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73자)

연기 끝

이혼 숙려 기간 · 여시결

토요일 아침 일곱 시⁠, 지애의 휴대전화에 읽지 않은 소통방 글이 삼백 개 넘게 쌓여 있었다⁠. 지애는 침대에 앉아 엄지로 화면을 밀어 올렸다⁠. 밀어도 밀어도 끝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속인 거네요⁠」 「⁠연기 실화냐⁠」 「⁠집 보러 갔을 때 커피 주던 그 남편⁠?⁠」 「⁠숙려 중에 한집 사는 게 죄예요⁠? 집이 안 팔리는데 어디 가요⁠」 「⁠상가 주인이 실명으로 쓴 거 봐 무섭다⁠」 「⁠이혼은 개인 사정이지만 연기는 사기 아님⁠?⁠」 「⁠사기는 돈을 받아야 사기죠⁠」 「⁠그럼 커피는 뭔데⁠」

새벽 다섯 시에 부녀회장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숙려 중인 집이 한둘이에요⁠? 우리 동에만 셋이에요⁠. 저도 열다섯 해 전에 숙려 기간 했어요⁠. 이혼은 안 했지만⁠. 그때 우리 남편이랑 손잡고 장 보러 다녔어요⁠. 남들 보라고⁠. 그것도 연기예요⁠? 그럼 우리 단지 부부 반은 배우예요⁠.⁠」

밑에 답글이 이어졌다⁠. 「⁠회장님 남편분 지금 뭐 하세요⁠」 「⁠회장님 숙려 하셨어요⁠?⁠」 「⁠배우 반 인정⁠」 한 시간 뒤 부녀회장이 하나를 더 올렸다⁠. 「⁠석묘진 씨⁠, 장터 때 내신 단지 발전 기금 오백⁠, 입주민 회의 거쳐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지애는 화면을 끄고 거실로 나갔다⁠. 성규가 머그잔 두 개를 들고 있었다⁠. 하나를 지애 자리에 놓았다⁠. 지애는 받지 않았다⁠. 대신 자기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연 씨 아내에게서 온 문자였다⁠. 소통방이 아니라 지애 번호로 따로 온 것이었다⁠.

「⁠어머님⁠, 단톡방 봤어요⁠. 솔직히 좀 놀랐어요⁠. 근데 저희도 싸우면서 살아요⁠. 그날 두 분 싸우는 거 보고 저희 얘기 같았어요⁠. 연기 안 하고 보여 주시면 한 번 더 가 볼게요⁠.⁠」

성규가 문자를 읽고 지애를 보았다⁠. 지애는 머그잔을 보았다⁠.

*

오전 열 시⁠, 지애는 율비를 할머니 집에 보내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율비의 학교는 다음 주 월요일까지 재량 휴업이었고⁠, 덕희가 단지 정문 앞까지 데리러 오기로 했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여자 하나가 탔다⁠.

지하 주차장 5동 엘리베이터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여자였다⁠. 이 동에 사는 언니 집에 들렀다 가는 길이라고⁠, 여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여자의 눈이 지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1101호죠⁠?⁠”

“⁠네⁠.⁠”

“⁠저 5동이에요⁠. 우리도 숙려 중이에요⁠.⁠” 여자가 율비를 한 번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는 그 여자한테 5억 2천에 팔기로 했어요⁠. 가계약했어요⁠. 그 돈이라도 받아야 둘이 각자 전세를 구해요⁠.⁠”

엘리베이터가 6층⁠, 5층을 지났다⁠. 율비가 엄마 손을 꼭 쥐었다⁠.

“⁠댁이 6억 받으면 그 여자가 우리 거 안 사요⁠. 우리 가계약서에 그렇게 써 있어요⁠. 1101호 값에 맞춘다고⁠.⁠” 여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댁은 6억 받고 우리는 경매로 가면⁠, 그게 맞아요⁠?⁠”

지애는 대답하지 못했다⁠. 할 말이 있었는데 하나도 맞는 말이 아니었다⁠. 여자가 맞았고⁠, 지애가 6억을 원하는 것도 맞았다⁠. 1층에서 문이 열렸다⁠. 여자가 먼저 내리다가 돌아보았다⁠.

“⁠연기하신 건 괜찮아요⁠. 우리도 했어요⁠. 근데 값은 연기로 못 해요⁠.⁠”

여자가 걸어 나갔다⁠. 율비가 엄마 손을 흔들었다⁠.

“⁠엄마⁠, 저 아줌마 화났어⁠?⁠”

“⁠아니⁠. 무서운 거야⁠.⁠”

“⁠뭐가 무서운데⁠?⁠”

“⁠집이 없어지는 게⁠.⁠”

율비가 정문 앞에서 손을 흔드는 할머니를 보며 엄마 손을 놓지 않았다⁠. 열 살 때 지애가 반지하 계단을 내려가면서 덕희의 손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

토요일 오후⁠, 희철은 상가 1층 복도에서 묘진과 마주쳤다⁠. 묘진이 계단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손에 하얀 봉투 두 개를 들고 있었다⁠.

“⁠방 소장님⁠.⁠”

묘진이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하나는 명도 요청서였다⁠. 6월 말까지 사무실을 비워 달라는 내용이었다⁠. 하나는 차용증 사본과 상환 요청서였다⁠. 3천만 원⁠.

“⁠예상하셨죠⁠?⁠”

“⁠예상했어요⁠.⁠” 희철이 봉투를 받았다⁠. 은단 통 대신 주머니에서 슬라임 통이 손에 잡혔다⁠.

“⁠제가 열두 해 전에 소장님 집을 안 샀으면 경매로 넘어갔을 거예요⁠. 은행이 먼저 가져가고 소장님 손에는 아무것도 안 남았겠죠⁠. 부산 가신 사모님 손에도요⁠.⁠” 묘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제가 칠천 싸게 산 건 맞아요⁠. 근데 경매보다는 비싸게 샀어요⁠.⁠”

“⁠알아요⁠.⁠” 희철이 묘진을 보았다⁠. “⁠그래서 열두 해 동안 고마웠어요⁠. 오늘까지요⁠.⁠”

복도 끝 약국 유리문 안에서 약국장이 고개를 들었다⁠. 희철은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웠다⁠.

“⁠어린이날에 1101호 집 보여 드리는 거 제가 해요⁠. 연기 없이요⁠.⁠”

묘진이 짧게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안됐다는 웃음이었다⁠.

“⁠연기 안 하면 안 팔려요⁠. 소장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이십 년을 그걸로 파셨는데⁠.⁠”

“⁠그래서 해 보려고요⁠. 제가 못 해 본 거⁠.⁠” 희철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안 팔리면 그분들도 저처럼 숙려 끝나는 날 아침에 전화하시겠죠⁠. 사모님한테⁠. 그럼 사모님이 이기시는 거고요⁠.⁠”

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단을 마저 내려가 상가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희철은 사무실 책상에 봉투 두 개를 올려놓았다⁠. 벽에 걸린 이십 년 치 단지 배치도를 보았다⁠. 6월 말까지 두 달이 남아 있었다⁠.

*

토요일 저녁⁠, 성규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다가 12동 앞 벤치에서 걸음을 멈췄다⁠. 예순쯤 된 남자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왼팔 소매를 걷어 올린 자리에 반창고가 크게 붙어 있었다⁠. 희철의 서류철에서 본 12동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받는 남편⁠.

남자가 먼저 성규를 알아보았다⁠.

“⁠1101호 맞죠⁠? 소통방에 사진 돌던데⁠. 회색 후드⁠.⁠”

“⁠네⁠.⁠”

“⁠앉아요⁠.⁠” 남자가 벤치 끝으로 몸을 옮겼다⁠. 몸에서 병원 소독약 냄새가 났다⁠. “⁠우리 집사람이 그 여자한테 가계약했어요⁠. 5억 2천⁠. 1101호 값에 맞춘다고 써 있는 거⁠.⁠”

“⁠알아요⁠.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요⁠?⁠” 남자가 반창고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6억 받으세요⁠. 받을 수 있으면⁠.⁠”

성규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단지 놀이터를 보고 있었다⁠. 아이들 몇이 미끄럼틀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 여자한테 5억 2천에 파는 거⁠, 나도 싫었어요⁠. 집사람이 울면서 도장 찍었어요⁠. 근데 1101호가 5억에 팔리면 우리는 5억이고⁠, 6억에 팔리면 우리는 기다리다 경매 가고⁠. 어떻게 되든 1101호 탓은 아니에요⁠. 내 콩팥 탓이지⁠.⁠” 남자가 웃었다⁠. “⁠우리 걱정은 우리가 할게요⁠.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 걱정이나 해요⁠.⁠”

“⁠저 마흔둘이에요⁠.⁠”

“⁠그러니까 젊지⁠.⁠”

남자가 일어나 12동 현관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느렸다⁠. 성규는 벤치에 혼자 앉아 반창고 붙은 팔이 현관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되든 1101호 탓은 아니라는 말이 고마웠고⁠, 고마운 만큼 무거웠다⁠.

*

일요일 밤 열 시⁠, 율비가 없는 1101호는 조용했다⁠. 거실 불을 반만 켰다⁠. 지애가 소파에 앉아 있을 때 성규가 베란다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들고 나왔다⁠. 병 안에 투명한 액체가 반쯤 차 있었다⁠.

“⁠이거 맡아 봐⁠.⁠”

“⁠뭔데⁠?⁠”

“⁠1101호⁠.⁠”

지애가 병을 받아 코에 댔다⁠. 처음에는 커피 냄새가 났다⁠. 갓 간 원두⁠. 그다음에 달고 부드러운 냄새가 올라왔다⁠. 분유였다⁠. 그다음은 쌉쌀한 알코올⁠, 약국 조제실 냄새⁠. 알코올 밑에서 축축하고 흙내 나는 냄새가 천천히 올라왔다⁠. 비 맞은 나무 냄새였다⁠. 마지막에 아주 희미하게⁠, 멸치 육수⁠.

“⁠커피⁠.⁠” 지애가 말했다⁠. “⁠분유⁠. 조제실⁠. 비⁠. 엄마 칼국수⁠.⁠”

“⁠다 맞혔네⁠.⁠”

“⁠다 우리 집 냄새잖아⁠.⁠”

성규가 지애 옆에 앉았다⁠. 쿠션은 바닥에 있었다⁠. 둘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지애는 병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손가락으로 병목을 쓸었다⁠.

“⁠나 왜 이혼하자고 했는지 알아⁠?⁠”

“⁠향수⁠.⁠”

“⁠향수 냄새를 맡았는데⁠, 물어볼 수가 없었어⁠. 물어봤다가 진짜면 내가 정할 게 없어지잖아⁠. 당신이 정하는 게 되잖아⁠.⁠” 지애가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놓았다⁠. “⁠그래서 먼저 정했어⁠. 묻기 전에⁠.⁠”

“⁠나는 이 집에서 하숙하는 것 같았어⁠.⁠” 성규가 말했다⁠. “⁠주인이 정한 시간에 밥 먹고⁠, 주인이 정한 날 나가는⁠. 근데 하숙비는 내가 냈어⁠. 금요일마다⁠.⁠”

지애가 웃었다⁠. 웃음이 짧게 끊겼다⁠. 성규가 손을 뻗어 지애의 손등 위에 얹었다⁠. 손님도 희철도 없었다⁠. 연기가 아닌 손이었다⁠.

지애는 손을 빼지 않았다⁠. 성규의 손가락이 지애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핸드크림 냄새가 났다⁠. 약국을 그만둔 지 엿새가 지났는데도 손에 남아 있었다⁠. 성규의 숨이 가까워졌다⁠. 커피와 딸기 향료와⁠, 이제는 지애도 이름을 아는 남의 차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지애는 고개를 돌렸다⁠. 성규의 얼굴이 손바닥 하나 거리에 있었다⁠. 안경을 벗은 눈에 성규의 덥수룩한 머리가 흐리게 보였다⁠. 열두 해 전 버스에서 깨어날 때마다 옆자리에서 창밖을 보던 얼굴이 이 얼굴이었다⁠. 지애는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

입술이 닿았다⁠. 짧았다⁠. 성규의 아랫입술이 조금 텄고⁠, 지애의 숨에 박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성규가 지애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지애의 손이 성규의 후드 지퍼를 쥐었다가⁠, 거기서 멈췄다⁠.

지애가 이마를 성규의 이마에 댄 채 말했다⁠.

“⁠숙려 기간이야⁠.⁠”

“⁠생각하는 기간이잖아⁠.⁠” 성규의 숨이 지애의 입술에 닿았다⁠. “⁠생각하면서 하면 되지⁠.⁠”

지애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마가 떨어졌다⁠. 웃음이 그치지 않아서 지애는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성규도 따라 웃었다⁠. 웃다가 둘 다 숨이 찼다⁠. 무릎 위의 유리병이 굴러 소파 틈에 끼었다⁠. 지애가 병을 꺼내 뚜껑을 닫았다⁠.

“⁠생각은 목요일까지 할게⁠.⁠”

“⁠목요일⁠?⁠”

“⁠법원 가는 날⁠.⁠”

성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애의 손을 놓지 않았다⁠. 둘은 그대로 반만 켠 거실 불 아래 앉아 있었다⁠. 손을 잡은 채로 텔레비전도 켜지 않고⁠,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

월요일 아침 아홉 시⁠, 희철이 원두 봉지를 들고 왔다⁠. 식탁에 셋이 앉았다⁠. 지애가 말을 꺼냈다⁠.

“⁠어린이날⁠, 연기 안 할게요⁠.⁠”

“⁠압니다⁠.⁠”

“⁠작은방 이불도 그대로 둘게요⁠. 칫솔 컵도⁠. 베란다 향료 병도⁠.⁠”

“⁠커피는요⁠?⁠” 희철이 원두 봉지를 쥐었다⁠. “⁠커피는 내리셔도 되잖아요⁠. 커피는 연기가 아니잖아요⁠.⁠”

지애와 성규가 서로를 보았다⁠.

“⁠커피는 내려요⁠.⁠” 성규가 말했다⁠. “⁠매일 내리니까⁠.⁠”

희철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애가 성규를 보았다⁠.

“⁠방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손님들한테 당신이 말해⁠.⁠”

“⁠내가⁠?⁠”

“⁠당신이 말 안 한 게 제일 많잖아⁠.⁠” 지애가 성규의 휴대전화를 집어 소통방 글쓰기 창을 열었다⁠. “⁠이번엔 당신이 정해⁠.⁠”

“⁠같이⁠.⁠”

“⁠같이⁠.⁠”

지애가 휴대전화를 들고 첫 문장을 쳤다⁠. 성규가 받아서 둘째 문장을 쳤다⁠. 셋째 문장에서 둘이 다투었다⁠. ‘⁠이혼 숙려 중입니다⁠’로 할지 ‘⁠이혼을 생각하는 중입니다⁠’로 할지⁠. 희철이 슬라임을 주무르며 기다렸다⁠. 가위바위보는 하지 않았다⁠. 지애가 성규의 문장을 골랐다⁠.

「⁠5월 5일 어린이날 오후 두 시⁠, 411동 1101호를 보여 드립니다⁠. 저희는 이혼 숙려 중입니다⁠. 연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 드립니다⁠. 커피는 드립니다⁠. 마성규⁠, 채지애⁠」

지애가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고⁠, 성규가 엄지를 화면 위에 올렸다⁠. 지애의 엄지가 성규의 엄지 위에 겹쳐졌다⁠. 둘이 같이 눌렀다⁠.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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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끝 · 이혼 숙려 기간 · 나오늘 책방