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99자)

선고

이혼 전문 변호사의 러브 · 신가랑

모태율은 바둑판 위의 박하사탕을 집어 들었다⁠. 기세만이 이 손을 보았다⁠. 사탕을 입에 넣을 것인지⁠, 주머니에 넣을 것인지 보는 눈이었다⁠.

기세만은 둘 다 하지 않았다⁠. 사탕을 바둑판 한가운데⁠, 화점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회장님 말씀이 더 그럴듯하게 들리시는 건⁠, 회장님이 늘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기세만의 웃음이 얼굴에서 천천히 빠져나갔다⁠.

“⁠금괴는 돌려드리지 않겠습니다⁠. 이건 회장님 것이 아닙니다⁠. 회장님이 사람 입을 사려고 내놓으신 순간 회장님 손을 떠났습니다⁠.⁠”

“⁠그럼 누구 건가⁠?⁠”

“⁠법정이 정할 겁니다⁠.⁠”

태율은 일어섰다⁠. 소파 가죽이 몸을 놓아주는 소리가 났다⁠. 문 앞에서 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에서 사탕 깨지는 소리가 한 번 들렸다⁠. 어금니로 깨문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 단단한 것으로 바둑판 위에서 내리친 소리였다⁠.

*

이날 저녁 두레에게서 문자가 왔다⁠. 호텔이 오늘 날짜로 대기발령을 해고로 바꿨다는 통지를 보냈다고 했다⁠. 석 달을 채우지도 않았다⁠. 문자 끝에 한 줄이 더 붙어 있었다⁠. 나 내일 법원 간다⁠. 오빠 넥타이 남색으로 매⁠.

이날 밤 열한 시 오십 분⁠, 백상 인사팀에서 메일이 왔다⁠. 제목은 짧았다⁠. 고용 관계 종료 통지⁠. 첨부 파일에 대표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법무법인 백상이 맡은 사건에서 모태율 변호사는 오늘부로 손을 뗀다는 문장이 두 번째 줄에 있었다⁠.

자정 사 분 뒤 기 부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변호사님⁠, 아버지가 백상에 변호사님을 제 사건에서 빼라고 했대요⁠. 방금 대표님이 저한테 전화해서⁠, 이제 원고 대리는 대표님 혼자 한다고 하시네요⁠.⁠”

“⁠부사장님 소송입니다⁠. 부사장님이 정하실 일입니다⁠.⁠”

“⁠그럼 지금 정할게요⁠. 어디 계세요⁠?⁠”

*

새벽 여섯 시⁠, 법원 사거리 뒷골목 이십사 시간 해장국집에는 택시 기사 둘과 밤새 일한 듯한 구청 제설반 사람들만 앉아 있었다⁠. 부사장은 이 사이 구석 자리에 앉아 뚝배기를 두 개 시켜 놓고 있었다⁠. 양복 대신 검은 패딩을 입었다⁠. 탁자 위에 종이 한 장과 볼펜이 놓여 있었다⁠. 부사장이 직접 써 온 소송위임장이었다⁠. 백상이 아니라 변호사 모태율 개인에게 원고 대리를 맡긴다는 내용이었다⁠.

“⁠백상에는 해임 통지를 보냈어요⁠. 새벽 다섯 시 반에요⁠. 대표님은 일곱 시에 출근해서 보시겠죠⁠.⁠”

부사장이 해장국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뜨거워서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데 처음 와 봐요⁠. 아버지 몰래 먹는 첫 밥이에요⁠.⁠”

“⁠맛은 어떠십니까⁠?⁠”

“⁠짜요⁠.⁠”

“⁠해장국은 짜야 합니다⁠.⁠”

태율은 이 말을 하고 나서 이것이 누구의 말인지 깨달았다⁠. 위임장에 서명했다⁠. 그리고 서류 가방 안쪽 지퍼 칸을 열어 노란 손수건 꾸러미를 탁자 위에 꺼내 놓았다⁠.

“⁠오늘 선고 전에 이걸 법정에 내놓을 겁니다⁠. 그러면 선고는 미뤄지고⁠, 윤 여사님과 남 기사님 증언을 다시 들어야 하고⁠, 회장님은 위증을 시킨 사람으로 수사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부사장님이 원고석에 앉은 채로요⁠.⁠”

부사장은 손수건을 오래 보았다⁠. 귀퉁이의 토끼 그림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효림의 손수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세요⁠, 변호사님⁠.⁠”

부사장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제가 원고석에 앉아 있을게요⁠. 이번엔 일어나지 않고 끝까지 앉아 있을게요⁠. 그게 제 몫이에요⁠.⁠”

*

이월 세 번째 주 목요일 아침 여덟 시 사십 분⁠, 양재동 가정법원 정문 앞에 밤새 내린 눈이 사람 발에 밟혀 회색으로 굳어 있었다⁠. 염다경은 혜온과 함께 택시에서 내렸다⁠. 길두가 먼저 와서 정문 기둥 옆에 핫팩 네 개를 들고 서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다경의 휴대폰이 울렸다⁠. 종로 금은방 사장이었다⁠.

“⁠변호사님⁠, 나 오늘 가게 문 닫고 나왔어⁠. 혹시 몰라서⁠. 그 신랑 반지 값은 했으니까⁠, 법원에서 부르면 가려고⁠. 지금 양재역이야⁠.⁠”

“⁠사장님⁠, 오늘은 선고만 하는 날이라 증인은⁠.⁠”

“⁠그래도 가 있을게⁠. 법원 구경도 하고⁠. 나 법원 처음이야⁠.⁠”

전화가 끊겼다⁠. 다경은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법정에 설 일이 없는 날⁠, 설 수도 있는 사람 하나가 지하철을 타고 오고 있었다⁠.

정문 앞에 검은 패딩을 입은 남자와 노란 외투를 입은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가 혜온을 보자마자 뛰어왔다⁠. 오른팔에 한쪽 귀가 짧은 토끼 베개를 끼고 있었다⁠.

“⁠엄마⁠!⁠”

혜온이 무릎을 꿇어 아이를 안았다⁠. 부사장이 몇 걸음 떨어져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 평창동에서 아침에 직접 데리고 나왔다고 했다⁠. 아이 아버지가 제 딸을 데리고 나오는 것을 막을 법은 없었다⁠. 회장 집 대문은 이것을 막으려 했지만⁠, 부사장이 대문 앞에서 한 시간을 버텼다고 했다⁠.

“⁠엄마⁠, 넥타이 삼촌 저기 있어⁠.⁠”

효림이 베개로 정문 반대편을 가리켰다⁠. 태율이 정문 기둥 옆에 혼자 서 있었다⁠. 남색 넥타이였다⁠. 법원 앞 도로 쪽⁠, 버스 정류장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등이었다⁠.

다경은 태율에게 걸어갔다⁠. 태율은 다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은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갔다⁠.

“⁠누구 기다려⁠?⁠”

“⁠응⁠.⁠”

“⁠올 사람이야⁠?⁠”

“⁠모르겠어⁠.⁠”

다경은 길두에게서 받은 핫팩 하나를 흔들어 길두의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길두는 주머니 속에서 이것을 쥐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등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한 시간 가까이 여기 서 있었던 손이었다⁠.

“⁠몇 시부터 서 있었어⁠?⁠”

“⁠여덟 시⁠.⁠”

“⁠아홉 시에 오기로 한 사람을⁠?⁠”

“⁠일찍 올 수도 있잖아⁠.⁠”

아홉 시가 되었다⁠.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섰다가 떠났다⁠. 내린 사람 가운데 윤 여사는 없었다⁠. 아홉 시 오 분⁠. 아홉 시 십 분⁠. 태율이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 정류장을 한 번 더 보고⁠, 돌아섰다⁠.

“⁠들어가자⁠.⁠”

태율의 서류 가방이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다⁠. 다경은 이 무게가 어디서 오는지 묻지 않았다⁠.

길두가 효림 앞에 쪼그려 앉았다⁠.

“⁠효림아⁠, 엄마랑 아빠는 저 안에서 일하셔야 해⁠. 아저씨랑 일 층 놀이방에서 놀자⁠.⁠”

“⁠아저씨가 토끼 해⁠.⁠”

“⁠아저씨는 사람인데⁠.⁠”

“⁠토끼 해⁠.⁠”

길두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귀를 만들었다⁠. 한쪽 손을 반으로 접었다⁠. 효림이 깔깔 웃었다⁠. 다경은 이 웃음소리를 등에 지고 법원 계단을 올라갔다⁠.

*

선고는 문을 열고 했다⁠. 재판은 사생활을 지키려고 닫혀 있었지만⁠, 판결은 누구나 들을 수 있게 열린 법정에서 알리는 것이 법이었다⁠. 그래서 오늘 처음으로 3층 법정 방청석이 찼다⁠.

맨 앞줄 가운데 기세만이 앉아 있었다⁠. 회색 목도리⁠, 뒤로 빗어 넘긴 흰머리⁠. 옆에 비서실장이 은테 안경을 고쳐 썼다⁠. 이 뒷줄에 기자 다섯이 수첩을 펴고 있었다⁠. 맨 뒷줄 구석에 두레가 호텔 제복이 아닌 하얀 스웨터를 입고 앉아 있었고⁠, 이 옆자리에 회색 니트 차림의 조율사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줄 끝에 회색 점퍼가 있었다⁠. 김 과장이었다⁠. 과장의 옆에 서른 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왼쪽 눈두덩의 멍이 누렇게 빠져 가고 있었다⁠. 구로동 문틈으로 보았던 이 아들이었다⁠. 김 과장이 아들의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다정해 보이는 손이었다⁠. 아들은 이 손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경은 피고석에 앉으며 이 둘을 보았다⁠. 그리고 원고석의 태율을 보았다⁠. 태율도 이 둘을 보고 있었다⁠. 태율의 펜이 손안에서 멈춰 있었다⁠.

혜온이 방청석을 한 번 훑고 다경에게 몸을 기울였다⁠.

“⁠윤 여사님은 안 오셨네요⁠.⁠”

“⁠네⁠.⁠”

“⁠아드님은 왔는데요⁠.⁠”

혜온의 목소리가 낮았다⁠. 혜온은 김 과장의 손이 얹힌 이 무릎을 보았다⁠. 효림의 돌 반지를 팔아 빌려준 돈이 결국 어디까지 흘러갔는지⁠, 효림은 이 손 하나로 다 읽었다⁠.

원고석에는 태율과 부사장이 앉았다⁠. 원고석 옆⁠, 한남동 빌딩 이전을 두고 함께 재판을 받는 재단 쪽 자리에 백상 대표가 앉았다⁠. 대표는 오늘 아침 원고 대리에서 해임되었고⁠, 재단의 대리인으로만 남았다⁠. 태율 쪽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열 시 정각⁠, 재판장이 들어왔다⁠. 모두가 일어섰다가 앉았다⁠. 재판장은 안경을 이마에 올리지 않았다⁠. 판결문 첫 장을 넘겼다⁠.

“⁠원고와 피고 사이의 이혼 등 청구 사건⁠, 그리고 함께 심리한 사해행위 취소 사건에 대해 선고하겠습니다⁠.⁠”

다경은 왼손을 탁자 모서리에 짚었다⁠. 혜온이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방청석 맨 앞줄에서 사탕 껍질 벗기는 소리가 났다⁠.

“⁠주문⁠.⁠”

누군가의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이 말을 끊었다⁠.

*

모태율은 일어서 있었다⁠. 무릎이 떨리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해장국집에서 부사장의 무릎을 보았을 때 이 떨림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고 생각했다⁠. 지금 태율의 무릎은 떨리지 않았고⁠, 대신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재판장님⁠, 원고 대리인입니다⁠. 선고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재판장이 판결문에서 눈을 들었다⁠.

“⁠변론은 끝났습니다⁠, 원고 대리인⁠.⁠”

“⁠압니다⁠. 변론을 다시 열어 주실 것을 청합니다⁠. 이 법정에서 선서한 원고 쪽 증인이 금품을 받고 거짓을 말했습니다⁠. 그 금품이 지금 제 손에 있습니다⁠. 그 증인을 세운 사람은 저입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기자들의 볼펜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백상 대표가 일어섰다⁠.

“⁠재판장님⁠, 재단 쪽 대리인입니다⁠. 원고 대리인은 지금 자기 의뢰인에게 불리한⁠.⁠”

“⁠원고 본인입니다⁠.⁠”

부사장이 앉은 채로 말했다⁠. 일어서지 않았다⁠. 해장국집에서 한 약속대로였다⁠.

“⁠대리인의 말은 제 뜻입니다⁠.⁠”

맨 앞줄에서 기세만이 천천히 일어섰다⁠. 비서실장이 기세만의 팔꿈치를 잡았다⁠. 이 손을 털어 냈다⁠. 박하 냄새가 법정 앞쪽까지 번졌다⁠.

“⁠모 변호사⁠.⁠”

지하 주차장에서 처음 들었던 이 목소리였다⁠. 다만 이번에는 말 사이에 숨을 고르지 않았다⁠.

태율은 이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서류 가방 안쪽 지퍼를 열었다⁠. 노란 손수건 꾸러미를 꺼냈다⁠. 귀퉁이의 토끼가 형광등 아래 드러났다⁠. 손수건을 펼쳤다⁠. 열 돈짜리 금덩이가 이 위에 누워 있었다⁠. 산 모양 표지가 천장을 향해 있었다⁠.

두 번째 줄 끝에서 윤 여사의 아들이 반쯤 일어서다 김 과장의 손에 눌려 주저앉았다⁠.

태율은 금괴를 손수건째 쥐었다⁠. 재판장 앞 증인석은 비어 있었다⁠. 이 자리까지는 원고석에서 세 걸음이었다⁠. 원고 대리인이 낸 증거라면 이 세 걸음을 걸어 법정 경위에게 건네면 되었다⁠. 그러면 금괴는 원고 쪽이 원고 쪽 증인을 다시 세우는 물건이 되었다⁠. 회장이 말한 그럴듯한 이야기가 이 세 걸음 위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

태율은 이 세 걸음을 걷지 않았다⁠.

태율은 원고석 탁자 끝을 돌아 나왔다⁠. 증인석 앞을 지나쳤다⁠. 재판장이 태율을 눈으로 따라왔다⁠. 백상 대표가 무언가 말하려다 멈췄다⁠. 방청석 맨 앞줄에서 기세만이 태율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

염다경은 피고석에서 태율이 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왼손이 탁자 모서리에서 떨어졌다⁠. 태율의 손에 들린 노란 토끼 손수건을⁠, 이 위의 누런 금빛을 보았다⁠. 태율이 가방을 들고 다니던 이 무게가 무엇이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일곱 해 동안 태율과 다경 사이에는 늘 탁자 두 개가 있었다⁠. 태율은 지금 이 사이를⁠, 제 의뢰인 자리가 아니라 다경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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