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23자)

빈 바닷가

꿈에서 만나는 남녀북남 · 기담오

강유채는 모래가 차가운 것부터 알았다⁠. 5월 5일 새벽 세 시 십 분이었다⁠. 발바닥에 닿는 모래가 젖은 시멘트처럼 식어 있었다⁠. 물은 발목까지 왔지만 미지근하지 않았다⁠. 하늘 끝 분홍빛도 엷었다⁠.

철조망 건너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채는 철조망 앞에서 기다렸다⁠. 정강이 높이의 쇠줄이 물속에서 가만히 있었다⁠. 말뚝을 손가락으로 한 번 두드렸다⁠. 못 알아들은 말이 나왔을 때 하던 신호였다⁠. 대답하는 손가락은 없었다⁠. 두 번 두드렸다⁠. 세 번⁠.

“⁠세 시 십 분에 안 오면⁠, 다음 날도 세 시 십 분⁠.⁠”

유채는 소리 내어 말했다⁠. 말이 물 위로 굴러가다 사라졌다⁠.

깨어 보니 다섯 시 사십 분이었다⁠. 전극을 떼는 손이 떨렸다⁠. 요원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유채의 얼굴을 보고 「⁠확인했습니다⁠」를 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5월 6일에도 바닷가는 비어 있었다⁠. 5월 7일에도⁠. 유채는 사흘째 밤에 철조망을 따라 바다 쪽으로 걸었다⁠. 물이 정강이에 닿고 무릎에 닿았다⁠. 허리에 닿자 다리가 멈췄다⁠. 작년 장마철 한강의 누런 물이 눈앞에 덮쳐 왔다⁠. 미끄러지던 손목⁠,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체온⁠. 유채는 허리까지 오는 물속에서 한참 서 있다가 뒷걸음질로 나왔다⁠. 건너편 모래에는 발자국 하나 없었다⁠.

*

5월 8일 오후⁠, 차장이 안가에 왔다⁠. 이번에는 사탕 그릇에 손을 대지 않았다⁠. 민영이 뒤따라 들어왔다⁠. 민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차장은 소파에 앉지 않고 서류 한 장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중국을 거쳐서 저쪽 연락이 왔어요⁠. 짧아요⁠. 읽어 볼게요⁠.⁠”

차장은 돋보기를 걸치지 않고 읽었다⁠. 이미 몇 번 읽은 목소리였다⁠.

“⁠남쪽 전령이 말을 바꿨다⁠. 이쪽 전령 하나를 가뒀다⁠. 줄은 당분간 닫는다⁠. 서덕환에 관한 소식은 이것으로 끝이다⁠.⁠”

민영의 볼펜이 손가락 사이에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볼펜이 굴러서 소파 밑으로 들어갔다⁠. 민영은 볼펜을 줍지 않았다⁠.

차장이 유채를 보았다⁠.

“⁠말을 바꿨다⁠. 무슨 뜻일까요⁠, 강 소방장⁠?⁠”

유채는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일어나야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일어났다⁠.

“⁠셋째 줄을 뺐어요⁠. 손전등 줄이요⁠. 제가 뺐어요⁠.⁠”

거실이 조용해졌다⁠. 냉장고 모터가 웅웅거렸다⁠. 요원이 노트북 뒤에서 숨을 멈췄다⁠.

“⁠그쪽 전령은 몰랐어요⁠. 저 혼자 뺐어요⁠. 그 사람은 제가 뺐다는 것도 몰랐어요⁠.⁠”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었다⁠. 광혁은 알았다⁠. 철조망이 목까지 올라오는 것을 광혁도 보았다⁠. 여기에는 철조망이 없었다⁠. 유채의 귀만 뜨거워졌다⁠.

차장은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서류를 반으로 접었다⁠.

“⁠소방장이 그 줄을 뺀 덕에 뭐가 달라졌는지 아세요⁠? 세 사람은 어차피 텔레비전에서 같은 말을 했어요⁠. 저쪽은 그 군인을 찾아냈고⁠, 이제 우리가 말을 바꿔 보내는 나라라고 생각해요⁠. 선원 다섯은 언제 돌아올지 몰라요⁠. 그리고 서 담당관 아버지 소식은 끝났어요⁠.⁠”

“⁠압니다⁠.⁠”

“⁠아는 사람이 그런 일을 했어요⁠?⁠”

유채는 대답하지 못했다⁠. 차장은 서류를 서류 가방에 넣고 일어났다⁠.

“⁠오늘부로 이 숙소에서 나가요⁠. 소방서에는 내가 연락하겠어요⁠. 북쪽과 연락한 일은 법대로 검토할 거예요⁠. 소방장 혼자 정할 일을 소방장 혼자 정했으니⁠, 이제는 우리가 정할게요⁠.⁠”

차장이 현관으로 나갔다⁠. 요원이 따라 나갔다⁠. 문이 닫혔다⁠.

*

거실에 민영과 유채만 남았다⁠. 민영은 소파 앞에 쪼그려 앉아 소파 밑을 들여다보았다⁠. 팔을 뻗어 볼펜을 더듬어 찾았다⁠. 볼펜을 쥐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담당관님⁠.⁠”

“⁠말 시키지 마세요⁠.⁠”

민영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져 있었다⁠. 민영은 볼펜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코트 자락이 바닥에 펼쳐졌다⁠.

“⁠스물아홉 해 만에 살아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술 마시면 제 이름을 부른대요⁠. 그 말을 듣고 나서 저는 밤마다 그 말만 생각했어요⁠. 다음에는 무슨 말이 올까⁠. 아버지가 무슨 술을 드시나⁠. 아직 담배를 피우시나⁠. 그 줄이 끊겼어요⁠. 소방장님이 연필로 두 번 그은 줄 때문에⁠.⁠”

“⁠담당관님⁠, 그 사람 좀 구해 주세요⁠.⁠”

민영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

“⁠제가요⁠? 어떻게요⁠? 저는 우리 아버지도 못 구했어요⁠. 스물아홉 해 동안 연안부두에 나가기만 했어요⁠.⁠”

“⁠그래도 담당관님은 줄을 아시잖아요⁠. 저쪽 소좌를 아시잖아요⁠.⁠”

“⁠소방장님이 그 줄을 끊었어요⁠.⁠”

민영은 볼펜을 한 번 눌렀다⁠. 딸깍⁠. 일어나서 코트를 털었다⁠. 현관까지 걸어가 문을 열어 주었다⁠.

“⁠나가 주세요⁠. 짐은 요원이 보내 드릴게요⁠.⁠”

유채는 신발을 신었다⁠. 문지방을 넘다가 돌아보았다⁠. 민영은 문을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민영의 손에 쥔 박하사탕이 껍질째 부서져 있었다⁠. 하얀 가루가 손가락 사이로 조금씩 떨어졌다⁠. 민영은 가루를 털지 않았다⁠.

*

5월 9일 아침⁠, 유채는 마포 소방서 차고 앞에 서 있었다⁠. 활동복을 입지 않고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채였다⁠. 직위가 정리될 때까지 구조대에서 빠져 행정 부서로 간다고 했다⁠. 서류에는 「⁠대기⁠」라고만 적혀 있었다⁠.

팀장이 사물함 정리한 상자를 들고 나왔다⁠. 상자 맨 위에 헬멧이 얹혀 있었다⁠. 헬멧 옆에 붙은 이름 스티커가 반쯤 떨어져 있었다⁠. 팀장은 상자를 유채 품에 안기지 않고 차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헬멧은 두고 가⁠.⁠”

“⁠다른 사람 써야죠⁠.⁠”

“⁠다른 사람 머리가 니 머리만 하냐⁠. 니 대가리 맞는 헬멧 찾느라 내가 삼 년을 고생했다⁠.⁠”

민석이 펌프차 뒤에서 나왔다⁠. 눈이 부어 있었다⁠. 민석은 유채 앞에 와서 경례를 붙이려다 말고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선배님⁠, 저 매칭됐어요⁠.⁠”

“⁠진짜⁠?⁠”

“⁠이상을 다 지웠더니 됐어요⁠. 선배님 덕분이에요⁠.⁠”

유채는 웃다가 목이 메었다⁠. 팀장이 헛기침을 하더니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탄원서였다⁠. 맨 아래에 구조대원 열네 명의 이름과 서명이 있었다⁠. 맨 위 칸이 팀장⁠, 맨 아래 칸이 민석이었다⁠. 민석은 서명을 너무 크게 해서 칸을 넘어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 근데 니가 사람 살리려고 한 짓이라는 건 알아⁠. 구조대는 그거면 된다⁠.⁠”

“⁠팀장님⁠.⁠”

“⁠내근 가서 개그 연습 좀 해 와라⁠. 돌아오면 내 개그 받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 민석이는 이제 연애한다고 안 웃어 줘⁠.⁠”

유채는 상자를 안아 들다가 팀장을 보았다⁠.

“⁠팀장님⁠, 저 작년 한강 이후로 가슴까지 오는 물에 못 들어가잖아요⁠.⁠”

“⁠알지⁠.⁠”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요⁠?⁠”

팀장은 헬멧을 손바닥으로 툭툭 털었다⁠. 대답을 고르는 동안 헬멧만 털었다⁠.

“⁠들어갈 일이 생기면 들어가⁠. 사람은 다 그렇게 들어가⁠. 처음에도 너 그렇게 들어갔어⁠. 무서워서 안 들어가는 거하고 못 들어가는 거는 달라⁠. 너는 아직 들어갈 일을 못 만난 거야⁠.⁠”

“⁠그게 아재 개그예요⁠, 진담이에요⁠?⁠”

“⁠둘 다야⁠. 내 개그는 원래 진담이 반이다⁠.⁠”

민석이 옆에서 “⁠나머지 반은 썰렁함이에요⁠” 하고 끼어들었다가 팀장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

망원동 할머니 집에 들어서자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 있었다⁠. 녹두는 갈고 있지 않았다⁠. 텔레비전도 켜 놓지 않았다⁠. 할머니는 유채가 안고 온 상자를 한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쫓겨났냐⁠.⁠”

“⁠응⁠.⁠”

“⁠오라비 일 때문이냐⁠.⁠”

“⁠아니⁠. 내가 말을 하나 빼서⁠.⁠”

할머니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마루를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렸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유채가 옆에 앉자 할머니가 유채의 손을 잡았다⁠. 마른 손이 생각보다 힘이 셌다⁠.

“⁠그 집 손자는 어떻게 됐냐⁠?⁠”

“⁠몰라⁠. 갇혔대⁠. 꿈에 안 와⁠.⁠”

할머니는 유채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마당 수돗가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내가 간다⁠.⁠”

“⁠어딜⁠?⁠”

“⁠오라비한테⁠. 판문점이든 어디든⁠. 나라가 모른 척하면 내가 휠체어 타고 간다⁠. 구십 먹은 늙은이를 막는 나라는 욕먹는다⁠.⁠”

“⁠할머니⁠,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일흔여덟 해 기다린 것보다는 쉽다⁠.⁠”

할머니는 유채의 손등을 엄지로 쓸었다⁠. 그러다 아주 작게 말했다⁠.

“⁠오라비라고 다 피붙이냐⁠.⁠”

유채는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마당만 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만나서 말한다⁠. 오라비 앞에서⁠. 오라비 앞에서 해야 할 말이다⁠.⁠”

할머니는 더 말하지 않았다⁠. 유채가 몇 번을 물어도 마당만 보았다⁠. 수돗가의 물방울이 고무 대야 위에 떨어져 동그랗게 퍼졌다⁠.

*

5월 10일 저녁⁠, 형광 연두색 등산복이 망원동 골목에 나타났다⁠. 민영의 요원이었다⁠. 요원은 안가에 두고 온 유채의 짐 가방을 끌고 와서 대문 앞에서 한참 초인종을 찾았다⁠. 초인종은 대문 기둥에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할머니가 먼저 대문을 열었다⁠.

“⁠누구냐⁠?⁠”

“⁠강유채 소방장님 짐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니가 우리 손녀 가둬 놨던 놈이냐⁠?⁠”

“⁠가둔 것은 아니고 모셨습니다⁠.⁠”

할머니는 요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마루로 끌고 들어가 녹두지짐 한 접시를 내밀었다⁠. 요원은 사양하다가 할머니의 눈빛에 지짐을 집었다⁠. 한 입 먹고 눈이 커졌다⁠.

“⁠맛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뭘 확인해⁠?⁠”

“⁠맛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할머니가 처음으로 웃었다⁠. 요원은 지짐을 세 장 먹고 일어나다가 유채를 마당으로 불러냈다⁠. 목소리를 낮췄다⁠.

“⁠보고드릴 의무는 없는 것입니다만⁠, 담당관님이 밤마다 세 시 십 분에 깨어 계십니다⁠. 숙소 거실에서 불을 끄고 앉아 계십니다⁠. 아무도 안 자는데 왜 깨어 계신지는 저도 모릅니다⁠.⁠”

요원은 할 말만 하고 짐 가방을 마루에 올려 둔 뒤 골목으로 사라졌다⁠. 등산복의 형광 연두색이 골목 끝에서 오래 보였다⁠.

유채는 5월 10일 밤부터 알람을 여러 개 맞췄다⁠. 광혁이 시각을 바꿨을 수도 있었다⁠. 한 시 반⁠, 세 시 십 분⁠, 네 시⁠. 알람이 울릴 때마다 눈을 감았고⁠, 눈을 감을 때마다 바닷가는 비어 있었다⁠. 새벽 네 시 알람에 할머니가 벽을 두드렸다⁠.

“⁠니 휴대폰이 닭이냐⁠! 밤새 울어⁠!⁠”

“⁠미안⁠, 할머니⁠.⁠”

“⁠미안하면 한 번에 자라⁠. 오라비 손자가 올 때 되면 온다⁠. 그 집 사람들은 늦게 와도 꼭 온다⁠.⁠”

*

5월 12일 새벽 세 시 십 분⁠, 유채는 할머니 방 돌침대 위에서 눈을 감았다⁠. 여드레째 밤이었다⁠. 발바닥에 모래가 닿았다⁠. 차가웠다⁠.

바닷가는 비어 있었다⁠. 유채는 철조망이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걸어가다 멈췄다⁠. 철조망이 없었다⁠.

말뚝도 쇠줄도 없었다⁠. 모래밭에서 바다 끝까지 이어지던 줄이 통째로 사라지고⁠, 물만 발목에서 찰랑거렸다⁠. 유채는 쇠줄이 있던 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물속에서 손가락이 모래만 쓸었다⁠. 고개를 들자 하늘 끝 구름 위에 떠 있던 작은 초소도 보이지 않았다⁠. 빨간 소방서 지붕만 혼자 떠 있었다⁠.

유채는 철조망이 있던 자리를 넘어 건너편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처음 밟아 보는 건너편 모래였다⁠. 차가웠다⁠. 발자국이 하나 찍혔다⁠. 유채는 제 발자국을 내려다보았다⁠. 바닷가 전체에 찍힌 발자국은 유채의 발자국 하나뿐이었다⁠. 물이 밀려와 발자국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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