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51자)

조율사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신가랑

염다경은 혜온의 입술이 열리는 것을 외투 자락 너머로 보고 있었다⁠. 효림이 엄마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고⁠, 노란 비옷 소매가 바스락거렸다⁠.

“⁠그 사람은 제 남편의 오랜 친구예요⁠.⁠”

플래시가 다시 터졌다⁠. 혜온은 눈을 감지 않았다⁠.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게 다예요⁠. 아이 앞에서는 더 묻지 마세요⁠.⁠”

혜온이 돌아섰다⁠. 기자들이 따라붙으려 하자 길두가 골목에 세워 둔 차 문을 열어젖히며 큰 소리로 외쳤다⁠.

“⁠비켜 주세요⁠, 애기 멀미해요⁠! 지난번에 토했어요⁠!⁠”

효림이 고개를 들고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 안 토했는데⁠.⁠”

기자 몇이 웃음을 터뜨렸고⁠, 이 틈에 혜온과 아이가 뒷자리로 들어갔다⁠. 다경은 차에 오르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대문 안쪽에서 기세만이 박하사탕 껍질을 기사 손에 쥐여 주고 있었다⁠. 태율은 골목 가로등 아래 혼자 서서 외투를 다시 입지 않고 팔에 걸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기사 제목이 바뀌어 있었다⁠. 「⁠태진가 며느리 “⁠남편 친구⁠”⁠… 시댁 “⁠더 나쁘다⁠”⁠」

*

토요일 밤⁠, 서초역 사거리 오피스텔 903호 바닥에 크레파스가 흩어져 있었다⁠. 효림은 엎드려서 도화지에 사람 둘을 그리고 있었다⁠. 하나는 긴 머리에 입을 크게 벌렸고⁠, 하나는 목에 파란 줄을 길게 늘어뜨렸다⁠.

“⁠이건 누구야⁠?⁠”

“⁠변호사 이모⁠. 이건 넥타이 삼촌⁠. 둘이 싸워⁠.⁠”

“⁠왜 싸우는데⁠?⁠”

효림이 크레파스로 두 사람 사이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주황색이었다⁠.

“⁠귤 때문에⁠.⁠”

다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혜온이 부엌에서 웃음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아홉 시에 토끼 베개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혜온은 두 걸음짜리 부엌 조리대에 기대 서서 보리차를 따랐다⁠. 컵 두 개에서 김이 올라왔다⁠. 오래 컵만 보다가⁠, 아이가 깨지 않도록 낮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태진호텔 라운지 피아노를 조율하는 사람이에요⁠. 남편이 대학 때부터 좋아한 사람이고요⁠.⁠”

다경은 컵을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회장님은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결혼을 서두르셨대요⁠. 저는 결혼하고 두 해째 겨울에 알았어요⁠. 남편이 어느 밤 거실 바닥에 앉아서 저한테 다 말했어요⁠. 그날 둘이 약속했어요⁠. 효림이한테는 엄마 아빠로⁠, 서로한테는 친구로 살자고⁠.⁠”

“⁠그럼 그날 1703호는요⁠?⁠”

“⁠남편이 늘 쓰던 방이에요⁠. 회장님 쪽 사람들이 두 사람이 아직 만난다는 걸 알아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갔어요⁠. 서울을 떠나라고⁠, 남편 얼굴 보지 말고 당분간 사라지라고요⁠. 남편은 회장님이 붙인 사람들이 따라다니니까 못 가요⁠. 저밖에 없었어요⁠.⁠”

창밖에서 신호등이 초록에서 빨강으로 바뀌었다⁠. 다경은 머릿속으로 조정실 탁자를 그렸다⁠. 이 이야기 한 줄이면 외도 주장은 이 자리에서 무너졌다⁠. 위로금 이억이 아니라 판 전체가 뒤집혔다⁠.

“⁠혜온 씨⁠, 이걸 법정에서 말하면⁠.⁠”

“⁠안 돼요⁠.⁠”

혜온이 컵을 내려놓았다⁠. 화가 나면 더 천천히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 얘기를 쓰시면 변호사님을 바꿀 거예요⁠. 효림이 아빠가 법정에서 그 얘기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도 아무 잘못 없어요⁠. 저는 제 손으로 이길게요⁠. 남의 인생을 팔아서 말고요⁠.⁠”

다경은 가방에서 사진 넉 장의 사본을 꺼냈다⁠. 1703호 문 앞의 혜온⁠, 혜온 어깨에 가린 남자의 반쪽 얼굴⁠. 이것을 혜온 앞에서 반으로 접어 서랍에 넣었다⁠.

“⁠그럼 다른 데서 이겨요⁠. 시간은 좀 더 걸려요⁠.⁠”

“⁠얼마나요⁠?⁠”

“⁠상대가 얼마나 숨겼느냐에 달렸죠⁠.⁠”

*

두 번째 조정기일은 시월 마지막 월요일이었다⁠. 조정실 4호 창가의 귤 바구니는 그대로였고⁠, 조정위원은 오늘도 양쪽 변호사 앞에 귤을 하나씩 굴려 놓았다⁠.

“⁠두 분⁠, 오늘은 반말 안 하실 거죠⁠?⁠”

“⁠네⁠.⁠”

또 동시였다⁠. 조정위원이 고개를 저으며 귤을 깠다⁠.

태율이 서류 한 장을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

“⁠신청인 쪽 수정안입니다⁠. 위로금 오억⁠, 면접교섭은 한 달에 두 번⁠. 양육은 아버지⁠.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피신청인은 혼인 중에 알게 된 신청인 가족의 사생활에 대해 앞으로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다경은 이 마지막 줄을 두 번 읽었다⁠.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소송을 낸 남편이 아내의 입을 막는 대가를 치르겠다고 했다⁠. 이 소송을 정말 두려워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 한 줄에 적혀 있었다⁠.

다경은 이것을 안다는 얼굴을 하지 않으려고 귤을 집어 들었다⁠.

“⁠위로금이 두 배 반이 됐네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정입니다⁠.⁠”

“⁠그 정⁠, 한남동에도 좀 있나요⁠?⁠”

태율의 펜이 멈췄다⁠.

다경은 휴대폰을 탁자에 놓고 사진 한 장을 띄웠다⁠. 한남동 큰길에서 한 블록 들어간 붉은 벽돌 빌딩 입구였다⁠. 현관 옆 대리석에 반짝이는 새 놋쇠 현판이 박혀 있었다⁠. 「⁠재단법인 태진문화재단⁠」

“⁠한남동 일곱 층짜리 빌딩입니다⁠. 이천이십삼 년⁠, 혼인 중에 부사장님 배당금으로 산 건물이고요⁠. 옥상 정원은 제 의뢰인이 직접 흙을 날라 꾸몄습니다⁠. 그런데 소송 내기 두 달 전인 지난 팔월에 이 재단으로 넘어갔더군요⁠. 현판 단 날은 경비 아저씨가 기억합니다⁠. 비가 와서 놋쇠에 물방울이 맺혔대요⁠.⁠”

이 사진은 길두가 찍었다⁠. 혜온이 지나가듯 말한 “⁠우리 빌딩 옥상⁠” 한마디를 듣고⁠, 길두는 사흘 동안 한남동 골목을 돌았다⁠. 1층 카페 사장에게 커피를 네 잔 사 마셨고⁠, 경비실 아저씨와는 장기를 두 판 두었다⁠. 두 판 다 졌다고 했다⁠.

“⁠나눌 재산을 빼돌리려고 남한테 넘긴 거라면⁠, 그 이전을 되돌려 달라고 따로 소송을 낼 수 있습니다⁠. 재산분할을 지키려는 사해행위 취소입니다⁠. 상대 대리인께서도 이 빌딩 처음 보시는 얼굴이네요⁠.⁠”

태율은 사진을 보고 있었다⁠. 기 부사장이 커프스단추에서 손을 떼고 처음으로 탁자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이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십 분만 쉬었다 하겠습니다⁠.⁠”

태율이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다경은 반쯤 열린 문틈으로 태율의 등을 보았다⁠. 창가에 서서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고⁠,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듣기만 하다가 한 번⁠, 알겠습니다⁠, 하고 끊었다⁠. 돌아온 자리에 앉기 전에 넥타이를 한 번 바로잡았다⁠.

“⁠신청인 쪽은 그 빌딩에 대해 지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없으신 거예요⁠, 못 들으신 거예요⁠?⁠”

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펜을 양복 안주머니에 꽂았다⁠. 맞은편 변호사가 말하는 동안 펜을 손에서 놓는 것을 다경은 일곱 해 동안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조정위원이 귤껍질을 정리하며 한숨을 쉬었다⁠.

“⁠두 분⁠, 여기서는 안 되겠네요⁠. 조정은 불성립으로 하겠습니다⁠. 재판부로 올라가세요⁠.⁠”

*

사람들이 다 나간 뒤에도 다경은 서류를 천천히 챙겼다⁠. 태율도 나가지 않았다⁠. 조정실 문이 닫히자 복도의 소독약 냄새가 끊기고 귤 냄새만 남았다⁠.

“⁠너도 몰랐지⁠, 빌딩⁠.⁠”

“⁠몰랐어⁠.⁠”

“⁠네 의뢰인이 너한테 숨긴 거야⁠.⁠”

“⁠의뢰인이 숨긴 게 아니라 의뢰인 돈 내는 사람이 숨긴 거겠지⁠.⁠”

태율이 넥타이 매듭을 손가락으로 조금 늦췄다⁠. 다경은 이 손을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결선 날 밤 기억나⁠?⁠”

태율이 물었다⁠. 다경은 서류 가방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학교 앞 포장마차⁠. 네가 소주 세 병 비우고 할 말 있다더니 끝까지 안 했지⁠. 나는 막차 끊길까 봐 먼저 일어났고⁠.⁠”

“⁠했어⁠. 네가 일어나는 동안⁠.⁠”

“⁠못 들었어⁠.⁠”

“⁠그래⁠.⁠”

태율은 귤 하나를 집어 꼭지에 엄지를 넣었다⁠. 껍질이 한 줄로 이어지다가⁠, 처음으로 중간에서 끊어졌다⁠. 끊어진 껍질을 내려다보았다⁠.

문이 두 번 울렸다⁠. 길두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대표님⁠, 재판부 배정 나왔어요⁠. 그리고 두 분 지금 삼 분째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제가 재고 있었어요⁠.⁠”

*

모태율이 법원 정문 계단을 내려갔을 때 기 부사장은 화단 옆에 혼자 서 있었다⁠. 기사가 차를 돌려 오는 사이였다⁠. 시월 끝의 바람이 화단의 국화 대를 한쪽으로 눕혔고⁠, 부사장은 이 꽃을 내려다보며 커프스단추를 돌리고 있었다⁠.

“⁠부사장님⁠, 한남동 빌딩 알고 계셨습니까⁠?⁠”

“⁠제 이름으로 산 건물인데요⁠. 재단으로 넘어간 건 서명할 때 알았습니다⁠.⁠”

“⁠직접 서명하셨습니까⁠?⁠”

“⁠아버지가 내미는 종이에 서명 안 해 본 적이 없어서요⁠.⁠”

부사장이 웃었다⁠. 입꼬리만 움직이는 웃음이었다⁠. 태율은 펜을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

“⁠부사장님⁠, 제 의뢰인은 부사장님입니다⁠. 부사장님이 저한테 숨기시면 저는 법정에서 모르는 채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건 안 합니다⁠.⁠”

“⁠그럼 아는 채로는요⁠?⁠”

“⁠그건 더 안 합니다⁠.⁠”

검은 세단이 화단 앞에 섰다⁠. 기사가 내려 뒷문을 열었다⁠. 부사장은 차에 오르려다 문틀을 잡고 멈췄다⁠. 그리고 태율을 보지 않고⁠, 화단의 국화를 보면서 말했다⁠.

“⁠변호사님⁠. 혜온이는 바람 같은 거 피울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문이 닫혔다⁠. 차가 정문을 빠져나가는 동안 태율은 계단에 서 있었다⁠. 법원에 낸 소장 첫 장의 청구 원인과 정반대의 말이었다⁠. 이 말을 받아 둘 곳이 그에게는 없었다⁠.

*

모태율은 광화문 태진타워 3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복도 바닥은 회색 카펫이었고⁠, 발소리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회장실 문 앞의 비서가 태율을 보고 일어서기도 전에 안에서 문이 열렸다⁠.

기세만은 창가 책상이 아니라 소파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박하사탕 그릇과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바둑판 위에는 돌 대신 서류 봉투 하나가 얹혀 있었다⁠.

“⁠앉게⁠.⁠”

태율은 앉았다⁠. 소파 가죽이 몸을 천천히 받았다⁠.

“⁠빌딩은 신경 쓰지 말게⁠. 재단 일은 재단 변호사들이 따로 막을 거야⁠. 자네는 자네 일만 하면 되네⁠.⁠”

“⁠제 일이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기세만이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이 사건 끝나면 우리 그룹 법무실장 자리가 비네⁠. 백상 파트너도 같이 달아 주지⁠. 서른셋에 둘 다 가진 사람은 이 나라에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조건이 있으시겠지요⁠.⁠”

“⁠조건은 그 봉투 안에 있네⁠.⁠”

태율은 봉투를 열었다⁠. 사진 한 장이 나왔다⁠. 흑백에 가까운 감시 카메라 화면이었다⁠. 엘리베이터 바닥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이 귤껍질을 한 줄로 늘어뜨리고⁠, 다른 한 사람이 이 귤 반쪽을 받고 있었다⁠. 화면 귀퉁이에 날짜와 시각이 찍혀 있었다⁠. 밤 열 시 십사 분⁠.

“⁠정곡빌딩 관리 회사가 우리 계열이네⁠. 몰랐나⁠?⁠”

몰랐다⁠. 태율은 이 건물에서 다섯 해를 일했다⁠.

“⁠염 변호사가 자네 첫사랑이라던데⁠. 학교 동기들이 다 알더구먼⁠.⁠”

기세만이 어금니로 사탕을 깨물었다⁠. 이 소리가 바둑판 위에서 울렸다⁠.

“⁠그 사람이 무엇을 아는지 알아 오게⁠. 사진 속 남자 이야기⁠, 며느리가 그 사람한테 했는지 안 했는지⁠.⁠”

기세만이 외투 안주머니에서 검은 카드 한 장을 꺼내 사진 옆에 놓았다⁠. 태진그룹 로고가 은색으로 박힌 법인카드였다⁠.

태율은 카드에 손을 대지 않았다⁠. 무릎 위에서 펜을 두 번 딸깍이자 기세만의 눈이 이 손가락으로 내려왔다⁠.

“⁠동생이 우리 호텔 프런트에 있지⁠? 두레라고 했던가⁠? 일은 할 만하다던가⁠?⁠”

다섯 해 전 두레의 이력서를 태진호텔 인사팀에 넣어 준 것이 이 방의 주인이었다⁠. 이때 태율은 이것을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저녁에 그 사람이랑 밥 먹게⁠. 밥값은 내가 내지⁠.⁠”

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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