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44자)

조정실 4호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신가랑

염다경은 모태율이 사진을 한 장씩 뒤집어 탁자에 놓는 손을 보고 있었다⁠.

양재동 서울가정법원 조정실 4호는 탁자 하나와 의자 여섯⁠, 창가에 놓인 귤 바구니가 전부인 방이었다⁠. 시월 두 번째 화요일 오후 두 시⁠,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탁자 가운데에 금을 긋듯 누워 있었고⁠, 이 금을 사이에 두고 이쪽에 다경과 하혜온이⁠, 저쪽에 태율과 태율의 의뢰인 기 부사장이 앉았다⁠. 태율은 사진 넉 장을 금 바로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모서리를 맞추는 손가락이 일곱 해 전 로스쿨 도서관에서 형광펜 뚜껑을 맞추던 이 손가락이었다⁠.

호텔 복도였다⁠. 카펫에 금색 무늬가 있고⁠, 문에 1703이라는 숫자가 붙은 스위트룸 앞에서 혜온이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옆에 남자 하나가 서 있었는데 얼굴은 혜온의 어깨에 가려 반쯤만 보였다⁠.

“⁠신청인 쪽 입장은 간단합니다⁠.⁠”

태율이 펜을 두 번 딸깍였다⁠. 생각을 끝냈다는 소리였다⁠.

“⁠성북동 주택은 태진개발 법인 소유라 나눌 재산이 아닙니다⁠. 부사장님이 가진 태진홀딩스 지분은 혼인 전에 회장님께 받은 것이고요⁠. 피신청인의 부정행위는 사진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섯 해를 함께 산 정을 생각해서 위로금 이억을 드리겠습니다⁠. 따님 효림 양의 양육은 아버지가 맡습니다⁠.⁠”

혜온의 손이 탁자 아래에서 맞잡혔다⁠. 다경은 이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누렇게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결혼 전 꽃집을 할 때 꽃가위를 하루 열 시간씩 쥐던 손이라고⁠, 처음 사무실에 왔을 때 혜온이 웃으며 말했었다⁠.

“⁠정이요⁠?⁠”

다경은 귤 바구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가⁠, 귤 대신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결혼 여섯 해 동안 지분 값이 열 배가 됐어요⁠. 그동안 남편 쪽 집안 제사를 열두 번⁠, 회장님 생신 연회를 여섯 번 이 사람이 차렸고요⁠. 아버지가 준 재산이라도 상대 배우자가 지키고 불리는 데 힘을 보탰으면 나눌 수 있다는 판례⁠, 너도 알지⁠?⁠”

“⁠여기서 반말은 좀⁠.⁠”

“⁠모 변호사님도 아시죠⁠?⁠”

“⁠압니다⁠. 염 변호사님이 학부 이학년 민법 기말에 그 판례를 반대로 써서 오 점 깎인 것도 압니다⁠.⁠”

조정위원이 헛기침을 했다⁠. 정년을 마치고 십 년째 조정실에 나온다는 이 여자는 첫 기일마다 귤을 돌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사람이 귤 두 개를 집어 양쪽 변호사 앞에 하나씩 굴려 놓았다⁠.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아니요⁠.⁠”

둘이 동시에 말했다⁠. 조정위원이 귤을 하나 더 까서 혼자 먹었다⁠.

다경은 사진을 혜온 앞으로 밀었다⁠. 이 남자가 누군지⁠, 이날 1703호에 왜 갔는지 한마디만 해 주면 지금 이 탁자를 뒤집을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세 번 물었고 세 번 다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혜온은 사진을 보지 않고 창밖을 보았다⁠.

“⁠그 사람 얘기는 안 할게요⁠.⁠”

기 부사장이 이때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서른일곱의 장남은 회색 정장에 은색 커프스단추를 달고 있었고⁠, 조정 내내 이 단추만 만지작거렸다⁠. 아내를 한 번 보았다⁠. 그리고 다시 단추를 보았다⁠.

다경은 이 눈길을 놓치지 않았다⁠. 남편이 아내의 외도 사진 앞에서 짓는 얼굴이 아니었다⁠.

“⁠위로금 이억⁠, 양육권 포기⁠, 둘 다 안 받습니다⁠.⁠”

다경이 사진을 태율 쪽으로 도로 밀었다⁠. 금처럼 누운 햇빛을 사진이 가로질렀다⁠.

“⁠다음 기일까지 부사장님 재산 목록이나 다시 뽑아 오세요⁠. 지분이 왜 열 배가 됐는지도요⁠.⁠”

조정위원이 두 주 뒤로 다음 기일을 잡았다⁠. 태율이 사진을 한 장씩 거두는 동안 다경은 태율의 넥타이를 보았다⁠. 남색 바탕에 은색 사선 줄무늬였다⁠. 로스쿨 졸업식 날에도 저것을 맸었다⁠.

*

법원 엘리베이터는 사람을 열다섯까지 태운다고 적혀 있었는데⁠, 오후 세 시의 이 칸에는 스무 명쯤 들어차 있었다⁠. 다경은 구석으로 밀려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탄 태율이 다경 바로 앞에 등을 지고 섰다⁠. 서류 가방 모서리가 다경 무릎에 닿았다⁠.

“⁠가방 치워⁠.⁠”

“⁠공간이 없어⁠.⁠”

“⁠그럼 숨 쉬지 마⁠. 공기도 좁아⁠.⁠”

등 너머에서 태율이 웃는 소리가 났다⁠. 소리 없이 어깨만 한 번 내려가는 웃음이었다⁠. 다경은 이 어깨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너 결선 때 대법원을 대법정이라고 세 번 불렀어⁠.⁠”

“⁠너는 결선 때 넥타이를 뒤집어 매고 나왔고⁠.⁠”

“⁠그건 긴장해서⁠.⁠”

“⁠나도 긴장해서⁠.⁠”

엘리베이터가 2층에서 멈췄다⁠.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문 쪽에 끼어 있던 방길두가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다경의 사무실 막내였다⁠. 스물여섯⁠, 법학적성시험을 세 번 보고 접은 뒤로 법률 사무소 일에 남은 열정을 다 쏟는다고 스스로 말하는 청년이었다⁠.

“⁠조정실 안 일 대 영⁠, 엘리베이터 안 일 대 일입니다⁠, 대표님⁠.⁠”

“⁠뭘 세는 거야⁠?⁠”

“⁠두 분 말싸움이요⁠. 근데 두 분⁠, 혹시 사귀셨어요⁠?⁠”

“⁠아니⁠.⁠”

다시 둘이 동시에 말했다⁠. 엘리베이터 안 스무 명이 한꺼번에 다경을 보았다⁠. 1층에서 문이 열리자 태율이 가장 먼저 내려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넥타이 끝이 문틈에서 한 번 펄럭였다⁠.

*

지하 2층 주차장은 시멘트 기둥마다 노란 번호가 칠해져 있었고⁠, 기름 냄새와 배기가스가 낮게 깔려 있었다⁠. 다경이 차 열쇠를 꺼내는데 기둥 B7 앞에 검은 세단 한 대가 시동을 걸어 둔 채 서 있었다⁠. 뒷문이 열리고 노인 하나가 내렸다⁠.

흰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고 회색 목도리를 두른⁠, 예순여덟 살의 남자였다⁠. 다경은 이 얼굴을 경제 기사 사진으로 수십 번 보았다⁠. 태진그룹 회장 기세만⁠. 기세만이 입안에서 무언가를 굴리다 어금니로 깨물었다⁠. 박하 냄새가 기둥 사이로 퍼졌다⁠.

“⁠염 변호사⁠.⁠”

낮고 느린 목소리였다⁠. 말 한마디마다 숨을 한 번씩 고르는 사람처럼 말했다⁠.

“⁠담배를 끊었더니 이것만 느네⁠. 하나 들겠나⁠?⁠”

“⁠괜찮습니다⁠. 회장님께서 조정에 직접 오신 줄은 몰랐습니다⁠.⁠”

“⁠조정에는 안 갔네⁠. 자네 보러 왔지⁠.⁠”

기세만이 외투 주머니에서 박하사탕 하나를 꺼내 다경 쪽으로 내밀었다가⁠, 받지 않자 도로 넣었다⁠.

“⁠우리 그룹 집안일이 많아⁠. 사촌⁠, 육촌⁠, 사위들⁠. 갈라서는 집이 해마다 둘셋은 나와⁠. 그걸 자네가 다 맡아 주게⁠. 수임료는 자네가 지금 받는 것의 스무 배로 하지⁠. 모 변호사도 내 사람이니 둘이 법정에서 얼굴 붉힐 일도 없고⁠.⁠”

다경은 열쇠를 손바닥에 쥐었다⁠. 톱니가 살에 박혔다⁠.

“⁠회장님⁠, 저는 이혼 변호사라서 갈라서는 집의 한쪽만 맡습니다⁠. 그 집을 양쪽 다 사시려는 분 일은 안 합니다⁠.⁠”

기세만이 다경을 오래 보았다⁠. 화가 난 얼굴이 아니라 물건 값을 다시 매기는 얼굴이었다⁠. 사탕 깨지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그럼 오늘 저녁에는 그 아이가 누구 밥을 먹는지 보세⁠.⁠”

기세만은 차에 올랐고 세단은 출구 쪽 경사로를 소리 없이 올라갔다⁠. 다경은 이 자리에서 혜온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

모태율은 백상 22층 대표실 소파에 앉아 대표의 말을 반쯤만 듣고 있었다⁠.

“⁠이 사건 깔끔하게 끝내면 내년 봄 파트너 심사는 자네 거야⁠. 회장님이 자네를 콕 집어서 맡기셨어⁠. 알지⁠?⁠”

서초동 법원 사거리 정곡빌딩의 15층부터 22층까지가 법무법인 백상이었다⁠. 대표실 창으로 법원 담장과 이 너머 검찰청 지붕이 내려다보였다⁠. 태율은 들고 있던 펜을 두 번 딸깍였다⁠. 아들 부부의 이혼 소송에 왜 회장이 직접 대리인을 골라 붙였는지⁠, 소송을 낸 이 아들이 조정 내내 왜 커프스단추만 만졌는지⁠, 대표는 묻지 않았고 태율도 묻지 않았다⁠. 이것이 이 층의 규칙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태진그룹 비서실장이었다⁠.

“⁠변호사님⁠, 부사장님 댁 일입니다⁠. 오늘부로 성북동 댁 출입 방식을 바꿨습니다⁠. 따님은 오후에 회장님 댁으로 모셨고요⁠. 사모님께서 지금 대문 앞에 계신데⁠, 법적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변호사님이 좀 정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태율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펜이 손안에서 멈췄다⁠.

“⁠언제 바꾸셨습니까⁠?⁠”

“⁠한 시간 전입니다⁠.⁠”

조정실에서 나온 지 한 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태율이 사진을 거두고 있던 이 시각에 누군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고 있었다⁠.

*

성북동 언덕길은 빗물이 경사를 따라 흘러내려 맨홀 뚜껑 위에서 소용돌이를 쳤다⁠. 다경이 택시에서 내렸을 때 혜온은 회색 철 대문 앞에 우산도 없이 서 있었다⁠. 손에는 유치원 신발주머니 하나가 들려 있었다⁠. 오늘 아침 효림이 놓고 간 것이라고 했다⁠. 대문 옆 도어락 화면에는 빨간 글씨로 비밀번호 오류라는 글자가 세 번째 떠 있었다⁠.

길두가 뒤따라 내려 우산을 혜온 머리 위로 씌웠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대문과 도어락과 혜온의 젖은 어깨를 차례로 찍었다⁠.

“⁠지금 이걸 왜 찍어⁠?⁠”

“⁠증거요⁠. 그리고 대표님⁠, 저기⁠.⁠”

언덕 아래에서 택시 한 대가 더 올라왔다⁠. 문이 열리고 남색 넥타이가 먼저 빗속으로 나왔다⁠.

다경은 우산을 쓰지 않은 채 그에게로 걸어갔다⁠.

“⁠너 알고 왔어⁠?⁠”

“⁠한 시간 전에 알았어⁠.⁠”

“⁠조정실에서 위로금 얘기할 때는⁠?⁠”

“⁠몰랐어⁠.⁠”

태율의 앞머리가 빗물에 이마로 내려앉았다⁠. 다경은 이 얼굴을 일곱 해 동안 보았다⁠. 거짓말을 할 때 태율은 눈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더 오래 마주 보았다⁠. 지금은 대문 쪽을 보고 있었다⁠.

“⁠내일 아침 아홉 시에 아이 데려오라는 사전처분 신청 들어가⁠. 오늘 밤 안에 문 안 열면 아동학대로 신고할 거고⁠.⁠”

“⁠아이는 할아버지 집에 있어⁠. 학대로는 안 걸려⁠.⁠”

“⁠그럼 문이라도 열어⁠. 저 사람 옷이 저 안에 있어⁠.⁠”

대문 안쪽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마당의 자갈을 밟는 발소리가 다가왔고⁠, 쪽문이 열리자 예순 줄의 여자가 우산을 쓰고 나왔다⁠. 이 집에서 스물두 해를 일했다는 가사관리인 윤 여사였다⁠. 여사는 품에 하얀 토끼 베개 하나를 안고 있었다⁠. 한쪽 귀가 다른 쪽보다 짧고⁠, 짧은 귀 끝이 손때로 누렇게 바래 있었다⁠.

혜온이 한 걸음 나섰다⁠.

“⁠효림이 베개예요⁠.⁠”

“⁠평창동에서 찾으셔서요⁠. 아가씨가 이게 없으면 못 주무신다고⁠.⁠”

윤 여사는 베개를 혜온 쪽으로 내밀다가 멈췄다⁠. 언덕 아래에 평창동에서 보낸 검은 승합차가 비상등을 켜고 서 있었다⁠.

“⁠회장님이 사모님께는 아무것도 내주지 말라고 하셔서⁠.⁠”

혜온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빗물이 이 손가락 굳은살 위로 흘렀다⁠.

태율이 앞으로 나섰다⁠.

“⁠윤 여사님⁠, 그 베개는 제가 받겠습니다⁠.⁠”

윤 여사가 머뭇거리다 베개를 태율에게 넘겼다⁠. 태율은 베개를 외투 안쪽으로 감싸 빗물을 막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승합차가 아니라 혜온 쪽으로 걸어갔다⁠.

“⁠평창동에 이걸 가져다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혜온 씨가 직접 가시죠⁠. 제 의뢰인 쪽에서 막지 않도록 제가 전화해 두겠습니다⁠.⁠”

다경은 이 손을 보았다⁠. 토끼 베개를 내미는 손가락 끝이 빗물에 하얗게 불어 있었다⁠.

혜온이 베개를 받으려고 두 손을 내민 순간⁠, 언덕길 위쪽에서 헤드라이트 두 줄기가 빗발을 가르며 내려왔다⁠. 검은 세단이 대문 앞에 섰다⁠. 기사가 내려 뒷문을 열고 우산을 펼쳤고⁠, 회색 목도리를 두른 노인이 천천히 내려섰다⁠. 박하 냄새가 빗냄새를 뚫고 왔다⁠.

기세만은 베개를 사이에 두고 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태율에게 말했다⁠.

“⁠모 변호사⁠, 그 베개는 지금 누구 손에 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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