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41자)

각자 내는 밥값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신가랑

모태율은 순댓국집 탁자 위⁠, 깍두기 접시와 새우젓 종지 사이에 검은 카드 한 장을 내려놓았다⁠.

서초동 법원 뒷골목 지하 1층의 이 집은 로스쿨 삼학년 때 법원 실무수습을 나오던 넉 달 동안 둘이 거의 매일 점심을 먹던 곳이었다⁠. 벽에 붙은 메뉴판의 값만 천 원씩 올랐고 나머지는 그대로였다⁠. 뚝배기 바닥에서 국물이 끓어오르는 소리⁠, 들깻가루 냄새⁠, 열 시 넘으면 소주잔 부딪는 소리가 벽을 타고 내려왔다⁠.

다경은 카드를 보다가 태율을 보았다⁠. 은색으로 박힌 태진그룹 로고가 형광등을 받아 번들거렸다⁠.

“⁠이게 뭐야⁠?⁠”

“⁠회장님이 너랑 밥 먹으래⁠. 네가 뭘 아는지 알아 오래⁠. 사진 속 남자 이야기를 혜온 씨한테 들었는지⁠. 밥값은 이걸로 내래⁠.⁠”

다경은 숟가락을 든 채 한참 태율을 보았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너무 커서 옆 탁자의 등산복 차림 아저씨 둘이 돌아보았다⁠.

“⁠그걸 나한테 그대로 말하면 어떡해⁠?⁠”

“⁠말 안 하고 밥 먹으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이상한 게 문제가 아니라⁠, 너 지금 네 의뢰인 쪽 돈 내는 사람을 배신하는 거야⁠.⁠”

“⁠배신 안 했어⁠. 밥 먹으러 나왔잖아⁠.⁠”

태율이 수저통에서 숟가락을 꺼내 냅킨에 한 번 닦았다⁠. 학부 때부터 하던 버릇이었다⁠. 다경은 이것을 보다가 웃음을 거두었다⁠.

“⁠그래서 회장한테 뭐라고 할 건데⁠?⁠”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거짓말이잖아⁠.⁠”

“⁠모른다고 할 거야⁠. 내가 모르니까⁠. 넌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할 거고⁠.⁠”

다경은 뚝배기에 들깻가루를 한 숟가락 더 넣었다⁠. 국물이 흐려졌다⁠. 이것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럼 정하자⁠. 법정에서는 끝까지 붙는다⁠.⁠”

“⁠당연하지⁠.⁠”

“⁠서로 의뢰인 비밀은 안 묻는다⁠.⁠”

“⁠좋아⁠.⁠”

“⁠거짓말로는 안 이긴다⁠.⁠”

태율의 숟가락이 뚝배기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태율은 다경을 보았다⁠. 다경이 이 말을 할 때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지 태율도 알았다⁠. 평창동 새벽 두 시의 전화⁠.

“⁠그건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어⁠.⁠”

“⁠그럼 네가 정할 수 있는 데까지만⁠.⁠”

“⁠좋아⁠. 그리고 하나 더⁠.⁠”

태율이 검은 카드를 손가락 끝으로 밀어 탁자 가장자리까지 보냈다⁠.

“⁠밥값은 각자 낸다⁠.⁠”

계산대 앞에서 둘은 동시에 제 카드를 내밀었다⁠. 주인 할머니가 두 장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눠서는 안 돼요⁠. 기계가 하나라⁠.⁠”

“⁠그럼 제 걸로 먼저 반 긁고⁠.⁠”

“⁠기계가 반을 몰라요⁠.⁠”

두 사람이 카드를 든 채 서로를 노려보는 사이⁠, 안쪽 구석 탁자에서 누군가 일어섰다⁠. 모자를 눌러쓴 방길두가 순대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제가 낼게요⁠! 오늘 같은 날은 기념해야죠⁠!⁠”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들깻가루 두 번째 넣으실 때부터요⁠. 대표님⁠, 밥값 약속 일 대 일입니다⁠.⁠”

결국 길두가 냈다⁠. 계단을 올라가며 태율은 법인카드를 카드 지갑에 다시 꽂았다⁠. 쓰지 않은 카드는 제 카드들과 떨어진 맨 바깥 칸에 들어갔다⁠. 돌아보니 다경이 이 손을 보고 있었다⁠.

*

십일월 중순⁠, 1심 첫 변론기일이 열렸다⁠. 가정법원 3층의 작은 법정은 방청석이 텅 비어 있었다⁠. 이혼 재판은 사생활을 지키려고 문을 닫고 열렸다⁠. 재판장은 사전처분을 정했던 이 판사였다⁠. 오늘도 안경을 이마에 올리고 있었다⁠.

다경은 피고석에서 원고석의 태율을 보았다⁠. 법정의 원고석과 피고석은 서로 마주 보게 놓여 있어서⁠, 재판장 다음으로 가장 오래 보게 되는 얼굴이 맞은편 변호사였다⁠. 태율은 오늘 넥타이를 짙은 녹색으로 바꿔 매고 왔다⁠. 일곱 해 동안 재판장이 남색 말고 다른 색을 맨 것을 두 번 보았다⁠. 둘 다 재판장이 질 것 같은 날이었다⁠.

“⁠원고 쪽 증인 신청입니다⁠.⁠”

태율이 일어섰다⁠.

“⁠원고 집안에서 스물두 해 일한 가사관리인 윤 여사⁠, 그리고 피고의 운전기사로 네 해 일한 남 기사를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피고가 혼인 중에 집을 비우고 아이를 돌보지 않은 일⁠, 그리고 태진호텔에 여러 차례 드나든 일을 증언할 것입니다⁠.⁠”

혜온의 어깨가 굳었다⁠. 다경은 탁자 아래로 혜온의 손등을 한 번 눌렀다⁠. 윤 여사는 효림을 키운 사람이었다⁠. 남 기사는 혜온이 꽃시장에 갈 때마다 차를 몰아 주던 사람이었다⁠.

다경이 일어섰다⁠.

“⁠피고 쪽은 원고에게 재산명시를 신청합니다⁠. 원고가 가진 재산을 빠짐없이 법원에 내놓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한남동 빌딩을 재단으로 넘긴 것은 재산분할을 피하려는 사해행위이므로⁠, 그 이전을 되돌리는 소송을 이 사건과 함께 심리해 주십시오⁠.⁠”

재판장이 안경을 내리고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둘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증인신문은 십이월 첫째 주로 잡겠습니다⁠.⁠”

법정을 나오며 다경은 태율 옆을 지나쳤다⁠. 태율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말했다⁠.

“⁠녹색 넥타이는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썼어⁠.⁠”

“⁠두 번 봤잖아⁠.⁠”

“⁠세 번째야⁠.⁠”

복도 끝 자판기 앞에서 혜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율무차 버튼을 눌러 놓고 컵이 다 차도록 꺼내지 않았다⁠.

“⁠윤 여사님이 그럴 리가 없어요⁠. 효림이 기저귀를 저보다 먼저 갈아 본 분이에요⁠.⁠”

“⁠사람이 증인석에 서는 이유는 여러 가지예요⁠. 혹시 짚이는 데 있어요⁠?⁠”

혜온은 그제야 컵을 꺼냈다⁠. 뜨거운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참 김만 보다가 말했다⁠.

“⁠아드님이요⁠. 작년에 다니던 회사에서 잘렸어요⁠. 대출이 많다고 했어요⁠. 봄에 저한테 돈 빌리러 오신 적도 있어요⁠. 회장님 댁 사람한테는 말 못 하겠다고⁠, 사모님한테만 하는 말이라고요⁠.⁠”

“⁠빌려 드렸어요⁠?⁠”

“⁠효림이 돌 반지를 팔아서 드렸어요⁠. 금은방에서 생각보다 값을 많이 쳐줬어요⁠.⁠”

다경은 수첩을 꺼내려다 말고 이 말을 그대로 외웠다⁠. 금은방⁠, 아들⁠, 대출⁠. 혜온이 율무차를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달다고 했다⁠.

*

같은 날 오후⁠, 방길두는 정곡빌딩 지하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두 개를 고르고 있었다⁠. 참치마요와 전주비빔 사이에서 오래 망설이는데⁠, 누군가 길두의 옆에 섰다⁠. 회색 점퍼를 입고 목에 아무것도 걸지 않은 마흔 줄의 남자였다⁠. 이 사람은 삼각김밥 대신 길두의 손목시계를 보았다⁠.

“⁠방길두 씨죠⁠? 염 변호사님 사무실⁠.⁠”

“⁠네⁠. 제가 유명한가요⁠?⁠”

남자가 점퍼 안쪽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삼각김밥 진열대 위에 올려놓았다⁠. 봉투가 두툼했다⁠.

“⁠어려운 일 아닙니다⁠. 사무실 서류 몇 장⁠, 휴대폰으로 사진만 찍어 주시면 돼요⁠. 오백 들었습니다⁠. 다음 달에 또 드리고요⁠.⁠”

길두는 봉투를 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봉투를 보았다⁠. 봉투를 집어 들었다⁠.

“⁠사진 한 장 같이 찍으실래요⁠? 저 이런 거 처음 받아 봐서 기념으로요⁠.⁠”

남자가 웃지도 않고 돌아섰다⁠. 길두는 이미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셔터 소리가 세 번 났다⁠. 남자가 편의점 유리문을 밀고 나가는 옆얼굴⁠, 계단 쪽으로 꺾어지는 뒷모습⁠, 그리고 길두의 점퍼 주머니에서 반쯤 삐져나온 박하사탕 봉지⁠.

오 분 뒤 길두는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봉투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있었다⁠. 지문이 묻지 않게 비닐장갑까지 낀 채였다⁠.

“⁠대표님⁠! 증거 정리 끝났습니다⁠!⁠”

다경은 봉투를 보고 일어섰다⁠.

“⁠그걸 왜 받아⁠?⁠”

“⁠안 받으면 증거가 없잖아요⁠!⁠”

“⁠받으면 우리가 받은 게 되잖아⁠!⁠”

둘은 봉투를 사이에 두고 한참 소리를 질렀다⁠. 결국 다경은 봉투를 뜯지 않은 채 지퍼백에 넣고⁠, 길두가 찍은 사진 세 장을 출력해 같이 사무실 금고에 넣었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돌려줄 곳이 생겼다⁠.

“⁠그 사람 주머니에 박하사탕 있었어요⁠.⁠”

길두가 금고 문을 닫으며 말했다⁠. 다경은 손을 멈췄다⁠.

*

밤 열 시⁠, 다경은 한남동 붉은 벽돌 빌딩의 옥상 문을 열었다⁠. 경비 아저씨는 길두와 장기 두 판을 둔 사이라 열쇠를 순순히 내주었다⁠. 재판부에 낼 사진이 필요했다⁠. 혜온이 흙을 날라 꾸몄다는 정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남의 말 말고 제 눈으로 봐야 했다⁠.

옥상은 생각보다 넓었다⁠. 나무 데크 위에 벽돌로 쌓은 화단이 다섯 줄 있었고⁠, 라벤더와 로즈마리가 십일월 찬바람에 반쯤 말라 있었다⁠. 화단 끝에 사람 키만 한 산수유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줄기에 손바닥만 한 나무 팻말이 감겨 있었는데⁠, 크레파스로 그린 토끼 한 마리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 효림이 태어난 해 봄이었다⁠.

산수유 아래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해⁠?⁠”

“⁠내 의뢰인이 숨긴 게 어떻게 생겼는지 보러 왔어⁠.⁠”

태율이 일어나지 않고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털었다⁠. 다경은 앉지 않고 산수유 팻말을 휴대폰으로 찍었다⁠. 플래시가 터지자 토끼 그림이 하얗게 날아갔다⁠.

“⁠흙을 다 혜온 씨가 날랐대⁠. 이 빌딩 사고 첫해 봄에⁠. 위층 사무실 사람들이 옥상 카페 생긴 줄 알고 올라왔다가 흙투성이 여자 하나 보고 내려갔대⁠. 그다음 해에 이 옥상 덕에 임대료가 올랐고⁠.⁠”

“⁠기여했다는 거지⁠. 재산을 불리는 데⁠.⁠”

“⁠기여한 거지⁠.⁠”

바람이 불었다⁠. 다경이 어깨를 움츠리자 태율이 목도리를 풀어 다경에게 내밀었다⁠. 회색 캐시미어였다⁠. 받지 않자 일어서서 직접 다경 목에 감았다⁠. 매듭을 짓는 태율의 손가락이 턱 아래에 닿았다⁠. 차가웠다⁠.

다경은 고개를 들었다⁠. 태율의 얼굴이 생각보다 가까웠다⁠. 입김이 섞였다⁠. 로즈마리 마른 냄새와 태율의 비누 냄새가 같이 났다⁠. 태율이 매듭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계단 쪽에서 손전등 불빛이 쏟아졌다⁠.

“⁠아이고⁠, 두 분 다 계셨네⁠.⁠”

경비 아저씨였다⁠. 두 사람은 한 걸음씩 물러섰다⁠. 아저씨는 아무것도 못 본 얼굴로 손전등을 내렸다⁠.

“⁠지금 지하에 사람들이 짐을 빼는데⁠, 혹시 아시는 일인가 해서요⁠. 재단 사람들이라는데⁠, 밤에 이삿짐 차 부르는 건 처음 봐서⁠.⁠”

*

지하 창고는 형광등이 반쯤 나가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 비닐 포장재가 흩어져 있고⁠, 셔터 너머로 그림 같은 물건을 흔들림 없이 실어 나르는 냉동탑차만 한 무진동 트럭이 후진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장갑 낀 남자 넷이 커다란 액자 하나를 들고 셔터 쪽으로 걷고 있었다⁠. 가로가 두 걸음은 되는 그림이었다⁠. 포장 담요 한쪽이 들려 이 아래로 푸른색이 보였다⁠. 물감을 손바닥으로 문지른 것 같은⁠, 깊은 바다 같은 푸른색이었다⁠.

다경은 이 그림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었다⁠. 혜온의 휴대폰 속⁠, 성북동 거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이었다⁠. 효림이 태어나던 해 겨울에 부부가 같이 경매에 나가 산 것이라고 했다⁠. 남편이 망설이는 사이 혜온이 손을 들었다고⁠.

다경은 트럭 앞으로 걸어가 섰다⁠. 장갑 낀 남자들이 멈췄다⁠.

“⁠그 그림 내려놓으세요⁠. 이혼 소송에서 나눌 재산입니다⁠.⁠”

트럭 옆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쉰 줄에 은테 안경을 쓰고 무릎까지 오는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다경은 목소리를 듣기 전에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경제 기사 사진마다 회장 뒤에 반 걸음 떨어져 서 있던 얼굴⁠, 태진그룹 비서실장이었다⁠.

“⁠염 변호사님이시죠⁠. 이건 재단 소유 건물의 창고에 있던 재단 물건입니다⁠. 회장님 댁으로 옮기는 것뿐이에요⁠.⁠”

비서실장은 공손하게 말했다⁠. 그리고 다경을 지나쳐⁠, 뒤에 서 있는 태율에게 몸을 돌렸다⁠.

“⁠모 변호사님⁠, 이 그림 회장님 겁니다⁠. 염 변호사님께 비켜 달라고 말씀 좀 해 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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