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94자)

제 방이었습니다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신가랑

염다경은 혜온이 돌려 끈 차 열쇠를 다시 돌리지 않았다⁠. 앞 유리에 평창동 가로등 불빛이 번져 있었다⁠. 혜온의 무릎 위에서 크레파스 토끼가 이 빛을 받고 있었다⁠.

“⁠하루만 주세요⁠.⁠”

“⁠하루요⁠?⁠”

“⁠그 사람을 먼저 만나 볼게요⁠. 혜온 씨가 그 사람 얘기를 하기 전에⁠,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는 들어 봐야죠⁠. 혜온 씨가 지키려던 사람이잖아요⁠.⁠”

혜온은 도화지를 다시 네 번 접었다⁠. 접는 손이 느렸다⁠.

“⁠일요일 아침 열 시요⁠. 그때까지 아무 말씀 없으시면 저 기자들 불러요⁠.⁠”

*

토요일 아침 아홉 시⁠, 종로 낙원상가 2층 복도는 셔터를 반쯤 내린 가게가 많았다⁠. 기타 줄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 누군가 시험 삼아 두드리는 드럼 소리가 복도 끝에서 끝까지 울렸다⁠. 혜온이 알려 준 악기점은 복도 가장 안쪽에 있었다⁠. 간판 위에 새 종이가 붙어 있었다⁠. 「⁠임대 문의 태진개발⁠」

셔터 안에서 피아노 소리가 났다⁠. 한 음을 길게 누르고⁠, 조금 뒤 같은 음을 다시 눌렀다⁠. 두 소리가 처음엔 어긋나 웅웅거리다가 차츰 하나로 겹쳐졌다⁠.

다경은 셔터 아래로 몸을 숙여 들어갔다⁠.

마흔 줄의 남자가 벽에 붙여 세우는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른 몸에 회색 니트를 입었고⁠, 오른손에 쇠로 된 조율 해머를 쥐고 있었다⁠. 조율사가 고개를 들었다⁠. 사진 속 반쪽 얼굴의 나머지 반쪽이었다⁠.

“⁠염다경 변호사님이시죠⁠. 기사에서 봤습니다⁠.⁠”

“⁠여기 정리하시는 거예요⁠?⁠”

“⁠월요일까지 비워 달래요⁠. 이건 제가 처음 이 가게에 왔을 때 고친 피아노예요⁠. 마지막으로 소리를 맞춰 두고 가려고요⁠.⁠”

조율사는 해머를 가죽 공구 말이 위에 내려놓았다⁠. 손목 안쪽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혜온의 꽃가위 굳은살과 자리가 비슷했다⁠.

다경은 서서 말했다⁠. 시간이 없었다⁠.

“⁠혜온 씨가 내일 아침 기자회견을 열겠대요⁠. 당신 이야기를 하겠다고요⁠. 회장님이 아이를 데리고 제주로 가 버렸어요⁠. 오늘이 엄마 날인데요⁠.⁠”

조율사의 손이 공구 말이 위에서 멈췄다⁠. 한참 뒤 이 사람이 말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알아요⁠. 그래서 왔어요⁠.⁠”

“⁠혜온 씨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순간 평생 남의 비밀을 판 여자가 돼요⁠. 그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게 그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이 기자들 앞에서 말하면⁠, 그 사람 남편은 아무것도 고를 수가 없어요⁠.⁠”

조율사가 일어섰다⁠. 무릎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제가 하겠습니다⁠. 법정에서요⁠. 혜온 씨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날 저한테 말 하나 전하러 왔을 뿐이라고요⁠. 제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 이름은 안 꺼내고요⁠.⁠”

“⁠법정에서 그 방이 누구 방이었느냐고 물으면요⁠?⁠”

조율사는 피아노 건반 하나를 눌렀다⁠. 이번에는 웅웅거림 없이 깨끗한 소리가 났다⁠.

“⁠모른다고는 못 하겠죠⁠. 저는 거짓말을 못 해서 이 일을 해요⁠. 소리는 거짓말을 안 하니까요⁠.⁠”

*

토요일 오후⁠, 오피스텔 903호 창틀의 화분에 꽃이 하나 피어 있었다⁠. 작고 흰 꽃이었다⁠. 혜온은 이 앞에 서서 다경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제가 지키려던 사람을 증인석에 세우시겠다고요⁠?⁠”

“⁠제가 세우는 게 아니에요⁠. 본인이 골랐어요⁠.⁠”

“⁠그 사람이 왜요⁠?⁠”

“⁠혜온 씨가 기자들 앞에서 말하면⁠, 혜온 씨는 평생 남의 비밀을 판 사람이 된대요⁠. 그건 못 보겠대요⁠. 그리고 그 말을 법정에서 하면 기자는 못 들어와요⁠. 이혼 재판은 문을 닫고 하니까요⁠.⁠”

혜온은 한참 화분만 보았다⁠. 꽃잎 하나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휴대폰을 꺼내 어떤 번호를 눌렀다가⁠,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고 화면을 껐다⁠.

“⁠그 사람은 늘 그래요⁠. 자기가 먼저 맞으려고 해요⁠.⁠”

“⁠혜온 씨도 그렇잖아요⁠.⁠”

혜온이 웃었다⁠. 오래 웃지 않던 얼굴이라 웃음이 어색하게 걸렸다⁠.

“⁠그럼 내일 기자회견은 다른 얘기를 할게요⁠. 회장님이 사회에 돌려준다는 그 건물 앞에서요⁠.⁠”

“⁠무슨 얘기요⁠?⁠”

“⁠흙 얘기요⁠.⁠”

길두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경비 아저씨한테 연락할게요⁠! 장기 한 판 더 두기로 했거든요⁠!⁠”

*

일요일 아침 열 시⁠, 혜온의 기자회견은 서초역 오피스텔 앞이 아니라 한남동 붉은 벽돌 빌딩 앞에서 열렸다⁠. 놋쇠 현판 「⁠재단법인 태진문화재단⁠」 바로 옆에 혜온이 섰다⁠. 기자 열댓 명이 이 앞에 반원으로 섰다⁠. 다경은 한 걸음 뒤에⁠, 길두는 휴대폰을 세로로 들고 이 옆에 섰다⁠. 경비 아저씨가 경비실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회장님이 이 건물을 사회에 돌려주신다고 하셨어요⁠. 좋은 일이에요⁠.⁠”

혜온은 천천히 말했다⁠. 오늘은 화가 나서가 아니라 한 마디도 틀리지 않으려고 천천히 말했다⁠.

“⁠이 건물 옥상에 화단이 다섯 줄 있어요⁠. 그 흙을 제가 날랐어요⁠. 첫해 봄에 스무 포대씩 엘리베이터로 일곱 번 올렸어요⁠. 산수유는 제 딸이 태어난 해에 심었고요⁠. 그 옥상 덕에 이 건물 임대료가 올랐다고 아래층 카페 사장님이 말해 주셨어요⁠.⁠”

혜온이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꽃가위 굳은살⁠, 손목의 화상 자국⁠. 카메라들이 이 손을 찍었다⁠.

“⁠저는 남의 아이들 학비를 달라는 게 아니에요⁠. 제가 나른 흙값을 달라는 거예요⁠. 그 흙값으로 제 딸이랑 살 방을 얻을 거예요⁠.⁠”

기자 하나가 물었다⁠. 사진 속 남자는 누구냐고⁠. 혜온은 그쪽을 보았다⁠.

“⁠그 질문에는 오늘 대답 안 할게요⁠.⁠”

혜온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경비 아저씨가 경비실 창문 안에서 엄지를 들었다⁠. 이날 오후 기사 제목은 둘로 갈렸다⁠. 「⁠태진가 며느리 “⁠흙값 달라⁠”⁠」⁠, 그리고 「⁠장학금 앞에서 손 내민 며느리⁠」 앞의 제목이 댓글이 세 배 많았다⁠.

*

모태율은 새해 첫 월요일 아침 백상 15층 작은 상담실에서 기 부사장과 마주 앉았다⁠. 창이 없는 방이었다⁠. 탁자 위에 피고 쪽이 낸 증인신청서 사본이 놓여 있었다⁠. 증인 이름 옆에 직업이 적혀 있었다⁠. 피아노 조율사⁠.

부사장은 이 종이를 손대지 않았다⁠. 커프스단추도 만지지 않았다⁠. 부사장의 손은 무릎 위에서 바지 천을 쥐고 있었다⁠.

“⁠그 사람이 법정에 서면⁠.⁠”

“⁠부사장님 말씀을 끝까지 들으려고 왔습니다⁠. 그전에 제가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태율은 펜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저는 부사장님 편입니다⁠. 그래서 거짓 증언으로 이기게 둘 수는 없습니다⁠. 윤 여사님과 남 기사님이 법정에서 한 말⁠, 부사장님은 그게 사실이 아닌 걸 아십니다⁠.⁠”

부사장의 턱이 움직였다⁠.

“⁠아버지가⁠.⁠”

“⁠아버지는 원고가 아닙니다⁠. 원고석에 앉는 사람은 부사장님입니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는 거짓말은⁠, 그 사람이 한 거짓말이 됩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환풍구에서 바람이 새는 소리가 났다⁠. 부사장이 겨우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은 그 사람한테 그 방 얘기 물으실 거예요⁠?⁠”

“⁠안 묻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제가 안 묻는다고 다른 사람이 안 묻는 건 아닙니다⁠.⁠”

부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태율은 대표가 어젯밤 메일로 보낸 반대신문 질문지를 꺼냈다⁠. 마지막 줄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증인에게⁠, 1703호가 누구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었는지 묻는다⁠. 호텔 기록상 예약자는 피고 하혜온⁠.

“⁠호텔 기록이 바뀌었습니다⁠. 제 동생이 서명을 거부한 그 진술서⁠, 다른 직원이 대신 서명했다고 합니다⁠. 기록상 그 방은 이제 혜온 씨 방입니다⁠.⁠”

부사장의 얼굴이 하얘졌다⁠. 증인이 기록대로 대답하면 위증이었고⁠, 혜온의 외도는 기록으로 굳었다⁠. 사실대로 대답하면 부사장의 이름이 나왔다⁠. 회장은 증인이 제 사람을 지키려고 거짓말을 고를 것이라고 셈하고 있었다⁠. 이 셈이 틀리면 잃는 사람은 회장이 아니라 아들이었다⁠.

“⁠시간을 좀 주세요⁠.⁠”

“⁠목요일 오후 두 시까지입니다⁠.⁠”

*

이 주 수요일 밤 두 시⁠, 방배동 연립 부엌에서 냄비 물이 끓었다⁠. 다경이 라면 두 개를 넣었고 태율이 스프를 반만 넣었다⁠. 나머지 반을 다 넣었다⁠.

“⁠짜⁠.⁠”

“⁠라면은 짜야 돼⁠.⁠”

둘은 냄비째 식탁에 놓고 마주 앉았다⁠. 서로의 사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약속이었다⁠. 내일 오후 두 시 법정에서 다경이 세울 증인을⁠, 태율은 반대신문해야 했다⁠.

“⁠이거 끝나면 뭐 할 거야⁠?⁠”

다경이 면을 후후 불며 물었다⁠.

“⁠너 학부 사학년 기말 오답 다시 외울 거야⁠. 빠진 거 있나 보게⁠.⁠”

“⁠나는 네 넥타이 버릴 거야⁠. 녹색⁠.⁠”

“⁠그거 비싼 거야⁠.⁠”

“⁠지는 날만 매잖아⁠.⁠”

태율이 젓가락을 멈췄다⁠. 김이 둘 사이에 올라왔다⁠.

“⁠내일은 남색 맬게⁠.⁠”

“⁠내일 너 지면 안 돼⁠?⁠”

“⁠내일은 누가 이기는 날이 아니야⁠.⁠”

다경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이 약속이었고⁠, 이 약속이 처음으로 무거웠다⁠. 다경이 식탁 아래로 발을 뻗어 태율의 발등에 올렸다⁠. 맨발이었다⁠. 태율이 이 발을 피하지 않았다⁠.

*

새해 첫 목요일 오후 두 시⁠, 가정법원 3층 법정의 문이 닫혔다⁠. 이날로 잡혀 있던 변론기일이었다⁠. 다경은 증인을 법정에 직접 데려오겠다고 신청해 두었고⁠, 재판장은 이것을 받아 주었다⁠. 연말 내내 이 기일을 미루자는 원고 쪽 서면이 두 번 들어왔지만 둘 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태율은 원고석에서 증인석에 선 조율사를 보았다⁠. 회색 니트 위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양복 재킷을 걸쳤다⁠. 선서문을 읽는 목소리가 낮고 고르게 울렸다⁠. 소리를 맞추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원고석에 태율과 백상 대표⁠, 그리고 기 부사장이 앉았다⁠. 부사장은 증인석을 보지 않았다⁠. 커프스단추를 쥔 손이 흰 소매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경의 주신문은 짧았다⁠.

“⁠증인은 피고와 어떤 사이입니까⁠?⁠”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피고의 남편과 오랜 친구입니다⁠.⁠”

“⁠지난여름 1703호에서 피고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네⁠. 한 번요⁠. 피고가 제게 말을 하나 전하러 왔습니다⁠. 서울을 떠나 있으라고요⁠. 십 분쯤 있다가 갔습니다⁠.⁠”

남 기사는 두 시간이라고 했었다⁠. 재판장이 안경을 이마에 올리고 무언가를 적었다⁠.

태율이 일어섰다⁠. 남색 넥타이였다⁠.

“⁠원고 대리인⁠, 하나만 묻겠습니다⁠. 증인⁠, 피고와 연인 관계였던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태율이 앉았다⁠. 다경이 태율을 보았다⁠. 태율은 다경을 보지 않았다⁠.

이때 옆자리의 백상 대표가 일어섰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서류를 넘겼다⁠.

“⁠원고 공동 대리인⁠, 몇 가지 더 묻겠습니다⁠. 증인⁠, 그날 그 1703호는 누구 이름으로 잡혀 있던 방입니까⁠? 호텔 기록에는 피고 하혜온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조율사가 입을 다물었다⁠. 법정이 조용해졌다⁠. 환풍기 소리가 들렸다⁠. 태율은 대표를 보지 않고 원고석 끝을 보았다⁠. 부사장이 앉은 자리였다⁠. 혜온이 피고석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깍지 낀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증인⁠, 대답하세요⁠.⁠”

재판장이 말했다⁠. 조율사가 입술을 열었다⁠. 소리를 고르는 사람처럼⁠, 첫 음을 내기 전에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먼저 났다⁠.

기 부사장이 원고석에서 일어서 있었다⁠. 커프스단추 하나가 소매에서 빠져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이것을 보지 않았다⁠. 증인석의 조율사를 보았다⁠.

“⁠제 방이었습니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제 방이었습니다 ·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