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461자)

토끼 역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신가랑

모태율은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휴대폰을 귀에서 떼지 못했다⁠. 골목에 내린 눈이 태율의 어깨에 얇게 쌓이고 있었다⁠. 다경은 태율의 넥타이를 놓은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가 봐야 해⁠.⁠”

“⁠동생⁠?⁠”

“⁠응⁠. 호텔⁠.⁠”

다경은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태율이 지금 이 이야기를 다경에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얼굴을 보고 알았다⁠.

“⁠가⁠. 내일 얘기해⁠.⁠”

택시 뒷자리에서 태율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소주 맛이 아직 남아 있었다⁠.

*

남산 아래 태진호텔 1층 로비는 새벽 한 시에도 샹들리에가 켜져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프런트 뒤편 작은 사무실 문을 열자 두레가 철제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 인사팀장이 서 있었다⁠. 책상 위에 종이 한 장과 볼펜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두레는 스물아홉이었고 호텔 제복 재킷 가슴에 금색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오빠를 보자 두레의 얼굴이 먼저 무너졌다⁠. 거짓말을 못 하는 얼굴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모 변호사님이 오실 줄은 몰랐네요⁠.⁠”

인사팀장이 말했다⁠. 태율은 이 사람에게 고개만 까딱하고 종이를 집어 들었다⁠. 「⁠본인은 1703호 객실 열쇠를 투숙객 하혜온 씨에게 직접 내주었음을 확인합니다⁠.⁠」

“⁠이거 사실이야⁠?⁠”

두레가 고개를 저었다⁠.

“⁠1703호는 부사장님이 일 년 내내 잡아 두는 방이야⁠. 그날 열쇠는 부사장님 손님한테 줬어⁠. 라운지 피아노 조율하시는 분⁠. 매일 아침 로비 지나가시니까 내가 얼굴 알아⁠. 사모님은 그분 올라가고 한 시간쯤 뒤에 혼자 오셔서 엘리베이터로 바로 가셨고⁠.⁠”

태율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것이 태율의 의뢰인의 비밀이라는 것을⁠, 의뢰인에게서가 아니라 여동생에게서 들었다⁠. 부사장이 왜 화단의 국화를 보며 혜온은 바람 같은 거 피울 줄 모른다고 말했는지⁠, 이제 알았다⁠.

“⁠서명하지 마⁠.⁠”

인사팀장이 헛기침을 했다⁠.

“⁠변호사님⁠, 이건 호텔 내부 일입니다⁠. 서명 안 하면 내일부터 대기발령이에요⁠. 그다음은 저도 장담 못 하고요⁠.⁠”

“⁠이 종이⁠, 호텔 인사팀이 쓴 겁니까⁠?⁠”

인사팀장이 잠깐 머뭇거렸다⁠.

“⁠오늘 저녁에 그룹 비서실에서 내려온 겁니다⁠. 문구 하나 고치지 말라고 하셨고요⁠.⁠”

“⁠그럼 대기발령 하세요⁠. 서명은 안 합니다⁠.⁠”

두레가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오빠⁠, 나 여기 오빠 덕에 들어왔잖아⁠.⁠”

“⁠내 덕 아니야⁠. 회장님 덕이지⁠. 그러니까 더 하지 마⁠.⁠”

두레는 한참 앉아 있다가 재킷 가슴의 이름표를 떼어 책상 위에 놓았다⁠. 금속이 철판에 닿는 소리가 났다⁠. 인사팀장이 종이를 거두어 갔다⁠.

로비로 나오는 길에 두레가 오빠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근데 오빠 입술 왜 그래⁠?⁠”

“⁠뭐가⁠?⁠”

“⁠빨개⁠. 립밤 발랐어⁠? 오빠 립밤 안 바르잖아⁠.⁠”

태율은 대답하지 않고 회전문을 밀었다⁠. 두레가 뒤에서 누구 거냐고 세 번 물었다⁠.

*

이튿날 아침 아홉 시⁠, 정곡빌딩 엘리베이터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다경은 6층 버튼 앞에 섰고⁠, 태율은 다경 바로 뒤에 섰다⁠. 거울에 붙은 고장 안내문은 다섯 달째 그대로였다⁠. 거울 속으로 태율의 얼굴을 보았다⁠. 눈 밑이 거뭇했다⁠.

“⁠동생은⁠?⁠”

“⁠대기발령⁠.⁠”

다경이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앞에 선 사람의 등이 다경의 코앞에 있었다⁠.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물으면 안 되는 거지⁠.⁠”

“⁠응⁠. 내 동생이 뭘 봤는지 너한테는 말 안 해⁠.⁠”

“⁠나도 혜온 씨한테 들은 거 너한테 말 안 해⁠.⁠”

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섰다가 다시 올라갔다⁠. 거울 속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둘 다 같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이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우리 지금 같은 걸 서로 모르는 척하는 거지⁠?⁠”

“⁠응⁠.⁠”

“⁠이상한 약속이야⁠.⁠”

“⁠순댓국집에서 네가 정한 거야⁠.⁠”

6층에서 문이 열렸다⁠. 다경이 내리며 태율의 외투 소매를 아주 짧게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앞에 서 있던 사람은 아무것도 못 보았다⁠. 문틈 사이로 길두의 얼굴이 보였다⁠. 길두는 다 보았다⁠. 사무실 문 앞에서 엄지를 들어 올렸다⁠.

“⁠대표님⁠, 소매 잡으신 거 방금 일 점 드렸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이라 가산점까지요⁠.⁠”

*

발표회 사흘 전 일요일 오후⁠, 다경은 오피스텔 903호 부엌 조리대에 길두가 뽑아 온 사진 세 장을 늘어놓았다⁠. 편의점 유리문을 미는 옆얼굴⁠, 계단으로 꺾어지는 뒷모습⁠, 점퍼 주머니의 초록 봉지⁠. 혜온은 행주로 손을 닦다가 첫 장에서 손을 멈췄다⁠.

“⁠이분 알아요⁠. 비서실 김 과장님이에요⁠.⁠”

“⁠성북동에 온 적 있어요⁠?⁠”

“⁠명절마다요⁠. 회장님이 집안 사람들한테 주시는 봉투를 들고 오셨어요⁠. 윤 여사님 봉투는 늘 따로 챙기셨고요⁠. 부엌 뒷문으로 오셔서 윤 여사님한테 직접 드렸어요⁠. 저한테는 현관으로 오시고⁠.⁠”

혜온은 사진을 뒤집어 놓았다⁠. 거실 바닥에서 효림이 크레파스로 성탄 카드를 그리다 고개를 들었다⁠.

“⁠엄마⁠, 토끼 귀는 몇 개야⁠?⁠”

“⁠두 개⁠.⁠”

“⁠하나는 접어도 돼⁠?⁠”

“⁠효림이 마음대로 해⁠.⁠”

다경은 사진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편의점에서 길두에게 봉투를 내민 손과 명절마다 윤 여사에게 봉투를 내민 손이 같은 손이었다⁠. 남 기사의 택시 컵걸이에도 같은 사탕이 꽂혀 있었다⁠. 아직 서로 이어지지 않은 점 세 개가 같은 사람에게서 나와 있었다⁠.

*

십이월 세 번째 주 수요일 오후⁠, 효림이 다니는 유치원 강당에는 접이식 의자가 여섯 줄 놓여 있었다⁠. 무대 뒤에 은박지 별이 매달려 있고⁠, 난방기 앞에서 귤 냄새와 아이들 땀 냄새가 섞였다⁠. 성탄 발표회였다⁠. 엄마가 오는 것은 당연했다⁠. 유치원은 회장 집이 아니었고⁠, 이 문 앞에서 엄마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기 부사장이 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부사장은 세 번째 줄 끝자리에 혼자 앉아 있다가 혜온이 들어오자 일어섰다⁠. 혜온은 잠깐 서 있다가 부사장의 옆자리에 앉았다⁠. 다경과 태율은 각자 의뢰인 뒤⁠, 네 번째 줄에 한 칸 띄우고 앉았다⁠. 혜온이 와 달라고 했고⁠, 부사장이 와 달라고 했다⁠. 이 사이 한 칸에 길두가 휴대폰을 세로로 들고 끼어 앉았다⁠.

“⁠제가 찍을게요⁠. 어머님 아버님 다 보시라고요⁠.⁠”

효림 반의 순서는 세 번째였다⁠. 숲속 동물들이 아기 예수에게 선물을 가져가는 이야기였다⁠. 효림은 토끼였다⁠. 머리띠에 달린 흰 귀가 한쪽은 꼿꼿하고 한쪽은 접혀 있었다⁠. 아이가 일부러 접었다고⁠, 혜온이 다경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베개 토끼처럼⁠.

토끼는 당근을 들고 무대 가운데로 나와서 대사를 잊었다⁠. 아이는 당근을 든 채 객석을 훑었다⁠. 세 번째 줄에서 엄마를 찾았고⁠, 이 옆에서 아빠를 찾았다⁠.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엄마⁠! 아빠⁠! 둘이 같이 앉았네⁠!⁠”

강당이 웃음으로 터졌다⁠. 혜온이 손을 흔들었고⁠, 부사장이 손을 흔들었다⁠. 효림은 네 번째 줄까지 훑더니 당근으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넥타이 삼촌도 왔다⁠!⁠”

이번에는 웃음이 더 컸다⁠. 태율은 귀가 빨개진 채 손을 반만 들었다⁠. 다경은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다⁠. 길두의 휴대폰이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발표가 끝나고 박수가 이어지는 사이⁠, 부사장이 혜온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네 번째 줄에서는 이 말이 들렸다⁠.

“⁠미안해⁠.⁠”

“⁠알아⁠.⁠”

혜온은 부사장을 보지 않고 무대를 보면서 대답했다⁠. 부사장은 무엇이 미안한지 말하지 않았고⁠, 혜온도 묻지 않았다⁠. 둘은 박수를 쳤다⁠.

다경은 이 둘의 등을 보다가 강당 뒤쪽에서 무언가 딱딱한 것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렸다⁠. 맨 뒷줄 벽에 붙어 선 회색 점퍼 남자가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화면이 세 번째 줄과 네 번째 줄을 향해 있었다⁠. 남자가 입안의 사탕을 한 번 더 깨물었다⁠.

길두가 이 남자를 보고 굳었다⁠. 편의점의 이 얼굴이었다⁠. 다경은 일어섰다⁠. 남자가 강당 문을 밀고 나갔고⁠, 의자 사이를 빠져나가 뒤를 따랐다⁠.

유치원 주차장은 눈이 녹아 진창이었다⁠. 남자가 회색 승용차 문을 여는 순간 다경이 이 문틀을 손으로 잡았다⁠.

“⁠태진 비서실 김 과장님이시죠⁠?⁠”

남자가 다경을 내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눈가에 주름이 많았고⁠, 손톱 끝이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담배를 끊은 지 오래되지 않은 손이었다⁠.

“⁠누구신지 모르겠는데요⁠.⁠”

“⁠편의점에서 저희 막내한테 주신 봉투⁠, 돌려드리려고요⁠. 아직 안 뜯었어요⁠.⁠”

김 과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경의 손가락을 문틀에서 하나씩 떼어 내듯 문을 천천히 당겼다⁠. 다경이 손을 뺐다⁠. 차는 진창을 튀기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다경의 구두 앞코에 흙탕물이 점점이 튀어 있었다⁠.

*

밤 열한 시⁠, 방배동 언덕길의 오래된 연립주택 계단은 오를 때마다 세 번째와 일곱 번째 칸이 울었다⁠. 다경이 앞장서고 태율이 뒤따랐다⁠. 목도리를 돌려받으러 왔다고 했다⁠. 둘 다 이 말을 믿지 않았다⁠.

다경의 집은 방 둘에 거실 하나였고⁠, 거실 바닥 여기저기에 판례집이 무릎 높이로 쌓여 있었다⁠. 태율이 들어서자마자 기울어진 판례집 한 더미를 바로 세웠다⁠.

“⁠그거 건드리지 마⁠. 순서 있어⁠.⁠”

“⁠무슨 순서⁠?⁠”

“⁠읽다 만 순서⁠.⁠”

태율이 웃었다⁠. 콧김만 짧게 빠지는 웃음이었다⁠. 다경은 이 웃음이 남은 입가를 보았다⁠. 그리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라디에이터가 탁탁 소리를 내며 데워지고 있었다⁠. 창밖 가로등 아래로 또 눈이 내렸다⁠. 다경이 태율의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넣어 천천히 풀었다⁠. 오늘은 남색이었다⁠. 매듭이 풀리는 동안 태율은 다경의 안경을 벗겨 판례집 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다경의 시야가 흐려지고 태율의 얼굴만 가까이 남았다⁠.

셔츠 단추는 작고 단단했다⁠. 다경의 손가락이 세 번째 단추에서 미끄러지자 태율이 이 손을 잡아 제 가슴에 댔다⁠. 심장이 손바닥 아래에서 빨랐다⁠. 일곱 해 동안 태율이 법정에서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빠르기였다⁠.

“⁠너 떨어⁠.⁠”

“⁠추워서⁠.⁠”

“⁠라디에이터 켰는데⁠.⁠”

다경이 태율의 입을 막았다⁠. 숨이 섞였다⁠. 판례집 한 더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고 둘 다 이것을 세우지 않았다⁠.

방의 불은 켜지 않았다⁠. 이불에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태율의 손이 다경의 등줄기를 따라 내려가다 허리에서 멈추었고⁠, 다경이 이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쳐 더 아래로 끌었다⁠. 서로의 숨이 처음에는 엇갈리다가 나중에는 같은 박자로 맞춰졌다⁠. 창밖에서 눈 치우는 넉가래 소리가 한 번 지나갔다⁠. 다경은 태율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이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숨을 골랐다⁠.

새벽에 다경이 깼을 때 태율은 옆에서 자고 있었다⁠. 잠든 얼굴에서도 미간이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법정에서 상대 변호사가 말할 때 짓는 얼굴이었다⁠. 다경은 이 미간을 엄지로 한 번 폈다⁠.

*

아침 일곱 시⁠, 다경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태율은 부엌에서 다경의 회색 스웨터를 걸치고 물을 끓이고 있었다⁠. 소매가 짧아 손목이 다 드러나 있었다⁠.

“⁠염다경 변호사님이시죠⁠? 일간지 사회부 기자입니다⁠.⁠”

다경은 이불을 끌어당겨 앉았다⁠. 부엌에서 주전자가 끓기 시작했다⁠.

“⁠어젯밤 모태율 변호사님과 같이 계셨죠⁠? 방배동 댁에 함께 들어가시는 사진이 있습니다⁠. 이혼 소송 양쪽 대리인이 한밤에 만나셨다는 건데⁠, 한 시간 뒤에 기사 나갑니다⁠. 반론하시겠습니까⁠?⁠”

주전자가 길게 울었다⁠. 태율이 불을 끄고 돌아섰다⁠. 다경의 얼굴을 보고⁠, 들고 있던 컵을 조리대에 내려놓았다⁠.

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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