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41자)

벚꽃 장터

이혼 숙려 기간 · 여시결

파스 냄새가 계산대 너머로 넘어왔다⁠. 4월 10일 토요일 오전⁠, 지애는 반나절 근무를 서고 있었다⁠. 계산대 앞의 할아버지는 파스 두 봉지를 내려놓고 돋보기를 이마로 밀어 올렸다⁠.

“⁠약사 양반⁠, 이혼한다며⁠?⁠”

지애는 바코드를 찍다 말고 웃었다⁠. 희철이 시킨 웃음이었다⁠. 웃음은 약국에서도 써야 했다⁠.

“⁠소문이에요⁠, 어르신⁠. 저희 잘 살아요⁠.⁠”

“⁠잘 사는 사람은 그 말을 안 해⁠.⁠” 할아버지가 파스를 챙겨 들었다⁠. “⁠우리 마누라도 사십 년을 잘 산다고 하더니 작년에 집 나갔어⁠. 경로당 회장이랑⁠.⁠”

뒤에 서 있던 젊은 엄마가 비타민 통을 내밀며 목소리를 낮췄다⁠.

“⁠약사님⁠, 1101호요⁠. 5억 초반이면 진짜 내놓으시는 거예요⁠? 저희 동생이 집 보고 있어서요⁠.⁠”

“⁠안 내놨어요⁠.⁠”

“⁠그럼 언제 내놓으세요⁠?⁠”

지애는 비타민 값을 받고 영수증을 건넸다⁠. 영수증 끝이 손끝에서 조금 떨렸다⁠. 열한 해 동안 이 계산대 앞에서 지애는 약을 건네는 사람이었다⁠. 오늘부터는 급매를 건네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약국장이 조제실 문틈으로 지애를 보았다⁠. 소문을 들었다는 얼굴이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조제실에 들어온 지애에게 박하사탕을 하나 내밀었다⁠.

“⁠입이 쓸 때는 이게 나아요⁠. 약보다⁠.⁠”

지애는 사탕을 입에 물고 가운 깃을 여몄다⁠. 흰 가운 안에 연두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집 보러 오는 사람 앞에서는 밝은 색을 입으라고 희철이 말해서 옷장 깊숙이에서 꺼낸 옷이었다⁠. 약국에서까지 입을 생각은 없었는데⁠, 아침에 갈아입을 겨를이 없었다⁠.

“⁠약사님⁠, 월요일에 상가 새 주인이 나를 보자네요⁠.⁠” 약국장이 약장 서랍을 정리하며 말했다⁠. “⁠임대료 이야기겠지⁠. 나는 이 자리에서 스물두 해를 했어요⁠. 두 해만 더 하고 접으려고 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아세요⁠?⁠”

“⁠모르지⁠. 건물 주인이 바뀌면 다들 처음엔 웃어요⁠. 웃다가 숫자를 말하지⁠.⁠” 약국장이 서랍을 닫았다⁠. “⁠약사님은 걱정 마요⁠. 약사님 자리는 내가 지킬게⁠.⁠”

지애는 고맙다고 말하고 박하사탕을 깨물었다⁠. 입 안이 화하게 식었다⁠.

*

정오에 1101호 초인종이 울렸다⁠. 성규가 문을 열자 쑥떡 냄새와 개 냄새가 같이 들어왔다⁠. 부녀회장이 떡 접시를 들고 서 있었고⁠, 발밑에서 작은 흰 개가 성규의 슬리퍼에 코를 박았다⁠.

“⁠1101호 아빠⁠, 떡 좀 먹어요⁠. 쑥떡⁠. 우리 동 할머니가 쪘어⁠.⁠”

부녀회장은 신발을 벗고 들어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앉자마자 휴대전화를 꺼내 「⁠물푸레4단지 소통방⁠」을 열어 성규에게 내밀었다⁠. 밤새 글이 이백 개 넘게 쌓여 있었다⁠.

「⁠1101호 사정은 안타깝지만 5억대는 막아야 합니다⁠」 「⁠다음 주 입주민 회의에서 시세 하한선 이야기합시다⁠」 「⁠하한선 정하는 건 담합이라 불법이에요⁠」 「⁠불법 아니고 공감대입니다⁠」 「⁠1501호 때 우리 석 달 앓았어요⁠」

“⁠다들 걱정이 많아⁠.⁠” 부녀회장이 떡 접시를 성규 쪽으로 밀었다⁠. “⁠6억 밑으로는 하지 마요⁠. 1101호가 5억에 팔리면 우리 집도 5억이 돼요⁠. 실거래가라는 게 그래⁠.⁠”

“⁠저희 집이에요⁠.⁠”

“⁠단지는 우리 집이에요⁠.⁠” 부녀회장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우리 아들 내년에 장가가⁠. 이 집 팔아서 보태 줄 거야⁠. 1101호 아빠가 오천 싸게 넘기면 우리 아들 신혼집이 방 하나 줄어⁠.⁠”

개가 성규의 발목을 핥았다⁠. 성규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녀회장의 얼굴을 보았다⁠.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겁이 난 얼굴이었다⁠.

“⁠회장님⁠, 소통방에 처음 글 올린 사람 누구예요⁠?⁠”

“⁠411동 주민⁠. 나도 몰라⁠. 프로필이 없잖아⁠. 근데 그 사람이 날짜까지 알더라고⁠. 5월 6일⁠. 숙려 끝나는 날⁠.⁠” 부녀회장이 떡을 하나 집어 성규 입에 넣다시피 했다⁠. “⁠아빠⁠, 나는 1101호 편이에요⁠. 오해하지 마⁠. 이혼은 개인 사정이고 시세는 공공재라는 거지⁠.⁠”

“⁠그 말 소통방에서도 봤어요⁠.⁠”

“⁠내가 쓴 거야⁠.⁠”

부녀회장이 개를 안고 나가자 거실에 쑥떡 냄새가 남았다⁠. 성규는 떡을 씹으며 날짜를 생각했다⁠. 5월 6일을 아는 사람은 법원과 지애와 성규⁠, 그리고 매도 일정을 짜려고 날짜를 받아 간 희철이었다⁠.

*

오후 두 시⁠, 단지 중앙 광장에 벚꽃 장터가 열렸다⁠. 벚나무 스무 그루가 한꺼번에 피어서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좌판 위로 쏟아졌다⁠. 솜사탕 기계가 설탕 타는 냄새를 뿜었고⁠, 어묵 국물 냄새가 단내를 덮었다⁠.

지애와 성규의 좌판은 놀이터 옆 세 번째 자리였다⁠. 돗자리 위에 율비가 다 읽은 동화책⁠, 작아진 롤러스케이트⁠,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가 놓였다⁠. 성규는 회사에서 남은 향료로 만든 딸기우유 향 방향제를 작은 망사 주머니에 담아 한 줄로 늘어놓았다⁠. 율비가 주머니마다 「⁠천 원⁠」이라고 쓴 종이를 붙였다⁠.

희철은 광장 건너편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다가오지는 않고 문자만 보냈다⁠. 「⁠사모님⁠, 웃으세요⁠」 「⁠남편분⁠, 어깨 펴세요⁠」 「⁠손이요⁠, 손⁠」

지애가 성규의 손을 잡았다⁠. 돗자리 아래로 손을 내려서⁠, 지나가는 사람에게만 보이게 잡았다⁠. 웃는 얼굴로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연 씨 부부한테 가계약금 돌려준 거⁠, 당신 통장에서 보냈어⁠?⁠”

“⁠내 통장에서 보냈어⁠.⁠” 성규도 웃는 얼굴이었다⁠. “⁠당신 통장에서 보내면 당신이 또 혼자 보냈다고 할까 봐⁠.⁠”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해⁠.⁠”

“⁠지난달에⁠. 관리비⁠.⁠”

지나가던 아주머니 둘이 좌판 앞에 멈췄다⁠. 한 사람이 성규의 회색 후드 집업과 흰 운동화를 훑더니 옆 사람 옆구리를 찔렀다⁠.

“⁠어머⁠, 영포티 패션이다⁠.⁠”

“⁠이거 열두 해 전에 산 거예요⁠.⁠” 성규가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영포티가 아니라 그냥 오래된 포티예요⁠.⁠”

아주머니들이 깔깔 웃으며 방향제를 두 개 샀다⁠. 지애는 웃음을 참느라 성규의 손을 꽉 쥐었다⁠. 성규가 아프다는 얼굴을 했다⁠. 웃는 얼굴로 아픈 얼굴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동화책을 뒤적이던 할아버지 한 분이 율비에게 이름을 물었다⁠.

“⁠율비요⁠. 마율비⁠.⁠”

“⁠이름 예쁘다⁠. 무슨 뜻이야⁠?⁠”

율비가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지애가 대답하려는데 성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밤 율 자에 비 비 자예요⁠. 율비 태어난 날 새벽에 병원 앞 밤나무에 비가 왔어요⁠. 창문을 열었더니 젖은 밤꽃 냄새가 들어왔어요⁠. 그 냄새로 지었어요⁠.⁠”

지애는 성규를 보았다⁠.

“⁠작명 앱에서 뽑았다며⁠.⁠”

“⁠앱에도 있었어⁠.⁠” 성규가 방향제 주머니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근데 냄새가 먼저였어⁠.⁠”

율비가 아빠 후드 자락을 잡아당겼다⁠. “⁠나 밤 냄새로 지은 거야⁠? 밤꽃 냄새가 무슨 냄새인데⁠?⁠”

성규가 대답을 고르는 동안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지애는 할아버지의 헛기침이 무슨 뜻인지 알았고⁠, 성규도 알았다⁠. 둘이 동시에 율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똑같이 말했다⁠.

“⁠비 냄새⁠.⁠”

*

장터 한가운데 천막에서 부녀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스피커가 한 번 삐 소리를 냈다⁠.

“⁠여러분⁠, 오늘 장터 천막이랑 솜사탕은 상가 새 주인 되신 분이 후원하셨어요⁠. 단지 발전 기금도 오백 내셨고요⁠. 박수 한번 쳐 주세요⁠.⁠”

천막 그늘에서 검은 트렌치코트가 고개를 숙였다⁠. 성규는 손에 쥔 방향제 주머니를 놓칠 뻔했다⁠. 박수 소리가 벚꽃 사이로 흩어졌다⁠. 광장 건너편 벤치에서 희철이 일어나 화단 뒤로 걸어갔다⁠. 은단 통을 흔드는 소리가 성규 귀에까지 들렸다⁠.

묘진은 천막에서 나와 좌판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이 인사를 하면 공손하게 받았다⁠. 장터 공기는 솜사탕과 어묵과 벚꽃 냄새로 가득했는데⁠, 묘진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냄새도 남지 않았다⁠.

묘진이 1101호 좌판 앞에 멈췄다⁠. 보조바퀴 자전거의 손잡이를 쥐고 가격표를 보았다⁠. 「⁠만 원⁠」

“⁠오천 원에 주세요⁠. 급매죠⁠?⁠”

“⁠그거 만 원이에요⁠.⁠” 율비가 자전거 앞을 막았다⁠.

묘진이 율비를 내려다보았다⁠. 잠깐 무언가를 재는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 율비에게 공손하게 건넸다⁠.

“⁠그럼 만 원⁠. 따님이 장사를 잘하시네요⁠.⁠”

지애가 일어났다⁠. 손을 놓지 않아서 성규도 같이 일어났다⁠.

“⁠상가 새 주인이세요⁠?⁠”

“⁠네⁠. 1층 약국이랑 부동산도 제 건물이에요⁠. 4단지 아파트는 여섯 채 있고요⁠.⁠” 묘진이 자전거를 끌어 좌판 밖으로 옮겼다⁠. “⁠약국 재계약이 6월이죠⁠? 약국장님이랑 이야기 중이에요⁠.⁠”

“⁠그래서 소문 내셨어요⁠?⁠”

“⁠저는 소문 안 내요⁠.⁠” 묘진이 지애를 똑바로 보았다⁠. “⁠소문은 공짜잖아요⁠. 저는 돈 드는 일만 해요⁠. 그래서 남이 낸 소문은 잘 들어요⁠.⁠”

성규가 지애의 손을 쥔 채로 물었다⁠.

“⁠그 소문⁠, 누가 냈는데요⁠?⁠”

“⁠동네 분이요⁠.⁠” 묘진이 자전거 보조바퀴를 발로 툭 건드렸다⁠. 바퀴가 헛돌았다⁠. “⁠숙려 끝나는 날⁠, 5억이에요⁠. 그날까지는 기다려 드릴게요⁠. 그날 아침에는 다들 저한테 전화를 하시더라고요⁠.⁠”

묘진은 자전거를 끌고 벚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보조바퀴가 보도블록 틈에 걸릴 때마다 덜컹 소리가 났다⁠. 소리가 다 멀어질 때까지 지애는 성규의 손을 놓지 않았다⁠. 희철의 문자는 더 오지 않았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는데도 손은 그대로였다⁠.

율비가 만 원짜리를 두 손으로 펴 들고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엄마⁠, 저 아줌마가 우리 집도 사⁠?⁠”

“⁠아니⁠.⁠”

“⁠그럼 누가 사⁠?⁠”

지애는 대답하지 못했다⁠. 바람이 불었고⁠, 벚꽃잎이 돗자리 위 「⁠천 원⁠」 종이들 위로 내려앉았다⁠.

*

성규는 좌판을 지애에게 맡기고 화단 뒤로 걸어갔다⁠. 회양목 울타리 너머 벤치에 희철이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은단 통을 올려놓고 뚜껑만 열었다 닫았다 했다⁠. 벚꽃잎이 희철의 포마드 머리에 두 장 붙어 있었다⁠.

“⁠소장님⁠, 그분 알죠⁠?⁠”

“⁠이 동네에 그분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상가 주인인데⁠.⁠”

“⁠그 전부터요⁠.⁠”

희철은 대답 대신 머리에 붙은 꽃잎을 떼어 냈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그분한테 집 판 사람이 이 단지에 많아요⁠. 다들 급할 때 팔았죠⁠. 급할 때는 누가 제일 먼저 와 주느냐가 다예요⁠. 그분은 늘 제일 먼저 와요⁠.⁠”

“⁠숙려 끝나는 날짜⁠, 5월 6일요⁠. 누구한테 말했어요⁠?⁠”

“⁠저야 알죠⁠. 매도 일정 짜야 하니까⁠.⁠” 희철이 은단 통 뚜껑을 닫았다⁠. “⁠근데 저만 아는 거 아니에요⁠. 사모님이 후곡 전세 집주인한테도 말씀하셨을걸요⁠. 이사 날짜 맞추려면⁠. 집주인은 또 자기 부동산한테 말했겠죠⁠. 부동산은 또⁠.⁠”

“⁠또⁠?⁠”

“⁠이 동네는 다 동네 분이라니까요⁠.⁠”

성규는 희철의 옆에 앉았다⁠. 벤치가 삐걱거렸다⁠. 광장에서 솜사탕 기계가 다시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희철은 이십 년 동안 이 단지에서 집을 팔았다⁠. 집을 판 사람들은 다 떠났고⁠, 희철만 남았다⁠. 성규는 처음으로 그것을 생각했다⁠.

“⁠소장님은 이 단지 사세요⁠?⁠”

“⁠예전에요⁠. 7동에⁠.⁠” 희철이 일어났다⁠. “⁠지금은 상가 뒤 원룸이요⁠. 출근이 일 분이라 좋아요⁠.⁠”

희철이 바지를 털다가 은단 통을 떨어뜨렸다⁠. 뚜껑이 열리면서 은빛 알갱이들이 보도블록 위로 쏟아져 틈마다 굴러 들어갔다⁠. 희철은 쪼그려 앉아 알갱이를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성규도 옆에 앉아 같이 주웠다⁠. 알갱이는 줍는 족족 손가락 사이로 다시 빠져나갔다⁠. 희철이 주운 것을 입에 털어 넣고 씹으며 말했다⁠.

“⁠남편분⁠, 사모님 약국이요⁠. 6월에 재계약 안 될 수도 있어요⁠. 그건 제가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것만은요⁠.⁠”

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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