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92자)

스물두 해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신가랑

염다경은 비서실장의 등 너머로 태율의 얼굴을 보았다⁠. 형광등 하나가 태율의 머리 위에서 지지직거리며 깜박였다⁠.

태율은 대답 대신 걸어 나왔다⁠. 다경 옆에 와서 섰다⁠. 그리고 비서실장을 보았다⁠.

“⁠실장님⁠, 저는 원고 대리인입니다⁠. 나눌지 말지 다투고 있는 물건을 소송 중에 밤에 옮기시면⁠, 다음 기일에 그걸 재판장 앞에서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저입니다⁠. 저는 그 설명 못 합니다⁠.⁠”

“⁠회장님 물건입니다⁠, 변호사님⁠.⁠”

“⁠그럼 회장님이 법정에 나오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오늘은 내려놓으세요⁠.⁠”

비서실장이 은테 안경을 한 번 밀어 올렸다⁠. 장갑 낀 남자들이 비서실장을 보았다⁠. 트럭의 후진 경고음이 아직도 울리고 있었다⁠.

“⁠회장님께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림이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경은 포장 담요를 들추고 푸른 화면과 액자 뒷면⁠, 창고 벽⁠, 트럭 번호판을 차례로 찍었다⁠. 손가락이 곱아서 셔터가 자꾸 미끄러졌다⁠. 태율의 회색 목도리가 아직 다경 목에 감겨 있었다⁠.

이튿날 오후⁠, 다경은 이 그림을 누구에게도 넘기거나 옮기지 못하게 해 달라는 보전처분을 받아 냈다⁠. 법원 결정을 현장에서 집행하는 집행관이 한남동 창고에 가서 액자 뒷면에 법원 딱지를 붙였다⁠. 혜온은 집행관 뒤에 서서 이 딱지를 보다가⁠, 액자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먼지가 묻어 나왔다⁠.

*

모태율은 백상 22층 대표실 문을 닫고 들어가자마자 이 말을 들었다⁠.

“⁠파트너 심사⁠, 보류야⁠.⁠”

대표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법원 담장 너머 은행나무가 다 떨어져 가지만 남아 있었다⁠.

“⁠회장님 비서실장이 아침에 전화했어⁠. 원고 대리인이 원고 쪽 물건을 못 옮기게 막았다고⁠. 자네 그거 설명할 수 있나⁠?⁠”

“⁠증거를 옮기면 막을 의무가 있습니다⁠. 변호사는 진실을 숨기는 일에 손을 대면 안 된다고⁠, 변호사법에 적혀 있습니다⁠.⁠”

“⁠변호사법 외우는 거 자네가 제일 잘하는 거 알아⁠. 근데 그 법이 자네 월급 주나⁠?⁠”

대표가 돌아섰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말했다⁠.

“⁠옥상 카메라도 재단 거라더군⁠. 목도리 얘기는 회장님이 직접 하셨어⁠.⁠”

태율은 대표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 섰다⁠. 고장 안내문 옆에 비친 제 얼굴의 목이 휑했다⁠. 목도리를 돌려받지 않았다⁠.

*

십이월 첫째 주 목요일⁠, 가정법원 3층 법정의 문이 닫혔다⁠. 증인석은 재판장 바로 아래⁠, 원고석과 피고석 사이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윤 여사가 이 자리에 서서 선서문을 읽었다⁠. 양심에 따라 숨기거나 보태지 않고 사실 그대로 말하겠다는 문장이었다⁠. 여사의 목소리는 또렷했는데⁠, 종이를 쥔 손끝이 떨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다경은 이 소리를 들었다⁠. 혜온도 들었다⁠. 혜온은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증인을 세운 편이 먼저 묻는 주신문을 태율이 시작했다⁠.

“⁠증인은 원고 집안에서 몇 해 일했습니까⁠?⁠”

“⁠스물두 해요⁠. 부사장님이 열다섯 살 때부터요⁠.⁠”

“⁠지난봄⁠, 피고가 밤늦게 귀가한 일이 있습니까⁠?⁠”

“⁠여러 번 있었어요⁠. 열두 시 넘어서 들어오시고⁠, 옷에서 남자 향수 냄새가 났어요⁠. 그런 날은 아가씨를 저한테 맡기고 나가셨어요⁠.⁠”

혜온이 숨을 들이켰다⁠. 다경은 이 숨소리 위에 제 손을 얹듯 혜온의 손등을 눌렀다⁠.

태율은 질문을 다섯 개 더 하고 자리에 앉았다⁠. 다경은 미리 준비해 온 질문 가운데 마지막 두 개를 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아이가 엄마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느냐는 질문이었다⁠. 증인신청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다경이 일어섰다⁠. 왼손을 탁자 모서리에 짚었다⁠.

“⁠증인⁠, 지난 시월 수요일 새벽 두 시에 피고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증인이죠⁠?⁠”

윤 여사가 원고석을 한 번 보았다⁠. 태율이 아니라 이 옆에 비어 있는 의자를 보았다⁠. 평소 기 부사장이 앉는 자리였는데⁠, 오늘 부사장은 오지 않았다⁠. 아침 일곱 시에 태율의 휴대폰으로 문자 한 줄이 왔었다⁠. 오늘은 못 가겠습니다⁠. 윤 여사님 얼굴을 못 보겠어요⁠.

“⁠네⁠.⁠”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어서⁠, 엄마 목소리라도 들려주려고 거신 거죠⁠?⁠”

“⁠네⁠.⁠”

“⁠엄마를 찾는 아이한테 엄마 목소리를 들려준 분이⁠, 지금 그 엄마가 아이를 버려두고 다녔다고 말씀하시는 거네요⁠.⁠”

“⁠원고 대리인⁠, 이의 있습니다⁠. 질문이 아니라 주장입니다⁠.⁠”

태율이 일어서며 말했다⁠.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경은 질문을 바꿨다⁠.

“⁠증인이 지난봄 피고 옷에서 맡았다는 향수⁠, 무슨 향이었습니까⁠?⁠”

“⁠그런 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남자 냄새였어요⁠.⁠”

“⁠그 무렵 부사장님은 어떤 향수를 쓰셨습니까⁠?⁠”

윤 여사의 입이 닫혔다⁠. 다경은 기다렸다⁠. 법정이 조용해서 천장 환풍기 도는 소리까지 들렸다⁠.

“⁠도련님 기저귀도 제가 갈았어요⁠.⁠”

윤 여사가 질문과 상관없는 말을 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집 일은 제가 제일 잘 알아요⁠. 회장님은 이십 년 넘게 일한 사람한테 섭섭하게 안 하세요⁠. 저는 본 대로 말한 거예요⁠.⁠”

다경은 이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 그어 두었다⁠. 섭섭하게 안 하신다⁠. 질문을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윤 여사는 증인석을 내려가며 혜온을 보지 않았다⁠. 손을 핸드백 손잡이에 감아쥐고 있었다⁠.

남 기사는 쉰 살이었고 머리를 짧게 깎았다⁠. 남 기사는 선서문을 더듬지 않고 읽었다⁠.

“⁠삼월부터 팔월까지 다섯 번⁠, 사모님을 태진호텔에 모셔다 드렸습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두 시간쯤 기다리면 내려오셨어요⁠.⁠”

맞은편이 되묻는 반대신문 차례가 오자⁠, 다경의 질문은 짧았다⁠.

“⁠다섯 번 다 1703호에 갔다는 건 증인이 어떻게 압니까⁠?⁠”

“⁠사모님이 엘리베이터에서 17층 누르시는 걸 봤습니다⁠.⁠”

“⁠지하 주차장 차 안에서 기다리셨다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남 기사의 턱이 굳었다⁠. 남 기사가 원고석을 보았다⁠. 태율은 펜을 쥐고 있었고⁠, 두 번 딸깍이지 않았다⁠.

“⁠한 번은 짐이 있어서 같이 올라갔습니다⁠.⁠”

“⁠그 한 번이 몇 월 며칠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날짜까지는⁠.⁠”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증인은 지난 시월에 개인택시 면허를 사셨죠⁠? 그 값이 얼마였습니까⁠?⁠”

“⁠퇴직금으로 산 겁니다⁠.⁠”

“⁠퇴직은 언제 하셨습니까⁠?⁠”

“⁠시월에요⁠.⁠”

“⁠면허는 언제 사셨습니까⁠?⁠”

“⁠시월에요⁠.⁠”

재판장이 안경을 이마로 밀어 올리고 남 기사를 오래 보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었다⁠. 금은 갔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증언은 법정의 기록인 조서에 그대로 남았다⁠. 혜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열었다면 오늘 이 증언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을 것이었다⁠.

*

법원 3층 여자 화장실 맨 끝 칸에서 혜온은 변기 뚜껑 위에 앉아 있었다⁠. 다경은 이 문 앞에 서서 손을 씻는 척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오래 흘렀다⁠.

“⁠윤 여사님 손 떨리는 거 보셨어요⁠?⁠”

칸막이 너머에서 혜온의 목소리가 났다⁠.

“⁠효림이도 거짓말할 때 똑같이 떨어요⁠. 그거 윤 여사님한테 배운 거예요⁠.⁠”

다경은 수도꼭지를 잠갔다⁠. 혜온이 문을 열고 나왔다⁠. 눈이 붉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세면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다시 묶고⁠, 다경을 거울 속으로 보았다⁠.

“⁠그래도 말 안 해요⁠.⁠”

“⁠알아요⁠.⁠”

*

방길두는 법원 정문 앞 택시 승강장에서 노란 개인택시 한 대가 들어오기를 이십 분째 기다리고 있었다⁠. 지붕 등에 개인이라는 글자가 박힌 새 차였다⁠. 운전석에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길두는 줄 선 사람 둘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 차 뒷문을 열었다⁠.

“⁠정곡빌딩이요⁠. 기사님⁠, 차 새 차네요⁠?⁠”

남 기사는 룸미러로 길두를 보았다⁠. 법정에서 다경 뒤에 앉아 있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데 신호 하나가 걸렸다⁠. 남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들을 돌렸다⁠.

“⁠면허 비싸다던데요⁠. 요즘 일억 가까이 한다면서요⁠? 저도 나중에 하고 싶은데⁠, 어디서 소개받으셨어요⁠?⁠”

“⁠손님⁠, 그냥 가시죠⁠.⁠”

길두는 고개를 끄덕이고 창밖을 보았다⁠. 그러다 앞 좌석 사이 컵걸이에 꽂힌 봉지 하나를 보았다⁠. 박하사탕이었다⁠. 편의점에서 봉투를 내밀던 남자의 점퍼 주머니에 있던 것과 같은 초록 봉지였다⁠.

길두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띄웠다⁠. 그리고 앞으로 몸을 내밀어 남 기사 눈앞에 들이밀었다⁠.

“⁠혹시 이분 아세요⁠? 제가 이분한테 빌린 게 있어서요⁠.⁠”

룸미러 속 남 기사의 얼굴이 하얘졌다⁠. 택시가 횡단보도 앞에서 급하게 섰다⁠. 길두의 이마가 앞 좌석 머리받이에 부딪쳤다⁠.

“⁠김 과장님을 손님이 어떻게⁠.⁠”

남 기사는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비상등을 켜고 문 잠금을 풀었다⁠.

“⁠내리세요⁠. 요금 안 받습니다⁠.⁠”

길두는 내렸다⁠. 택시가 떠난 뒤 이마를 문지르며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김 과장⁠. 박하사탕⁠. 오늘 처음으로 증거를 연애 점수보다 먼저 적었다⁠.

*

모태율은 밤 열한 시 법원 사거리 건너편 포장마차의 비닐 문을 젖혔다⁠. 다경이 혼자 앉아 있었다⁠. 우동 그릇은 손도 안 댄 채 식어 있었고 소주병이 반쯤 비어 있었다⁠.

태율은 맞은편에 앉았다⁠. 다경은 보지 않았다⁠.

“⁠너 그 사람들 거짓말하는 거 알지⁠?⁠”

“⁠몰라⁠.⁠”

“⁠알잖아⁠.⁠”

“⁠몰라야 해⁠. 내 증인이야⁠.⁠”

다경이 잔을 내려놓았다⁠. 소주가 넘쳐 손등을 적셨다⁠.

“⁠거짓말로는 안 이긴다며⁠. 순댓국집에서⁠.⁠”

“⁠나는 거짓말 안 했어⁠.⁠”

“⁠네 증인이 했지⁠. 네가 데려와서 세웠고⁠. 마지막 두 질문 안 한 걸로 네 양심은 다 챙긴 거야⁠?⁠”

태율의 손이 무릎 위에서 펜을 찾았다⁠. 펜은 사무실 책상 위에 있었다⁠. 손가락이 빈 허공을 두 번 눌렀다⁠.

다경이 일어섰다⁠. 비닐 문을 밀치고 나갔다⁠. 주인 아주머니가 국자를 든 채 태율을 보았다⁠.

“⁠둘이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요⁠. 우동 불어⁠.⁠”

“⁠이미 불었어요⁠.⁠”

태율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탁자에 놓고 따라 나갔다⁠. 등 뒤에서 아주머니가 거스름돈을 가져가라고 외쳤다⁠. 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가로등 불빛 안에서만 보이는 가는 눈이었다⁠.

골목 중간에서 다경이 돌아섰다⁠.

“⁠넌 늘 규칙 뒤에 숨어⁠. 학교 때부터⁠. 지금도⁠.⁠”

“⁠그럼 규칙 밖에서 말할게⁠.⁠”

태율은 한 걸음 다가섰다⁠. 다경이 물러서지 않았다⁠. 다경의 손이 먼저 올라와 태율의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녹색이었다⁠. 다경이 이것을 끌어당겼다⁠. 입술이 부딪쳤다⁠. 차갑고⁠, 소주 맛이 나고⁠, 다음 순간 뜨거웠다⁠. 다경의 숨이 태율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눈송이 하나가 다경 속눈썹에 내려앉았다가 둘 사이에서 녹았다⁠.

넥타이를 쥔 다경의 주먹이 풀리지 않았다⁠. 태율은 다경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외투 너머로 다경의 갈비뼈가 숨 쉴 때마다 오르내렸다⁠.

외투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다경이 먼저 입술을 뗐다⁠. 다경의 입김이 태율의 턱에 닿았다⁠.

“⁠받아⁠.⁠”

화면에 두레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여동생은 밤 근무 중에 전화하는 법이 없었다⁠. 태율은 받았다⁠.

“⁠오빠⁠.⁠”

두레의 목소리가 떨렸다⁠. 호텔 프런트 뒤편 사무실인지⁠,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그 1703호 열쇠⁠, 그날 내가 내줬어⁠. 그 남자 얼굴도 봤어⁠. 근데 지금 인사팀이 나보고 사직서 쓰래⁠.⁠”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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