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01자)

금은방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신가랑

모태율은 바닥을 굴러 제 구두 앞에서 멈춘 커프스단추를 내려다보았다⁠. 은색이었고⁠, 작은 산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태진의 표지였다⁠.

법정 안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증인석의 조율사가 입을 반쯤 연 채 서 있었다⁠. 피고석의 혜온이 맞잡은 두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다경은 왼손을 탁자 모서리에 짚은 채 굳어 있었다⁠. 백상 대표만이 서류를 쥔 손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원고⁠, 앉으십시오⁠.⁠”

대표가 낮게 말했다⁠. 부사장은 앉지 않았다⁠.

“⁠재판장님⁠, 원고 본인입니다⁠. 그 방은 제가 일 년 내내 잡아 둔 방입니다⁠. 그날 아내는 저 대신 이분에게 말을 전하러 갔습니다⁠. 아내는 바람을 피운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압니다⁠.⁠”

재판장이 안경을 천천히 벗었다⁠. 이마에 올리지 않고 손에 들었다⁠. 태율은 재판장이 안경을 벗는 것을 처음 보았다⁠.

“⁠원고 본인의 말은 조서에 남기겠습니다⁠. 그리고 이 법정에서 앞서 증언한 두 증인의 말과 지금 들은 말이 서로 다릅니다⁠. 선서하고 거짓을 말하면 위증의 벌을 받습니다⁠. 그 증인들을 세운 쪽도⁠, 그 증언을 들은 쪽도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재판장이 원고석을 보았다⁠. 태율을 보았다⁠. 태율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외도에 관한 다툼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다음 기일에 재산분할을 듣고 변론을 마치겠습니다⁠. 선고는 이월로 잡겠습니다⁠.⁠”

조율사가 증인석에서 내려왔다⁠. 원고석 앞을 지날 때 조율사와 부사장의 눈이 한 번 마주쳤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율은 몸을 굽혀 커프스단추를 주워 부사장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부사장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 손이 단추를 꼭 쥐었다⁠.

*

염다경은 법정 문 밖 복도에서 혜온의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혜온은 복도 한가운데 멈춰 서 있었고⁠, 몇 걸음 앞에 부사장이 서 있었다⁠. 조율사는 이미 계단 쪽으로 내려간 뒤였다⁠. 백상 대표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반대쪽 끝으로 걸어갔다⁠.

“⁠왜 그랬어⁠?⁠”

혜온이 물었다⁠. 따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사장은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단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네가 먼저 다 맞았잖아⁠. 석 달 동안⁠. 기사도⁠, 증인도⁠.⁠”

“⁠내가 맞겠다고 했잖아⁠.⁠”

“⁠그 사람도 맞겠다고 하더라⁠. 오늘 증인석에서⁠. 그래서 이번엔 내 차례였어⁠.⁠”

혜온의 입술이 떨렸다⁠. 혜온은 이것을 깨물어 멈췄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가⁠, 손을 뻗어 남편의 접힌 소매를 한 번 펴 주었다⁠. 여섯 해 동안 매일 아침 하던 손짓이었다⁠.

“⁠효림이한테는 내가 말할게⁠. 아빠가 오늘 용감했다고⁠.⁠”

부사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경은 가방 손잡이를 쥔 채 이 둘을 보다가⁠, 복도 반대편 끝에서 이쪽을 보고 서 있는 태율과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다경도 끄덕였다⁠. 오늘 이긴 사람은 법정 안에 아무도 없었다⁠.

*

같은 날 저녁 여섯 시⁠, 광화문 태진타워 33층 회장실의 바둑판 위에는 돌도 봉투도 없었다⁠. 기세만은 창가에 서서 광화문 네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퇴근길 차들이 붉은 꼬리를 길게 끌었다⁠.

“⁠오늘부로 그 애는 대기발령이다⁠. 사내망에 벌써 올렸어⁠.⁠”

기세만은 돌아서지 않고 말했다⁠. 태율은 소파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외도는 버리게⁠. 그건 끝났어⁠. 이제 재산분할만 막으면 돼⁠. 빌딩은 이미 재단에 갔고⁠, 지분도 다음 달 이사회에서 넘어가⁠. 판결 날까지 그 둘만 지키게⁠. 그러면 법무실장 자리는 아직 비어 있네⁠.⁠”

“⁠그림은 법원 딱지가 붙어 있습니다⁠.⁠”

“⁠그림 하나는 줘도 돼⁠. 그 아이가 손들고 산 거니까⁠.⁠”

기세만이 박하사탕을 꺼냈다⁠. 입에 넣지 않고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그리고 윤 여사와 남 기사 이야기는 법정에서 꺼내지 말게⁠. 위증 얘기가 나오면 그 사람들 세운 쪽이 다치는 거야⁠. 그 사람들 세운 게 누구지⁠?⁠”

“⁠제가 세웠습니다⁠.⁠”

“⁠그래⁠. 그러니 더 조용히 하게⁠.⁠”

기세만이 사탕을 입에 넣었다⁠. 깨물지 않았다⁠. 혀 위에서 오래 녹였다⁠.

“⁠자네 동생⁠, 대기발령 석 달 넘으면 자동으로 정리되네⁠. 우리 호텔 규정이 그래⁠.⁠”

“⁠동생 일은 동생이 정할 겁니다⁠.⁠”

“⁠그 애가 정할 수 있는 건 사직서에 서명하느냐 마느냐 하나뿐일세⁠. 나는 그 둘 다 받아 줄 수 있고⁠.⁠”

기세만이 그제야 돌아섰다⁠. 창에 등을 지자 얼굴이 그늘에 묻혔다⁠. 사탕이 혀 위에서 이에 부딪는 소리만 들렸다⁠.

“⁠모 변호사⁠, 나는 자네를 아직 버리지 않았어⁠. 그 차이를 잘 알아 두게⁠.⁠”

*

밤 아홉 시⁠, 백상 15층 창 없는 상담실에 기 부사장이 다시 앉았다⁠. 회사 출입증은 이미 막혀 있었다⁠. 백상 로비에서 방문증을 받아 올라왔다⁠. 넥타이를 매지 않았고⁠, 커프스단추 대신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렸다⁠.

“⁠아버지가 판결까지 가래요⁠.⁠”

“⁠들었습니다⁠.⁠”

“⁠저는 돈은 못 막아요⁠. 빌딩은 이미 넘어갔고 지분도 다음 달이면 아버지 재단으로 넘어가요⁠. 혜온이한테 뭘 주고 싶어도 줄 게 없어요⁠.⁠”

부사장은 탁자 위에 은색 커프스단추 한 쌍을 꺼내 놓았다⁠. 하나는 법정 바닥을 굴렀던 것이었다⁠.

“⁠대신 부탁 하나만 할게요⁠. 변호사님⁠, 거짓말로는 이기지 마세요⁠. 저 때문에 그동안 거짓말한 사람이 너무 많아요⁠. 혜온이도⁠, 그 사람도⁠, 저도요⁠. 윤 여사님한테도 그렇게 전해 주세요⁠. 그분은 저를 열다섯 살 때부터 키우셨어요⁠.⁠”

태율은 단추를 보았다⁠. 산 모양이 형광등 아래에서 빛났다⁠.

“⁠부사장님⁠, 그 말씀은 제가 의뢰인을 해치는 일이 생겨도 괜찮다는 뜻입니까⁠?⁠”

“⁠저를 해치는 게 아니잖아요⁠.⁠”

부사장이 웃었다⁠. 지난번처럼 눈까지 같이 움직였다⁠.

“⁠제 아버지를 해치는 거죠⁠.⁠”

*

다음 날 오후⁠, 종로 금은방 골목은 유리 진열장마다 노란 불빛이 쏟아져 나와 겨울 해보다 밝았다⁠. 다경은 이 골목 입구에서 혜온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태진에 서른 해 넘게 일한 사람한테만 주는 금괴가 있다고요⁠?⁠”

“⁠네⁠. 창립 오십 주년 때 만든 거예요⁠. 열 돈짜리 오십 개요⁠. 회장님이 서재에서 직접 주세요⁠. 성북동 기사님이 서른한 해 일하고 은퇴하실 때 하나 받으셨어요⁠. 윤 여사님이 그거 보고 부러워하셨어요⁠. 저도 팔 년만 더 있으면 받는다고요⁠.⁠”

“⁠윤 여사님은 몇 해 일하셨죠⁠?⁠”

“⁠스물두 해요⁠.⁠”

다경은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길두가 휴대폰에 사진 한 장을 띄우고 있었다⁠. 혜온이 보내 준 효림의 돌잔치 사진이었다⁠. 윤 여사 옆에 서른 줄의 남자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윤 여사의 아들이었다⁠.

“⁠대표님⁠, 제가 예비 신랑으로 들어갈게요⁠. 대표님은 밖에서 기다리세요⁠. 기사에 얼굴 나왔잖아요⁠.⁠”

“⁠예비 신랑이 왜 금괴를 물어봐⁠?⁠”

“⁠예단이요⁠. 요즘 예단에 금괴 넣는 집 많대요⁠.⁠”

길두는 일곱 번째 가게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경이 십 분을 기다리다 유리문 너머를 들여다보니⁠, 진열장 앞에 앉아 반지를 세 개째 끼어 보고 있었다⁠. 돋보기를 머리에 얹은 예순 줄의 여자 사장이 길두의 손가락 굵기를 재고 있었다⁠.

다경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신부는 어디 있어⁠? 반지는 신부 손 보고 골라야지⁠.⁠”

사장이 길두에게 물었다⁠. 길두가 문 쪽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요⁠.⁠”

“⁠아니에요⁠.⁠”

다경과 길두가 동시에 말했다⁠. 사장이 돋보기를 내리고 다경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테레비에서 봤나⁠?⁠”

다경은 숨기지 않기로 했다⁠. 명함을 꺼내 진열장 유리 위에 놓고⁠, 길두의 휴대폰에서 돌잔치 사진을 띄웠다⁠.

“⁠사장님⁠, 이 남자가 혹시 금괴 하나 팔고 가지 않았어요⁠? 산 모양이 찍힌 거요⁠.⁠”

사장은 사진을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팔고 갔지⁠. 지난달에⁠. 열 돈짜리⁠, 앞에 산 모양⁠, 뒤에 오십 주년이라고 새겨진 거⁠. 귀한 거라 안 녹이고 진열장에 뒀어⁠. 그런데⁠.⁠”

다경이 진열장 맨 위 칸을 가리켰다⁠. 벨벳 받침대 하나가 비어 있었다⁠.

“⁠어제 어떤 남자가 와서 두 배 값을 주고 도로 사 갔어⁠. 현금으로⁠. 마흔 줄에 회색 점퍼 입고⁠, 박하사탕 하나 먹으라고 주더라고⁠. 안 먹었어⁠. 나 이가 시려서⁠.⁠”

길두가 휴대폰 사진을 넘겼다⁠. 편의점 유리문을 미는 옆얼굴⁠. 사장이 돋보기를 다시 썼다⁠.

“⁠이 사람이네⁠.⁠”

사장이 돋보기를 벗어 진열장 위에 내려놓았다⁠.

“⁠금괴 팔러 온 청년은 손을 덜덜 떨더라고⁠. 빚쟁이한테 쫓기는 얼굴이었어⁠. 이거 어디서 났냐고 물으니까 엄마가 받은 거래⁠. 엄마는 자기가 판 거 모른다고⁠, 제발 진열장에 이름 같은 거 붙이지 말아 달라고⁠.⁠”

다경은 빈 벨벳 받침대를 오래 보았다⁠. 금괴는 하루 차이로 사라졌다⁠. 대신 이 가게의 진열장 앞에 사람 하나가 생겼다⁠. 금괴가 회장의 서재에서 나와 윤 여사의 아들 손을 거쳐 이 받침대에 앉았다가⁠, 서류로는 회사를 그만뒀다는 회장의 비서실 사람 손으로 돌아간 것을 제 눈으로 본 사람이었다⁠.

“⁠사장님⁠, 이 이야기 법정에서 한 번 더 해 주실 수 있으세요⁠?⁠”

“⁠법정⁠? 나 가게 비우면 안 되는데⁠.⁠”

“⁠반지 하나 살게요⁠. 신랑 거⁠.⁠”

길두가 끼고 있던 반지를 들어 보였다⁠. 사장이 웃었다⁠.

*

밤 여덟 시 반⁠, 1층에서 함께 탄 정곡빌딩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경은 문이 닫히자마자 말했다⁠.

“⁠금괴 하나가 회장한테서 윤 여사님한테 갔어⁠. 아들이 그걸 팔았고⁠, 어제 김 과장이 되사 갔어⁠.⁠”

태율이 손을 들었다⁠.

“⁠그 얘긴 나한테 하지 마⁠.⁠”

“⁠들어⁠.⁠”

“⁠나는 아직 그쪽 변호사야⁠. 윤 여사님은 내 증인이고⁠. 네가 지금 하는 말은 내 증인이 돈을 받고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그걸 내가 들으면⁠.⁠”

“⁠그러니까 너한테 하는 거야⁠. 네 증인이 거짓말했어⁠. 거짓말로는 안 이긴다며⁠.⁠”

“⁠약속 하나 더 있었잖아⁠. 내 쪽에서 찾은 건 내 쪽 거라며⁠. 네가 그랬어⁠.⁠”

다경이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한 말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거울 속 고장 안내문 옆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 않았다⁠.

문이 6층에서 열렸다⁠. 다경이 내렸다⁠. 태율은 따라 내리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동안 다경이 돌아보았다⁠. 태율이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문틈이 좁아지다 없어졌다⁠.

*

밤 열 시⁠, 15층 사무실에 남아 있던 모태율의 휴대폰에 정곡빌딩 1층 보안실 번호가 떴다⁠.

“⁠변호사님⁠, 로비에 손님이 오셔서 한 시간째 기다리십니다⁠. 변호사님만 만나시겠다고요⁠.⁠”

1층 로비는 불이 반쯤 꺼져 있었다⁠. 회전문 옆 대리석 벤치에 누빔 외투를 입은 예순 줄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진분홍 보자기 하나를 올려놓고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윤 여사였다⁠. 여사는 태율을 보고 일어서다가 비틀거렸다⁠.

“⁠모 변호사님⁠.⁠”

“⁠윤 여사님⁠, 이 시간에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김 과장님이 오늘 아침에 이걸 도로 가져다주셨어요⁠. 회장님이 주신 퇴직 선물이라고 하래요⁠. 퇴직 날짜는 지난달로 하고요⁠. 법정에서 누가 물으면요⁠.⁠”

여사가 보자기 매듭을 풀었다⁠. 손이 떨려 매듭이 두 번 미끄러졌다⁠. 보자기 안에 작은 손수건이 하나 더 있었다⁠. 노란 바탕에 토끼가 그려진 아이 손수건이었다⁠. 여사가 이것을 펼쳤다⁠.

엄지 두 마디만 한 금덩이가 로비의 남은 불빛을 받아 누렇게 빛났다⁠. 앞면에 산 모양이 찍혀 있었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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