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25자)

금요일 여섯 시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신가랑

모태율은 기세만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베개를 한 번 더 외투 안쪽으로 당겨 안았다⁠. 빗물이 넥타이 매듭을 타고 셔츠 안으로 스며들었다⁠.

“⁠효림 양 손에 갑니다⁠, 회장님⁠. 들고 가는 사람이 어머니일 뿐입니다⁠.⁠”

“⁠자네가 내 집 대문을 열어 주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베개 하나입니다⁠. 사건은 하나도 안 내드렸습니다⁠.⁠”

기세만이 박하사탕을 깨물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태율은 이 손을 보았다⁠. 검버섯이 앉은 손등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굴렀다⁠. 회장의 손을 그냥 두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베개를 넘겼다⁠. 기세만은 이것을 기사에게 건넸고⁠, 기사는 베개를 승합차 쪽으로 들고 갔다⁠.

혜온의 두 손이 빈 채로 내려갔다⁠.

“⁠법대로 하게⁠, 염 변호사⁠.⁠”

기세만이 차에 오르며 말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태율을 한 번 더 보았다⁠. 저울에 올려 무게를 다는 눈이었다⁠.

다경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태율 앞에 섰다⁠.

“⁠베개 하나 줬다가 뺏긴 거⁠, 그거 위로라고 한 거야⁠?⁠”

“⁠아니⁠. 판사한테 할 말 하나 생긴 거야⁠.⁠”

태율은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고 택시를 잡으러 언덕을 내려갔다⁠. 다경은 이 말을 밤새 곱씹었다⁠.

*

이틀 뒤 다경은 사무실에서 두 블록 떨어진 오피스텔 9층에 방 하나를 얻었다⁠. 방 한 칸에 두 걸음짜리 부엌이 붙어 있고⁠, 창으로 서초역 사거리의 신호등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보증금은 다경이 다섯 해 부은 적금에서 나갔다⁠. 아이를 데려오려면 아이가 잘 방부터 있어야 했다⁠.

길두는 바닥에 주저앉아 조립식 아이 침대의 설명서를 거꾸로 들고 있었다⁠.

“⁠대표님⁠, 이거 사무실 경비로 처리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제 연말 보너스가 지금 이 방 보증금에 들어간 거예요⁠.⁠”

“⁠너 보너스 받은 적 없잖아⁠.⁠”

“⁠네⁠. 앞으로도 없겠네요⁠.⁠”

길두가 육각렌치를 돌리자 침대 머리판이 끼익 소리를 내며 섰다⁠. 혜온은 창가에 서서 유리에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이틀 밤을 다경의 사무실 소파에서 잤다⁠.

“⁠변호사님 돈이죠⁠, 이거⁠?⁠”

“⁠판결 나면 받을 거예요⁠. 이자까지 쳐서요⁠.⁠”

혜온은 대답 대신 장바구니에서 작은 화분 하나를 꺼내 창틀에 올렸다⁠. 꽃집을 접을 때 하나 남겨 둔 것이라고 했다⁠. 길두가 침대를 다 세우고 일어나며 손바닥을 펼쳤다⁠. 나사 두 개가 남아 있었다⁠.

*

엿새 뒤 월요일⁠, 양재동 가정법원 심문실은 조정실보다 좁았고 창이 없었다⁠. 재판장은 마흔 중반의 여자 판사였는데⁠, 서류를 넘기다가 안경을 이마 위로 밀어 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판결 전에 급한 것부터 정해 달라는 사전처분 심문이었다⁠. 다경이 신청한 것은 하나⁠, 엄마가 아이를 만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태율은 피신청인 편 자리에서 다경을 보고 있었다⁠. 다경은 일어서서 말할 때 왼손을 탁자 모서리에 짚었다⁠. 일곱 해 전 모의재판 결선에서도 그랬다⁠. 탁자를 짚은 왼손 엄지가 하얗게 눌려 있었다⁠.

“⁠신청인 하혜온의 손을 봐 주십시오⁠.⁠”

혜온이 일어나 두 손을 재판장 쪽으로 펼쳤다⁠. 엄지와 검지 사이 굳은살⁠, 오른쪽 손목 안쪽의 동전만 한 화상 자국⁠.

“⁠꽃가위 굳은살입니다⁠. 화상은 효림 양이 돌 무렵 이유식 냄비를 엎었을 때 아이 대신 맞은 자국이고요⁠. 여섯 해 동안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운 손입니다⁠. 피신청인 쪽에 이 일을 대신한 손이 있다면 내놓으라고 하십시오⁠.⁠”

태율은 펜을 두 번 딸깍였다⁠.

“⁠재판장님⁠, 신청인은 혼인 중 부정행위로 가정을 깬 사람입니다⁠. 지금 거처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 댁에서 원래 키우던 가사관리인 손에 안정적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다경이 외투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플라스틱 고리에 「⁠903⁠」이라고 적힌 오피스텔 열쇠였다⁠.

“⁠거처는 지난 목요일부터 정해졌습니다⁠. 서초역 사거리 9층⁠, 아이 침대도 들였습니다⁠. 저희 막내가 조립했는데 나사가 두 개 남았습니다⁠.⁠”

재판장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태율은 열쇠를 보았다⁠. 다경의 열쇠고리에 늘 달려 있던 작은 은색 저울 장식이 거기 같이 매달려 있었다⁠. 제 집 열쇠에서 떼어 온 것이었다⁠.

“⁠안정적으로라고 하셨습니까⁠?⁠”

다경이 태율을 보지 않고 재판장을 보며 말했다⁠.

“⁠지난주 수요일 새벽 두 시⁠, 평창동에서 제 의뢰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가 베개를 찾으며 울다 지쳐서⁠, 가사관리인이 몰래 엄마 목소리라도 들려주려고 건 전화였습니다⁠. 혜온 씨가 전화로 자장가를 두 번 불러 주고 나서야 아이가 잠들었습니다⁠. 상대 대리인께서 확인해 주시죠⁠.⁠”

재판장이 안경을 밀어 올리고 태율을 보았다⁠.

“⁠사실입니까⁠, 피신청인 대리인⁠?⁠”

태율은 수요일 아침에 윤 여사와 통화했다⁠. 이때 윤 여사는 목소리를 낮춰 이 새벽 일을 털어놓고⁠, 회장님께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었다⁠. 아니라고 하면 이 방에서는 이걸로 끝이었다⁠. 윤 여사도 아니라고 할 것이었다⁠.

다경이 처음으로 태율을 보았다⁠. 탁자를 짚은 손가락이 조금 더 하얘졌다⁠.

“⁠사실입니다⁠.⁠”

방이 조용해졌다⁠. 혜온이 고개를 숙였고⁠, 다경의 왼손이 탁자에서 떨어졌다⁠.

재판장은 이 자리에서 정했다⁠. 매주 금요일 저녁 여섯 시부터 일요일 저녁 여섯 시까지 아이는 엄마와 지낸다⁠. 아버지 쪽은 아이 옷과 베개를 함께 보낸다⁠. 성북동 집에 남은 혜온의 옷가지는 사흘 안에 내준다⁠.

복도로 나왔을 때 태율의 휴대폰에 비서실장 이름이 떴다⁠. 태율은 받지 않았다⁠.

*

같은 날 오후 네 시⁠, 염다경 법률사무소의 전화가 연달아 울렸다⁠. 정곡빌딩 6층의 열두 평짜리 사무실이었다⁠. 책상 셋에 회의 탁자 하나⁠, 창틀에는 길두가 키우는 다육 화분 넷이 줄지어 있었다⁠.

길두가 휴대폰 화면을 다경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태진가 맏며느리⁠, 호텔 스위트룸 밀회⁠」

1703호 문 앞 사진이었다⁠. 혜온의 얼굴에 모자이크가 씌워져 있었지만 너무 얇아서 눈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기사 아래 댓글이 삼천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조정실에서 본 사진이 그대로 나갔어요⁠. 조정실 안에 있던 사람은 여섯인데요⁠.⁠”

“⁠여섯 중에 기사 흘릴 사람은 하나밖에 없어⁠. 거기 돈을 대는 사람⁠.⁠”

전화가 또 울렸다⁠. 길두가 받았다⁠.

“⁠네⁠, 염다경 법률사무소입니다⁠. 아⁠, 네⁠. 상담 취소요⁠? 네⁠, 네⁠. 저희 대표님이 남의 가정을 깨는 여자 편을 든다고요⁠?⁠”

다경이 고개를 들었다⁠. 길두가 다경을 한 번 보더니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죄송합니다⁠, 여기 짜장면집인데요⁠. 잘못 거셨어요⁠.⁠”

길두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육 화분에 물을 주는 척했다⁠. 다경이 웃음을 참으려다 실패했다⁠. 이날 오후에만 상담 예약 세 건이 취소되었다⁠.

*

밤 열 시⁠, 다경은 사무실 불을 끄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두 대 가운데 한 대에는 석 달째 점검 중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남은 한 대가 22층에서 내려와 6층에서 열렸고⁠, 안에는 남색 넥타이를 반쯤 푼 태율이 서 있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다가⁠, 5층과 4층 사이에서 덜컥 소리를 내며 멈췄다⁠. 천장 형광등이 한 번 깜박이고 비상등만 남았다⁠.

태율이 비상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에서 관리실 경비의 졸린 목소리가 나왔다⁠.

“⁠아⁠, 또요⁠? 기사님 부를게요⁠. 삼십 분쯤 걸려요⁠.⁠”

“⁠또라니요⁠?⁠”

“⁠이번 주만 세 번째예요⁠.⁠”

스피커가 끊겼다⁠. 다경은 벽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져 앉았다⁠. 태율은 서 있다가⁠, 오 분쯤 지나 다경 맞은편 구석에 앉았다⁠. 좁은 칸이라 무릎끼리 한 뼘 거리였다⁠.

다경이 외투 주머니에서 귤 하나를 꺼냈다⁠. 조정위원이 굴려 준 것이었다⁠. 껍질을 벗기다 손톱이 미끄러지자 태율이 손을 내밀었다⁠. 귤을 받아 꼭지 쪽에 엄지를 넣고 천천히 돌렸다⁠. 껍질이 한 줄로 이어져 나왔다⁠. 학부 때도 그랬다⁠. 시험 기간 도서관 휴게실에서 귤껍질을 한 번도 끊지 않았다⁠.

“⁠아직도 그렇게 까⁠?⁠”

“⁠아직도 손톱으로 쥐어뜯어⁠?⁠”

태율이 귤을 반으로 갈라 한쪽을 내밀었다⁠. 비상등 불빛에 귤이 거의 갈색으로 보였다⁠. 시고 차가웠다⁠.

“⁠아까 왜 사실이라고 했어⁠?⁠”

“⁠판사가 물었으니까⁠.⁠”

“⁠윤 여사님이 아니라고 하면 끝나는 거였잖아⁠.⁠”

“⁠그 사람한테 거짓말을 시킬 수는 없어서⁠.⁠”

다경은 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기사 이야기를 꺼내려다 그만두고⁠, 결국 꺼냈다⁠.

“⁠기사는⁠? 그것도 몰랐어⁠?⁠”

“⁠몰랐어⁠.⁠”

“⁠알았으면 막았을 거야⁠?⁠”

태율이 귤껍질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막았을 거라고는 말 못 해⁠.⁠”

다경은 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믿었다⁠. 태율은 듣기 좋은 말을 할 때 말끝을 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은 말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상등 아래서 태율의 얼굴이 반쯤만 보였다⁠. 비누 냄새가 났다⁠. 사무실 화장실의 싸구려 물비누가 아니라⁠, 누가 골라 준 것 같은 마른 나무 냄새였다⁠. 다경은 이것을 누가 골라 줬는지 묻지 않았다⁠.

“⁠사진 속 남자⁠, 누구야⁠?⁠”

태율이 물었다⁠. 다경은 남은 귤 조각을 입에 넣었다⁠.

“⁠몰라⁠. 알아도 말 안 해⁠.⁠”

“⁠나도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엘리베이터가 덜컥 흔들리더니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형광등이 켜지자 둘은 동시에 일어섰고⁠, 동시에 옷의 먼지를 털었다⁠. 1층에서 문이 열렸을 때 로비에 서 있던 경비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사십 분이요⁠. 기록 갱신하셨어요⁠.⁠”

*

이 주 금요일 저녁 여섯 시⁠, 평창동 언덕 꼭대기의 회장 저택 대문은 높이가 사람 키의 두 배였다⁠. 대문 앞 골목에 다경과 혜온⁠, 길두가 서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아버지 쪽 대리인으로 온 태율이 서 있었다⁠. 혜온은 아이에게 줄 딸기우유 두 팩을 장바구니에 넣어 왔다⁠.

다섯 시 오십오 분⁠, 골목 끝에서 승합차 두 대가 섰다⁠. 카메라를 멘 사람들이 내렸다⁠.

다경은 이들이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알았다⁠. 길두가 휴대폰을 들어 이들을 찍기 시작했다⁠.

“⁠면접교섭 시간이랑 장소를 기자들이 어떻게 알아요⁠?⁠”

“⁠아는 사람이 알려 줬겠지⁠.⁠”

여섯 시 정각에 대문이 열렸다⁠. 기세만이 직접 나왔다⁠. 왼손에 효림의 손을 잡고 있었다⁠. 노란 비옷을 입은 다섯 살 아이가 오른팔에 토끼 베개를 끼고 있었다⁠. 기세만은 대문 앞 가로등 아래⁠, 카메라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멈춰 섰다⁠.

“⁠엄마 노릇을 하겠다니 해 보라지⁠.⁠”

기세만이 아이 손을 놓았다⁠. 효림이 혜온에게 달려갔고⁠, 혜온이 무릎을 꿇어 아이를 안았다⁠. 플래시가 한꺼번에 터졌다⁠.

다경은 외투를 벗어 들고 혜온과 아이 앞을 막았다⁠. 렌즈 하나가 외투 옆으로 파고들자⁠, 반대쪽에서 다른 외투 하나가 펼쳐졌다⁠. 태율이었다⁠.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선 채 양쪽 렌즈를 막았다⁠. 태율의 등이 다경의 등에 닿았고⁠, 셔츠 너머로 체온이 건너왔다⁠.

“⁠네 의뢰인 쪽에서 부른 거잖아⁠.⁠”

“⁠알아⁠. 그래서 막는 거야⁠.⁠”

기자 하나가 외투 사이로 마이크를 밀어 넣었다⁠.

“⁠하혜온 씨⁠, 사진 속 남자는 누굽니까⁠? 아이 앞에서 떳떳하게 말씀해 보시죠⁠!⁠”

효림이 엄마 목에 얼굴을 묻었다⁠. 혜온은 아이의 등을 쓸어내리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아이를 안은 채 외투와 외투 사이로 한 걸음 나와⁠, 마이크를 똑바로 보았다⁠.

“⁠말할게요⁠.⁠”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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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필깎이2026.10.25· 2화

    금요일 여섯 시가 조정이 끝나는 시간이에요, 둘이 만나는 시간이에요?

    • 신가랑작가2026.10.26

      처음엔 조정이 끝나는 시간이었어요. 나중에 다른 뜻이 붙습니다.

금요일 여섯 시 ·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