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548자)

상대편 변호사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신가랑

염다경은 이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부엌에서 태율이 다경을 보고 있었다⁠. 다경의 회색 스웨터 소매 밖으로 태율의 손목뼈가 드러나 있었다⁠.

“⁠반론하겠습니다⁠.⁠”

다경은 휴대폰을 귀에 대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맨발이 찬 바닥에 닿았다⁠.

“⁠받아 적으세요⁠. 저와 모태율 변호사는 대학 동기이고⁠, 어젯밤 함께 있었습니다⁠. 그 일이 제 의뢰인의 재판에 영향을 준 적은 없습니다⁠. 오늘 안에 저희 둘 다 각자의 의뢰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의견을 듣겠습니다⁠. 그리고 기자님께 그 사진을 건넨 사람이 누군지⁠, 저는 압니다⁠.⁠”

기자가 무언가 더 물으려 했다⁠. 다경은 끊었다⁠.

태율이 컵 두 개에 보리차를 따라 들고 왔다⁠. 하나를 다경 손에 쥐여 주었다⁠.

“⁠왜 인정했어⁠?⁠”

“⁠거짓말로는 안 이긴다며⁠.⁠”

“⁠그건 법정 얘기였잖아⁠.⁠”

“⁠법정 밖에서 거짓말하면 법정 안에서도 하게 돼⁠.⁠”

태율이 보리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컵을 내려놓고 다경의 스웨터를 벗어 개켜 의자에 걸었다⁠.

“⁠내 쪽은 내가 정리할게⁠.⁠”

“⁠네 쪽에 정리할 사람이 너무 많아⁠.⁠”

“⁠알아⁠.⁠”

*

기사는 여덟 시 정각에 나갔다⁠. 「⁠태진가 이혼 소송 양측 변호사 ‘⁠한밤 밀회⁠’⁠」 방배동 연립 계단 앞⁠, 다경이 앞서고 태율이 따라 올라가는 뒷모습이었다⁠. 다경의 반론은 기사 맨 끝에 한 줄로 붙었다⁠. 사진을 건넨 사람을 안다는 문장은 빠져 있었다⁠.

열 시에 변호사협회에서 전화가 왔다⁠. 진정이 한 건 들어왔다고 했다⁠. 상대방 대리인과 사사로운 관계를 맺어 의뢰인의 이익을 해쳤다는 내용이었다⁠. 진정을 낸 사람의 이름은 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열한 시⁠, 정곡빌딩 1층 로비에 기자 넷이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길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이들 앞을 막아섰다⁠. 넥타이를 처음 매고 나온 날이었는데⁠, 매듭이 목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저희 대표님은 그날 밤 판례 공부를 하셨습니다⁠.⁠”

“⁠판례를 둘이서요⁠?⁠”

“⁠네⁠. 판례는 원래 둘이 봐야 잘 보입니다⁠. 하나는 판결을 읽고⁠, 하나는 반대 의견을 읽고요⁠.⁠”

기자 하나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길두는 이 틈에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아났다⁠. 점검 중 종이가 붙은 문 앞에서 한참 버튼을 누르다가⁠, 옆 칸 문이 열리자 그리로 뛰어들었다⁠.

*

오후에 다경이 서초역 사거리 오피스텔 9층 복도에 내렸을 때 903호 문 앞에 검은 코트 하나가 서 있었다⁠. 은테 안경의 비서실장이었다⁠. 이 사람은 한 팔에 사람 상반신만 한 흰 토끼 인형을 안고 있었다⁠. 리본에 백화점 이름이 찍혀 있었다⁠.

“⁠아⁠, 염 변호사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거기서 뭐 하세요⁠?⁠”

“⁠따님 성탄 선물을 전해 드리려고요⁠. 사모님이 문을 안 열어 주셔서⁠.⁠”

비서실장이 토끼 인형을 고쳐 안았다⁠. 인형의 두 귀가 다 꼿꼿했다⁠.

“⁠변호사님⁠, 오늘 기사 보셨지요⁠. 변호사님이 이 사건에서 빠지시면 모두가 편해집니다⁠. 사모님도⁠, 따님도⁠, 모 변호사님도요⁠.⁠”

“⁠한 사람 더 있겠죠⁠. 제일 편해지실 분⁠.⁠”

“⁠회장님은 원래 편하십니다⁠.⁠”

비서실장은 공손하게 웃고 인형을 문 앞 바닥에 세워 두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불러 내려갔다⁠. 다경은 이 인형을 내려다보다가 숨을 한 번 고르고 초인종을 눌렀다⁠. 혜온은 문을 열고 인형을 보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다경만 들였다⁠. 창틀의 작은 화분에 꽃봉오리 하나가 맺혀 있었다⁠.

다경은 서지 않고 바로 말했다⁠.

“⁠기사 보셨죠⁠. 제가 빠지겠습니다⁠. 저보다 경험 많은 변호사를 소개해 드릴게요⁠. 상대는 이걸로 재판부를 흔들 거예요⁠. 제가 옆에 있으면 혜온 씨가 그걸 다 맞아요⁠.⁠”

혜온은 대답 대신 휴대폰을 내밀었다⁠. 비서실장에게서 아침에 온 문자였다⁠.

「⁠사모님⁠, 변호사를 바꾸시면 올해 성탄절은 따님과 함께 보내시도록 회장님께서 배려하시겠다고 합니다⁠.⁠」

다경은 이 문장을 두 번 읽었다⁠. 회장은 다경을 빼는 값으로 아이와의 하루를 내놓았다⁠.

“⁠이거 받으면 저 성탄절에 효림이랑 있을 수 있어요⁠.⁠”

혜온이 휴대폰을 도로 가져갔다⁠. 그리고 문자 창을 닫았다⁠.

“⁠변호사님이 누굴 좋아하든 저는 상관없어요⁠. 제가 그 사람 얘기 쓰지 말라고 했을 때⁠, 변호사님은 그 사진을 제 앞에서 접어서 넣으셨어요⁠. 이 일 하는 사람 중에 제 비밀을 지켜 준 사람은 변호사님밖에 없어요⁠.⁠”

“⁠혜온 씨⁠.⁠”

“⁠그리고 넥타이 삼촌도 그날 판사님 앞에서 거짓말 안 했잖아요⁠. 새벽 두 시 전화요⁠. 효림이가 그날 잤어요⁠.⁠”

혜온은 창틀의 화분을 손가락으로 돌려 꽃봉오리가 해 쪽을 보게 했다⁠.

“⁠그분한테 제 편 들어 달라는 거 아니에요⁠. 그분은 그분 편 하시면 돼요⁠. 재판장님한테는 제가 직접 괜찮다고 말할게요⁠.⁠”

다경은 한참 서 있다가 겨우 앉았다⁠. 소파가 꺼지는 소리가 났다⁠. 혜온이 보리차를 따랐다⁠. 이 집에 오는 사람마다 보리차를 마시게 되었다⁠.

*

모태율은 백상 18층 대형 회의실의 긴 탁자 끝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 상석에 기세만이 있었고⁠, 이 오른쪽에 비서실장⁠, 왼쪽에 백상 대표가 있었다⁠. 기 부사장은 태율과 같은 쪽⁠, 두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아 커프스단추를 돌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법원 지붕에 쌓인 눈이 보였다⁠.

기세만이 박하사탕 하나를 탁자 위에 굴렸다⁠. 사탕이 길게 굴러 태율 앞에서 멈췄다⁠.

“⁠빼게⁠.⁠”

대표가 헛기침을 했다⁠.

“⁠회장님⁠, 사건 중간에 대리인을 바꾸면 재판부가 이상하게 봅니다⁠. 제가 공동 대리인으로 같이 서고⁠, 모 변호사는 서류 쪽으로 빠지게 하는 게⁠.⁠”

“⁠빼라고 했네⁠.⁠”

기세만은 대표를 보지 않았다⁠. 태율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사진을 내밀던 날과 같은 눈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값을 매기는 눈이 아니라 쓸모를 다 본 눈이었다⁠.

이때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기 부사장이 일어서 있었다⁠.

“⁠제 변호사는 제가 정합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대표가 펜을 떨어뜨렸다⁠. 부사장은 커프스단추에서 손을 떼고 탁자를 짚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소송을 낸 사람은 저입니다⁠. 원고가 저예요⁠. 모 변호사님은 그대로 둡니다⁠.⁠”

기세만이 아들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화를 내지 않았다⁠. 사탕을 하나 더 꺼내 입에 넣고⁠, 천천히 굴리다가 깨물었다⁠.

“⁠그래⁠. 그럼 대표가 같이 서게⁠. 그리고 너는⁠.⁠”

기세만이 처음으로 아들에게 목소리를 낮췄다⁠.

“⁠종로 낙원상가 이 층 악기점 있지⁠. 오늘 아침에 내가 샀다⁠. 거기서 피아노 고치던 사람은 오늘부로 할 일이 없어⁠.⁠”

부사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부사장은 선 채로 아버지를 보았다⁠. 태율은 이 얼굴을 보았다⁠. 일흔 가까운 아버지가 마흔 가까운 아들의 가장 아픈 데를 손가락 하나로 누르는 데 걸린 시간은 사탕 하나 깨무는 시간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다 나간 뒤⁠, 태율은 복도 끝 창가에서 부사장을 붙잡았다⁠.

“⁠부사장님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기사에 나온 일⁠, 사실입니다⁠. 저는 상대 대리인 염다경 변호사와 만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시고도 저를 그대로 두시겠는지 여쭙고⁠, 그 대답을 재판부에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부사장은 창밖 눈 쌓인 지붕을 보고 있었다⁠.

“⁠아내도 똑같이 했겠죠⁠, 오늘⁠.⁠”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럼 괜찮습니다⁠.⁠”

부사장이 웃었다⁠. 처음으로 입꼬리만이 아니라 눈까지 같이 움직이는 웃음이었다⁠.

“⁠변호사님⁠, 저 아까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안 된다고 했어요⁠. 서른일곱 해 만에요⁠.⁠”

“⁠압니다⁠. 봤습니다⁠.⁠”

“⁠다리가 아직도 떨려요⁠.⁠”

태율은 부사장의 무릎을 보았다⁠. 정말로 떨리고 있었다⁠.

*

밤 아홉 시⁠, 망원동 골목 원룸 바닥에 호텔 제복이 개켜져 있었다⁠. 두레는 이 위에 금색 이름표를 올려놓고 컵라면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가 들어오자 두레는 휴대폰 화면을 오빠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아침 기사의 이 사진이었다⁠.

“⁠립밤 주인 얼굴 나왔네⁠. 뒷모습이지만⁠.⁠”

“⁠먹어⁠. 불어⁠.⁠”

“⁠오빠는 기사 났는데 라면이 넘어가⁠?⁠”

“⁠너는 대기발령인데 넘어가잖아⁠.⁠”

두레가 젓가락으로 태율을 가리키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 법정에 설게⁠. 그날 열쇠 누구한테 줬는지 말할게⁠.⁠”

“⁠아직 아니야⁠.⁠”

“⁠왜⁠?⁠”

“⁠네가 그걸 말하면 한 사람이 다 벗겨져⁠. 그 사람이 스스로 벗을 때까지는 아니야⁠.⁠”

두레는 오빠를 오래 보았다⁠. 거짓말을 못 하는 대신 남의 거짓말은 잘 알아보았다⁠. 오빠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럼 그때까지 나 백수야⁠?⁠”

“⁠내가 라면 사 줄게⁠.⁠”

“⁠이거 내 라면이야⁠. 그리고 오빠 쓰는 그 나무 냄새 비누도 내가 호텔에서 남은 거 챙겨 준 거야⁠. 그것도 이제 끝이야⁠.⁠”

태율은 제 손목 냄새를 맡아 보았다⁠.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밤⁠, 다경이 태율의 손목께에서 한 번 코를 킁 하던 것이 그제야 떠올랐다⁠.

*

밤 열한 시⁠, 정곡빌딩 엘리베이터에 다경이 탔다⁠. 6층에서 문이 닫히기 직전 누군가 손을 넣었다⁠. 태율이었다⁠. 망원동에서 돌아와 사무실에 두고 온 서류를 챙겨 내려가는 길이라고 했다⁠. 둘은 나란히 섰다⁠. 숨길 것이 없어진 첫날이었다⁠.

다경은 엘리베이터 천장 구석의 검은 반구형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태진 계열 관리 회사의 카메라였다⁠.

“⁠저거 지금도 보고 있겠지⁠.⁠”

“⁠보고 있겠지⁠.⁠”

다경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태율이 다경을 보다가 같이 손을 흔들었다⁠. 1층에 닿을 때까지 둘은 손을 흔들었고⁠, 문이 열리자 로비 경비가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사십 분 기록 깨시려고요⁠?⁠”

“⁠아니요⁠. 인사했어요⁠.⁠”

*

성탄절을 사흘 앞둔 변론기일⁠, 염다경은 문 닫힌 3층 법정 피고석에서 원고석에 새로 생긴 얼굴을 보았다⁠. 태율 옆에 백상 대표가 앉아 있었다⁠. 대표는 은빛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고⁠, 서류를 넘길 때 손가락에 침을 묻혔다⁠. 다경 옆에는 혜온이 앉았다⁠. 법정 맨 뒤⁠, 재판장의 허락을 받은 자리에 길두가 사무직원으로 앉아 있었다⁠. 넥타이 매듭은 여전히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재판장이 안경을 이마에 올렸다⁠.

“⁠시작하기 전에 짚을 것이 있습니다⁠. 양쪽 대리인에 관한 기사를 재판부도 보았습니다⁠.⁠”

다경이 일어섰다⁠. 태율도 일어섰다⁠. 둘은 서로를 보지 않았다⁠.

“⁠피고 대리인입니다⁠. 기사 내용은 사실입니다⁠. 피고에게 알렸고⁠, 피고는 저를 대리인으로 그대로 두겠다고 했습니다⁠.⁠”

“⁠원고 대리인입니다⁠. 같은 사실을 원고에게 알렸고⁠, 원고도 같은 뜻입니다⁠.⁠”

재판장이 혜온을 보았다⁠.

“⁠피고⁠,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대리인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혜온이 일어섰다⁠. 무릎 위에 맞잡고 있던 두 손을 풀어 옆으로 내렸다⁠.

“⁠네⁠. 제 변호사는 염다경 변호사님입니다⁠. 제가 골랐어요⁠.⁠”

재판장이 원고석으로 눈을 돌리자⁠, 묻기도 전에 기 부사장이 일어섰다⁠.

“⁠저도요⁠. 제가 골랐습니다⁠.⁠”

백상 대표가 옆에서 부사장의 소매를 슬쩍 당겼다⁠. 부사장은 앉지 않고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서 있었다⁠. 재판장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이 말을 조서에 남기려고 펜을 들었다⁠.

이때 백상 대표가 일어섰다⁠.

“⁠재판장님⁠, 원고 공동 대리인입니다⁠. 그 문제는 두 사람의 사사로운 관계로 끝나지 않습니다⁠.⁠”

재판장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서류 한 장을 넘겼다⁠. 그리고 몸을 돌려 법정 맨 뒤를 가리켰다⁠.

“⁠피고 대리인의 사무실이 원고 쪽 회사 사람에게서 현금 오백만 원을 받았습니다⁠. 받은 사람이 지금 저기 앉아 있습니다⁠.⁠”

길두의 넥타이가 목에서 한 번 크게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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