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84자)

상담실

이혼 숙려 기간 · 여시결

교실에서는 늘 흰 우유와 실내화 고무 냄새가 났다⁠. 4월 13일 화요일 둘째 시간이 끝난 쉬는 시간⁠, 율비는 책상에 엎드려 연필 끝으로 지우개를 찌르고 있었다⁠. 짝꿍이 의자를 뒤로 젖히고 율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율비⁠, 너네 집 이혼 급매래⁠.⁠”

율비는 연필을 멈췄다⁠. 짝꿍의 말은 학원 차 안에서 들은 말처럼 앞뒤가 없었다⁠.

“⁠누가 그래⁠?⁠”

“⁠우리 엄마가⁠. 어제 저녁에 아빠한테 그러던데⁠. 1101호 이혼 급매 나오면 우리가 잡자고⁠.⁠”

앞자리 여자애가 돌아앉았다⁠. “⁠급매가 뭐야⁠?⁠”

“⁠급하게 매운 거⁠?⁠” 뒷자리 남자애가 끼어들었다⁠. “⁠떡볶이 같은 거⁠?⁠”

“⁠아니야⁠.⁠” 율비가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숫자를 말할 때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급매는 급하게 파는 거야⁠. 우리 집은 천천히 팔 거야⁠. 그리고 우리 엄마 아빠는 아직 이혼 안 했어⁠. 숙려 기간이야⁠.⁠”

“⁠숙려가 뭔데⁠?⁠”

“⁠생각하는 기간⁠. 어른들은 이혼도 생각하고 해⁠.⁠”

아이들이 잠깐 조용해졌다⁠. 짝꿍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 끝나면⁠?⁠”

“⁠그건 생각 끝나 봐야 알지⁠.⁠”

“⁠우리 아빠는 미국 주식 생각하는데 맨날 안 끝나⁠.⁠”

아이들이 와르르 웃었다⁠. 율비도 따라 웃었다⁠. 웃으면서 율비는 책상 밑에서 엄지손톱을 집게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 칠판을 두드리자 아이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셋째 시간 내내 율비는 칠판 대신 창밖 벚나무를 보았다⁠. 우리가 잡자고⁠, 짝꿍 엄마가 그랬다고 했다⁠. 잡는다는 말이 집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율비는 처음 알았다⁠. 우리 집은 물고기가 아닌데⁠. 마지막 시간 종이 울리자 율비는 학원 가방을 메고 교문을 나와서 학원 차가 서는 길 대신 단지 상가로 걸었다⁠.

*

같은 화요일 오후⁠, 상담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지애와 성규는 법원 복도 대기 의자에 한 칸 띄워 앉았다⁠. 복도에서는 바닥 왁스 냄새와 자판기 커피 냄새가 났다⁠. 맞은편 의자에는 일흔은 넘어 보이는 노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들어온 뒤로 한 번도 쉬지 않고 다투었다⁠.

“⁠김치냉장고는 내가 가져가요⁠. 당신은 김치 안 담그잖아⁠.⁠”

“⁠김치는 안 담가도 김치는 먹어⁠.⁠”

“⁠그럼 사 먹어요⁠.⁠”

“⁠사 먹는 김치는 김치냉장고에 넣으면 안 되나⁠?⁠”

할머니가 지애를 보았다⁠. 같은 편을 찾는 눈이었다⁠.

“⁠새댁⁠, 김치냉장고는 김치 담그는 사람이 가져가는 거 맞지⁠?⁠”

지애가 대답을 고르는 사이에 성규가 먼저 말했다⁠.

“⁠저희 집은 김치를 장모님이 담가 주세요⁠.⁠”

“⁠그럼 장모님 드려⁠.⁠” 할아버지가 무릎을 쳤다⁠. “⁠그게 제일 깔끔하네⁠.⁠”

노부부는 처음으로 같은 의견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고⁠, 바로 다음 순간 장모님 댁까지 누가 차를 몰고 가느냐로 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지애는 웃음을 참으며 성규를 곁눈질했다⁠. 성규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숙려 기간이 시작되고 둘이 같은 일로 웃음을 참은 것은 처음이었다⁠. 상담실 문이 열리고 직원이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

지애는 법원 상담실의 낮은 소파에 앉았다⁠. 창문 블라인드 틈으로 오후 햇빛이 줄무늬로 들어왔다⁠. 탁자 위 종이컵 녹차에서 김이 올라왔다⁠. 성규는 소파 반대편 끝에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 사람 하나가 앉을 만큼 자리가 비어 있었다⁠.

상담위원은 예순이 넘은 남자였다⁠. 머리가 반쯤 벗어졌고⁠, 말끝마다 “⁠그렇지라⁠”를 붙였다⁠. 서류를 넘기다 안경 너머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따님은 누가 키우실랑가요⁠?⁠”

“⁠제가요⁠.⁠” 지애가 말했다⁠.

“⁠제가요⁠.⁠” 성규가 말했다⁠.

상담위원이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두 분은 대답은 참 빨리 하시네⁠. 대답 빠른 집이 대개 대화는 느리지라⁠.⁠”

지애가 서류를 펼쳤다⁠. 후곡 학원가 전세 가계약서 사본⁠, 율비 학원 시간표⁠, 약국 근무표가 차례로 나왔다⁠.

“⁠율비 학원이 다 후곡에 있어요⁠. 걸어서 오 분⁠. 저는 아홉 시에 출근해서 여섯 시에 끝나고요⁠. 저녁은 제가 먹일 수 있어요⁠.⁠”

“⁠남편분은요⁠?⁠”

“⁠저는 지금 집에서 키우고 싶어요⁠.⁠” 성규가 무릎 위에서 손을 맞잡았다⁠. “⁠율비가 이사를 안 가게요⁠. 학교도 친구도 그대로 두고⁠.⁠”

“⁠그 집을 남편분이 사실 수 있고⁠?⁠”

성규가 대답하지 않았다⁠. 상담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에 무언가를 썼다⁠.

“⁠부인은 왜 그 집을 꼭 사셨어요⁠? 기록 보니까 여섯 해 전에 가장 비쌀 때 사셨드만⁠.⁠”

지애는 녹차 컵을 감싸 쥐었다⁠. 컵이 뜨거웠다⁠. 블라인드 줄무늬가 손등 위에서 흔들렸다⁠.

“⁠열 살 때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갔어요⁠.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요⁠. 어느 날 학교 갔다 왔더니 냉장고에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어요⁠. 피아노에도⁠, 텔레비전에도요⁠. 엄마가 딱지 붙은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서 반찬을 했어요⁠. 그 김치 냄새를 아직도 기억해요⁠.⁠”

성규가 지애를 보았다⁠. 지애는 상담위원만 보았다⁠.

“⁠그다음 달에 반지하로 이사했어요⁠. 장마 때마다 벽에서 물이 났고요⁠. 저는 그때 정했어요⁠. 내 집은 내가 먼저 정한다⁠. 남이 정하게 두면 냉장고에 딱지가 붙는다⁠.⁠”

“⁠나한테는 이사 많이 다녔다고만 했잖아⁠.⁠” 성규의 목소리가 낮았다⁠.

“⁠이사 많이 다닌 거 맞아⁠.⁠”

“⁠딱지 이야기는 안 했잖아⁠.⁠”

“⁠당신은 안 물어봤잖아⁠.⁠”

상담위원이 녹차 컵을 내려놓았다⁠. 컵 바닥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부인이 먼저 정하니께 남편이 안 정하고⁠, 남편이 안 정하니께 부인이 먼저 정하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집이네⁠, 그렇지라⁠.⁠” 상담위원이 서류를 덮었다⁠. “⁠숙제 하나 내 드릴게요⁠. 집에 가서 서로한테 질문을 하나씩 하세요⁠. 정하지 말고 묻기만⁠.⁠”

“⁠하나만요⁠?⁠” 지애가 물었다⁠.

“⁠두 분한테는 하나도 많아요⁠.⁠”

상담실을 나올 때 복도 텔레비전에서 오후 뉴스가 흘렀다⁠. 「⁠이혼 숙려 기간 중 한집 생활 늘어⁠… 집값과 대출 부담 탓⁠」 대기 의자에 앉은 부부 셋이 동시에 화면을 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지애는 세 부부의 얼굴에서 아침마다 거울로 보는 얼굴을 보았다⁠.

*

법원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 성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약국장이었다⁠. 성규가 스피커를 켰다⁠.

“⁠율비 아빠⁠? 율비가 약국에 와 있어요⁠. 학원 안 가고⁠. 조제실 의자에 앉아서 박하사탕만 먹고 있어⁠.⁠”

성규는 차선을 바꿨다⁠. 열 해 된 회색 승합차였다⁠. 율비가 태어난 해에 산 차라 뒷좌석 시트에 아직도 아기 분유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다고 성규는 믿었다⁠. 지애는 그럴 리 없다고 했지만⁠, 비 오는 날 창문을 닫으면 분명히 났다⁠.

약국 조제실 의자에서 율비가 내려왔다⁠. 볼이 박하사탕으로 불룩했다⁠. 약국장이 지애에게 눈짓을 하고 진열대 쪽으로 물러났다⁠.

“⁠학원은⁠?⁠”

“⁠안 갔어⁠.⁠”

“⁠왜⁠?⁠”

율비는 대답 대신 사탕을 깨물었다⁠. 와작 소리가 조제실에 울렸다⁠. 약국장이 진열대 너머에서 헛기침을 했다⁠.

“⁠율비가 와서 그러더라고요⁠. 엄마 일하는 데를 한 번 보고 싶었다고⁠. 그래서 조제실 구경시켜 줬어요⁠. 약 세는 기계도 돌려 보고⁠.⁠”

“⁠약 세는 기계 재밌어⁠.⁠” 율비가 말했다⁠. “⁠엄마는 맨날 저거 하는 거야⁠?⁠”

“⁠맨날⁠.⁠”

“⁠심심하겠다⁠.⁠”

“⁠심심하지 않아⁠. 틀리면 사람이 아파⁠.⁠”

율비가 조제실 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하얀 약장 서랍마다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율비는 엄마가 열한 해 동안 서 있던 자리를 처음 보는 얼굴로 보았다⁠. 성규가 율비 가방을 받아 들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율비는 창밖만 보았다⁠. 신호등 두 개를 지나서 율비가 입을 열었다⁠.

“⁠우리 반 애가 우리 집 이혼 급매래⁠. 자기네가 잡을 거래⁠.⁠”

지애가 조수석에서 돌아보았다⁠. 성규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급매가 떡볶이냐고 물어봐서 내가 설명해 줬어⁠. 숙려 기간도⁠.⁠”

“⁠뭐라고 했는데⁠?⁠”

“⁠생각하는 기간이라고⁠. 어른들은 이혼도 생각하고 한다고⁠.⁠” 율비가 창문에 이마를 댔다⁠. “⁠맞지⁠?⁠”

성규와 지애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미러 속에서 율비가 그것을 보았다⁠.

*

집에 들어서자 율비는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거실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지애와 성규가 신발을 벗는 동안 율비는 소파 가운데에 올라가 앉았다⁠. 법원 봉투가 있던 자리였다⁠.

“⁠나도 정할래⁠.⁠”

“⁠뭘⁠?⁠”

“⁠나 어디서 살아⁠?⁠”

지애와 성규가 현관에 선 채로 서로를 보았다⁠. 상담실에서 율비를 두고 다툰 것이 한 시간 전이었다⁠.

“⁠엄마는 엄마랑 살라고 할 거고⁠, 아빠는 아빠랑 살라고 할 거잖아⁠. 근데 둘 다 나한테는 안 물어봤잖아⁠.⁠” 율비가 소파 쿠션을 끌어안았다⁠. “⁠선생님이 그랬어⁠. 자기 일은 자기가 정하는 거래⁠.⁠”

지애는 신발장에 손을 짚었다⁠. 아침에 혼자 정한 서류들이 가방 안에서 무겁게 느껴졌다⁠. 성규가 먼저 거실로 걸어가 율비 앞에 쪼그려 앉았다⁠.

“⁠율비는 어디서 살고 싶어⁠?⁠”

율비가 쿠션 너머로 아빠를 보았다⁠. 한참 보다가 엄마를 보았다⁠.

“⁠엄마랑 살래⁠.⁠”

성규의 등이 아주 조금 굽었다⁠. 지애는 그것을 현관에서 보았다⁠.

“⁠아빠는 금요일마다 없잖아⁠. 금요일 밤에 무서운 꿈 꾸면 아빠 방에 가는데⁠, 아빠 방에 아무도 없어⁠. 그리고 아빠 냄새가 이상해⁠. 금요일 다음 날 아침에는 딸기우유 냄새가 아니야⁠.⁠”

“⁠무슨 냄새가 나는데⁠?⁠”

“⁠모르는 냄새⁠.⁠”

성규는 율비의 운동화 끈을 풀어 주었다⁠. 끈이 두 번 엉켜 있었다⁠. 풀고 나서 율비의 발을 소파 밑으로 내려놓았다⁠.

“⁠알았어⁠.⁠”

지애는 이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율비의 실내화 주머니에서 교실 냄새가 났다⁠. 흰 우유와 고무 냄새⁠. 지애는 열 살 때 반지하 신발장에서 맡던 곰팡이 냄새를 떠올렸고⁠, 율비의 실내화 주머니를 신발장에 가지런히 넣었다⁠.

상담위원의 숙제가 생각났다⁠. 정하지 말고 묻기만⁠. 지애는 성규의 등에 대고 물을 말을 골랐다⁠. 금요일 밤에 어디 가느냐고 물을까⁠. 신용대출은 무엇에 썼느냐고 물을까⁠. 버스에서 왜 깨우지 않았느냐고 물을까⁠. 하나만 고르라는 숙제가 그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지애가 입을 열기 전에 성규가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

밤 열한 시⁠, 성규는 베란다 향료 선반 앞에 앉아 있었다⁠. 바닐라 병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거실 불은 꺼졌고⁠, 안방 문틈으로만 불빛이 새어 나왔다⁠. 율비 방은 조용했다⁠.

엄마랑 살래⁠. 아빠는 금요일마다 없잖아⁠.

율비의 말이 틀린 데가 없었다⁠. 금요일마다 없었다⁠. 없었던 까닭을 말할 수 없었고⁠, 말할 수 없는 동안 율비에게서 아빠의 집은 금요일마다 비어 있었다⁠. 성규가 이 집을 사려던 것은 율비가 이사 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율비는 이 집보다 엄마를 골랐다⁠.

성규는 신발장 위에 놓인 명함을 떠올렸다⁠. 하얀 종이에 이름과 번호만 있던 명함⁠. 지애가 버리지 않고 신발장 구석에 꽂아 둔 것을 성규는 알고 있었다⁠. 성규는 맨발로 현관에 나가 명함을 빼 왔다⁠.

번호를 누르고 문자를 쳤다⁠. 지웠다가 다시 쳤다⁠.

「⁠만나서 이야기하죠⁠. 마성규⁠」

보내고 나서 휴대전화를 엎어 놓기도 전에 답이 왔다⁠.

「⁠목요일 오후 세 시⁠, 상가 2층으로 오세요⁠. 아내분께는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다들 그러세요⁠.⁠」

성규는 휴대전화를 엎었다⁠. 바닐라 병 뚜껑을 닫는 것을 잊어서⁠, 베란다에 달고 무거운 냄새가 밤새 고였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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