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75자)

상가 2층

이혼 숙려 기간 · 여시결

목요일 아침 열 시⁠, 약국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지애는 조제실에서 고개를 들었다⁠. 공기에 아무 냄새도 섞이지 않았다⁠. 냄새가 없는 것으로 누가 들어왔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 지애는 우스웠다⁠.

묘진은 관리사무소 직원 하나를 데리고 왔다⁠. 직원은 줄자로 약국 진열대 폭을 쟀고⁠, 묘진은 계산대 앞에 서서 진열대의 핸드크림을 하나씩 집어 뒷면을 읽었다⁠.

“⁠무향은 없나요⁠?⁠”

“⁠완전한 무향은 없어요⁠. 향을 안 넣은 거라도 원료 냄새는 있어요⁠.⁠” 지애가 연고 기제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이게 제일 냄새가 적어요⁠. 약 섞을 때 쓰는 바탕 연고예요⁠.⁠”

묘진이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처음으로 무언가 마음에 든 얼굴이었다⁠.

“⁠이걸로 할게요⁠.⁠” 묘진이 카드를 내밀었다⁠. “⁠약국장님이 월요일에 그러시더라고요⁠. 약사님 자리는 꼭 지키겠다고⁠. 좋은 분이세요⁠.⁠”

“⁠네⁠.⁠”

“⁠좋은 분들은 숫자를 늦게 봐요⁠.⁠” 묘진이 영수증을 받아 접었다⁠. “⁠6월부터 임대료가 사십 퍼센트 올라요⁠. 이 상가에서 약국이 제일 오래 싸게 있었어요⁠. 스물두 해 동안⁠.⁠”

지애는 계산대 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이 차가운 유리에 닿았다⁠.

“⁠그래서 저한테 뭘 원하세요⁠?⁠”

“⁠아무것도요⁠.⁠” 묘진이 바탕 연고를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원하는 건 5월 6일에 말씀드릴게요⁠. 그날은 다들 들어 주시거든요⁠.⁠”

묘진과 직원이 나가자 약국장이 조제실에서 나왔다⁠.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다⁠. 약국장은 지애 옆에 서서 한참 진열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약사님⁠, 여섯 해 전에 내가 이 약국 넘긴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나 은퇴할 테니 인수하라고⁠.⁠”

“⁠기억해요⁠.⁠”

“⁠그때 약사님이 인수 자금 대출 알아보다가 접었잖아⁠. 집 사느라고⁠.⁠” 약국장이 지애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때 인수했으면 지금 약사님 약국이었지⁠. 저 여자랑은 약사님이 이야기했을 거고⁠. 남편분은 그 이야기 알아요⁠?⁠”

“⁠말 안 했어요⁠.⁠”

“⁠왜⁠?⁠”

“⁠집을 사기로 이미 정했으니까요⁠.⁠”

약국장이 짧게 웃었다⁠. 웃음 끝이 쓸쓸했다⁠.

“⁠약사님은 남편분하고 같이 정한 게 하나라도 있어요⁠?⁠”

지애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율비 이름이라고 말하려 했는데⁠, 지난 토요일 장터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그것도 성규가 먼저 정한 것이었다⁠. 밤나무에 내린 비 냄새로⁠. 지애는 박하사탕 통을 열어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생각해 볼게요⁠.⁠”

*

오후 세 시⁠, 성규는 상가 계단을 올라 2층 문을 열었다⁠. 두 달 전까지 영어 학원이었던 방이었다⁠. 벽에 알파벳 스티커가 반쯤 떼어진 채 남아 있었다⁠. A와 P와 L이 남고 나머지는 하얀 자국만 있었다⁠. 창가에 공기청정기 두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방 안에 아무 냄새도 없었다⁠.

성규는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 냄새도 없는 방 한구석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가 코끝을 붙잡았다⁠. 화하고 쌉쌀한 냄새⁠. 성규는 이름을 붙이려다 놓쳤다⁠. 묘진이 책상 너머에서 의자를 가리켰다⁠.

“⁠아내분께 말씀 안 하고 오셨죠⁠?⁠”

“⁠네⁠.⁠”

“⁠다들 그러세요⁠.⁠” 묘진이 서류 한 장을 책상 위로 밀었다⁠. “⁠간단하게 말씀드릴게요⁠. 1101호를 5억 3천에 사겠습니다⁠. 그다음에 보증금 없이 월세 백오십에 남편분께 다시 빌려 드릴게요⁠. 율비는 전학 안 가도 되고⁠, 같은 방에서 자고⁠, 같은 놀이터에서 놀아요⁠. 남편분은 대출 4억 2천에서 벗어나시고요⁠.⁠”

성규는 서류를 보지 않았다⁠. 묘진의 얼굴을 보았다⁠. 화장기가 거의 없었고⁠, 귀걸이도 없었다⁠.

“⁠향료 연구원이시라면서요⁠.⁠” 묘진이 물었다⁠. “⁠냄새로 먹고사시는 분이 냄새 없는 방에 오시니까 어떠세요⁠?⁠”

“⁠숨이 막혀요⁠.⁠”

“⁠다들 그러세요⁠. 그래서 여기서는 오래 이야기를 안 하세요⁠. 빨리 정하고 나가세요⁠.⁠” 묘진이 공기청정기를 돌아보았다⁠. “⁠제가 이 방을 이렇게 해 둔 이유예요⁠.⁠”

“⁠아내는 그렇게 안 할 거예요⁠.⁠”

“⁠그래서 남편분께 먼저 말씀드리는 거예요⁠.⁠” 묘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남편분 혼자 사시려다가 대출 안 나오셨죠⁠? 남편분 연봉으로 4억 2천은 안 나와요⁠. 저는 은행보다 계산이 빨라요⁠.⁠”

“⁠율비 핑계 대고 싸게 사시려는 거잖아요⁠.⁠”

“⁠맞아요⁠.⁠” 묘진이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율비한테도 좋아요⁠. 둘 다 맞는 말이에요⁠. 둘 중 하나만 맞는 제안은 제가 안 해요⁠.⁠”

묘진은 창밖을 보았다⁠. 창 너머로 4단지 아파트들이 줄지어 있었다⁠. 411동 11층 베란다도 보였다⁠.

“⁠2012년에 저도 저기 살았어요⁠. 3동 702호⁠. 신혼집이었어요⁠. 둘이 대출을 끝까지 받아서 샀는데⁠, 남편이 빚만 두고 나갔어요⁠. 숙려 기간도 없었어요⁠. 그냥 나갔어요⁠.⁠” 묘진의 목소리는 숫자를 말할 때와 같았다⁠. “⁠석 달 만에 급매로 팔았어요⁠. 제일 먼저 와 준 사람한테⁠. 그 사람이 일 년 만에 되팔고 오천을 남겼어요⁠. 그때 알았어요⁠. 집은 감정으로 팔면 지고⁠, 숫자로 팔면 이겨요⁠. 저는 그 뒤로 숫자로만 사요⁠.⁠”

“⁠그래서 남들이 감정으로 팔 때를 기다리세요⁠?⁠”

“⁠기다리는 건 아니에요⁠. 그때 제일 먼저 가는 거예요⁠. 제가 그랬듯이요⁠.⁠” 묘진이 서류를 한 번 더 성규 쪽으로 밀었다⁠. “⁠아내분 약국 재계약도 같이 생각해 보세요⁠. 집이 정리되면 저도 마음이 넓어져요⁠.⁠”

성규는 서류를 접어 후드 주머니에 넣었다⁠. 받지 않으면 묘진 앞에서 바로 거절하는 것이 되었고⁠, 거절할 말이 아직 없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아까의 화하고 쌉쌀한 냄새가 코끝에 남아 있었다⁠. 이름이 혀끝까지 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

저녁 여섯 시⁠, 희철이 세 번째 손님을 데려왔다⁠. 마흔 중반 부부였다⁠. 남편이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지애를 보고 손뼉을 쳤다⁠.

“⁠어⁠, 약사님⁠!⁠”

지난주 약국에서 탈모 샴푸와 숙취해소제를 같이 먹어도 되느냐고 묻던 남자였다⁠. 오늘도 몸에 붙는 크롭 재킷 차림이었다⁠. 아내가 남편의 옆구리를 찔렀다⁠.

“⁠당신 약국에서 뭐 샀는데⁠?⁠”

“⁠비타민⁠.⁠”

“⁠샴푸요⁠.⁠” 지애가 웃으며 말했다⁠. 희철이 시킨 웃음이 이번에는 저절로 나왔다⁠.

성규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지애는 거실을 정리했다⁠. 소파 팔걸이에 성규의 회색 후드 집업이 걸쳐져 있었다⁠. 손님 눈에 띄지 않게 안방 옷걸이에 걸려고 집어 드는데⁠,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가 떨어졌다⁠.

「⁠1101호 매매 및 임대 제안 — 매매가 5억 3천만 원⁠. 매수인 석묘진⁠. 잔금 5월 7일⁠. 매도인에게 월세 150만 원⁠, 보증금 없이 2년 임대⁠.⁠」

지애는 종이를 쥐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부엌의 성규를 눈짓으로 불렀다⁠. 성규가 주전자를 내려놓고 따라 들어왔다⁠. 지애가 안방 문을 반쯤 닫았다⁠. 거실에서 희철이 베란다 창을 열며 남향 햇빛 자랑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뭐야⁠?⁠”

성규는 종이를 보았다⁠. 대답하지 않았다⁠.

“⁠나 몰래 그 여자 만났어⁠?⁠”

“⁠만났어⁠.⁠”

“⁠언제⁠?⁠”

“⁠오늘 세 시⁠.⁠”

“⁠그 여자한테 판다고⁠?⁠”

“⁠모르겠어⁠.⁠”

거실에서 크롭 재킷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내에게 속삭이는 소리였는데 안방까지 다 들렸다⁠.

“⁠여보⁠, 저 집 싸우는 거 아니야⁠?⁠”

“⁠우리도 싸우잖아⁠.⁠”

“⁠우리는 손님 있을 때는 안 싸우잖아⁠.⁠”

“⁠손님 가면 싸우지⁠.⁠”

희철이 큰 소리로 웃으며 붙박이장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애와 성규는 안방에서 서로를 보다가⁠, 동시에 거실로 나갔다⁠. 둘 다 웃고 있었다⁠. 크롭 재킷 부부는 붙박이장을 열어 보고 베란다를 보고⁠, 마지막으로 소파에 앉은 두 사람을 오래 보았다⁠. 현관에서 아내가 희철에게 말했다⁠.

“⁠소장님⁠, 집은 좋은데요⁠. 생각해 볼게요⁠.⁠”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지애는 약국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생각해 보겠다던 손님이 다시 오는 일은 드물었다⁠.

*

손님들이 가고 희철도 갔다⁠. 율비는 학원에 있었다⁠. 거실에 커피 냄새가 식어 가고 있었다⁠.

“⁠당신은 나 몰래 그 여자랑 거래하고⁠.⁠” 지애가 종이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당신은 나 몰래 전세 계약했잖아⁠.⁠”

“⁠그건 율비 때문에⁠.⁠”

“⁠이것도 율비 때문에⁠.⁠” 성규가 종이를 지애 앞으로 밀었다⁠. “⁠율비가 이사 안 가도 된대⁠. 같은 방에서 자고⁠.⁠”

“⁠월세 백오십을 당신 혼자 내고⁠? 대출 없어지면 당신은 남는 게 하나도 없어⁠. 5억 3천이면 대출 갚고 나눌 돈이 한 사람에 오천도 안 돼⁠.⁠”

“⁠알아⁠.⁠”

“⁠알면서 받아 왔어⁠?⁠”

성규가 대답하지 않았다⁠. 지애는 식탁 의자에 앉았다⁠. 상담위원의 숙제가 떠올랐다⁠. 정하지 말고 묻기만⁠. 지애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꺼냈다⁠.

“⁠당신⁠, 그 여자 제안 받을 거야⁠?⁠”

성규가 지애를 보았다⁠. 지애가 묻기만 하고 기다리는 것을 성규는 오랜만에 보았다⁠. 성규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모르겠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지애는 물어봐 주는 말을 오랜만에 들었다⁠. 둘 다 잠깐 말이 없었다⁠. 냉장고 모터가 웅 하고 돌았다⁠.

“⁠나도 하나 말할게⁠.⁠” 지애가 말했다⁠. “⁠여섯 해 전에 약국장님이 약국 넘겨준다고 했어⁠. 인수하라고⁠. 집 사느라 안 했어⁠.⁠”

“⁠왜 말 안 했어⁠?⁠”

“⁠당신이 향수 회사 말 안 한 거랑 같은 이유⁠.⁠”

성규가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한 번 흔들렸다⁠.

“⁠둘 다 집 하나 사려고 하나씩 버렸네⁠.⁠”

“⁠버린 게 아니라 고른 거야⁠.⁠”

“⁠고른 거면 같이 골랐어야지⁠.⁠”

지애는 대답 대신 식탁 위의 종이를 다시 보았다⁠. 「⁠잔금 5월 7일⁠」 숙려 기간이 끝나는 다음 날이었다⁠. 묘진은 사흘 기한을 알았고⁠, 5월 6일을 알았고⁠, 약국 재계약이 6월인 것도 알았다⁠. 오늘은 성규가 대출을 못 받은 것까지 알았다⁠.

“⁠그 여자⁠, 우리 일을 너무 많이 알아⁠.⁠”

“⁠소장님은 당신이 전세 집주인한테 날짜 말했을 거래⁠.⁠”

“⁠나 집주인한테 잔금 날만 말했어⁠. 법원 날짜는 말 안 했어⁠.⁠”

“⁠그럼 누가 말했는데⁠?⁠”

둘이 서로를 보았다⁠. 같은 질문을 서로에게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성규가 베란다를 돌아보았다⁠. 향료 선반의 병들이 저녁 빛을 받고 있었다⁠.

“⁠누가 흘리는지 찾자⁠.⁠”

“⁠어떻게⁠?⁠”

“⁠냄새 맡듯이⁠.⁠” 성규가 식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향료는 섞어 놓으면 뭐가 들어갔는지 몰라⁠. 그래서 하나씩 빼 보거나⁠, 하나씩 다른 걸 넣어 봐⁠.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씩 흘려 보자⁠. 그 여자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 보면 돼⁠.⁠”

지애는 성규를 보았다⁠. 열한 해 동안 성규가 무언가를 먼저 하자고 한 것을 손에 꼽을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버스에서 소화제를 산 일이었다는 것을 지애는 지난 토요일에야 알았다⁠.

“⁠좋아⁠.⁠” 지애가 말했다⁠. “⁠같이 정해⁠.⁠”

“⁠같이⁠?⁠”

“⁠같이⁠. 누구한테 뭘 흘릴지⁠.⁠”

지애가 식탁 위 제안서를 뒤집어 놓았다⁠. 「⁠잔금 5월 7일⁠」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누구부터 해⁠?⁠”

“⁠당신이 정해⁠.⁠”

“⁠같이 정하자며⁠.⁠”

성규가 잠깐 생각하더니 주먹을 식탁 위로 내밀었다⁠.

“⁠그럼 가위바위보⁠.⁠”

“⁠마흔둘이 가위바위보로 정해⁠?⁠”

“⁠마흔이 이혼은 혼자 정했잖아⁠.⁠”

지애가 성규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주먹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주먹이 식은 머그잔 두 개 사이에서 세 번 흔들렸다⁠. 지애는 보를 냈고 성규는 가위를 냈다⁠. 성규가 이긴 것은 열한 해 만에 처음이라고⁠, 지애는 손바닥을 펼친 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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