝을 돌고⁠, 열린 남쪽 문으로 나갔다⁠. 햇빛이 얼굴에 쏟아졌다⁠. 회담장 벽을 따라 몇 걸음을 걸어 북쪽 문 앞으로 갔다⁠. 발밑에 콘크리트 턱이 있었다⁠. 턱 남쪽에 유채가⁠, 턱 북쪽에 광혁이 서 있었다⁠.

가슴까지 오는 물보다 낮은 턱이었다⁠. 발목에도 안 닿았다⁠. 그런데 한강의 누런 물을 앞에 둔 것처럼 무릎이 떨렸다⁠. 들어갈 일이 생기면 들어가⁠, 하던 팀장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유채는 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손이 닿았다⁠.

광혁의 손은 꿈에서처럼 거칠었다⁠. 검지 마디에 총 멜빵에 쓸린 굳은살이 있었다⁠. 꿈에서처럼 차갑지는 않았다⁠. 땀에 젖어 미지근했다⁠. 손바닥 한가운데서 맥이 뛰었다⁠. 빨랐다⁠. 유채의 맥도 빨랐다⁠. 두 맥이 손바닥 사이에서 엇박자로 부딪쳤다⁠.

냄새가 났다⁠. 꿈에서는 한 번도 나지 않던 냄새였다⁠. 군복에 밴 강바람 냄새⁠, 빨랫비누 냄새⁠, 그리고 아주 엷은 감자 냄새⁠. 유채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바닷가에는 없던 것이었다⁠. 꿈속 바닷가는 살갗으로만 왔다⁠. 여기는 코로도 왔다⁠.

광혁이 유채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넣었다⁠. 꿈에서 하던 대로 깍지를 꼈다⁠. 콘크리트 턱 위에서 깍지 낀 손 두 개가 한 덩어리가 되었다⁠. 턱은 두 사람의 손 아래 그늘 속에 있었다⁠.

“⁠넘어오라고 안 할게요⁠.⁠”

유채가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알고 있다⁠.⁠”

“⁠넘어오지 말라고도 안 할게요⁠.⁠”

“⁠그것도 안다⁠.⁠”

광혁의 귀 끝이 붉었다⁠. 유채의 귀도 뜨거웠다⁠. 여기에는 철조망이 없었다⁠. 귀만 있었다⁠. 귀는 철조망처럼 거짓말에만 빨개지지 않았다⁠.

“⁠세 시 십 분⁠.⁠”

광혁이 말했다⁠.

“⁠불나면 늦어요⁠.⁠”

“⁠늦어도 기다린다⁠. 바닷가 모래가 차가워져도⁠.⁠”

유채가 웃었다⁠. 웃음 끝이 떨렸다⁠. 광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웃던 그대로였다⁠. 피는 안 섞였는데도 그랬다⁠.

광혁이 깍지를 풀었다⁠. 손가락 하나씩 천천히 빠져나갔다⁠. 마지막 새끼손가락이 유채의 새끼손가락 끝을 한 번 스치고 떨어졌다⁠. 광혁은 한 걸음 물러났다⁠. 군화 앞코가 턱에서 떨어졌다⁠. 열린 남쪽 문은 그대로 열려 있었다⁠. 광혁은 문을 보지 않고 돌아서서 할아버지에게 걸어갔다⁠.

*

작은 차에서 내린 노인은 양복이 컸다⁠. 어깨가 흘러내렸고 소매가 손등을 덮었다⁠. 머리는 하얗게 셌고⁠, 얼굴은 바닷바람에 오래 그을린 얼굴이었다⁠. 창익이 회담장 북쪽 문에서 노인의 팔을 잡아 안으로 들였다⁠. 탁자 남쪽 끝에 앉아 있던 민영이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었다⁠.

노인은 탁자 앞에서 멈췄다⁠. 민영을 한참 보았다⁠. 입술이 몇 번 달싹였다⁠.

“⁠민영아⁠.⁠”

민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코트 주머니에 넣은 손이 주머니 안에서 움직였다⁠. 민영은 주머니에서 박하사탕 한 움큼을 꺼냈다⁠. 사탕 쥔 손을 탁자 위 군사분계선 너머로 내밀었다⁠.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사탕을 받았다⁠.

“⁠아부지 이거 좋아했잖아⁠.⁠”

민영이 말했다⁠. 처음 듣는 말투였다⁠. 열 살 아이의 말투였다⁠.

“⁠박하사탕⁠. 배에 갈 때마다 주머니에 넣고 갔잖아⁠.⁠”

노인이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볼이 불룩해졌다⁠. 노인은 사탕을 문 채로 울었다⁠.

창익이 회담장 벽시계를 보았다⁠. 그러고는 시계에서 등을 돌렸다⁠. 십 분은 십오 분이 되었고⁠, 이십 분이 되었다⁠. 아무도 시계를 보지 않았다⁠. 유채는 남쪽 문가에서 둘을 보았다⁠. 노인이 신의주에 아내와 손주 셋이 있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야 한다고⁠, 손주 막내가 아직 걸음마를 한다고⁠. 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또 끄덕였다⁠.

“⁠가세요⁠. 손주 걸음마 보셔야죠⁠.⁠”

민영이 말했다⁠. 볼펜 소리는 나지 않았다⁠. 민영은 아버지의 큰 양복 소매를 손가락으로 접어 올려 주었다⁠. 소매 밑으로 마른 손목이 나왔다⁠. 민영은 손목을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노인이 창익의 부축을 받아 북쪽 문으로 나갔다⁠. 민영은 탁자 앞에 선 채로 노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박하사탕 껍질 하나가 탁자 위 군사분계선 위에 떨어져 있었다⁠.

*

오후 세 시⁠, 회담장 문간에서 민영과 창익이 마주 보았다⁠. 한 사람은 남쪽 문턱에⁠, 한 사람은 북쪽 문턱에⁠. 사이에 콘크리트 턱이 있었다⁠. 유채는 할머니 휠체어를 밀고 나오다가 둘의 말을 들었다⁠.

“⁠보고서에 이렇게 쓸게요⁠. 판문점 이후 꿈은 끊겼다⁠. 남쪽 전령이 더는 그 바닷가에 가지 못한다⁠.⁠”

민영이 말했다⁠. 창익이 담배 개비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나도 그렇게 쓴다⁠. 하사가 구류장에서 잠을 망쳐서 이제는 세 시 십 분에 못 잔다고⁠. 국장 동지는 믿을 거다⁠. 잠 못 자게 한 게 국장 동지니까⁠.⁠”

“⁠거짓말이네요⁠, 둘 다⁠.⁠”

“⁠철조망이 없어서 다행이오⁠.⁠”

창익이 처음으로 민영 앞에서 웃었다⁠. 민영도 웃었다⁠. 박하사탕을 깨물며⁠.

“⁠강 건너는 사람이 줄면 좋겠소⁠.⁠”

창익이 말했다⁠.

“⁠바다로 끌려가는 사람도요⁠.⁠”

민영이 받았다⁠. 둘은 고개를 한 번씩 숙였다⁠. 창익이 먼저 돌아서서 북쪽으로 걸어갔다⁠. 담배 개비를 귀에 꽂고 걸었다⁠.

*

할머니 휠체어를 밀고 주차장으로 나가는 길에 유채의 주머니에서 전화가 떨었다⁠. 팀장이었다⁠.

“⁠살아 있냐⁠?⁠”

“⁠살아 있어요⁠.⁠”

“⁠그쪽 사람은⁠?⁠”

“⁠안 넘어왔어요⁠.⁠”

전화 너머에서 팀장이 한참 숨만 쉬었다⁠. 뒤에서 차고 문 올라가는 소리⁠, 민석이 누구하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서민영이라는 사람이 서장님한테 서류를 보냈다⁠. 탄원서까지 붙여서⁠. 대기 풀렸다⁠. 내일 아침 여덟 시 교대다⁠.⁠”

유채는 휠체어 손잡이를 쥔 채 멈췄다⁠. 할머니가 고개를 뒤로 젖혀 유채를 올려다보았다⁠.

“⁠팀장님⁠.⁠”

“⁠울지 마라⁠. 무전에 우는 소리 들어가면 서장님이 경위서 쓰라고 한다⁠.⁠”

“⁠안 울어요⁠.⁠”

“⁠민석이 바꿔 줄까⁠?⁠”

바꿔 달라고 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바뀌었다⁠.

“⁠선배⁠, 선배 물통 제가 일주일 썼습니다⁠. 뚜껑에 이빨 자국 난 거 제가 낸 거 아닙니다⁠. 원래 있었습니다⁠.⁠”

“⁠나민석⁠.⁠”

“⁠네⁠.⁠”

“⁠내 물통 뚜껑에 이빨 자국 없었어⁠.⁠”

“⁠내일 새 걸로 사 놓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유채는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었다⁠. 출동하기 좋은 날도⁠, 출동이 없을 날도 아니었다⁠. 그냥 맑았다⁠.

“⁠남조선 소방서는 물통도 나눠 쓰니⁠?⁠”

할머니가 물었다⁠.

“⁠안 나눠 써요⁠. 몰래 쓰는 거예요⁠.⁠”

“⁠아까 손은 어땠니⁠?⁠”

“⁠뜨거웠어요⁠.⁠”

“⁠영수 오라비 손도 뜨거웠다⁠. 대동강 얼음 위에서도 뜨거웠다⁠.⁠”

할머니가 무릎 담요를 끌어 올렸다⁠.

“⁠저 집 남자들은 손만 뜨겁고 입은 무겁다⁠.⁠”

“⁠입도 뜨거워요⁠. 세 시 십 분에 보재요⁠.⁠”

“⁠세 시 십 분이 뭐냐⁠?⁠”

“⁠자는 시간이요⁠.⁠”

할머니가 혀를 찼다⁠.

“⁠할미는 새벽 세 시면 화장실 간다⁠. 일어난 김에 너 잘 자나 들여다보마⁠. 깨우지는 않으마⁠.⁠”

“⁠할머니⁠, 들여다보면 깨요⁠.⁠”

“⁠그럼 코 고는지만 듣고 가마⁠.⁠”

유채는 웃다가 휠체어 바퀴를 돌부리에 부딪쳤다⁠. 할머니가 손잡이를 탁 쳤다⁠. 소방관이 사람 하나 못 민다고⁠, 남조선 소방서 걱정된다고 했다⁠.

리광혁은 할아버지를 승합차 뒷좌석에 눕혔다⁠. 철민이 담요를 덮었다⁠. 할아버지는 사진과 털실 뭉치를 가슴에 안고 눈을 감았다⁠. 털모자의 빨간 귀덮개가 담요 위로 삐져나와 있었다⁠. 할머니가 휠체어에서 일어나려다 유채에게 붙잡혀 손만 흔들었다⁠. 할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내렸다⁠.

“⁠순아⁠.⁠”

할아버지가 눈을 감은 채 불렀다⁠. 할머니가 휠체어 팔걸이를 쥐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왜⁠, 오라비⁠.⁠”

“⁠모자 고맙다⁠. 귀가 안 시렵다⁠.⁠”

“⁠오월에 귀가 왜 시려⁠? 여름에도 쓰고 다녀라⁠. 땀띠 나도 쓰고 다녀⁠.⁠”

“⁠그러마⁠.⁠”

할아버지는 대답하고 털모자 귀덮개를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할머니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일흔여덟 해 만에 만나 나눈 마지막 말이 땀띠였다⁠. 유채는 할머니 어깨를 감쌌다⁠. 할머니 어깨가 생각보다 작았다⁠. 할머니가 유채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철민이 차 문을 닫으며 광혁 옆으로 붙었다⁠.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췄다⁠.

“⁠하사님⁠, 남쪽 여자 손 어땠습네까⁠?⁠”

“⁠뜨거웠다⁠.⁠”

“⁠또요⁠?⁠”

“⁠냄새가 났다⁠.⁠”

“⁠무슨 냄새입네까⁠?⁠”

“⁠소방서 비누⁠.⁠”

철민은 무슨 비누인지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다가 니스워더웨이이⁠, 하고 중얼거렸다⁠. 광혁은 철민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쳤다⁠. 철민이 웃었다⁠.

창익이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차창을 내리고 처음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오월 햇빛 속으로 풀려 나갔다⁠.

광혁은 조수석 문을 열다가 돌아보았다⁠. 콘크리트 턱 너머 남쪽 땅에 유채가 서 있었다⁠. 주황 줄 두른 남색 활동복⁠, 하나로 묶은 갈색 머리⁠, 햇볕에 그을린 얼굴⁠. 옆에 할머니의 휠체어가 있었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민영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었다⁠.

광혁은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 셋을 폈다⁠.

유채가 웃었다⁠.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손가락 열 개를 활짝 폈다⁠. 오월 햇빛이 열 손가락 사이로 쏟아졌다⁠. 할머니가 휠체어에서 유채의 손을 올려다보다가 혀를 찼다⁠. 광혁은 손가락 셋을 편 채로 차에 올랐다⁠. 차가 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까지⁠, 콘크리트 턱 너머의 열 손가락은 내려가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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