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13자)

어린이날

이혼 숙려 기간 · 여시결

“⁠어린이날에 집을 팔아⁠?⁠”

율비가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 말고 물었다⁠. 5월 5일 수요일 오전 열한 시⁠, 덕희가 금촌에서 율비를 데려다주고 그대로 따라 들어왔다⁠. 덕희의 가방에서 노란 종이가 삐죽 나와 있었다⁠.

“⁠집 보여 주는 거야⁠. 파는 건 아직 몰라⁠.⁠” 성규가 말했다⁠.

“⁠어린이날에 어린이 집을 남한테 보여 주는 거잖아⁠.⁠”

“⁠저녁에 짜장면 시켜 줄게⁠.⁠”

“⁠탕수육도⁠.⁠”

“⁠탕수육도⁠.⁠”

율비는 납득한 얼굴로 방에 들어갔다⁠. 성규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작은방 바닥에 성규의 이불이 그대로 개켜져 있었다⁠. 욕실 선반에 칫솔 컵 두 개가 따로 놓여 있었다⁠. 베란다 향료 병들도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치우지 않은 집은 손님을 맞는 집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는 집처럼 보였다⁠.

덕희가 가방에서 노란 종이를 꺼내 들고 현관 신발장 앞으로 갔다⁠. 지애가 안방에서 나오다 덕희의 손목을 잡았다⁠.

“⁠엄마⁠, 오늘은 연기 안 하기로 했어⁠.⁠”

“⁠부적은 연기가 아니야⁠. 신앙이야⁠.⁠”

“⁠엄마 신앙 없잖아⁠.⁠”

“⁠오늘부터 있어⁠.⁠”

결국 부적은 신발장 안쪽⁠, 신발들 뒤에 붙었다⁠. 보이지 않는 자리라서 연기가 될 수 없다고 덕희가 우겼고⁠, 지애는 더 다투지 않았다⁠.

정오에 희철이 왔다⁠. 원두 봉지를 두 개 들고 왔다⁠. 신발을 벗자마자 부엌으로 가서 주전자를 확인했다⁠.

“⁠커피는 내리시는 거죠⁠? 커피는 연기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내려요⁠.⁠” 성규가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매일 내리니까⁠.⁠”

희철은 안도의 숨을 쉬고 소파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어린이날 특집 만화가 나왔고⁠, 만화 밑으로 자막이 지나갔다⁠. 「⁠다음 달 대출 규제 앞두고 막판 거래 몰려⁠… 해외 금리 불안은 여전⁠」 희철이 리모컨을 집어 소리를 줄였다⁠. 율비가 방에서 소리쳤다⁠. 만화는 소리를 줄이면 재미없다고⁠. 희철은 소리를 도로 올렸다⁠. 주머니에서 슬라임 통을 꺼내 쥐었다⁠. 율비가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아저씨⁠, 그거 아직 안 나았어⁠?⁠”

“⁠오늘 지나면 나을 것 같아⁠.⁠”

*

두 시가 되기 전부터 초인종이 울렸다⁠. 지애가 문을 열 때마다 사람이 늘었다⁠. 부녀회장이 흰 개를 안고 쑥떡 접시를 들고 왔다⁠. 소통방에서 글만 보던 이웃들이 넷⁠, 다섯씩 몰려왔다⁠. 대부분 집을 살 사람이 아니었다⁠. 1101호 부부가 정말 연기를 안 하는지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연 씨 부부가 왔다⁠. 아내가 지애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남편은 들어오면서 주차 등록이 두 대까지 되느냐고 또 물었다⁠. 쌍둥이를 데리고 온 마흔 살 부부가 뒤를 따랐다⁠. 쌍둥이는 들어오자마자 율비 방으로 달려갔다⁠.

현관문 밖 복도에 5동 여자가 서 있었다⁠. 들어오지 않고 문틈으로만 거실을 보았다⁠.

두 시 오 분⁠, 검은 트렌치코트가 들어왔다⁠. 법무사 사무실 직원이 뒤따랐다⁠. 거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커피 냄새와 쑥떡 냄새와 개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을 묘진이 지나갔다⁠. 묘진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냄새도 보태지지 않았다⁠.

묘진은 거실 한가운데서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고 말했다⁠.

“⁠5억 4천⁠. 오늘 현금이고 잔금은 한 달 안에 드립니다⁠.⁠”

거실에 웅성거림이 퍼졌다⁠. 부녀회장이 개를 꼭 끌어안았다⁠. 연 씨 남편이 아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지애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저희가 먼저 말할게요⁠.⁠” 지애가 묘진을 보았다⁠. “⁠값은 그다음에 하세요⁠.⁠”

묘진이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법무사 직원에게 서류철을 맡기고 벽에 등을 기댔다⁠.

*

성규는 현관에서 시작했다⁠.

“⁠금요일 밤마다 아내가 여기 앉아 있었어요⁠. 소파 말고 이 신발장 옆 의자요⁠. 제가 새벽에 들어오면 늘 깨어 있었어요⁠. 저는 금요일 밤마다 대리운전을 했어요⁠. 장모님 빚을 갚느라고요⁠. 두 해 동안 아내한테 말 안 했어요⁠.⁠”

사람들이 덕희를 돌아보았다⁠. 덕희가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눈가가 붉었지만 고개는 내리지 않았다⁠.

성규는 거실로 갔다⁠.

“⁠여기서 저희는 한 달 동안 손을 잡고 앉아 있었어요⁠. 소장님이 시켜서요⁠. 사이좋은 집이 팔린다고⁠. 처음엔 연기였어요⁠. 손잡고 앉아 있으니까 손님들이 물어봤어요⁠. 어떻게 만났느냐고⁠, 안 싸우느냐고⁠. 대답하다 보니까 아내가 모르던 이야기를 제가 했고⁠, 제가 모르던 이야기를 아내가 했어요⁠.⁠”

희철이 슬라임 통을 쥔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작은방 문을 열었다⁠.

“⁠저는 여기서 자요⁠. 한 달째요⁠. 베개는 무향 세제로 빨았어요⁠. 아내 라벤더 냄새가 싫어서가 아니라⁠, 냄새가 섞이면 제가 잠을 못 자서요⁠.⁠”

율비 방 앞에서 성규는 문을 열지 않았다⁠. 안에서 쌍둥이와 율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딸 방이에요⁠. 이름은 밤나무에 내린 비 냄새로 지었어요⁠.⁠”

“⁠내 방 벽에 슬라임 자국은 안 지워져요⁠!⁠” 방 안에서 율비가 소리쳤다⁠. “⁠그건 사는 사람이 알아서 해요⁠!⁠”

거실에 웃음이 터졌다⁠. 부녀회장이 개를 안은 채 웃다가 쑥떡 접시를 놓칠 뻔했다⁠.

성규는 베란다 문을 열었다⁠. 향료 병들이 오후 햇빛에 반짝였다⁠.

“⁠여섯 해 전에 향수 회사에서 오라고 했는데 안 갔어요⁠. 이 집 대출 때문에요⁠. 아내도 같은 해에 약국을 인수할 수 있었는데 안 했어요⁠. 같은 이유로요⁠. 서로 말 안 했어요⁠. 그리고 흠도 말씀드릴게요⁠. 베란다 창틀은 비가 세게 오면 물이 새요⁠. 욕실 실리콘에 곰팡이가 있어요⁠. 할머니 손님이 냄새로 맞히셨어요⁠.⁠”

부엌에서 성규는 식탁 위 머그잔 두 개를 들어 보였다⁠. 하나는 손잡이 이가 나가 있었다⁠.

“⁠결혼할 때 산 잔이에요⁠. 열한 해 동안 아침마다 두 잔을 내렸어요⁠. 한 달 전부터 아내가 안 받아요⁠.⁠”

거실이 조용해졌다⁠. 성규는 후드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연 씨 아내에게 내밀었다⁠.

“⁠이 집 냄새예요⁠. 커피⁠, 분유⁠, 약국⁠, 비⁠, 장모님 칼국수⁠. 사시든 안 사시든 가져가세요⁠.⁠”

연 씨 아내가 병을 받아 코에 댔다⁠. 오래 맡았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

“⁠감동적이네요⁠.⁠” 묘진이 벽에서 등을 뗐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연 씨 사모님⁠, 대출 얼마까지 나와요⁠?⁠”

연 씨 아내가 병을 쥔 채 남편을 보았다⁠. 남편이 대신 대답했다⁠.

“⁠부모님 도움까지 해서 5억 7천이요⁠.⁠”

“⁠다음 달부터 심사 강화되는 거 아시죠⁠? 한도가 줄어요⁠. 이 집에 6억 넣으시면 다음 달부터 이자로 숨을 못 쉬세요⁠.⁠” 묘진이 연 씨 부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감동은 이자를 안 내 줘요⁠. 저는 5억 4천 현금이에요⁠. 이분들은 오늘 대출 걱정 없이 끝나요⁠. 그게 이분들한테도 좋아요⁠.⁠”

연 씨 남편이 고개를 숙였다⁠. 묘진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거실의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지애는 성규를 보았다⁠. 성규도 지애를 보았다⁠.

지애가 성규의 귀에 대고 말했다⁠. 이번에는 웃는 얼굴로 하는 귓속말이 아니었다⁠.

“⁠5억 7천⁠. 잔금은 6월 말⁠. 대출 승인은 이달 안에 받게 시간 맞춰 주고⁠. 베란다 선반은 두고 가⁠.⁠”

“⁠그거 다 당신이 정했네⁠.⁠”

“⁠아니⁠, 물어보는 거야⁠. 어때⁠?⁠”

성규가 지애를 보았다⁠. 지애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반은 두고 가자⁠. 병은 가져가고⁠.⁠”

지애가 연 씨 부부를 보았다⁠.

“⁠5억 7천에 드릴게요⁠. 잔금은 6월 말로 맞추고⁠, 대출 승인은 이달 안에 받으시게 저희가 서류 다 해 드릴게요⁠.⁠”

연 씨 남편이 아내를 보았다⁠. 아내가 유리병을 두 손으로 감쌌다⁠.

“⁠여보⁠, 사자⁠.⁠”

“⁠5억 7천이야⁠.⁠”

“⁠알아⁠. 싸우고도 같이 사는 집이잖아⁠. 우리 같잖아⁠.⁠” 아내가 지애를 보았다⁠. “⁠저희도 싸우면서 살 거예요⁠. 이 집에서⁠.⁠”

희철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슬라임 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희철은 줍지도 않고 가방에서 계약서 양식을 꺼냈다⁠. 손이 떨려서 볼펜이 두 번 미끄러졌다⁠. 율비가 방에서 나와 슬라임 통을 주워 희철 주머니에 도로 넣어 주었다⁠.

묘진은 연 씨 부부가 가계약금을 이체하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법무사 직원에게서 서류철을 돌려받았다⁠. 그러고는 지애와 성규 앞으로 왔다⁠.

“⁠축하드려요⁠. 5억 7천이면 5동⁠, 9동⁠, 12동도 5억 7천이네요⁠.⁠”

현관 밖 5동 여자가 문틀을 붙잡았다⁠. 묘진이 서류철을 열어 가계약서 세 장을 꺼냈다⁠. 「⁠1101호 실거래가와 같은 금액으로 한다⁠.⁠」

“⁠저는 숫자가 맞으면 사요⁠. 5억 7천도 맞아요⁠. 십 년 보면요⁠.⁠” 묘진이 세 장을 다시 넣었다⁠. “⁠세 집은 제가 그 값에 살게요⁠.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5동 여자가 입을 막았다⁠. 부녀회장이 개를 내려놓고 박수를 치려다가 손을 멈췄다⁠. 묘진에게 박수를 쳐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묘진은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었다⁠. 신발장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신발들 뒤에 붙은 노란 부적이 보였다⁠. 묘진은 부적을 한 번 보고 지애를 돌아보았다⁠.

“⁠숙려 잘 끝내세요⁠. 저는 끝내 보지 못했어요⁠.⁠”

묘진이 나가자 5동 여자가 그제야 현관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지애 앞에서 여자는 한참 입술을 깨물었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할게요⁠. 그 여자가 산 거니까⁠.⁠”

“⁠네⁠.⁠”

“⁠근데 오천이에요⁠. 우리한테 오천이면 둘이 따로 방 두 개예요⁠.⁠” 여자가 지애의 손을 잠깐 잡았다가 놓았다⁠. 손이 차가웠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말은 취소 안 할게요⁠. 그때는 맞는 말이었으니까⁠.⁠”

여자가 돌아서 복도로 나갔다⁠. 지애는 여자의 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은 취소하지 않아도 되었다⁠.

거실에서 희철이 계약서에 마지막 도장을 받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연 씨 부부가 계약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희철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천장을 보았다⁠.

“⁠이십 년 만에 처음이에요⁠.⁠”

“⁠뭐가요⁠?⁠” 성규가 물었다⁠.

“⁠손 안 잡고 판 집이요⁠.⁠” 희철이 주머니에서 슬라임 통을 꺼내 율비에게 내밀었다⁠. “⁠다 나았어⁠. 돌려줄게⁠.⁠”

율비가 슬라임 통을 받아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아저씨 냄새 배었어⁠. 은단 냄새⁠.⁠”

*

저녁 일곱 시⁠, 짜장면과 탕수육이 왔다⁠. 율비는 탕수육 소스를 부어 먹는 사람과 찍어 먹는 사람을 반으로 나눠 그릇을 두 개 만들었다⁠. 엄마는 찍먹⁠, 아빠는 부먹⁠, 할머니는 아무거나⁠. 덕희가 다 먹고 율비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갔다⁠.

거실에 지애와 성규만 남았다⁠. 식탁에는 손님들이 마신 종이컵이 스무 개 넘게 쌓여 있었다⁠. 커피 냄새가 식어서 쓴 냄새가 되어 있었다⁠.

지애가 텔레비전 장 서랍을 열었다⁠. 한 달 전 첫날 아침 희철이 넣어 둔 법원 봉투가 그대로 있었다⁠. 지애가 봉투를 꺼내 소파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5월 6일 오전 10시⁠」

“⁠내일 열 시야⁠.⁠”

“⁠알아⁠.⁠”

지애가 소파 끝에 앉았다⁠. 성규는 반대편 끝에 앉았다⁠. 봉투가 둘 사이에 있었다⁠. 첫날 아침과 같은 자리였다⁠.

“⁠당신은 내일 어떻게 할 거야⁠?⁠”

성규가 봉투를 보았다⁠. 지애를 보았다⁠. 지애는 정해 놓은 얼굴이 아니었다⁠. 묻고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성규는 이 얼굴을 한 달 동안 몇 번 보았고⁠, 볼 때마다 대답이 늦었다⁠.

“⁠내일 말할게⁠.⁠” 성규가 말했다⁠. “⁠법원에서⁠. 당신 앞에서⁠.⁠”

14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어린이날 · 이혼 숙려 기간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