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427자)

노란 모자를 빼앗긴 새벽

용왕님 단골 경매사 · 석다감

2028년 1월 6일 목요일 새벽 영 시 반⁠, 노량진수산시장 하역장에 눈발이 날렸다⁠. 트럭 짐칸 위에 쌓인 눈이 지게차가 지나갈 때마다 바닥으로 쏟아졌다⁠. 팔용은 고무장화로 눈 섞인 물을 밟으며 경매장으로 걸었다⁠. 노란 모자 위에 눈이 내려앉았다가 녹았다⁠.

3번 자리 앞에서 변두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띠를 묶고 염주를 걸었는데⁠, 염주 알을 굴리는 손이 빨랐다⁠.

“⁠형님⁠, 소문 들었어요⁠. 오늘 용왕님 손 안 받으신다고⁠. 상무님이 사무실에서 자고 있어요⁠. 슬리퍼 신고⁠.⁠”

“⁠누가 그래⁠?⁠”

“⁠형님 얼굴이요⁠. 어제부터 얼굴에 쓰여 있어요⁠.⁠”

팔용은 경매대 위에 볼펜을 내려놓았다⁠. 몸통에 「⁠강릉해양경찰서⁠」 글씨가 찍힌 볼펜이었다⁠.

“⁠두만아⁠, 너는 손 들어라⁠.⁠”

“⁠네⁠?⁠”

“⁠어르신이랑 약속했잖냐⁠. 끝까지 손 들겠다고⁠. 너는 네 약속 지켜⁠. 나는 내 걸 지킨다⁠.⁠”

두만이 염주를 쥐었다⁠. “⁠형님⁠, 형님이 안 받으면 제가 드는 손은 뭐가 돼요⁠?⁠”

“⁠안 받는 손이 되지⁠.⁠”

“⁠그게 제일 서러운 손이에요⁠, 형님⁠. 경매장에서⁠.⁠”

*

세 시⁠, 3번 자리는 사람으로 꽉 찼다⁠. 설 대목을 삼 주 앞두고 출하자들이 물량을 쏟아부었다⁠. 통영 참돔 쉰 상자⁠, 완도 광어 서른 상자⁠, 주문진 방어 스무 상자⁠. 전광판에 출하자 이름이 줄줄이 떴다⁠. 맨 앞 출입선 바로 밖에 통영 양식장 사장이 직접 와 서 있었다⁠. 예순 언저리에 금테 안경을 쓴 사내로⁠, 세 배 값이 뜨는 걸 제 눈으로 보러 밤새 차를 몰고 왔다고 했다⁠.

나무 의자에 용왕이 앉았다⁠. 은빛 수염을 무릎에 모으고⁠, 진주를 굴렸다⁠. 오늘은 구경꾼들 휴대전화보다 법인 직원들 눈이 더 많았다⁠.

팔용이 볼펜을 쥔 손을 들었다⁠. 호창이 경매장 천장으로 올라갔다⁠.

“⁠통영 참돔 다섯 상자⁠, 들어갑니다⁠, 이만⁠, 이만오⁠, 삼만⁠.⁠”

17번이 손을 폈다⁠. 다른 중도매인 둘이 손을 폈다⁠. 나무 의자에서 손가락 하나가 올라왔고⁠, 두만이 손을 감싸 쥐고 손가락을 폈다⁠. 남보다 하나 더⁠.

팔용은 두만의 손을 보았다⁠. 보고⁠, 지나갔다⁠.

“⁠삼만⁠, 17번 삼만⁠.⁠”

두만이 손을 더 높이 들었다⁠. “⁠형님⁠, 32번이요⁠! 32번⁠!⁠”

“⁠32번 손은 안 받습니다⁠.⁠”

경매장이 술렁였다⁠. 용왕이 손가락을 조금 더 높이 들었다⁠. 형광등이 깜박였다⁠. 수조 물이 출렁여 바닥으로 넘쳤다⁠. 젖은 바닥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고⁠, 그림자 속에서 푸른 비늘이 꿈틀거렸다⁠. 구경꾼 몇이 뒤로 물러났다⁠.

“⁠어르신 손은 오늘부터 안 받습니다⁠.⁠” 팔용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제일 높은 손이라도 안 받습니다⁠.⁠”

“⁠그건 네 규칙이 아니다⁠.⁠” 용왕이 말했다⁠.

“⁠압니다⁠. 오늘 제가 깹니다⁠.⁠”

“⁠그럼 경매가 아니지⁠!⁠”

통영 양식장 사장이 출입선을 넘어 들어왔다⁠. 법인 직원이 붙잡았지만 뿌리쳤다⁠. 금테 안경 너머 눈이 벌겠다⁠.

“⁠경매사 양반⁠, 출하자는 제일 높은 값을 받을 권리가 있어요⁠. 내가 이 참돔 두 해 키웠어⁠. 사료값이 작년보다 삼십 퍼센트 올랐어⁠. 저 노인이 세 배 준다는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안 받아요⁠?⁠”

“⁠이 고기가 바다로 가면 동해 그물이 빕니다⁠.⁠”

“⁠동해 그물이 내 사료값 내 줘요⁠? 통영은 통영 사정이 있어⁠.⁠” 사장이 전광판을 가리켰다⁠. “⁠저기 내 이름 떠 있잖아요⁠. 내 이름 걸고 올린 고기예요⁠. 경매사는 값을 부르는 사람이지 손님을 고르는 사람이 아니야⁠.⁠”

팔용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장의 말이 맞았다⁠. 서른 해 동안 팔용이 입에 달고 산 말이었다⁠.

“⁠경매 중단합니다⁠.⁠” 팔용이 말했다⁠. “⁠3번 자리 활어⁠, 오늘 유찰입니다⁠.⁠”

경매장 뒤편에 몰려 있던 수조 상인들이 한꺼번에 떠들기 시작했다⁠. 광어 수조 사내가 제일 먼저 소리쳤다⁠.

“⁠유찰이면 우리는 뭐 사⁠? 용왕님이 사 가나 경매사가 안 파나⁠, 내 수조는 똑같이 비어⁠!⁠”

“⁠그래도 바다로는 안 가잖아⁠.⁠” 우럭 수조 아주머니가 받았다⁠. “⁠여기 그대로 있잖아⁠. 상자 안에⁠.⁠”

“⁠상자 안에 있으면 뭐 해⁠? 내 수조에 없는데⁠.⁠”

“⁠내일 다시 부르겠지⁠. 오늘만 참아⁠.⁠”

“⁠나는 오늘 손님이 있어⁠! 내일 손님은 내일 와⁠!⁠”

피영애가 두 사람 사이에 뜰채를 쑥 내밀어 입을 막았다⁠. 영애는 경매대 위의 팔용을 올려다보았다⁠. 상인회 총회에서 팔용을 바꾸자고 마이크를 잡았던 사람이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애의 눈길이 팔용의 손에 머물렀다⁠. 볼펜을 쥔 손이 경매대 끝을 붙잡고 있었다⁠.

*

사무실 문이 열리고 기창술이 슬리퍼를 끌고 뛰어나왔다⁠. 잠옷 위에 법인 점퍼를 걸쳤고⁠, 머리 한쪽이 베개에 눌려 솟아 있었다⁠.

“⁠남궁 경매사⁠, 지금 뭐 하는 거야⁠?⁠”

“⁠경매 중단했습니다⁠.⁠”

“⁠제일 높은 응찰을 거부하고 유찰을 때려⁠? 그건 경매가 아니야⁠. 그냥 당신 마음이지⁠.⁠” 기창술의 목소리가 경매장을 울렸다⁠. “⁠법인이 왜 경매사를 둬⁠? 마음대로 하지 말라고 둬⁠. 출하자가 우리를 왜 믿어⁠? 경매사가 손님 안 고르니까 믿어⁠.⁠”

팔용은 기창술을 보았다⁠. 기창술의 말도 맞았다⁠. 경매장에서 맞는 말이 한꺼번에 셋이 나왔다⁠. 통영 사장 말⁠, 기창술 말⁠, 그리고 서른 해 전 팔용이 처음 노란 모자를 받던 날 들은 말⁠.

“⁠상무님 말씀 맞습니다⁠.⁠”

“⁠맞으면 불러⁠.⁠”

“⁠못 부릅니다⁠.⁠”

기창술이 팔용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팔용의 노란 모자를 집어 들었다⁠. 모자가 벗겨지자 반백 머리가 납작하게 눌린 자국 그대로 드러났다⁠. 경매장의 수십 개 눈이 납작한 머리를 보았다⁠.

“⁠오늘부로 경매에서 빠져⁠. 징계위 열 거야⁠. 정년 이 년 남은 거⁠, 안 남을 수도 있어⁠.⁠” 기창술이 모자를 들고 막내 경매사를 손짓했다⁠. “⁠막내⁠, 와서 불러⁠. 지금⁠.⁠”

막내가 쭈뼛쭈뼛 경매대로 올라왔다⁠. 기창술이 막내 머리에 노란 모자를 씌웠다⁠. 모자가 커서 눈썹까지 내려왔다⁠.

막내가 호창을 시작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무 의자의 용왕은 손을 무릎에 내렸다⁠. 두만이 용왕을 돌아보았다⁠. 용왕은 고개를 저었다⁠. 두만이 손을 내렸다⁠.

참돔이 17번에게 넘어갔다⁠. 용왕이 오기 전 값이었다⁠. 광어는 수조 상인들이 단골로 쓰는 21번 중도매인이 가져갔다⁠. 피영애가 경매장 뒤에서 21번의 손을 보고 주먹을 쥐었다⁠. 영애의 수조에 3주 만에 광어가 들어갈 참이었다⁠. 영애는 주먹을 쥔 채로 팔용의 맨머리를 보았고⁠, 주먹을 풀었다⁠.

통영 사장은 전광판에 뜬 낙찰가를 보고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

다섯 시 반⁠, 한강 둔치는 아직 어두웠다⁠. 노량진에서 한강대교 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강변 자전거길 옆에 벤치가 있었다⁠. 눈은 그쳤고⁠, 강물이 검게 흘렀다⁠. 팔용은 벤치에 앉아 맨머리에 손을 얹었다⁠. 서른 해 동안 새벽에 모자를 안 쓴 날이 손에 꼽혔다⁠. 머리가 시렸다⁠.

물 위로 은빛이 반짝였다⁠. 용왕이 강물 위를 걸어 둔치로 올라왔다⁠. 맨발이었는데 발이 젖지 않았다⁠. 용왕은 팔용 옆에 앉았다⁠. 벤치가 삐걱 소리를 냈다⁠.

“⁠네가 네 규칙을 깼구나⁠.⁠”

“⁠네⁠.⁠”

“⁠모자를 잃었다⁠.⁠”

“⁠네⁠.⁠”

용왕이 수염을 쓸었다⁠. “⁠서른 해 너를 보면서 네가 규칙을 깨는 날을 못 봤다⁠. 오늘 처음 봤다⁠. 깨는 손도 바르더구나⁠.⁠”

“⁠칭찬입니까⁠?⁠”

“⁠바다에서는 칭찬이다⁠.⁠”

강 건너 빌딩 불빛이 물 위에 길게 늘어졌다⁠. 용왕은 한동안 강물을 보았다⁠. 강물에는 고기 냄새가 없었다⁠.

“⁠어르신⁠, 진짜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팔용이 말했다⁠. “⁠사람이 많이 잡아서 바다가 빈 거면⁠, 어르신이 사서 돌려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세종에서 그래프 보실 때 어르신 얼굴이 그게 아니었습니다⁠.⁠”

용왕이 오래 말이 없었다⁠. 둔치 위로 첫 자전거가 지나갔다⁠.

“⁠명태는 내 그물에 걸린 적이 없다⁠.⁠” 용왕이 말했다⁠. “⁠사람 그물이 줄어든 뒤에도 명태는 안 돌아왔다⁠. 물이 데워져서 북으로 갔다⁠. 차가운 물을 따라⁠. 오징어도 그렇다⁠. 나는 동해의 임자인데 동해 물을 식힐 줄 모른다⁠. 내 손은 물을 못 식힌다⁠.⁠”

용왕이 오른손을 펴 보였다⁠. 손바닥이 사람 손과 같았다⁠. 주름이 많았다⁠.

“⁠바다에 남은 고기라도 붙들어야 했다⁠. 사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진주는 바다에 많으니까⁠.⁠”

“⁠사도 물은 안 식습니다⁠.⁠”

“⁠안다⁠. 세종에서 알았다⁠.⁠” 용왕이 손을 거두었다⁠. “⁠그래도 멈추면 아무것도 안 한 것이다⁠.⁠”

팔용은 맨머리를 쓸었다⁠. 용왕의 말에 대답할 말을 몰랐다⁠. 서른 해 경매장에서 값을 부르는 법은 배웠는데⁠, 값을 못 매기는 것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배운 적이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네가 없는 경매장에는 안 간다⁠. 바다에 가까운 경매장으로 간다⁠. 동해 위판장⁠. 거기서 사면 더 빨리 돌려보낸다⁠.⁠”

“⁠거기서 사시면 노량진에 올라올 고기가 없습니다⁠.⁠”

“⁠노량진은 네가 없지 않으냐⁠?⁠”

용왕이 일어나 강물로 걸어 들어갔다⁠. 물이 발목⁠, 무릎⁠, 허리로 차올랐다⁠. 금관이 잠기기 전에 용왕이 한 번 돌아보았다⁠.

“⁠모자는 다시 써라⁠. 맨머리는 너답지 않다⁠.⁠”

물 위에 동그란 물결이 남았다⁠. 물결이 강물에 섞여 사라졌다⁠.

*

아침 여덟 시⁠, 상도동 빌라 현관에 남자 운동화 한 켤레가 있었다⁠. 해일의 것이었다⁠. 해경 조사가 끝나고 갈 데가 없어 어젯밤 올라왔다고 난주가 말했다⁠. 해일은 어릴 때 쓰던 작은 방에서 이불을 머리까지 덮고 자고 있었다⁠. 이불 밖으로 갈라진 손등이 나와 있었다⁠.

난주가 부엌에서 국을 데우다가 팔용의 맨머리를 보았다⁠. 국자를 든 손이 멈췄다⁠.

“⁠모자 어디 갔어⁠?⁠”

“⁠상무가 가져갔다⁠.⁠”

난주는 국자를 냄비에 걸쳐 두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한참 팔용을 보았다⁠.

“⁠삼십 년 낙찰만 부르던 손이 왜 하필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봤다⁠.⁠”

“⁠뭘⁠.⁠”

“⁠출하자 이름⁠.⁠” 팔용이 식탁에 「⁠강릉해양경찰서⁠」 볼펜을 내려놓았다⁠. “⁠해일이 대게 올라온 날 출하자 이름을 안 봤다⁠. 손가락만 봤다⁠.⁠”

난주가 볼펜을 보았다⁠. 볼펜을 보다가 팔용을 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고 일어나 국을 떴다⁠. 국그릇을 팔용 앞에 놓으며 한마디만 했다⁠.

“⁠2층 용왕 정식은 내일부터 빼야겠네⁠.⁠”

작은 방 문이 열리고 해일이 나왔다⁠. 아버지의 맨머리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모자요⁠.⁠”

“⁠잃었다⁠.⁠”

해일이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셋이 한 식탁에 앉은 것이 몇 해 만인지 아무도 세지 않았다⁠. 해일이 국을 한 숟갈 떴다⁠.

“⁠아버지⁠, 저 노량진에서 하역 일 해도 돼요⁠? 배 한 달 못 나가는 동안⁠. 두만 아저씨가 설 대목에 사람 모자란대요⁠.⁠”

“⁠해라⁠.⁠”

*

1월 10일 월요일 아침⁠, 2층 「⁠난주네⁠」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나왔다⁠. 화면 아래 자막이 흘렀다⁠. 「⁠노량진 용왕⁠, 주문진·속초 위판장 산지 경매에 등장⁠… 동해 활어 싹쓸이⁠」⁠. 화면에는 주문진 위판장 바닥의 나무 의자와 은빛 수염이 나왔다⁠. 산지 경매사가 땀을 흘리며 호창을 부르고 있었다⁠. 이어서 자막이 하나 더 흘렀다⁠. 「⁠대형마트 직거래 계약 어선들⁠, 계약 깨고 위판장으로⁠… “⁠세 배 주는데 누가 계약 지키나⁠”⁠」⁠.

난주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손님 없는 초장집 테이블 여덟 개 위로 형광등만 환했다⁠.

팔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저장하지 않은 번호가 떴다⁠. 받자 낯익은 목소리가 짧게 말했다⁠.

“⁠경매사님⁠, 탁세윤이에요⁠. 만나 주세요⁠. 오늘 밤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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