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673자)

가림막 안쪽

드래곤 알을 주웠더니 우리 원룸이 둥지가 되었다 · 채온유

할머니는 헬멧으로 탁희준을 치지 않았다⁠.

헬멧을 들어 올린 채 한참 서 있다가⁠, 이걸 두 손으로 탁희준의 가슴 앞에 내밀었다⁠. 탁희준이 손을 들어 받았다⁠. 받는 순간 탁희준의 손가락 끝에서 서리가 헬멧 표면을 타고 번졌다⁠. 그을음 위로 하얀 막이 앉았다⁠. 녹아 흘러내린 쪽까지 하얗게 덮였다⁠.

“⁠들어 봐⁠.⁠” 할머니가 말했다⁠. “⁠무거워⁠?⁠”

탁희준이 헬멧을 내려다봤다⁠. 마당의 형광등 빛이 하얗게 언 헬멧 위에서 미끄러졌다⁠.

“⁠가볍네요⁠.⁠”

“⁠우리 아들은 무거웠어⁠. 들것에 실려 오는데⁠, 들것 든 놈들이 넷이었어⁠.⁠” 할머니가 손을 거두지 않았다⁠. 탁희준이 헬멧을 돌려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거 가지고 가⁠. 하룻밤만⁠. 자네 집 그 차가운 방에 두고 자 봐⁠.⁠”

탁희준은 헬멧을 들고 오래 서 있었다⁠. 마당의 어느 누구도 이 남자가 그렇게 오래 말을 못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헬멧을 평상 위 보자기에 도로 내려놓았다⁠. 조심스럽게⁠, 녹은 쪽이 아래로 가게⁠. 서리 낀 헬멧이 보자기를 적셨다⁠.

“⁠오늘은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했네요⁠.⁠” 탁희준이 마당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위로금 이야기는 일요일까지 그대로입니다⁠.⁠”

탁희준이 나갔다⁠. 마당에 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보지 않았다⁠. 손을 들었던 아이 엄마가 아이를 안고 먼저 나갔다⁠. 철물점 아주머니는 남았다⁠. 남아서 내게 말했다⁠. 맹 기사⁠, 할머니 얘기는 할머니 얘기고⁠, 우리 애도 이 골목에서 자⁠. 이 말이 틀리지 않아서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평상 끝 할아버지가 일어나 할머니의 보자기를 다시 묶어 주었다⁠. 매듭을 두 번 묶었다⁠.

이날 밤 골목은 손을 내린 사람들과 끝까지 안 내린 사람들로 갈라졌다⁠. 숫자로 세면 우리 쪽이 적었다⁠.

다음 날 밤 열 시⁠, 철물점 아주머니가 연탄 창고 앞에 왔다⁠. 손전등을 들고 혼자였다⁠. 나는 창고 문 앞에 접이식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이날부터 밤에는 내가⁠, 낮에는 할머니가 거기 앉았다⁠.

“⁠한 번만 보자⁠. 뭘 무서워해야 하는지는 알고 무서워해야지⁠.⁠”

나는 문을 열어 주었다⁠. 아주머니가 손전등을 비추자 연탄 벽 너머에서 깜부가 고개를 들었다⁠. 송아지만 한 몸에 손가락 길이의 뿔 두 개⁠, 노른자 색 눈이었다⁠. 깜부는 아주머니의 손전등 빛이 눈부신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돼지 등뼈를 마저 씹었다⁠. 오도독⁠, 오도독⁠. 첫날 밤 족발 뼈를 씹던 소리가 이제 아이 팔뚝만 한 뼈에서 났다⁠.

아주머니가 손전등을 내렸다⁠. 한참 이 소리를 들었다⁠.

“⁠우리 애가 중학교 때 햄스터를 키웠어⁠. 그것도 밤에 저렇게 씹었어⁠.⁠” 아주머니가 말했다⁠. “⁠근데 햄스터는 집을 안 태워⁠.⁠”

“⁠알아요⁠.⁠”

“⁠알면 됐어⁠.⁠” 아주머니가 돌아섰다⁠. 몇 걸음 가다 말고 말했다⁠. “⁠나 내일 관리청에 전화할 거야⁠. 미리 말해 두는 거야⁠. 뒤에서 하는 거 싫으니까⁠.⁠”

이 아주머니는 정말 다음 날 전화했다⁠. 미리 말해 준 사람은 이 아주머니 하나였다⁠.

*

일요일이 지나자 탁희준은 위로금을 미리 보냈다⁠. 손을 들었던 집 열한 곳에 흑림 직원이 흰 봉투를 들고 찾아갔다⁠. 받은 집도 있고 돌려보낸 집도 있었다⁠. 받은 집 대문에는 이 주 안에 새 에어컨 실외기가 달렸다⁠. 그사이 깜부는 하루 이십 킬로그램을 먹었고⁠, 기사들이 실어 오는 고기로는 모자라 할머니가 창고 연탄 백 장을 고물상에 팔았다⁠. 깜부가 뿔로 서까래를 들이받는 소리가 하루에 몇 번씩 골목까지 울렸다⁠. 이때마다 받은 집의 창문이 닫혔다⁠. 열흘이 그렇게 갔다⁠. 나는 이 열흘 동안 탁희준을 끝낼 방법을 하나만 생각했다⁠. 가림막 안의 신고 안 한 게이트와 이걸 판 사람이었다⁠.

팔월 사일 점심때 나는 공사장 함바집에 갔다⁠.

함바집은 공사장 가림막 바로 옆⁠, 컨테이너 두 개를 붙여 만든 밥집이다⁠. 인부들이 새벽 여섯 시와 열한 시 반과 저녁 다섯 시에 밥을 먹는다⁠. 나는 거기 배달을 한 번도 안 했다⁠. 함바집은 배달을 안 한다⁠. 그래서 이 안에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아는 얼굴은 하나였다⁠. 치킨 백 마리의 밤에 구덩이 건너편 숙소 앞에서 담배를 비벼 끄던 남자⁠.

반장은 구석 자리에서 제육볶음을 먹고 있었다⁠. 나는 이 맞은편에 앉아 쇼핑백 하나를 식탁에 올렸다⁠. 찜질방 사장님에게 사정사정해서 하루 빌려 온 첫 허물이었다⁠. 쇼핑백 입구로 검은 유리 같은 꼬리 끝이 삐져나왔다⁠.

옆 식탁 인부들이 이걸 보고 웃었다⁠.

“⁠아저씨⁠, 공룡 장난감이요⁠? 애 거예요⁠?⁠”

“⁠네⁠, 애 거예요⁠.⁠”

반장은 웃지 않았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쇼핑백 안을 들여다봤다⁠. 꼬리 끝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아직도 미지근했다⁠.

“⁠그날 밤 그놈이구먼⁠.⁠”

“⁠여기 구덩이에서 나온 알에서 깼어요⁠. 흑림이 석 달 전부터 판 구덩이요⁠.⁠”

반장이 나를 오래 봤다⁠. 그러고는 왼손을 식탁 위에 올렸다⁠. 새끼손가락과 약손가락이 한 마디씩 없었다⁠.

“⁠석 달 전이 아니고 넉 달 전이여⁠. 지반 검사한다고 들어왔어⁠. 흑림이 우리 조 여섯 명한테 일당 세 배 주고 굴을 파게 했어⁠. 저 아래 파란 데로 가는 굴⁠. 얼음으로 벽 세우면서⁠. 그 얼음이 사람 손을 이렇게 만들어⁠.⁠” 반장이 손을 거뒀다⁠. “⁠나는 두 마디고 막내는 손가락 셋을 잃었어⁠. 흑림이 병원비 대고 입막음 값 줬어⁠. 막내는 그 돈으로 고향 갔고⁠.⁠”

“⁠관리청에는요⁠.⁠”

“⁠노란 띠 봤어⁠?⁠” 반장이 제육을 한 숟가락 떴다⁠. 씹지 않고 숟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신고 안 했지⁠. 신고하면 큰 데서 가져간다고⁠. 우리도 입 다물었어⁠. 일당 세 배였으니까⁠.⁠”

“⁠그 얘기⁠, 관리청 사람 앞에서 해 주실 수 있어요⁠?⁠”

반장이 대답하지 않았다⁠. 함바집 아주머니가 와서 국을 더 떠 주고 갔다⁠. 반장이 국을 들이켰다⁠.

“⁠그놈이 그날 구덩이를 내려다보는 걸 봤어⁠.⁠” 반장이 말했다⁠. “⁠그 짐승 말이여⁠. 자기 나온 데를 내려다보더라⁠. 우리 막내가 고향 갈 때 버스 창으로 공사장 내다보던 얼굴이랑 똑같었어⁠.⁠”

반장이 쇼핑백을 내 쪽으로 밀었다⁠.

“⁠오늘 밤 열한 시⁠. 숙소 앞에서 봐⁠. 굴 입구 보여 줄게⁠. 거기서 관리청 불러⁠.⁠”

*

나는 이 얘기를 강산에게 했다⁠. 이게 실수였다고 지금은 안다⁠. 당시에는 몰랐다⁠. 강산은 내 일이라면 언제나 제일 먼저 오는 놈이었고⁠, 이날 저녁에도 그랬다⁠. 짜장면 곱빼기를 사 들고 연탄 창고에 와서 깜부에게 단무지를 던져 주면서⁠, 형 오늘 뭐 해⁠, 하고 물었다⁠. 나는 반장⁠, 넉 달 전⁠, 얼음 굴⁠, 손가락⁠, 열한 시까지 다 말했다⁠.

“⁠반장님 숙소가 몇 번 컨테이너야⁠?⁠” 강산이 물었다⁠.

“⁠그건 왜⁠?⁠”

“⁠아니⁠, 그냥⁠. 형 혼자 가면 위험하잖아⁠. 내가 밖에서 망봐 줄까 해서⁠.⁠”

이 녀석 입에서 그냥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날 처음으로 강산이 이유를 지어내지 않았다⁠. 나는 이게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다⁠. 알아채지 못하고 세 번째 컨테이너라고 대답했다⁠.

강산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형⁠, 이건 진짜야⁠, 소리를 한 번도 안 했다⁠. 이 녀석은 단무지를 다 던져 주고 나서 내일 일찍 콜이 있다고 일어났다⁠. 배차 정지 먹은 놈이 무슨 콜이냐고 물었다⁠. 부평 대행으로 옮겼다고 했다⁠. 나는 그런가 보다 했다⁠.

깜부는 단무지를 싫어했다⁠. 다 뱉어 놓았다⁠. 노란 단무지가 연탄 벽 앞에 줄지어 있었다⁠.

*

밤 열한 시⁠, 가림막 틈은 열려 있었다⁠. 반장이 숙소 앞에서 담배를 물고 기다리고 있었다⁠. 반장이 손짓했다⁠. 나는 반장을 따라 구덩이 가장자리를 돌아 옆벽의 굴 입구 앞으로 갔다⁠. 흑림 상자들은 치워져 있었다⁠. 굴 입구에 얼음 벽만 남아 있었다⁠. 이 너머에서 파란빛이 새어 나왔다⁠. 숨을 쉬면 입김이 나왔다⁠. 팔월 초였다⁠.

“⁠여기여⁠. 넉 달 전에 내가 첫 삽 떴어⁠.⁠”

나는 휴대폰을 꺼내 관리청 인천 지부 상황실 번호를 눌렀다⁠. 신고 내용을 말했다⁠. 구월동 재개발 공사장 B구역⁠, 미신고 게이트⁠, 신고 안 한 채로 넉 달 동안 판 굴⁠, 이 굴을 판 사람이 옆에 있다⁠. 상황실 직원이 주소를 되묻고 확인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잠깐 말이 없었다⁠.

“⁠그 주소는 한 시간 전에 신고가 접수됐는데요⁠.⁠”

“⁠누가요⁠?⁠”

“⁠담당 과장님이 이미 현장에 계십니다⁠.⁠”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진흙을 밟는 구두 소리 둘이었다⁠. 손전등 빛이 내 얼굴에 닿았다⁠. 변연수 과장이었다⁠. 이 옆에 탁희준이 서 있었다⁠. 흰 셔츠였다⁠. 탁희준의 둘레에서 진흙이 하얗게 얼어 사각거렸다⁠.

“⁠맹수동 씨⁠. 또 뵙네요⁠.⁠” 변연수가 손전등을 내렸다⁠. 피곤한 목소리였다⁠. “⁠이 게이트는 흑림이 오늘 저녁 아홉 시에 발견해서 신고했습니다⁠. 접수 번호 나왔고요⁠. 내일 아침에 노란 띠 칠 겁니다⁠.⁠”

“⁠오늘 발견한 게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넉 달 전부터 팠어요⁠. 이분이 팠어요⁠.⁠”

반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반장의 왼손이 주머니 밖으로 나와 있었다⁠. 한 마디씩 없는 손가락이 손전등 빛에 하얗게 보였다⁠.

“⁠넉 달이여⁠. 내가 첫 삽 떴어⁠. 우리 막내 손가락 셋⁠—⁠”

“⁠반장님⁠.⁠” 탁희준이 말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넉 달 전부터 여기 계셨으면⁠, 넉 달 동안 신고 안 하신 건 반장님도 같으시죠⁠. 반장님 조 여섯 명 다요⁠. 미신고 게이트 작업 참여면 면허는 없으시니까 벌금이겠네요⁠. 한 분당⁠. 그리고 이 현장 시공사는 반장님 조랑 다시 계약 안 할 거고요⁠.⁠”

반장의 손이 주머니로 돌아갔다⁠.

“⁠막내분 고향이 진도라고 하셨죠⁠? 거기까지 관리청 사람이 진술 받으러 가야겠네요⁠.⁠”

반장이 나를 봤다⁠. 이 눈을 나는 안다⁠. 배달 사고가 나서 가게 사장과 손님 사이에 끼었을 때 내 얼굴이 그랬다⁠. 누구 편을 들어도 내 돈이 나간다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 반장이 고개를 숙였다⁠.

“⁠…석 달 전인지 넉 달 전인지는 내가 헷갈렸나 보네⁠. 나는 오늘 처음 봤어⁠. 파란 거⁠.⁠”

반장이 숙소 쪽으로 걸어갔다⁠. 담배를 꺼내 물었는데 불을 붙이지 않았다⁠. 나는 이 등을 붙잡지 못했다⁠. 붙잡으면 반장의 조 여섯 명이 같이 붙잡혔다⁠.

*

변연수가 손전등을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내 얼굴이 아니라 내 가슴께를 비췄다⁠.

“⁠하나 더 있습니다⁠. 오늘 저녁 지부 민원실에 구월동 주민분들 전화가 여러 통 왔어요⁠. 골목 연탄 창고에 게이트 생물이 있다고요⁠. 어제는 사람이 데었다고⁠.⁠” 변연수가 서류철을 옆구리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냥 말했다⁠. “⁠이 게이트가 오늘 신고됐으니까⁠, 여기서 나온 생물은 관리청이 거둡니다⁠. 내일 아침 아홉 시에 단속반이 그 창고를 엽니다⁠. 할머니께 말씀드려 주세요⁠.⁠”

“⁠거두면 흑림으로 가잖아요⁠.⁠”

“⁠인천 처리 업체가 흑림이에요⁠. 제가 정한 거 아닙니다⁠.⁠” 변연수가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봤다⁠. “⁠본청이 오기 전에 지부에서 끝내는 게 그 생물한테도 나아요⁠. 본청은 현장에서 태웁니다⁠.⁠”

탁희준과 같은 말이었다⁠. 같은 말을 두 사람이 하니까 이게 사실처럼 들렸다⁠. 나는 이게 제일 무서웠다⁠.

“⁠누가 알려 줬어요⁠?⁠” 내가 탁희준에게 물었다⁠. “⁠반장님 일⁠. 열한 시⁠.⁠”

탁희준이 가림막 쪽으로 손전등을 돌렸다⁠. 빛이 벌어진 철판 틈을 비췄다⁠.

틈 밖 가로등 아래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었다⁠. 이 옆에 강산이 헬멧을 손에 들고⁠, 한 손에 흰 봉투를 쥐고 서 있었다⁠. 손전등 빛이 닿자 강산이 봉투를 등 뒤로 감췄다⁠. 감추지 못했다⁠. 봉투 모서리가 허리 옆으로 삐져나왔다⁠.

“⁠주강산 씨가 알려 주셨어요⁠.⁠” 탁희준이 말했다⁠. “⁠빚이 좀 있으시더라고요⁠. 단톡방에서 맹수동 씨 사채 소문 낸 분이요⁠. 소문은 반만 틀렸어요⁠. 사채 쓴 사람은 맹수동 씨가 아니라 주강산 씨였거든요⁠.⁠”

강산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헬멧을 쥔 손이 떨렸다⁠. 나는 진흙을 한 걸음⁠, 두 걸음 밟으며 가림막 쪽으로 걸어갔다⁠. 강산이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도망가지도 않았다⁠. 이 녀석은 이 자리에 서서⁠, 내가 오는 걸 기다렸다⁠.

1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