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61자)

열 돈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신가랑

모태율은 금괴를 내려다보다가 윤 여사의 손을 보았다⁠. 누빔 외투 소매 끝으로 나온 손등에 주름이 겹겹이 접혀 있었고⁠, 엄지손톱 하나가 반쯤 깨져 있었다⁠. 이 손이 노란 토끼 손수건 귀퉁이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앉으세요⁠, 윤 여사님⁠.⁠”

여사는 대리석 벤치에 다시 앉았다⁠. 태율은 옆에 앉지 않고 여사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지난 구월이었어요⁠.⁠”

윤 여사가 말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도록 한 마디씩 끊어서 말했다⁠.

“⁠회장님이 평창동 서재로 부르셨어요⁠. 아가씨 일인 줄 알았어요⁠. 회장님이 책상 서랍에서 오동나무 상자를 꺼내셨어요⁠. 이건 서른 해 채운 사람한테만 주는 거다⁠, 자네는 여덟 해를 미리 당겨 주지⁠, 그러셨어요⁠. 그리고 비서실장님이 하라는 대로만 말하면 된다고요⁠.⁠”

“⁠아드님 일이 있었죠⁠.⁠”

여사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빚이 많았어요⁠. 사람들이 집 앞까지 찾아왔어요⁠. 사모님이 효림이 돌 반지까지 팔아서 빌려주셨는데 그걸로도 모자랐어요⁠. 그래서 받았어요⁠. 받고 거짓말했어요⁠. 사모님이 새벽에 안 들어오신 적⁠, 한 번도 없어요⁠. 아가씨를 저한테 맡기고 나가신 적도 없고요⁠.⁠”

로비 회전문이 바람에 반 바퀴 돌았다⁠. 찬 공기가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아들이 이걸 몰래 팔았어요⁠. 그래도 빚쟁이들한테 맞았어요⁠. 그런데 김 과장님이 이걸 도로 사다가 저한테 주시면서 퇴직 선물이라고 하래요⁠. 판사님이 위증이라고 하실 때 제 손이 떨렸어요⁠. 아가씨가 그 손을 알아요⁠. 거짓말할 때 떨리는 손이요⁠.⁠”

여사가 손수건째 금괴를 태율의 손바닥 위에 얹었다⁠. 차가웠다⁠. 열 돈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서른일곱 그램 남짓이라는 숫자보다 무거웠다⁠.

“⁠이 손수건은 아가씨 거예요⁠. 제주 가기 전에 할머니 코 닦으라고 주셨어요⁠. 변호사님⁠, 이걸 회장님께 돌려드려 주세요⁠. 변호사님은 그 집 변호사시잖아요⁠. 조용히요⁠. 저는 법정에 다시 못 서요⁠.⁠”

태율은 금괴를 쥔 손을 펴지도 오므리지도 못했다⁠.

“⁠윤 여사님⁠, 제가 이걸 조용히 돌려드리면 윤 여사님 거짓말은 그대로 남습니다⁠.⁠”

“⁠알아요⁠.⁠”

“⁠그래도요⁠?⁠”

“⁠그래도 저는 못 서요⁠. 회장님 얼굴 보고는요⁠.⁠”

여사는 일어서서 태율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회전문을 밀고 나갔다⁠. 보자기만 벤치 위에 남았다⁠.

*

자정 넘어 망원동 원룸⁠, 두레는 접이식 탁자 위에 놓인 노란 손수건 꾸러미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이게 뭐야⁠. 오빠 결혼해⁠? 예물이야⁠?⁠”

“⁠열어 보지 마⁠.⁠”

“⁠이미 열었어⁠.⁠”

두레가 손수건 귀퉁이를 들추고 금괴를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산 모양 표지가 형광등 아래서 반짝였다⁠. 두레는 호텔에서 다섯 해 일했다⁠. 이 표지가 어디 찍히는 것인지 알았다⁠.

“⁠오빠⁠, 변호사는 의뢰인 비밀 지켜야 하잖아⁠.⁠”

“⁠응⁠.⁠”

“⁠근데 진실 숨기면 안 된다는 것도 있다며⁠. 오빠가 예전에 그거 외우면서 중얼거렸잖아⁠.⁠”

“⁠둘 다 변호사법에 있어⁠. 둘이 부딪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학교에서 물으면⁠, 나는 늘 정답을 썼어⁠. 점수도 잘 받았고⁠.⁠”

“⁠그 정답이 뭔데⁠?⁠”

“⁠의뢰인과 상의하라⁠.⁠”

“⁠상의했어⁠?⁠”

태율은 부사장의 말을 떠올렸다⁠. 거짓말로는 이기지 마세요⁠. 제 아버지를 해치는 거죠⁠.

“⁠했어⁠.⁠”

두레가 라면 봉지를 뜯다 말고 오빠를 보았다⁠.

“⁠그럼 뭘 고민해⁠? 오빠는 거짓말하는 사람 편 들려고 변호사 됐어⁠?⁠”

“⁠아니⁠.⁠”

“⁠그럼 끝났네⁠.⁠”

“⁠윤 여사님이 법정에 못 서겠대⁠. 이걸 내가 내밀면 그분이 다쳐⁠.⁠”

“⁠그분은 이미 다쳤잖아⁠. 그분이 직접 들고 오셨다며⁠.⁠”

두레가 냄비에 물을 받았다⁠. 수돗물 소리가 좁은 방을 채웠다⁠.

“⁠그리고 나 신경 쓰지 마⁠. 나 프런트 체질 아니야⁠. 맨날 웃는 거 힘들었어⁠. 오빠 동생 체질이지⁠.⁠”

“⁠그런 체질이 어딨어⁠.⁠”

“⁠여기 있잖아⁠.⁠”

*

일월 마지막 주⁠, 재산분할 변론이 끝났다⁠. 태율은 이 법정에서 금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지분과 빌딩과 그림을 두고 원고 쪽 서면을 읽었고⁠, 다경은 피고 쪽 서면을 읽었다⁠. 재판장은 변론을 마치고 선고 날을 이월 세 번째 주 목요일로 정했다⁠. 법정을 나서며 다경이 재판장을 보았다⁠. 이 눈을 피했다⁠. 일곱 해 동안 처음이었다⁠. 금괴는 태율의 서류 가방 안쪽 지퍼 칸에 노란 손수건에 싸인 채 들어 있었다⁠. 태율은 이날 밤 윤 여사에게 세 번 전화했다⁠. 세 번 다 받지 않았다⁠.

이 주 일요일 오후⁠, 태율은 구로동 언덕배기 다세대주택 3층 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두 번 누르자 문이 걸쇠가 걸린 채로 한 뼘 열렸다⁠. 윤 여사의 얼굴이 이 틈에 반쯤 보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집 안에서 된장 끓는 냄새가 났다⁠.

“⁠윤 여사님⁠, 한 번만 더 여쭙겠습니다⁠. 법정에 직접 서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금괴가 어디서 왔는지는 윤 여사님 입으로 말씀하셔야 윤 여사님 말이 됩니다⁠.⁠”

“⁠변호사님⁠, 저는⁠.⁠”

여사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서른 줄의 아들이 어머니 어깨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왼쪽 눈두덩이 누렇게 멍들어 있었고 입술 끝이 찢어져 있었다⁠.

“⁠어머니 이제 그만 괴롭히세요⁠.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판 거예요⁠. 어머니는 몰랐어요⁠.⁠”

“⁠알아요⁠. 금은방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들의 얼굴이 굳었다⁠. 윤 여사가 아들 팔을 잡아 뒤로 물렸다⁠. 걸쇠를 풀지 않았다⁠.

“⁠죄송해요⁠, 변호사님⁠.⁠”

태율은 문틈으로 명함 한 장을 밀어 넣었다⁠. 뒷면에 한 줄을 적었다⁠. 선고 날 아침 아홉 시⁠, 법원 정문에 있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명함은 안으로 떨어졌다⁠. 태율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여사가 명함을 줍는 소리를 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

이월 첫째 주 화요일 아침 아홉 시⁠, 광화문 태진타워 1층 로비에 검은 세단들이 줄지어 섰다⁠. 태진홀딩스 이사들이 차례로 내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선고를 보름 남짓 앞두고 열리는 이사회였다⁠. 장남 명의였던 지분을 재단으로 넘기는 일을 마무리하는 자리였다⁠.

염다경은 로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옆에 혜온이 있었다⁠. 다경의 손에는 법원이 전날 오후에 내린 결정문 사본이 들려 있었다⁠. 소송이 끝날 때까지 이 지분을 누구에게도 넘기지 말라는 처분금지 결정이었다⁠.

회전문이 돌고 기세만이 들어왔다⁠. 회색 목도리를 다시 두르고 있었다⁠. 다경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사들도 따라 멈췄다⁠.

“⁠종이 한 장으로 내 이사회를 막겠다고 왔나⁠?⁠”

“⁠종이가 막는 게 아니라 법원이 막는 겁니다⁠. 이사회는 여셔도 됩니다⁠. 지분만 못 옮기실 뿐이에요⁠.⁠”

이사 하나가 다경의 손에서 결정문을 받아 넘겨 보았다⁠. 이사의 얼굴이 굳었다⁠. 이사는 회장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기세만이 손을 들어 이 말을 끊었다⁠.

기세만은 다경이 아니라 혜온을 보았다⁠.

“⁠얘야⁠.⁠”

여섯 해 동안 기세만이 며느리를 그렇게 부른 적은 혼례 날 한 번뿐이었다고⁠, 혜온은 나중에 말했다⁠.

“⁠삼십억 주마⁠. 효림이는 두 주에 한 번 네 집에서 재워라⁠. 학교도 네가 골라⁠. 대신 지분 이야기⁠, 윤 여사 이야기⁠, 다 접어⁠. 오늘 여기서 고개 한 번만 끄덕이면 된다⁠.⁠”

로비의 이사들이 숨을 죽였다⁠. 삼십억은 첫 조정실에서 내민 이억의 열다섯 배였다⁠. 다경은 혜온을 보지 않았다⁠. 이 대답은 의뢰인의 것이었다⁠.

혜온은 오래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효림이가 크면 물을 거예요⁠. 엄마는 그때 뭐 했냐고⁠. 할아버지가 거짓말시킨 사람들 얘기 다 접고 돈 받았다고는 못 하겠어요⁠.⁠”

“⁠네가 이길 것 같으냐⁠?⁠”

“⁠이기려는 게 아니에요⁠, 아버님⁠. 효림이한테 할 말을 남기려는 거예요⁠.⁠”

기세만이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집어냈다⁠. 입에 넣지 않았다⁠. 사탕 껍질이 기세만의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락거렸다⁠. 이사들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다경에게 한 마디를 남겼다⁠.

“⁠모 변호사는 요즘 자네 전화를 잘 받나⁠?⁠”

*

밤 열한 시⁠, 방배동 연립 계단에서 귀에 익은 삐걱 소리가 두 번 났다⁠. 다경이 문을 열자 태율이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다툰 뒤로 한 달 가까이 이 계단을 오르지 않았다⁠. 손에 귤 한 봉지를 들고 있었다⁠.

“⁠미안해⁠. 엘리베이터에서⁠.⁠”

“⁠나도⁠. 네 말이 맞았어⁠. 내 쪽 거는 내 쪽 거⁠.⁠”

둘은 거실 바닥⁠, 판례집 더미 사이에 마주 앉았다⁠. 태율이 귤을 깠다⁠. 껍질이 한 줄로 이어지다가 중간에서 끊어졌다⁠. 요즘 태율의 귤껍질은 자주 끊어졌다⁠.

“⁠너 요즘 나 피하지⁠.⁠”

“⁠응⁠.⁠”

“⁠나한테 말 못 하는 거 있지⁠.⁠”

“⁠응⁠.⁠”

다경은 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묻지 않았다⁠. 이것이 약속이었다⁠. 대신 태율의 손에서 끊어진 껍질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선고 날⁠, 내가 뭘 하든⁠.⁠”

태율이 말했다⁠. 다경을 똑바로 보았다⁠. 거짓말을 할 때처럼 오래 보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말끝을 내리지 않고 보았다⁠.

“⁠네 편 들려고 하는 거 아니야⁠. 맞는 편에 서려는 거야⁠. 그거 하나만 알아 둬⁠.⁠”

“⁠알았어⁠.⁠”

“⁠그리고 사랑해⁠.⁠”

다경은 귤을 씹다가 멈췄다⁠. 라디에이터가 탁 소리를 냈다⁠.

“⁠알아⁠.⁠”

“⁠언제부터⁠?⁠”

“⁠결선 날 밤 포장마차⁠. 너 소주 세 병 비우고 말했잖아⁠. 나 너 좋아해⁠, 이기든 지든⁠. 나 그거 듣고 일어난 거야⁠. 막차 핑계 대고⁠. 무서워서⁠.⁠”

태율이 다경을 한참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내려가는 웃음이 아니라⁠, 처음으로 소리가 나는 웃음이었다⁠.

“⁠칠 년 걸렸네⁠. 못 들었다며⁠.⁠”

“⁠네 오답만 외운 게 아니었어⁠.⁠”

태율이 다경을 끌어당겼다⁠. 다경의 이마가 태율의 쇄골에 닿았다⁠. 셔츠 너머로 태율의 심장이 또 빨랐다⁠. 다경은 이 빠르기를 손바닥으로 세다가 그만두었다⁠. 이 밤 둘은 불을 켜지 않았다⁠. 태율의 손이 다경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길 때마다 귤 냄새가 났다⁠. 다경은 태율의 손목을 잡고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서류 가방은 현관에 놓여 있었다⁠. 안쪽 지퍼 칸이 잠겨 있다는 것을⁠, 다경은 이 가방을 옮기다 알았고 열지 않았다⁠.

*

선고 전날 오후 네 시⁠, 태진타워 33층 회장실 바둑판 위에 박하사탕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기세만이 이것을 손가락으로 밀어 태율 앞으로 보냈다⁠.

“⁠윤 여사가 자네한테 뭘 맡겼다던데⁠.⁠”

태율은 사탕을 보았다⁠. 김 과장이 이 밤 윤 여사를 따라 정곡빌딩 로비까지 왔다는 뜻이었다⁠.

“⁠돌려주게⁠. 그러면 법무실장 자리⁠, 다음 주에 발표하지⁠. 자네 동생은 다시 프런트에 서고⁠. 자네가 원하면 백상이 아니라 우리 그룹 이름으로 자네 사무실을 차려 줄 수도 있어⁠.⁠”

“⁠돌려드리지 않으면요⁠?⁠”

기세만이 등을 소파에 기댔다⁠.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백상은 오늘 밤 자네를 정리할 거야⁠. 그건 대표가 이미 알고 있고⁠. 그리고 하나 더⁠.⁠”

기세만이 목도리를 풀어 소파 팔걸이에 걸었다⁠. 목에 늙은 핏줄이 드러났다⁠.

“⁠그 금괴가 지금 자네 손에 있지⁠? 윤 여사는 법정에 다시 안 선다고 했고⁠. 그럼 그 금괴를 누가 누구에게 줬다고 해야 말이 맞을까⁠? 원고 대리인이 원고 쪽 증인한테 금괴를 주고 말을 바꾸라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더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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