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417자)

오백만 원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신가랑

모태율은 길두를 가리킨 대표의 손가락 끝을 보다가 다경에게로 눈을 옮겼다⁠. 다경은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왼손을 탁자 모서리에 짚고⁠, 오른손으로 가방 지퍼를 열고 있었다⁠.

“⁠재판장님⁠, 피고 대리인입니다⁠. 그 돈 여기 있습니다⁠.⁠”

다경이 꺼낸 것은 투명한 지퍼백이었다⁠. 안에 흰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봉투 입구는 처음 붙인 그대로 접착이 살아 있었고⁠, 지퍼백 테이프 위에 날짜와 길두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태율은 이 봉투를 처음 보았다⁠. 대표가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받은 날 이 상태로 사무실 금고에 넣었습니다⁠. 한 번도 열지 않았습니다⁠. 재판장님께서 이 자리에서 열어 주십시오⁠.⁠”

법정 질서를 맡은 경위가 지퍼백을 받아 재판장에게 올렸다⁠. 재판장이 안경을 내리고 봉투를 뜯었다⁠. 오만 원짜리 지폐 백 장이 은행 띠지에 묶여 나왔다⁠. 재판장이 띠지를 뒤집어 보았다⁠. 은행 지점 이름이 도장으로 찍혀 있었다⁠.

“⁠태진타워 지점이네요⁠.⁠”

대표의 턱이 굳었다⁠. 태율은 이 지점이 어디 있는지 알았다⁠. 광화문 태진타워 1층⁠, 회장실에서 엘리베이터로 이 분 거리였다⁠.

“⁠그리고 이 돈을 건넨 사람의 얼굴입니다⁠.⁠”

다경이 출력한 사진 세 장을 경위에게 넘겼다⁠. 편의점 유리문을 미는 옆얼굴⁠, 계단 쪽 뒷모습⁠, 점퍼 주머니의 초록 박하사탕 봉지⁠.

재판장이 사진을 보다가 법정 뒤를 보았다⁠.

“⁠사무직원⁠, 사실관계만 짧게 말해 보세요⁠.⁠”

길두가 일어섰다⁠. 넥타이 매듭이 아직도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난달 어느 날 오후 세 시쯤 빌딩 지하 편의점에서 참치마요랑 전주비빔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사무실 서류 사진만 몇 장 찍어 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분 사진을 찍었습니다⁠. 서류 사진은 안 찍었습니다⁠. 삼각김밥은 둘 다 샀습니다⁠.⁠”

재판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이번에는 쉽게 내려오지 않았다⁠. 혜온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웃음을 참는 어깨였다⁠.

다경이 다시 일어섰다⁠.

“⁠저희는 이 돈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돌려줄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찾았습니다⁠. 원고 공동 대리인께서 방금⁠, 이 돈이 원고 쪽 회사 사람의 돈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으니까요⁠.⁠”

법정이 조용해졌다⁠. 대표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자기가 한 말이 어디로 돌아왔는지 대표는 알았다⁠.

재판장이 봉투를 다시 지퍼백에 넣어 경위에게 건넸다⁠.

“⁠원고 쪽에서 돌려받으시죠⁠. 그리고 원고 공동 대리인⁠, 사건 관계인에게 돈이 건네진 경위는 다음 기일까지 서면으로 설명하세요⁠. 재판부가 그 내용을 따로 보겠습니다⁠.⁠”

경위가 지퍼백을 원고석 탁자에 내려놓았다⁠. 대표는 이것을 손대지 않고 내려다보았다⁠. 태율은 대표를 보았다⁠. 대표는 태율을 보지 않았다⁠.

*

복도 끝 창가에서 다경은 율무차 버튼을 눌렀다⁠. 컵이 차는 동안 뒤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나 그 봉투 몰랐어⁠.⁠”

“⁠알아⁠. 네 얼굴 봤어⁠.⁠”

태율이 다경 옆에 섰다⁠. 창밖으로 법원 마당의 소나무에 눈이 얹혀 있었다⁠.

“⁠사진 속 남자⁠, 비서실 사람이지⁠. 이름 알아⁠?⁠”

“⁠그건 안 알려 줘⁠.⁠”

“⁠왜⁠?⁠”

“⁠우리 약속⁠. 내 쪽에서 찾은 건 내 쪽 거야⁠.⁠”

태율이 짧게 웃었다⁠. 다경이 율무차를 꺼내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찡그렸다⁠.

“⁠혜온 씨 말이 맞네⁠. 너무 달아⁠.⁠”

*

모태율은 22층 대표실 문을 노크하지 않고 열었다⁠. 대표는 창가에 서서 지퍼백을 책상 위에 올려 둔 채 넥타이를 풀고 있었다⁠. 오만 원짜리 백 장이 투명한 비닐 너머로 보였다⁠.

“⁠알고 세우셨습니까⁠?⁠”

대표가 돌아보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비서실장한테 들었어⁠. 염 변호사 사무실 막내가 돈을 받아 갔다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그 돈을 누가 줬는지는 안 물으셨습니까⁠?⁠”

“⁠묻는 게 우리 일이 아니야⁠. 세우는 게 우리 일이지⁠.⁠”

대표가 넥타이를 책상 위에 던졌다⁠. 그리고 그제야 돌아섰다⁠.

“⁠다음 기일 서면은 이렇게 갈 거야⁠. 비서실 직원 하나가 회장님 모르게 혼자 한 일이다⁠. 그 직원은 오늘부로 회사를 그만뒀다⁠. 회장님은 유감을 표하신다⁠.⁠”

“⁠그만뒀습니까⁠, 그만두게 하셨습니까⁠?⁠”

“⁠모 변호사⁠.⁠”

대표가 태율의 이름을 불렀다⁠. 다섯 해 동안 대표가 태율을 그렇게 부른 것은 승진 소식을 전할 때 한 번뿐이었다⁠.

“⁠자네 의뢰인이 자네를 지켰어⁠. 그거 오래 안 가⁠. 회장님은 아들한테 진 적이 없는 분이야⁠. 서른일곱 해 동안 한 번도⁠.⁠”

태율은 지퍼백을 보았다⁠. 은행 띠지의 지점 도장이 비닐에 반사되어 번들거렸다⁠. 그만둔 직원이 회장 모르게 혼자 한 일이라면⁠, 이 직원은 회장 집무실 이 분 거리 은행에서 돈을 찾아 왔다⁠.

“⁠서면은 제가 쓰지 않겠습니다⁠.⁠”

“⁠그럼 내가 쓰지⁠.⁠”

대표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태율은 문을 닫고 나왔다⁠. 복도 끝 엘리베이터 거울에 고장 안내문이 여전히 붙어 있었다⁠.

*

이튿날 오전 열한 시⁠, 광화문 태진타워 2층 대강당 앞 로비에 기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다경은 로비 기둥 옆에 서서 강당 안쪽 화면을 보았다⁠. 연단에 기세만이 서 있었다⁠. 회색 목도리 대신 짙은 남색 넥타이를 맸다⁠.

“⁠저는 오늘⁠, 제 장남 명의로 된 태진홀딩스 지분 전부와 한남동 건물 한 채를 태진문화재단에 내놓기로 했습니다⁠. 이 재단은 앞으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의 학비를 대는 데 쓰일 것입니다⁠. 제 집안이 받은 것을 사회에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강당을 채웠다⁠. 앞줄의 기자 하나가 손을 들었다⁠.

“⁠회장님⁠, 장남 부부가 이혼 소송 중인데 며느리 쪽은 지분 분할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아이도 우리 집 식구였으니⁠, 남의 집 아이들 학비에 함께해 주리라 믿습니다⁠.⁠”

기세만은 대답하며 한 번 웃었다⁠. 화면 속 이 웃음은 다정한 할아버지의 웃음이었다⁠. 다경은 기둥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눌 재산을 통째로 장학금으로 바꾸면⁠, 이것을 나누자고 하는 사람은 남의 아이들 학비를 빼앗는 사람이 되었다⁠. 지분은 재단으로 가도 재단 이사장은 회장 자신이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사람들이 강당 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기세만은 비서실장을 앞세우고 로비를 가로지르다가 기둥 옆에서 멈췄다⁠.

“⁠염 변호사⁠. 보러 와 줬구먼⁠.⁠”

“⁠학비 대주시는 아이들은 몇 명이나 됩니까⁠?⁠”

“⁠많을 거야⁠. 자네 의뢰인이 뺏으려는 것만큼⁠.⁠”

기세만이 박하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나눌 게 없으면 싸울 일도 없지⁠. 법이 사회에 돌려준 걸 다시 뺏어 오라고 하던가⁠?⁠”

“⁠재판 중에 나눌 재산을 남한테 넘기면 그게 재단이든 사회든 되돌릴 수 있습니다⁠. 그 법은 회장님 같은 분들 때문에 생겼어요⁠.⁠”

“⁠그럼 되돌려 보게⁠. 내일 신문은 자네를 남의 장학금 뺏는 변호사라고 쓸 거야⁠.⁠”

“⁠그 신문도 회장님이 쓰실 거고요⁠.⁠”

기세만이 사탕을 깨물었다⁠. 이 소리가 대리석 로비에서 크게 울렸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고 다경을 지나쳐 갔다⁠. 비서실장이 지나가며 다경에게 고개를 숙였다⁠. 비서실장의 코트 주머니에서 초록 봉지 모서리가 보였다⁠.

*

오후 여섯 시⁠, 정곡빌딩 1층 로비는 다시 기자들로 붐볐다⁠. 오전 기자회견의 반론을 들으려는 사람들이었다⁠. 엘리베이터 한 대가 열리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갔다⁠. 모태율은 15층에서 탔다가 6층에서 다경이 타는 것을 보았다⁠. 칸은 꽉 찼고⁠, 둘은 맨 뒤 벽에 어깨를 붙인 채 나란히 섰다⁠.

앞에 선 기자 하나가 휴대폰으로 오전 기자회견 영상을 보고 있었다⁠. 기세만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사회에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태율은 아래를 보았다⁠. 다경의 손이 태율의 손 옆⁠,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늘어져 있었다⁠. 손톱 하나가 부러져 있었다⁠. 지하 창고에서 셔터를 누르다 그랬을 것이다⁠.

태율은 손등으로 다경의 손등을 한 번 건드렸다⁠. 다경이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째에 다경의 새끼손가락이 태율의 새끼손가락에 걸렸다⁠. 다음은 손바닥이었다⁠. 앞사람들의 외투 아래⁠, 아무도 내려다보지 않는 높이에서 둘의 손이 맞잡혔다⁠. 다경의 손은 찼고 손바닥 가운데만 따뜻했다⁠.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섰다⁠. 4층⁠, 3층⁠, 2층⁠.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다경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태율도 주었다⁠.

1층에서 문이 열리자 둘은 동시에 손을 놓고⁠, 동시에 앞으로 걸어 나갔다⁠. 로비 경비가 두 사람을 보고 손을 들었다⁠.

“⁠오늘은 인사 안 하세요⁠?⁠”

“⁠했어요⁠.⁠”

다경이 대답했다⁠. 경비는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법원 사거리를 건너며 둘은 늘 하던 내기를 했다⁠. 사해행위 취소 판례를 누가 더 많이 대는가⁠. 진 사람이 저녁을 산다⁠. 다경은 일곱 개를 댔다⁠. 태율은 여섯 개를 대고 일곱 번째에서 연도를 틀렸다⁠.

“⁠그 판결⁠, 너 학부 사학년 때도 연도 틀렸어⁠.⁠”

“⁠그걸 왜 기억해⁠?⁠”

“⁠네 오답은 내가 다 외우고 있거든⁠.⁠”

이날 저녁은 태율이 샀다⁠. 순댓국집 주인 할머니가 카드를 받으며 물었다⁠. 오늘은 안 싸우냐고⁠. 둘이 동시에 싸웠다고 대답했다⁠. 밥값은 각자 낸다는 약속은 네 번째 줄이었고⁠, 이 줄은 자주 깨졌다⁠.

*

성탄절 금요일 저녁 여섯 시⁠, 평창동 회장 저택 대문은 닫혀 있었다⁠. 혜온은 딸기우유 두 팩이 든 장바구니를 들고 대문 앞에 섰다⁠. 다경이 이 옆에 섰다⁠. 여섯 시 오 분이 되고⁠, 십 분이 되었다⁠. 장바구니 속 딸기우유 팩 겉면에 물방울이 맺혔다가 흘러내렸다⁠.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난번 이 자리에 섰던 기자들도 오늘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도 찍지 않을 날이었다⁠.

여섯 시 십오 분⁠, 쪽문이 열리고 윤 여사가 나왔다⁠. 혜온의 눈을 보지 못했다⁠.

“⁠아가씨는 회장님이랑 아침에 제주 리조트 가셨어요⁠. 가족 여행이요⁠. 일요일 밤에 오신대요⁠.⁠”

“⁠오늘은 엄마 날이에요⁠. 판사님이 정하신 날이에요⁠.⁠”

다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윤 여사는 고개를 숙인 채 앞치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네 번 접은 도화지였다⁠. 이것을 혜온 손에 쥐여 주었다⁠. 펼치지 않아도 크레파스 냄새가 났다⁠.

“⁠아가씨가 가시기 전에 그리셨어요⁠. 엄마 오면 주라고⁠. 회장님은 모르세요⁠.⁠”

윤 여사는 이 말만 하고 쪽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컸다⁠.

혜온은 도화지를 펼쳤다⁠. 토끼 한 마리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한쪽 귀가 접혀 있었다⁠. 이 아래 삐뚤삐뚤한 글씨가 있었다⁠. 엄마 기다려⁠.

다경은 이 자리에서 태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율은 바로 받았다⁠.

“⁠면접교섭 깨졌어⁠. 회장이 애 데리고 제주 갔대⁠.⁠”

“⁠지금 비서실장한테 걸게⁠.⁠”

삼 분 뒤 태율이 다시 전화했다⁠. 비서실장은 받지 않았고⁠, 부사장도 아버지 일정을 몰랐다고 했다⁠. 다경은 월요일 아침 법원 문 열자마자 법원 결정을 지키라는 이행명령을 신청하겠다고 했다⁠. 법원이 이 명령을 내리기까지 또 몇 주가 걸릴 것이었다⁠. 그동안 금요일은 몇 번이고 다시 올 것이었다⁠.

차 안에서 혜온은 도화지를 무릎 위에 펼쳐 놓고 오래 보았다⁠. 다경이 시동을 걸자⁠, 혜온이 손을 뻗어 열쇠를 도로 돌렸다⁠. 엔진이 꺼졌다⁠.

“⁠변호사님⁠.⁠”

혜온이 말했다⁠. 도화지를 접는 손보다 말이 더 느렸다⁠.

“⁠내일 기자회견 할게요⁠. 그 사람 얘기 다 할 거예요⁠. 회장님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그거잖아요⁠.⁠”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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