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553자)

진주는 카드가 안 됩니다

용왕님 단골 경매사 · 석다감

2027년 12월 6일 월요일 아침 아홉 시⁠, 도매법인 정산 창구 앞에서 변두만은 진주를 손바닥에 올린 채 줄 끝에 붙었다⁠. 앞사람이 계좌이체 확인증을 내고 나가자 두만은 진주를 창구 유리 밑 동그란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32번⁠, 참돔 대금입니다⁠.⁠”

창구 직원이 진주를 내려다보았다⁠. 안경을 고쳐 쓰고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예요⁠?⁠”

“⁠진주요⁠. 천연⁠.⁠”

“⁠진주는 안 받아요⁠.⁠”

“⁠카드는 돼요⁠?⁠”

“⁠중도매인 정산에 카드가 어디 있어요⁠? 오늘 안에 이체 안 하시면 내일 3번 자리 못 들어가세요⁠.⁠”

두만이 진주를 도로 꺼내 들고 몸을 돌렸다⁠. 의자에서 졸던 팔용과 눈이 마주쳤다⁠. 팔용은 새벽 경매를 마치고 집에 가려다 기창술 상무에게 붙잡혀 있었다⁠. 상무의 말은 짧았다⁠. 대금이 안 들어오면 낙찰이 무효가 되고⁠, 무효가 되면 세 배짜리 수수료도 없다⁠.

“⁠형님⁠, 같이 가 주세요⁠. 종로요⁠.⁠”

“⁠내가 왜⁠?⁠”

“⁠형님이 낙찰 부르셨잖아요⁠. 진주 감정사가 의심하면 형님이 증인 서 주셔야죠⁠. 제가 혼자 가서 용왕님한테 받았다고 하면 경찰 불러요⁠.⁠”

팔용은 노란 모자를 벗어 작업복 주머니에 접어 넣었다⁠. 모자를 벗자 반백 머리가 눌린 자국대로 납작했다⁠.

*

종로3가 귀금속 상가 3층⁠, 진주 감정실은 사람 둘이 들어서면 꽉 찼다⁠. 감정사는 돋보기 안경을 머리에 얹은 예순 줄의 여자였다⁠. 진주를 핀셋으로 집어 불빛에 대더니 아무 말 없이 엑스레이 기계에 넣었다⁠. 모니터에 동그란 그림자가 떴다⁠. 한가운데가 비어 있지 않고⁠, 나이테 같은 겹이 바깥까지 빽빽했다⁠.

“⁠핵이 없네⁠.⁠” 감정사가 중얼거렸다⁠. “⁠양식은 가운데 조개껍데기 구슬을 넣어서 키워요⁠. 이건 아무것도 안 넣었어⁠. 바다가 혼자 만든 거야⁠.⁠”

“⁠그럼 진짜죠⁠?⁠” 두만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진짜 중에서도 진짜⁠. 이만한 천연 진주는 해외 경매에나 나와요⁠. 어디서 났어요⁠?⁠”

두만이 팔용을 보았다⁠. 팔용은 감정실 벽의 진주 목걸이 사진을 보았다⁠.

“⁠동해 용왕님이요⁠.⁠” 두만이 말했다⁠.

“⁠요즘 다들 그렇게 말해⁠. 저번 주엔 할머니 장롱이라던 사람도 있었어⁠.⁠” 감정사가 계산기를 두드렸다⁠. 숫자를 보더니 지우고 다시 두드렸다⁠. 두 번째 숫자를 보고 감정사는 돋보기 안경을 벗었다⁠. “⁠이건 내가 사기엔 너무 크고⁠, 아는 도매상한테 넘겨 줄게요⁠. 한 알에 이 정도⁠.⁠”

감정사가 계산기를 돌려 보여 주었다⁠. 두만이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동그라미를 셌다⁠. 세 번째 자리에서 손가락이 멈췄다가 다시 처음부터 셌다⁠.

“⁠형님⁠, 참돔 마흔 상자 대금 내고도 이천만 원 넘게 남아요⁠.⁠”

“⁠그건 어르신 돈이다⁠.⁠”

“⁠당연하죠⁠. 제가 용왕님 통장 따로 만들게요⁠.⁠” 두만이 진주를 감정사 손에 놓으며 한마디 보탰다⁠. “⁠용왕님 이름으로 통장이 나오나⁠?⁠”

감정사가 도매상에게 전화를 거는 동안 두만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빚 독촉 문자였다⁠. 두만은 화면을 엎어 놓았다⁠. 오후 두 시⁠, 도매상의 돈이 두만의 계좌로 들어왔다⁠. 두만은 은행 앱으로 법인 계좌에 참돔 대금을 보냈고⁠, 보내기 단추를 누를 때 팔용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이체 완료⁠」⁠. 이체 완료 화면 다음에 두만이 몇 번 더 단추를 눌렀는지는 팔용이 보지 못했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두만의 휴대전화는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

이튿날 밤 열 시⁠, 상도동 빌라 거실에서 팔용은 해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일곱 번 가고 끊겼다가⁠, 이 분 뒤에 문자가 왔다⁠. 「⁠배 위예요⁠. 무슨 일이에요⁠?⁠」 팔용은 문자 대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해일이 받았다⁠. 엔진 소리와 바람 소리가 먼저 들렸다⁠.

“⁠밤에 무슨 배를 타⁠?⁠”

“⁠대게는 밤에 그물 놓고 새벽에 걷어요⁠. 아버지 경매는 새벽에 하고요⁠. 우리 집은 다 밤에 일해요⁠.⁠” 해일의 목소리가 바람에 끊겼다⁠. “⁠영상 봤어요⁠. 단골 잘 두셨네요⁠.⁠”

“⁠참돔은 어떠냐⁠?⁠”

“⁠배 주위를 빙빙 돌아요⁠. 그물 근처까지 왔다가 코앞에서 돌아 나가요⁠. 대게 그물에 참돔이 들 리도 없지만⁠, 들어도 안 들어와요⁠. 이상하죠⁠.⁠” 해일이 잠깐 말을 끊었다⁠. “⁠그물엔 대게도 별로 없어요⁠.⁠”

“⁠얼마나⁠?⁠”

“⁠아버지는 경매장에서 값만 부르시면 되잖아요⁠. 그물 사정까지 아실 필요는 없어요⁠.⁠”

전화가 끊겼다⁠.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난주가 고무장갑을 낀 채 거실을 들여다보았다⁠. 팔용은 휴대전화를 탁자에 엎어 놓았다⁠. 화면이 꺼지기 전에 「⁠통화 시간 1⁠:12⁠」가 떴다⁠.

“⁠걔가 당신 닮아서 말을 반만 해⁠.⁠” 난주가 말했다⁠. “⁠반은 나 닮아서 다 하고⁠.⁠”

*

12월 8일 수요일 새벽 두 시 반⁠, 3번 자리 앞에 중도매인보다 구경꾼이 많았다⁠. 휴대전화를 든 젊은이들이 경매장 출입선 밖에 줄지어 서서 맨 앞자리를 찍었다⁠. 기창술 상무가 사무실에서 가져다 놓은 바퀴 달린 가죽 의자가 비어 있었고⁠, 바로 옆에 첫날의 낡은 나무 의자가 다시 놓여 있었다⁠.

팔용은 모자를 쓰며 막내 경매사를 불렀다⁠. 경매사 자격증을 딴 지 두 해 된 서른 살이었다⁠.

“⁠오늘 3번 자리 네가 불러⁠.⁠”

“⁠선배님⁠, 오늘 용왕님 오시는 날이잖아요⁠. 저 손 떨려요⁠.⁠”

“⁠떨리면 볼펜 쥐어⁠.⁠”

세 시 정각⁠, 용왕이 출입선을 넘어 들어왔다⁠. 아무도 길을 비켜 주지 않았는데 사람들 사이가 물결처럼 갈라졌다⁠. 용왕은 가죽 의자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나무 의자에 앉았다⁠. 은빛 수염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진주 한 알을 손바닥에 굴렸다⁠. 구경꾼들 휴대전화가 일제히 위로 올라갔다⁠.

막내가 목을 가다듬고 호창을 시작했다⁠. 오늘은 참돔 서른 상자와 동해 방어 열 상자⁠, 주문진 대게 다섯 상자였다⁠. 첫 상자부터 17번이 손을 폈고⁠, 두만이 손을 폈다⁠. 용왕은 손을 무릎에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

두만이 뒤를 돌아보며 입 모양으로 물었다⁠. 어르신⁠, 안 사세요⁠?

용왕은 막내 경매사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참돔이 17번에게 낙찰되었다⁠. 첫날의 삼분의 일 값이었다⁠. 두 번째 상자도⁠, 세 번째 상자도 17번이 가져갔다⁠. 구경꾼들이 실망한 소리를 냈다⁠. 열 번째 상자가 나오기 전에 팔용이 경매대 뒤에서 나와 막내의 어깨를 쳤다⁠.

“⁠비켜 봐⁠.⁠”

팔용이 경매대에 서서 볼펜을 쥔 손을 들었다⁠. 첫 마디가 나가기도 전에 나무 의자에서 손가락 하나가 올라왔다⁠.

*

“⁠어르신⁠.⁠” 팔용은 호창을 멈추고 경매대에서 내려왔다⁠. 구경꾼들의 휴대전화가 팔용을 따라 돌았다⁠. “⁠왜 제가 부를 때만 드십니까⁠?⁠”

“⁠나는 네 손님이다⁠.⁠”

“⁠막내도 법인 경매사입니다⁠. 자격시험 1차⁠, 2차 다 붙었습니다⁠.⁠”

“⁠시험은 내가 모른다⁠. 나는 네 손을 서른 해 봤다⁠. 네 손은 값을 속이지 않는다⁠.⁠” 용왕이 수염을 쓸었다⁠. “⁠단골은 가게를 안 바꾼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더구나⁠.⁠”

“⁠그럼 제 규칙을 따르셔야 합니다⁠.⁠” 팔용이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3번 자리에서 손가락 하나는 오천 원 올린다는 뜻으로만 받겠습니다⁠. 남보다 하나 더⁠, 그런 건 없습니다⁠.⁠”

“⁠좋다⁠.⁠”

팔용이 경매대로 돌아가 호창을 이었다⁠. “⁠참돔 다섯 상자⁠, 이만⁠, 이만오⁠.⁠”

용왕이 손가락 둘을 들었다⁠. 팔용이 받았다⁠. “⁠삼만오⁠.⁠”

17번이 넷을 폈다⁠. 용왕이 손가락 다섯을 다 폈다⁠. 17번이 두 손을 폈다⁠. 용왕이 두 손을 다 폈다가⁠, 손이 모자라자 수염을 한 움큼 쥐어 머리 위로 들었다⁠.

“⁠어르신⁠, 수염은 뭡니까⁠?⁠”

“⁠열 손가락 다음은 무엇이냐⁠?⁠”

경매장이 터지듯 웃었다⁠. 두만이 용왕 옆에 쪼그려 앉아 두 손을 감싸 쥐고 보여 주었다⁠.

“⁠어르신⁠, 3번 자리에서는요⁠, 주먹 한 번이 열이에요⁠. 주먹 쥐었다 펴고 손가락 셋 펴면 열셋⁠. 그리고 이렇게 가려야 돼요⁠. 남들이 보면 따라 올라오잖아요⁠.⁠”

“⁠따라 올라오면 나는 또 올라간다⁠.⁠”

“⁠그러니까 가리시라고요⁠. 돈 아끼시라고⁠.⁠”

“⁠바다에 돈이 없는데 무엇을 아끼느냐⁠?⁠”

용왕은 두만을 흉내 내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쌌다⁠. 감싼 손 틈으로 손가락 하나가 비죽 나와 있었다⁠. 팔용은 비죽 나온 손가락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오천 원씩 올라가는 손가락이 서른 번 올라오면 십오만 원이었다⁠. 용왕은 지치지 않았다⁠. 17번이 손을 내리고 세윤을 돌아보았을 때 참돔 다섯 상자 값은 다시 첫날만큼 올라 있었다⁠.

“⁠낙찰⁠, 32번⁠.⁠”

이날 팔용이 부른 참돔 스무 상자와 방어 열 상자⁠, 대게 다섯 상자가 모두 32번으로 갔다⁠. 동해 방어와 대게를 낙찰받을 때 용왕은 손가락을 들기 전에 잠깐 눈을 감았다⁠. 상자에 붙은 출하지는 「⁠강원 주문진⁠」이었다⁠.

*

다섯 시⁠, 2층 「⁠난주네⁠」 입구에 새 종이가 붙어 있었다⁠. 난주의 굵은 매직 글씨였다⁠. 「⁠용왕 정식 — 용왕님이 안 사 간 고기로 차립니다⁠」⁠. 테이블 여덟 개가 다 찼다⁠. 구경꾼들이 1층에서 선어와 조개를 사 들고 올라와 차림비를 내고 앉았다⁠.

“⁠경매사님⁠, 오늘 매상이 저번 주 사흘 치야⁠.⁠” 난주가 쟁반을 들고 지나가며 팔용의 등을 쳤다⁠.

벽에 붙은 텔레비전에서 아침 뉴스가 나왔다⁠. 화면 아래 자막이 흘렀다⁠. 「⁠해양수산부⁠, 노량진 활어 이상 고가 낙찰 경위 파악 나서⁠」⁠. 이어 화면이 바뀌고 동해 항구가 나왔다⁠. 「⁠동해 수온 상승에 오징어 어획 급감⁠… 어민들 “⁠배 띄울수록 손해⁠”⁠」⁠.

구석 자리에서 상인회장 피영애가 회덮밥을 먹다 숟가락으로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봐⁠, 나라에서도 이상하대⁠. 내 수조는 사흘째 비었어⁠. 난주야⁠, 너 이 집 남편이 손님 다 쫓는 거 알고 장사하니⁠?⁠”

“⁠언니⁠, 손님은 늘었어⁠.⁠” 난주가 물을 따라 주었다⁠. “⁠1층이 비니까 2층이 차⁠. 세상 이치가 원래 그래⁠.⁠”

“⁠그 이치에 내 수조는 없잖아⁠.⁠”

팔용은 대꾸하지 않고 국물을 떠먹었다⁠. 국물이 짰다⁠.

*

여섯 시⁠, 하역장 끝에서 용왕의 그림자가 다시 상자를 삼켰다⁠. 구경꾼 몇이 따라 나와 휴대전화를 들었지만 화면에는 빈 스티로폼 상자만 찍혔다⁠. 용왕은 한강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동해 방어는 주문진 앞에 풀겠다⁠. 제 집에 돌아가야지⁠.⁠”

팔용이 고무장화를 끌고 하역장을 나서는데 주차장 기둥 옆에 탁세윤이 서 있었다⁠. 검은 패딩 위로 사원증이 보였고⁠, 손에는 태블릿 대신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경매사님⁠, 오늘 17번이 참돔 열 상자는 건졌어요⁠. 경매사님이 안 부르신 열 상자⁠.⁠” 세윤의 말끝이 차가웠다⁠. “⁠용왕님이 경매사님만 보고 오신다면서요⁠.⁠”

“⁠제가 오시라고 한 적 없습니다⁠.⁠”

“⁠알아요⁠. 그래서 더 문제예요⁠. 경매사님은 규칙대로 하시는데⁠, 규칙대로 하면 저 손님을 못 막아요⁠.⁠” 세윤이 서류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새솔마트 수산물 매입 방식 변경 안내⁠」⁠. “⁠1월부터 새솔은 노량진 매입을 끊습니다⁠. 동해 어민 삼천 가구랑 직거래로 갑니다⁠. 한 해 값을 미리 정해 놓고 산지에서 바로 받아요⁠. 경매를 안 거치면 용왕님 손가락도 안 닿죠⁠.⁠”

“⁠어민들이 손해 봅니다⁠. 경매에 올리면 세 배를 받는데⁠.⁠”

“⁠용왕님이 언제까지 세 배로 사 주실까요⁠? 그 손님이 떠나는 날 값은 바닥으로 떨어져요⁠. 저는 그런 걸 봤어요⁠.⁠” 세윤은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하나 더 말씀드릴게요⁠. 경매사님 아드님 배요⁠. 주문진 제7순풍호⁠.⁠”

팔용이 세윤을 보았다⁠.

“⁠저희 계약 배예요⁠. 이번 겨울 대게 계약 물량 다 못 채우면 위약금 조항도 있고요⁠. 남궁 선장님이 아버님한테 말 안 했나 봐요⁠.⁠”

세윤이 차 열쇠를 누르자 주차장 저 끝에서 흰 승합차가 삑 소리를 냈다⁠. 팔용은 볼펜을 쥔 채 서 있었다⁠. 하역장 바닥의 물기가 고무장화 밑창으로 차갑게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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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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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필제2026.11.06· 2화

    종로 감정사가 계산기 두 번 두드리고 안경 벗는 데서 웃었어요. 팔용이 자리 비우니까 용왕님이 손을 안 드는 것도 귀엽고요. 탁세윤이 직거래로 가겠다고 할 때 이야기가 확 커졌네요.

    • 석다감작가2026.11.06

      용왕님은 사람을 보고 손을 들어요. 탁세윤에게도 직거래를 고집할 이유가 있으니 둘이 다시 마주 앉는 날까지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